【여준 呂準 (1860 ~ 1932)】 "1906년 서전서숙 교사, 1908년 명동학교·오산학교 교사"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원삼면(遠三面) 죽릉리(竹陵里) 출신이다. 1932년 사망 당시 70세인 것으로 보아 1860년생으로 추정된다. 호는 시당(時堂)이며, 이명으로 여조현(呂祖鉉)·여성현(呂聲鉉)을 사용하였다. 여운달이란 아들이 있었다.
1906년 문을 연 북간도 최초의 근대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 설립에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참여하여 교사로 근무하였다. 1907년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북간도를 떠나자 사실상 학교 업무를 책임졌다. 1908년 4월 명동서숙(明東書塾)이 문을 열자 김약연(金躍淵) 등과 함께 참여하여 교원으로 일하였다.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근무할 당시인 1908년 11월, 평남 정주군(定州郡)에 부임한 군수의 제창에 따라 군내 98개 학교의 교사와 임원이 참석한 토론회에서 「학부령(學部令)」에 의거하면서도 서로 일치하는 과정을 편성하는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5년 오산학교의 김기홍(金起鴻)은 학교의 역사를 회고하는 글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학원 오산(五山)을 세운 구원(久遠)한 지주인 몇 분 선생님의 이름을 삼가 적기로 한다”면서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1912년 오산학교를 사직하자마자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을 중심으로 자치와 교육을 실시하며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퉁화현(通化縣) 하니허(哈泥河)로 큰 형님의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그 이전인 1911년 늦봄 또는 여름에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에서 결성된 경학사(耕學社)의 발기인에 이미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는 신민회의 동료들과 이주를 약속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학사에서 한인 2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라는 민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학교를 삼원보 추가가에서 하니허로 옮긴 이후부터 이동녕(李東寧)에 이어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학교의 이름이 신흥강습소에서 신흥학교(新興學校)로 바뀌었고, ‘강낭우리(貯穀所)’에서 거적자리를 펴고 시작하였던 이전과 달리 땅도 사고 주택과 교사(校舍)도 건축하여 기반을 튼튼히 하면서 규모도 확장되었다. 1913년 3월 교감 윤기섭(尹琦變) 및 제1기 졸업생과 함께 졸업생들의 결속과 건학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였다. 흉년 등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는 이탁(李鐸) 등과 함께 각 지방을 돌며 재정을 갹출하는데 힘썼다.
1919년 2월 김규식(金奎植)·김동삼(金東三)·김약연·박용만(朴容萬)·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이동녕·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동휘(李東輝) 등 남북만주, 중국 관내, 연해주(沿海州), 미주(美洲)의 지도적인 인사 39명이 연명한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 동참하였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민족지도자들의 결의가 담긴 선언서는 일본에 독립전쟁을 선포한 결의문이었다.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만세시위가 계속 일어나자,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서간도의 한인사회도 3월 12일 삼원보에 모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만세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고 독립전쟁의 기운이 달아오르자, 1919년 4월 서간도의 한인 사회 지도자들은 한인 사회를 체계적으로 연계하고 독립군 양성을 확대하고 이끌어 갈 자치 조직으로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였다. 한족회는 서간도 한인 사회를 이끌어 가기 위해 중앙 조직을 설치하였고, 한인이 거주하는 각 마을에 지방 조직을 만들었다. 11월에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의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위치와 역할을 결정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간도의 서로군정서는 북간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이 되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함북으로 진입하였고, 서로군정서군은 압록강을 넘어 평북의 강계·자성·후창·벽동·위원 등의 국내로 진입해 일제의 경찰서 및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이상룡이 서로군정서의 책임자인 독판(督辦)에 선출되었을 때 부(副)독판에 선출되었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5월 3일 민족학교인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해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동남쪽으로 약 15리 떨어진 허둥(河東)의 따두즈(大肚子)에 본교를 두고 본격적인 독립군 병사를 양성하는 한편, 시베리아에서의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출병한 체코군들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였다. 여기에 일본군 장교 출신인 동천(東天)의 신팔균(申八均), 경천(金擎天)의 김광서(金光瑞)·청천(池靑天)의 지석규(池錫奎) 등 ‘남만주의 3천’이 교관으로 합류하며 더욱 체계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군사이론까지 강의하였다.
일제는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강화되자,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을 세우고 9월에 마적을 사주하여 훈춘(琿春)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그해 10월 시베리아에서의 적백 내전에 개입하고 있던 일본군 제21사단과 함북 나남(羅南)에 사령부를 둔 제19사단 등 2만여 명을 동원하여 서북간도를 침략하여 독립군을 제거하는 한편, 독립군의 기반인 한인 마을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를 미리 알아챈 서로군정서는 일제의 공격을 피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안투현(安圖縣) 삼인반(三人班)으로 주력부대를 옮겼다.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가 백두산 일대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하자 일본군은 뒤쫓아 왔다. 이에 독립군은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지린성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일대에 큰 전투를 벌였다.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은 방향을 바꾸어 북만주 밀산(密山)으로 향하였다. 서로군정서군도 사령관 지청천의 인솔 하에 본대는 북만주로 향하였고, 일부는 이상룡이 머물고 있는 서간도로 돌아왔다. 일본군은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패배한 뒤 한인가옥·학교·교회 등을 닥치는 대로 방화하고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 따르면 3,693명의 한인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바로 ‘간도참변(間島慘變)’이다.
간도참변 이후 서간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옛 서로군정서 대원들을 이상룡과 함께 추스렸다. 1921년 1월 북간도의 박재눌(朴載訥) 외 13인과 함께 임시정부와 『독립신문』에 “우리의 독립운동이 확실한 실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여 일본의 대타격을 받은 동삼성(東三省) 동포의 인심을 다시 수습키 어렵게 한 일”, “정부는 재미 국민회(國民會)의 성의만을 인정하여 다른 단체원에 반감을 느끼게 한 일” 등 다섯 가지의 비판적 질문을 하였다. 그 해 6월 이상룡이 베이징(北京)에서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이 주도한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에 다녀온 뒤, 김동삼·이탁 등과 회의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이탈해 무장투쟁에 전념하는 독자 노선을 갖기로 결의하였다. 그 일환으로 이탁과 김동삼을 닝안현(寧安縣)에 보내는 등 둔전병제를 실시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고자 노력하였다. 아울러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황학수(黃學秀)를 영입해 서로군정서 참모장 겸 군무위원장에 임명하고 무장대를 정돈하고자 하였다.
1922년 봄 환런현(桓仁縣)에서 서로군정서 등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가 참가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가 열려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결성되었다. 1922년 8월 23일에는 아직 가담하지 않은 단체까지 합류시키기 위해 환런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가 개최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조직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둔전병제에 입각한 장기적인 독립전쟁 준비에 노력하고자 애무현(額穆縣) 황지강자(黃地崗子)에 중학과정 정도의 검성학당(儉城學堂)을 설립해 교장으로 근무하며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검성학당에는 1925년 3월 현재 43명 정도의 학생이 농사철을 피하여 배웠으며, 김창규(金昌奎)가 총무를 맡았다. 이상룡도 민족사를 가르치기도 하고 농법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서 고문을 맡았다. 한국독립당은 공개 단체인 한족자치연합회를 이면(裏面)에서 지도하는 기관으로 ‘민본정치의 실현, 노본(勞本)경제의 조직, 인문문화의 건설’을 표방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서로군정서 시절에 함께 활동한 지청천 등이 주도한 단체였다.
이러던 활동 중, 1932년 사망하였다. 사망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중국 군벌에게 총살당했다는 것과 중국군에 아들이 체포되자 “저거 하나밖에 없는 것 죽이면 나도 죽는다”며 집에 불을 질러 부부가 불에 타 죽었다는 주장이 있다. 순국선열유가족심사위원회에서 유가족 생활비 부조(扶助) 대상자 134명을 선정했을 때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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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준이 제2대 숙장을 맡았던 서전서숙(중국 지린성 롱징, 1908. 9) [판형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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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1일 대한독립의군부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 [판형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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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준의 동향 관련 일제 측 보고(1919. 10. 10)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