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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33)】 ‘‘하나님이 죽으면 현대인도 죽는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33
하나님이 죽으면 현대인도 죽는다
져도 나는 겁은 안낸다. 나는 그것 때문에 걱정을 아니 낸다. 그게 정말 군인정신이라고. 그러니까 승패에다 모가지를 매는 것은 군인이 아니에요. 못쓰는 것이에요. 참군인은 군인에서 있어까지도 승패에 목을 매지 않는 법이에요. 그러게 진리를 성공의 실패에다가 결부를 시키면 그건 안 되는 말. 그렇게 하면 못써요. 모든 종교가 꼭 그걸로 타락이 돼요. 처음엔 진리다가도 그것을 성공의 실패에다가 다른 쉽게 말해면 이 세계의 세상적인 행복에다 번영에 갔다가 붙들어 매요.
다른 말로 쉽게 말하면 예수 잘 믿으면 곡식도 잘됩니다. 기업도 잘됩니다. 그래서 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 받습니다. 그럼 실패를 했으면 하나님의 미움 산줄 아느냐? 그럼 그건 열심을 믿는 거 같아도 그 사람이 진리의 세계를 뭔지 몰라요. 그러니까 진리는 승패에 불구하고 진리는 진리다 하고 살려야 그 진리가 살아나는데, 진리는 그렇게 살려놓으면 그러면 내가 구원이 돼. 그 진리를 살리므로 인해서 나는 진리를 살리고자 진리는 진리다. 이성계가 이성계만이 성공이 아니라 그 선죽교에서 맞아 죽은 정몽주도 그 실패가 아니다. 그건 이긴 거다. 그렇게 하면 그럭함에 의해서 정몽주만이 살아나는 것 아니라 나도 살아난다 그 말이야. 내가 살아나 내가 구원돼. 그러니까 진리 또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해서 있고, 없다고 해서 없는 것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다. 나 살 생각을 말고 하나님을 살릴 생각을 해라. 그럭하면 하나님 살아나.
하나님이 살아나면 나는 이 가운데 저절로 살아나게 돼. 이런 게 있다 그러면 현대가 하나님은 죽었다. 이건 인간 스스로 죽은 증겁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능히 그런 말을 하면 인간이 죽은 겁니다. 그런데 이제라도 인간이 죽고 싶지 않거든 죽었던 하나님 되살려 하나님 살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았다. 그런 수로 확신했다. 그럭하면 그 인간은 사는 것이 틀림없어요. 하나님이 죽었다는 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어. 지금으론 곧 나올 필요가 있어 나온 거지만 그걸로만이 그칠게 아니라 아니고 이게 말이 조금 모순되는 말 같습니다만 확실히 그런 면이 있어요. 내 구원이 걱정이지.
그러면 저게 저 종교 믿는 놈이냐 저 못 믿을 소리다 그럴 거예요. 허나 어떤 땐 이짝에 사람 먹어야 살지만 하나님도 먹고야 살지 하나님은 뭘 먹나. 사람 잡아먹고야 산다. 사람의 혼을 먹고야 사람들이 다 뭔고 하니 하나님한테 먹힐 생각을 안 하면 하나님 빼빼 굶어서 말라 죽고야 만다. 현대는 어느 놈 한 놈 하나님한테 먹힐 생각 안 해. 한다면 난 그거에요. 내가 왜. 뭐 정신 현실 위에 정신계를 이상계를 위해 종교계를 위해서 현실을 무시한단 말이에요. 난 그거 안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뭐 굶어서 아사를 해. 그런데 하나님이 굶어죽고 나면 현대인은 죽어요. 그렇지 않소. 그런 말을 이루려한 것이다. 조그맣게 쓴 것은 고 옆에 한번 말한 게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야지 말이야. 하나님이 조그맣게, 프로그램이 좋거든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를 밑에 있는 원리로 생각을 해보면 좋다는 거야.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또 이사야의 말에 이런 말도 있다. 왜냐하면 참 어려운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마음을 가지고도 깨달아 돌이키지 못한다.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한다.” (요한복음 12;40)
이사야가 왜 이 말을 했겠냐? 그러면 이사야도 마음에 고민이 되서 한소리 아니에요? 이사야 같은 사람도 확실히 사상으로 굉장히 앞선 분 아닙니까? 예수 나시기 전 벌써 7,8백 년 전에 세계가 하나 되는 평화의 세계를 꿈 꾼 사람이니까 만방이 여호와께 이사야 2장에 있는 11장에 놀라운 그 굉장히 이렇게 높고 크고 한 세상을 가졌던 분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믿는 분이지 인간은 결코 의심하는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말을 했건만 듣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럼 인간이야말로 말을 하면 알아들을 것 같은데 왜 못 알아들을까? 그 점이 기가 막혀서 그런 걸 거예요.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왜 사람들이 것도 모를까? 공화당 사람도 사람들이겠는데 학생들이 그렇게 데모를 하고 그리고 매를 맞고 그러고 그래도 저도 다 자식이 있어 보는데 여러 가지 생각해서 말이야. 그럼 그것쯤 알겠는데 어찌해 그럴까? 사람의 마음이 없을까? 그들도 사람의 마음이 있겠는데? 이제 그렇게 생각을 하다 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나봐 결론이 그렇게 나간 거예요.
믿지 않는 그게 심판이다
이사야가 그렇게 나가 왠고 하니 인간의 도리로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가 왜 사람이 사람인 점이 도리가 있는 게 인간 이지. 도리가 인간이 있는데 도리가 있다면 말이야. 아니 그것도 모른단 말이야? 아니 어떻게 억지소리를 해도…, 애들이야말로 단순하다면 순진하다면 순진한 건데 그게 학생일수록 그래도 실지 이해와는 관계가 안 된 건데, 그럼 그런 눈으로 보고 “아이구 이거 틀렸다.” 그런다면 그건 귀담아 들어 아이들이라도 저러는 건데 이렇게 될 수가 있겠나? 그럴 수 있겠는 게 인간일 건데.
그래 뭐라고 그래요. “그 자식들이 공부는 안하고 망발을 하는 그거 다 뿌리 채 뽑아버려.” 그렇게 하고 또 그러면 그걸 정말 나라를 생각하고 다음에 오는 세대를 생각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그렇게 타이르면 몰라도 말이야. 그걸 강제로 그렇게 해서 최루탄으로 하고 뭐 때리고, 저번에도 그랬습니다만 신통이도 때릴 때 골라서 말이야 머리통을 꼭 때리고 상처 난데가 다리 부러졌다는 사람은 없어요. 모두 두골이 깨지고 코가 상하고 눈이 상하고 그랬는데 그런 건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 그러니까 이사야도 무슨 필시 그런 걸로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하다가 그래 인간이 그랬다고 할 수가 없어.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건가 봐.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에 다른데 있는 말입니다만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것 없다. 믿지 않는 그게 바로 벌써 심판이다. 다른 말로 이 믿지 않아 가지고 벌을 받는 거 아니라 벌써 벌을 받았기 때문에 벌 받은 그 벌 때문에 못 믿는 거야. 일체 믿지 않는 그 일이 벌써 벌이다 그거야.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이건 벌이란 말은 딴 얘깁니다만, 여기 꼭 그런 거 아냐. 허나 하여간 하나님이 그럭하셨다. 그러면 이 일에 그 현실에 뵈는 그 역사에 아주 비논리적이요. 도리로 봐서 도저히 인간으로선 할 것 같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그런 말, ‘주께서 그들의 눈을’ 사람인 담엔 눈이 있으면 그걸 보고 모른단 말이야. 저는 그래도 때리는 순간에도 눈이 있겠는데 그래 그 두골을 때릴 때 제 마음이 안 아팠단 말이냐? ‘눈을 멀게 하셨다.’ 그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사람의 마음이 없기에 그러지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그 곤봉이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애들을 어린애들을 때린단 말이냐? 그저 마음이 무뎌, 마음이 죽었던 거다. 왜 꼭 그렇다면 그거 왜 그랬을까? ‘그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마음을 가지고도 깨달아 돌이키지 못하고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제 이해하기 곤란한, 하나님이라면 될수록은 사랑하는 하나님이요, 참의 하나님이요,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이요, 세상을 구원 창조하실 때부터 그랬고. 다 세상을 구원하자는 게 하나님의 목적이겠는데, 저렇게 저러구 어떻게든지 알아듣도록 만들어 주시겠는데 왜 그럭하셨을까. 하나님이 그럭하지 않고는 인간이 인간대로만 있다면 적어도 알아들을 거야.
야당이 그만치나 반대를 하고 신문이 그렇게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그만큼이나 말을 하고 그러면 그래도 그런 생각이 있겠는데, 아 일부러 그걸 계획을 짜고 아주 미리 미리 이렇게 그러할 걸 미리 미리 계획을 짜고 해요. 거기다가도 그러다가도 그 장면에선 또 일이 그렇게 돼서 또 백십이포로 불허까지 됐다는데 그런 걸 또 고쳐 묻혀 버리고 다른 것을 넣어가지고 기어이 하고야 만다. 그걸 사람이 할 수가 없어요. 그러는 데가 무슨 벌 받은 백성 아닌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이러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게까지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다른 거 하나님이 그럭하셨다면 왜 그러지. 그래 그러면 아주 이놈들 구원 얻을까 봐서 못 얻게 하나님이 그럭하시려고 그럭하는 데는 하나님이 이게 망하길 바래 그런다는 게 아니에요. 그만큼 그게 그 깊고 비통한데가 있는 거예요. 눈이라는 건 뭐하자는 거냐? 눈이란 건 보자는 거야 보면 아는 거야. 마음이라는 건 뭐냐? 마음이란 생각하자는 거야 생각하면 깨달아지는 법이야. 그런데 눈으로 봐도 못 볼까? 눈으로 어떻게 안보여요. 또 마음이 생각을 구한다면 마음이 둔해지게 만든 모양이야, 일부러 그렇게 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들어도 듣지 못하도록 생각을 해도 깨닫지 못하도록 고의로 그렇게 만드신가보다. 왜 그 놈들 구원 얻을까봐. ‘내게 고침을 받고,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 그 고침을 못 받게 해서 그런 거야. 그런 걸 이사야가 그 역사를 그렇게 읽어냈어요. 그때 역사를 놓고. 근데 이제 이 사람이 여기다 이걸 인용하는 것은 예수님의 돌아간 그 일 예수님이 그때 한일을 보고 이건 돌아간 다음에 글로 쓴 거지만 그 믿지 않는 그 모양을 보고 아, 정말이구나. 이사야 때도 이랬지만 과연 그렇다. 지금도 그렇구나 동감이 되기 때문 그래 이걸 인용을 한 거야.
그러니까 그 말을 고쳐 따져서 한번 다시하면 뭔고하니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고 그렇게 많은 이적을 행했건만 왜 사람들이 안 믿었지. 어, 눈을 어떻게 하고 마음을 둔하게 하나님 그렇게 만드셔서 하나님이 그 예수말씀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그렇게 만드셔서 그랬다. 그러면 크게 모순이 생겨요. 아들을 보내는 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그런 이를 보내는 건 무슨 심사고? 또 그 말을 하면 해도 못 알아듣게 하는 건 무슨 심산가? 그러면 풀 수 없는 그런 점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가 이제 풀라고 해서 그러면 인제 이사야의 말에 예수님은 「이사야」 많이 읽은 분이야요. 잘 이해하는 분이에요. 그런 거니까 예수님도 그거 몰라서 이런 말씀 또 생전에 가르쳤는데 실제 하셨는지 인용을 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걸 뭘 아셨을 거예요. 아셨으면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내 뭐 다 알고. 내가 이렇게 말을 해도 저들이 못 알아듣는 거 아니라.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해줘도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아. 생각하면 알 것 같은데 생각하고 돌아오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줄을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다 잘 아실 거예요. 그러면 그럴 때에 예수님은 어떡하셨나, 그렇다고 물러나지 않고 그만두지 않았어요. 말하기를 그친 것도 아니고 권능 행하는 것을 그친 것도 아니고 그 점이 우리 생각할 점이에요. 그럭하고 계속해서 말씀하는 도중 권능도 행했고 그럴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그럼 고게 뭐냐? 이점 아까 말씀대로 세상이 다 빛은 아니에요.
그 빛을 드러내는 몇 사람
인간이라 그러지만 인간 전체가 물론 인간 속에 도리가 있지만 인간 전체가 다 깨달은 것은 아니에요. 그중에 어떤 한사람, 어느 몇 사람이 대표가 돼서 그 빛을 드러내는 거지. 사람들이 그건 다 반드시 알고 이렇게 이해하고 따라오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의 책임은 그거 말을 해야지. 말을 하지만 그 사람들이 알아들어 쉽게 웬만하면 말을 알아듣고 돌아와요. 그렇지만 해도 알아듣지 않는 경우 어느 정도가 지나간 다음에는 그 말하는 말이 알아듣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점점 모르게 말을 해요. 그건 우리도 그걸 다 해보지 않소? 집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대한 건 훌륭하게 이런 실례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그 가정이 결렬만 파탄만 나요. 한 마디해서 애가 할 때에는 저 자식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다. 인간성을 인정을 해서 해줘요. 몇 번 말할 때도 그래요. 허나 하다하다 정말 안 들으면 그다음 부모가 어떻게 말을 하냐하면 억설로 하거든. 하면 점점 애가 화가 나게만 해요.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어떻게 보면 말이야 말 안 듣고 나가서 망하기를 바라기나 하는 것처럼 부모가 말해.
여러분도 나이 좀 든 분들은 그런 자기 생각을 해보면 다 그런 경험이 있을 거예요. 그저 부모가 없더라도 부부가 사랑하는 사이에는 사랑싸움은 그렇게 되는 법이야.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이쪽에선 말이야 무조건 항복으로 돌아와야 하겠는데 점점 갈라져서 말이야. 그러니까 꼭 깨지고야마는 법이야. 깨지고 말면 그럼 어떻게 하냐. 그 다음엔 비상수단이 있어. 그러면 결국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렇게 말했던 그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울고 돌아오고 마는 거예요. 문젠 대개 한 가정에서도 그렇게 해결이 되지 않소? 그러면 그렇게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제야 알아듣지 못하는 말 점점 더 어려운 말, 아까 말보다도 지독한 말을 해서 봐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게끔 그 만드는 그 밑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그게 그 사실은 그냥 이속에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외국 사람에 대해선 그러지 않아요. 웬만치 말하다가도 어, 외국사람 그만두지. 자기나라 사람이라면 더하고 자기나라 사람보다 집사람이라면 더하고 집에 사람보다도 부부면 더하고 말이야. 사랑의 정도가 이 깊을수록 싸움을 하게 되면 지독하게 더 지독하게 그런 법이에요. 지독하리만큼 결례를 더 참혹하게 돼. 결례를 더 참혹하게 된 다음 가만있어, 그러면 결국 다에요. 그렇게 하면 그놈의 집은 망하고 그런데 그러고 그 인간에 목적이 그러고 말자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됐어도 그다음에 그걸 또 다시 꿰매는, 우리는 물론 인간의 부족을 인간이니까 대개 그렇게 끝나고 마는 일이 많습니다만 우리 하나님 대 우리 인간 속에 인간의 관계는 그럭할 때에 하나님 편에서 역시 비상수단을 쓴다.
비상수단이 뭔고 하니, 자기가 못 견디고 돌아오는 자기가 못 견딘다기보다는 자기가 그 짐을 자기가 담당을 해. 그래 예수의 요단강에 오면 십자가라는 거 그래서 이거 너무 익어 썩어진 말입니다만 화해라하는 말이 그래 나오지. 그러니까 예수님 옆에서 가만히 이사야 한 걸 이렇게 자기 한 걸 이렇게 보면 이 백성이 어떻게 돼서 한 백성이지.이게 이 사람들이 깨닫자는 사람들이 아니라. 점점 깨닫지 못하는 고의로 악으로 점점 들어간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나봐. 그건 우리도 지금 이 현시점에서 이거를 보면 그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저 사람들 저 고의로 저러나. 결코 세계정세를 몰라 그러는 거 아냐, 헌법의 역사를 몰라 그러는 거 아니라, 토군들의 역사를 몰라서 그러는 거 아냐. 다 알아요. 그들이 왜, 연구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그걸 모를 리가, 다 알지. 다 아는데도 바짝 바짝 그렇게 한다. 그게 저주 받지 않았나?
그러고 나면 말이야. 그렇게 한다면 말이야. 생각이 있는 사람이 보면 이제 그걸 보고 참 불쌍한 마음이 움직일 거예요. 그런데 우리 같은 거는 그 지경엘 못가니까 미운 생각에 싸움을 하지만, 될 수는 내가 미움, 미움 미운소리 하지 말자고 그런다만, 참 뭔고 하니 예수님은 그런 지경에 볼 때, 요 자식들 망해 싸. 그런다면 내말 안 듣고 뭐 죽은 사람 살렸는데도 안하게 한다면 나와라 내가 한다더냐 그러고 만다면 예수가 아니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지. 그런 꼴을 보면 둘이다 죽자 살자 사랑이라 하다가 싸움을 하고 헤어졌다. 어허, 너 밖에 사람이 없다더냐. 뭐 그러고 만다면 그건 예수가 아니에요. 그런 경우에도 또 어슬렁어슬렁 이쪽에서 또 못 견디고 못 견딘다고 할까 들어가는 데가, 그러니까 그런 경우엔 그걸 보면 저 짝을 봐. 그걸 곧 전체 저거야만 밉지만 미운 것의 한 층을 더 들어가. 저게 왜 인간인데 왜 저러지? 제가 왜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못하지? 다 그래도 소학교 공부하고 중학교 공부하고 대학교도 공부했다고 그러고 현대 사람이라고 그러고 공부 다 했다는 인간들인데 왜 그것도 모르지? 이제 그러면 보통으로는 그게 설명이 가질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그러지만 그 말을 현대적인 말로 바꿔하면 뭔고 하니 너도 나도 불쌍한데 역사의 짐을 지울라니까 그런 거로구나.
역사에 외상은 없다
역사에 외상은 없어요. 짐이 있으면 천상 어느 놈이 메도 메게 생겼지. 그러니까 저는 무슨 마음에 그랬던지 간에 이때까지 오는 이 역사에서 그 잘못한 그 결과를, 저는 그 불쌍한 데가 어디 가니 우리가 잘나서 잘나. 오, 그렇지 오, 우리밖에 없다. 공화당밖에 없다. 이렇게 하는 데가 그 불쌍한 거, 사실이 그런 게 아니고 역사의 쓰레기통을 맡았는데 그게. 어떤 놈이 담당을 해도 이건 담당을 하는 놈이 있어야 거전 안할 소리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뽑혔는데 말이야. 그럼 그걸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역사의 짐을 지고, 그러고 고스란히 져야지.
그런 생각이 있어지면 참 다시 더할 수 없이 좋겠는데, 그걸 못 그렇게 해 그걸 못 그렇게 하는 것을 옆에서 이렇게 보면 밉기는 고사하고 불쌍해진다 그 말이야. 이왕 역사의 짐을 지면서, 나는 이 신통치 않지만 내 지내보는 한 번 두 번 경험해 본일 있어요. 폐병 같은 경우엔 저 문둥이 죽었으면, 옛날로부터 그건 다 하나님께 하늘에 벌 받은 병이라 하지 않아요?
그거 왜 그랬느냐 그러면 낫지 않거든. 다른 병은 약을 쓰면 낫지만 이건 뭐 일생의 불치병이야. 지금은 약이 좋아 낫습니다만, 옛날엔 낫지 않기 때문에 그걸 천형병(天刑病)이라 그랬어요. 그래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있는 의서에도 말이야 아주 저 폐병은 적악지가(積惡之家)에 난다고 그랬어요. 옛날에 대대손손이 악을 적악(積惡)한 놈의 집안에만 그 병이 난다고 지금은 못할 소리지만. 그러니까 병만 들리면 그만 “아이구 난 이제 뭐 망한다.” 그런 점이 망한다는 생각이 되니까 누구에게 선심을 쓸 생각이 나지 않아. 가족에 대해서 짜증내고 동네에 대해서 짜증내고, 방문을 해도 저는 다 편안하니까 그러고 뭐 너가 뭐, 일부러 그러게 그 폐병쟁이의 그 불쌍한 점은 어디 있냐하면 짜증내는 거, 좋다니 잘해준다는 게 없습니다.
그건 왜 그런고 하니 난 이제 어차피 이러다 망하는 놈이다. 천형병이다. 그런데 그건 그럼 그 병은 그렇기 때문에 그 심리를 깨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 병이 낫는 것보다도 그 삐뚤어진 그 심리, 그래 나는 내가 지내봐서 효력 본 걸론 그거에요. 의사한테 뭐 병이 네 병인 줄 아냐. 너는 이왕에 이 민족의 병을 맡아 앓는 거니까, 어차피 어느 놈이 앓아도 앓아야 될 병인데 네 중에 떨어진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전체의 병인 줄 알고 잘 맡아 앓아, 그렇게 말해주면 효력 있어요. 효력 있어요. 뭐 반드시 일어나라 그래서 일어서야만 이적이 아니에요. 그렇게 됐던 사람이 병은 고스란히 앓아요. 좋아요. 그래요. 좋아요. 하나님의 은혜, 그게 기적이라면 기적이지 뭐 기적이야 그건 더 기적 아니에요. 나는 그것 실험해 본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실험해 보세요. 괜히 나만이 팔자가 사나워 그랬다든지 뭐 벌을 받아 그랬다든지 그러지말고 전체의 병인데 나라 모양이 이렇게 된다면 말이야 어느 놈이. 우리나라에 폐병균이 들끓어. 문둥이 균이 들끓으니깐 말이야. 어느 놈이 앓아도 앓게만 마련인데, 그것이 네 등에 떨어졌구나. 떨어졌구나. 또 수학문제가 있으면 쉬운 문제도 있고 어려운 문제도 어느 놈이 풀어도 풀긴 풀어야 되겠는데. 왜 난 하필 제일 어려운 문제를 맡았을까? 선생이 미워서 날 시킨 거 아니야. 어떻게 차별을, 아무 놈이 맡으면 맡을 건데, 그러면 네가 능력이 있으면 풀면 좋고, 못 풀어도 푸는 데까지 하면 되는 거지. 꼭 네가 풀어야만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맡은 거지.
그러니까 일은 전체의 일을 맡아, 전체의 짐을 맡아서 한다고 하는 그 점을 깨닫는 것만이 중요한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이 의미로 말하면 전체의 걸 맡아서 하는 건데, 이것이 맡아서 하는 건 줄로 알질 못할 뿐만 아니라 잘나서 이걸 이겨서 그럭하니, 그럭하는 데는 미울 정도를 지내서 불쌍하다 그 말이야. “아유, 저걸 어떡하나.” 불쌍한 생각, 그래 그 점이 만일 우리 마음가운데 곧 불쌍하다 생각하는 마음이 참 진정으로 발동을 하면요 저 사람들이 감동을 하겠는지 난 건 몰라요. 그건 뭐 우리민족의 전체의 일이니까 말이야. 전체의 일이, 일로 봐서 그런거니까 어쩔 수 없는 고 실력대로가 고려시대에는 정몽주, 이색이 다 맞아죽어야 하는 거지. 외상없어요. 안 맞아 죽을 사람이 잘못 맞아 죽은 거 아닌 게요.
이런 게 왜 정몽주에게 떨어졌나, 이색에게 누구에게 떨어졌나 그것만 보면 되지. 그때도 보면 필연코 죽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러게 그렇게 된 거니까, 건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해도 이름이 박정희가 되겠는지, 김종필이 되겠는지, 이후락이 되겠는지 모르지만 누가 그랬던지 간에 어쨌든 저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게만 마련이에요. 그런 거면 이왕이면 그 사람이 그 전체에 뜻을 알아서 이건 쌓이고 쌓여오던 이 죄악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니까, 우리 교회에는 어떻게서든지 해야지 해서. 고스란히 메고 더러운 거 하고 해서 슬쩍해 저 이제 바다 속에 들어가 내다가 버려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런데 이런 이 그걸 못 깨달아서 그걸 못 그렇게 해. 바다에다가 버리긴 고사하고 아깝다고 하고 이걸 보물이라고 들썩, 아유, 내버리면 안 된다, 안 된다. 그러니 점점 집안에서 똥냄새는 더 나오고 말이야. 걱정이란 말이야. 그러니 저도 더럽고 우리도 더럽고 이걸 어떻게 하냐? 이게 저주받은 백성 아닌가. 그럴 때에는 민족으로서는 하면 나는 뭔고 하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 슬쩍 전할 수 있어. 저주받아 그런 거 아니라 이게 인류 전체의 짐인데 그게 우리 편에 떨어진 거다.
전체의 짐을 지고 가는 십자가
우리도 민족적으로 그렇게 생각 그럭하면 이제 예수님은 불쌍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저것들이 믿지 않는 것이 그것이 몰라. 그래도 내 일. 그것을 남의 일로 보지를 않아. 그랬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내가 전체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린다 그러지. 연극으로 한 거 아냐, 연극으로, 여기서 저 정당 싸움하면서. 우리 단식한다. 거 연극이야. 우리가 이렇게이렇게 하는 척하고 저가 먼저 미안해서 그럴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심리가 아니야. 진짜로 정말로 내가 쇼맨이 아니라고 하는 언제 윤성봉 씨가 내 이름을 들어서 그거 성자냐 쇼맨이냐, 무슨 잡지에다 썼습니다. 말도 할 것 없이 쇼맨이지. 윤성봉 씨 누가 뭐 그런 심리에 썼는지 몰라요. 하지만 쇼맨은 할 수가 있었어. 하지만 예수님은 쇼맨은 아니에요. 그것만은 우리가 거가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그래 우리가 주님 그리고 선생님 그래야 하는 데가 그런데 그 심리에 그 마음에 깨달음에 가기가 어려워. 그런데 그는 그걸 그대로 했어. 그때 저놈들이 믿지를 않는다, 그렇게 보지를 않고 그는 곧 자기일로 이렇게 알고 고대로 한 것이 결과가 십자가라 하는 걸로 고스란히 나타는 그렇다면 이제 오늘날에 우리 일도 우리 일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우리 일이다. 우리 걸로 뭘로 아냐. 세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짐이다. 그렇게 살려내는 길, 그럴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이건 참 알기 어려운 말이에요. 하나님이 도리어 못 그렇게 했다. 못 믿을 그건, 하나님 자체가 악을 한다는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그건 설명 안 해도 알줄 알지만 하나님의 자체가 “이 자식 망해버려야” 그랬다는 거 아니에요. 그건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어디까지든지 하나님 노릇을 해.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 아니할 수 없다 그 말이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어디까지든 참이요, 어디까지든지 사랑이요. 그걸 참에 할인을 할 수도 없고, 사랑에 거신할 수도 없다 그 말이야. 그렇게 나가면 말이야 바위가 돼서 말이야. 바위가 물러설 수도 없고. 물렁물렁해질 수도 없어. 바위는 어디까지 바위야. 그러면 말이야 거기 대드는 놈이 대드는 계란이 깨지는 수밖에 없어.
그런 모양으로 하나님은 우리 모양으로 좀 보통 옅은 의미의 인종을 써서 말이야. “야야, 그럼 내가 안 그런다. 이렇게 타협을 해.” 타협을 한다면 역사에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야. 허나 역사에 왜 참혹하냐. 왜 옳은 이, 왜 옳은 사람이 죽고, 전도를 해도 못 알아듣고 이시대가 이렇게 악한 구멍으로만 들어가나. 하나님은 굽히지 않아. 자긴 어디까지 말하자면 타협을 해서까지라도 좋은 결과를 얻자고, 자기를 굽혀서까지라도 선심을 쓰자하는 그런 거 아니 한다 그 말이야.
거기가 하나님이야 그러고 나면 어드런고 하니 인간이 점점 여기 와서 다할수록 부서져요. 참 의미에서 하면 인간 자기가 한 거지, 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겠소마는 하나님은 하나님된 것 때문에 또 다른 말로 역증 할 수 있어, 어째서 인간이 이성적인 인간인데 말이야. 말을 해줘도 듣지를 않고 말이야 실지 현실로 그 놀라운 만한 일을 해줘도 어째서 깨닫질 못하는 그 뭐 이거 단식을 한데도 안 되고 어린애들이 많은 수많은 학생들이 데모를 한데도 안 들어. 그러다가 퇴학을 당해 비참한 일이 있나 이 천재지변이 있어 전염병까지 돌아 요샌 아주 갖은 조건에 다 이거 이럭하면 웬만하면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이거 참 우리 잘못한 거 있나. 이러면 고쳐 생각을 해야 하지 않아. 그럴 것 같은데 그러면 그럴수록 정녕 바짝 바짝 더 굳어져 더 굳어지지 않아요. 변명 내내 말이야 이거 불같아 그런 겁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해 그럽니다. 생각해 그럽니다. 역사가 마치 이래야 됩니다. 그래 점점 더 굳어지지 않아요? 그럴 때에 그것도 인간이란 생각을 하면 왜 저럴까? 왜 저럴까? 미운 생각보다 무서운 생각, 무서운 생각보다 불쌍한 생각, 동화에 나왔던 것처럼, 왜 저 모양 왜 저럴까? 그러면 하나님이란 하는 일 두고 이렇게 얘길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그렇게 할 수… (녹음33, 3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