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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좋은 시 읽기___주경림
삶의 구멍, 그대로 선禪의 자리
주경림
경복궁 서쪽 담장길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가을이 깊어갔다. 오랜만에 담장길을 걸어 그 맞은 편 통의동 보안여관에 들렀다. ‘보♨안 여관’ 간판 그대로 걸고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있는 1930년대에 지어진 목조 건물이다. 서정주 시인이 하숙하며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낡은 문짝을 열고 들어가니 ‘잡화점전展’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는 ‘누가 나의 가족인가’라는 물음으로 출발한다. 아이는 게임, 아빠는 스포츠와 각종 신문기사들, 엄마는 카카오톡, 할머니는 고스톱, 할아버지는 트로트에 열중하는 등, 각각의 소비영역 주체들이 집이라는 공간만 공유한다. 각종 상품이 모여있는 가게 같아 ‘잡화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 힘든 현대사회의 가족의 의미를 짚어보며 소비사회의 가족을 풍자하는 전시였다. 그래서 필자도 이번 지면에서 시에 드러난 가족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했다. 시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 속에는 그리움과 회환이 담겨있어 현대사회의 소원해진 가족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 삶의 이정표
아버지와 함께 장에 간 일이 있었다.
의평리에서 옥계를 지나
광천 장까지는 고개를 서너 개 넘어야 했다.
한 고개를 넘고 나서
다리가 아프다고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아버지는 이내 내 손을 잡아끌고
고개를 몇 개 더 넘어야 장터가 보인다고 하셨다.
울며 따라나선 장터 길
내 인생도 그 고개처럼 몇 굽이를 넘는구나.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
지금도 아버지는
그 고개를 넘어야 장터가 보인다고 하신다.
──엄원용, 「장에 가는 길」,『시와산문』, 가을호
수필가, 목사이기도 한 엄원용 시인의 「장에 가는 길」은 12행의 짧은 시이지만 독자에게는 긴 시로 읽힌다. 시인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장에 간 체험이 현재까지도 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고개를 넘어야 장터가 보인다고” 하신 아버지 말씀이 옛시간과 공간을 넘어 아직도 유효하다. 시골에서 도시,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을 지탱해주는 이정표가 되어 긴 여운을 남긴다. 현대 가족사회를 풍자한 보안여관 ‘잡화점전展’에서 늘 부재하는 아버지가 엄원용 시인의 시에서는 늘 함께 한다.
“쉽게 쓴 시가 아름답다.”고 시집 『여행의 끝』 책머리에에서 엄원용 시인 자신이 밝힌 시론과 일치한다. “읽고 나서 깊이 생각하게 하고 누구나 기쁨을 누릴 수 있게하는 쉬운 시”임에 틀림없다. 참 쉽게 씌어졌으면서도 오래 곱씹게 하는 힘을 지녔다. 아마 그 힘은 읽는 이에게도 어린 아들의 작은 손을 잡아끌어주던 아버지의 커다란 손의 체온과 따듯한 음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시인의 진실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시인은 인생길의 고비마다 “그 고개를 넘어야 장터가 보인다고 하신” 아버지의 육성을 듣는다. 그 말씀이 험난한 여정에 비유되는 인생길의 어려움을 잘 넘기게 해준다.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 그렇게 세상을 받아들이며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에둘러 가며 현재 삶의 위치를 확인한다.
문득, 심사정의 그림인 <촉잔도蜀棧圖>가 떠올랐다. 인생이나 벼슬길의 어려움을 비유한 험난한 산세와 기암절벽, 급류와 촌락이 이어져 8m의 두루마리 그림이 되었다.
벌거벗은 잎새
온몸이 군데군데 파여 있다
가난한 벌레에게는 밥상이고 쌀독이었을
나뭇잎이 밟혀온 내력이다
배고픔을 읽은 청목靑木이 살점을 대여한 것
뻥 뚫려있는 구멍 속으로
하늘 한 조각이 풍경으로 들어앉는다
마른 잎처럼 구겨진 어머니의 가슴에도
저런 구멍이 몇 개 있다
나 젊은 날
객기로 파헤쳐놓은 구덩이다
나는 예수의 제자 토마스처럼
가슴에 난 상처가 메워졌는지
더듬어 보곤 하였는데
한 번 날인된 구九멍은 삭제되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막걸리를 마신 날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노랫가락은 떨리더라니
그런 날은
추임새로 들어가려는 내 목청도 울리기 마련
──조재형, 「구멍」, 『다층』, 가을호
엄원용 시인이 「장에 가는 길」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건재해서 삶의 이정표가 되고있음을 보여주었다면 조재형 시인은 희생적이었던 어머니의 자리를 그리워한다. 시의 도입부는 벌레 먹은 구멍이 숭숭한 잎새에서 시작해서 시인은 차츰 그 구멍의 내력을 심정적으로 읽어간다. 그 내력은 잎새의 구멍은 벌레에게 먹힌 자국이 아니라 “배고픔을 읽은 청목靑木이 살점을 대여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일차원적 생태계의 질서가 자비와 보시의 차원으로 격상된다. ‘대여’라는 표현은 십분 벌레의 입장이 구차해지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뿐, 무주상보시임에 틀림없다.
이제, 조재형 시인은 도입부의 입새의 구멍에서 어머니의 가슴 구멍으로 옮겨간다. 둘째 연, “뻥 뚫려있는 구멍 속으로/ 하늘 한 조각이 풍경으로 들어앉는다”는 잎새에서 시인 자신의 마음 풍경으로 건너가려는 시적 장치로 볼 수 있다. 하늘 한 조각 담아낼 수 있는 그 구멍은 시인의 젊은 날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깊고 넓게 확대된다. 잎새 구멍에서 시인은 젊은 날, 객기와 치기로 어머니 가슴에 파헤쳐놓은 구덩이를 본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자기 고백 같은 울림이 감동을 준다. 훗날, 더듬어보아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 구멍은 자식을 위해 헌신적인 어머니의 상처로 남아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상처와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함께 끌어안는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 “막걸리를 마신 날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노랫가락은 떨리더니”에서 상처마다 구멍 뚫린 한 자루의 피리가 연상된다. 시인이 그 노랫가락에 추임새로 들어갈 수 있음은 어머니의 마음 그대로 한 장단을 맞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도 아들도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도 공감과 위로를 받는 치유의 카타르시즘을 맛볼 수 있다.
■구멍에서 구멍으로,
화단에 개미구멍이 나있다
수없이 통과하고 비어있는 구멍들
내가 빠져나온
어머니의 헐렁한 구멍도 거기 있다
입시, 식당 배식구, 투표소 칸막이
연애하러 나가며 설렘을 저장해둔 하이힐 구멍
결혼이란 구멍에 들어와
터널에 갇힌 듯 밖을 그리며
몸부림치지만
저들도 나무 귀퉁이에
방 한 칸 세 들어 놓고
학교로 일터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나갔구나
또 다른 구멍을 찾아갔구나
작은 틈새를 들여다본다
빈 소리들이 구멍에 골똘하게 들어있다
하늘이 낸 구멍으로 해와 달이 지나다니듯
구멍은 태초의 역사가 아닌가
──김선호, 「구멍」, 『미네르바』, 가을호
조재형 시인이 벌레먹은 잎새 구멍에서 어머니 가슴에 난 상처를 상기했다면 김선호 시인은 개미구멍에서 태초의 역사까지 보아낸다. 개미는 집단으로 서식하며 사회성이 강한 곤충이다. 그 사회성의 결집체로 집을 짓고 산다. 개미집은 복잡한 미로 같은 형태를 띠면서 골목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김선호 시인은 개미집인 그 작은 틈새에서 자신이 빠져나온 어머니의 헐렁한 구멍부터 굽이굽이 지나온 인생의 회로를 마치 숨은그림처럼 찾아낸다. 입시, 결혼처럼 관념적인 구멍, 식당 배식구 같은 생긴 모습 그대로인 구멍 등이다. 세상에는 구멍 아닌 것이 없는 듯하다. 그중에 결혼은 “터널에 갇힌 듯 밖을 그리며/ 몸부림치”는 구속의 구멍인 셈이다. 개미들도 인간처럼 학교로 일터로 혹은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나갔다고 보는 대목을 읽다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개미도 사회적인 동물이니 그도 그럴 것이다. 시인이 능숙한 솜씨로 언어와 주제를 운용해가는 역량이 돋보이며 그동안 힘써온 내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점차, 김선호 시인은 작은 틈새를 넓고 깊게 보기 시작한다. “빈 소리들이 골똘하게 들어있다”는 시의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골똘하게’는 독자의 집중과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기를 기대한다. 그 구멍이 해와 달이 지나다니는 우주와 태초의 역사까지 보아낼 수 있을만큼 크고 깊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을 쫓아가려니 숨이 차오른다.
■이미지의 해체와 결합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다 만났다
긴 몸을 땅바닥에 대고 기어가다
풀숲으로 들어간 능구렁이
몸길이가 짧은 뱀은 없는 걸까
길다 긴 것과 짧다 짧은 걸 비교하다
여름 해는 길다
길게 느껴진다 구렁이처럼
그럼 극히 짧은 건 무얼까
문득 어느 순간 다가온 그건 선禪이다
달콤한 가장 강렬한 깨침을 위해
지금 나는 비포장 도로 위에서
길을 걷고 있다 쉬지 않고
──강만수, 「선禪」, 『시와산문』, 가을호
강만수 시인의 「선禪」은 상식적인 알음알이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시이다. 능구렁이와 여름 해, 선의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찾아보려는 노력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길다 긴 것과 짧다 짧은 걸 비교하다” 시인은 느닷없이 ‘선’을 불쑥 독자 앞에 내놓는다. 우리가 배움으로 익히 알고있는 선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적정無我寂靜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이다. 수행방법으로 보통 좌선하는데 강만수 시인은 비포장 도로 위에서 쉬지 않고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관념과 의식을 무장해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상상과 이미지를 결합시키려하지말고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라는 주문이다. 무심의 경지 속에 무심하게 만나는 깨달음이 바로 강만수 시인의 선이 아닐까. 그래서 시인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인위성이 배제된 비포장 도로를 쉬지 않고 걷고 있나 하고 짐작해볼 뿐이다. 바로 무심의 경지로 가기위함일 것이다. 추사가 자신의 서체를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 한 말이 떠오른다. 강만수 시인의 시 「선」 역시 시인이 자신의 시가 잘되고 못되고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읽는 이도 잘됐는지 못됐는지 알 수 없다. 무언가 명징하게 밝혀지지 않는 시의 여백을 채워갈 독자의 몫이 크다는 점이 미덕이다. 단지 분명한 것은 시인이 온 힘을 다해 새로움을 찾아 깊게 고뇌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사리 한강가에 가서
지구의 가슴팍을 떼어 메고 왔다
아른아른 봄 햇살이 함께 따라왔다
하얀 스티로폼 상자에 거름과 햇살을 섞어 담아
새 지구 하나 만들었다
매운고추 방울토마토 상추를 심고
잘 눌러주었다, 물을 흠뻑 주었다
거름이 잘 썩어 있는 지구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새 지구 가슴팍에
우리 모두 싹이 터서
묵은 신발을 벗는 봄밤
키다리 나무도 난쟁이 풀잎도 발바닥이 간질간질,
온 몸 물관부가 스멀스멀 열린다
봄햇살 깃털 달고 화들짝 날아오른다
──이혜선, 「불이不二, 지구를 만들다」, 『시와산문』, 가을호
강만수 시인의 「선」을 상상력과 연관된 이미지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았다면 이혜선 시인의 「불이不二, 지구를 만들다」는 이미지의 강한 결합으로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혜선 시인은 한국현대시인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바 있고 평론가로서 활약 중이다.
첫 연의 “새 지구 하나 만들었다”가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이기에 부릴 수 있는 호기이며 흥미로운 발상이다. 겉으로 드러나있지 않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가 오염되고 훼손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새 지구 가슴팍에/ 우리 모두 싹이” 트는 왕성한 생명력을 통해 희망과 치유의 멧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위의 시는 지공誌公 화상(18~514 위진남북조시대)의 「14과송科頌」에 나오는 ‘불이不二’를 제목으로 차용해 쓴 연작시 중의 한 편이다. ‘불이’는 이분법적인 경계를 허물어 “보리와 번뇌는 둘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생과 사는 둘이 아니다”라는 절대 차별이 없는 세상의 이치를 전해주는 가르침이다. 미사리 한강가에서 떠온 흙, 봄 햇살, 매운 고추 방울토마토 상추, 키다리 나무, 난쟁이 풀잎, 그 모두가 한몸 되어 환희롭게 생명성을 꽃피운다. 새 지구에서 “묵은 신발을 벗는 봄밤”에는 모두가 꽃향기가 되어 날아오른다. 생명이라는 큰 줄기를 이루어나가는 지구라는 한 가족인 셈이다.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이고,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天地興我同根 萬物興我一體)라는 승조 법사(384~413, 중국 동진東晋 스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끝맺으며
이번 호에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를 찾아 읽어보았다. 요즈음의 가족이란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 얼굴 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시인들의 시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리가 따뜻한 온기로 남아있었다. 엄원용 시인의 「장에 가는 길」에서 아버지는 삶의 이정표처럼 “그 고개를 넘어야 장터가 보인다고 하신다.” 조재형 시인은 젊은 날에 객기를 부려 파헤쳐놓은 어머니의 가슴 상처를 떠올리며 그리움과 회환에 젖는다. 개미 구멍에서 자신을 이 세상에 내보내준 어머니의 헐렁한 구멍을 상기하는 김선호 시인은 결혼도 역시 터널에 갇힌 듯 밖을 그리워하는 구멍으로 표현한다.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 지구를 하나 만들어낸 이혜선 시인에게는 지구상의 모든 식물이나 동물은 모두 생명이라는 큰 줄기를 이루는 한가족인 셈이다. 가족이라는 진부한 주제와는 동떨어진 강만수 시인의 「선」은 명징한 의미는 다가오지 않더라도 낯설은 세계,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을 주었다.
최근에는 생활가전제품을 파는 전자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스마트 홈 시대를 예고하는 광고에 나섰다. 미래의 가정은 가전제품들이 인간을 이해하고 의미있는 정보를 주고 유익한 제안까지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집을 비우는 시간에는 절전모드로 전환하고 이사를 가더라도 위치확인시스템GPS이 인식해서 적정 실내온도까지 맞춰준다고 한다. 스마트홈이라는 하드웨어의 완벽함이 소프트웨어인 가족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스마트홈과 스위트홈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꾸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주경림 /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씨줄과 날줄』, 『눈잣나무』, 『풀꽃우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