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성지순례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환
라파엘호는 황산리에 정박했다.
윤종관 신부
2020. 12. 15.
대전교구 윤종관 신부
라파엘호는 황산리에 정박했다.
대전교구 윤종관 신부
차 례
머리말 …………………………………………………………………………… 3
1. 어제의 강경, 그리고 황산포…………………………………………… 4
2. 김대건 신부는 왜 강경을 입국지점으로 택하였나?………………… 11
3.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닻을 내린 강경의 외딴곳 추정 ……… 13
4. 라파엘호의 입항과 접안 후 하선까지의 경위를 합리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16
5. ‘외딴곳’이라는 그 ‘황산 동네’는 황산리이다.………………………… 20
6. 조선조 말엽 관변기록의 황산포 ……………………………………… 30
⑴ 강경 전화교환구역 황산포(1908) ………………………………… 30
⑵ 강경포교안사건 관련 문서(1899)에 언급된 황산포 …………… 31
⑶ 팔도사도삼항구일기(1885-1887)의 황산포……………………… 32
⑷ 충청도와 전라도 공문철(1886-1887)의 황산포 ………………… 33
⑸ 1895편찬 전라도 호남읍지의 여산군 황산포…………………… 34
⑹ 1871편찬 전라도 호남읍지의 여산부 나암창…………………… 35
7. 나암창과 황산창, 그리고 황산포……………………………………… 36
8. 조선왕조실록 정조14년(1790)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와 나암포 … 38
마침말 : 나암포와 관련없는 황산포의 언저리 ‘황산 동네’ …………… 39
추이 ……………………………………………………………………………… 40
라파엘호는 황산리에 정박했다.
대전교구 윤종관 신부
머리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이하면서 필자는 순례하는 마음으로 강경과 나바위 성지를 홀로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나바위 성지의 화산 아래에서 「성 김대건 신부 일행 착륙지점」의 안내판을 읽었다.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있었다.
1845년 8월 31일 김대건신부는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Ferréol)고 주교, 다블뤼(Daveluy)안 신부 그리고 11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포교지인 한양을 향하여 라파엘호를 타고 항해하였다. 그러나 폭풍우와 풍랑을 만나 돛대와 키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제주도 용수리에 닿았다. 그곳에서 배를 정비하여 다시 북상하였으나 반파상태인 배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자 계획을 바꾸어 강경에 정박하기로 하였다. 선원 일행 중에 강경신자들과 강경 일원의 지형도를 잘 알고 있던 자가 있었다. 당시 강경포는 조선 3대 어시장 중에 하나였으므로 번잡하고, 황산포와 낭청포는 나루가 있어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기에 배들의 오고감이 드물고 상선도 정박하지 않던 아주 작은 나암포 화산 언저리가 착륙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착륙지점의 글을 읽은 후, 강변길을 따라 1㎞ 가량을 내려가서 「성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의 진입로」라는 곳에서 아래와 같은 안내의 글을 읽었다.
조선시대 익산시 용안면 용두리 용두산 기슭에 자리한 용두포에서 나암포까지는 수로가 있었고 용두산은 나암포로 들어오는 초입이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상해를 떠나 42일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천신만고 끝에 금강을 오르면서 정박할 곳을 두렵고 초조하게 찾았다.
용두포에서 바라본 화산은 이들에게 ‘바다의 별’이자 희망으로 인도하는 등대와 같았을 것이다.
필자는 그날 홀로 귀가하면서 착잡한 심정으로,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 희년을 기하여 그분이 주교님 모시고 귀국하시던 라파엘호가 정말 어디에 도착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문(自問)하게 되었다. “그분과 함께 라파엘호의 동승자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천신만고 끝에 금강을 오르면서 정박할 곳을 두렵고 초조하게 찾았다」는 최 베드로가 ‘강경이 황산 동네’에 도착했다고 증언한 것은 허위란 말인가? 그리고 함께 오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과 김대건 신부님께서 ‘강경에 도착했다’고 기록한 서한은 뭐란 말인가?”
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 본인은 김대건 신부님의 까마득한 후배로서 교회사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역사는 왜곡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알고 있는 상식 수준의 한 사제의 입장으로 이 글을 쓴다. 교회사 전문가의 비판을 기다린다.
1. 어제의 강경(江景), 그리고 황산포(黃山浦)
‘강경(江景)’이라는 지명(地名)은 조선(朝鮮)시대의 행정명칭(行政名稱)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강경읍(江景邑)’은 일제강점기에 정해진 행정명칭이다. 옛적의 강경포(江景浦)는 은진군 김포면(恩津郡金浦面)에 위치한 수운거점(水運據點)의 큰 상업지였다. 이 강경포의 인근과 더불어 그 일대(一帶)를 일컬어 ‘강경(江景)’ 혹 ‘강경이(江景伊)’라 하였다.1) 부여(扶餘)에서부터 남행(南行)으로 흘러내려오는 금강(錦江:일명 白馬江)의 본류가 직각형(直角形·ㄴ형)으로 휘돌아 서행(西行)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여러 지류(支流:샛강)들과 합류하는데, 그곳에 해발 43.8m의 옥녀봉(玉女峰)이 솟아 있다.2)
그 옥녀봉 아래의 북쪽에서 2개의 지류가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동북쪽(논산쪽)에서 흘러내려온 논산천(論山川)과 동남쪽(여산쪽)에서 흘러내려온 강경천(江景川)이다. 그 2개 지류는 오늘날 변형되어 옥녀봉 위쪽에서 합류하여 금강 본류와 합해진다.
또 다른 지류가 옥녀봉 남쪽에서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강경 읍내를 사행곡류(蛇行曲流)로 관통하는 지류다. 오늘날 ‘대흥천(大興川)’이라 하는 이 지류는 옥녀봉 남쪽에서 서창갑문(西倉閘門)을 통하여 금강 본류에 유입된다. 이 지류의 금강 합류점이 강경포구(江景浦口)이다. 이곳에서부터 이 지류의 하안(河岸)을 따라 오늘날 상강경(上江景)3) 아래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에 ‘강경포(江景浦)’가 형성되어 있었다. 강경포구까지 이르는 그 사행곡선의 이 지류가 ‘ㄹ’자형으로 물길을 이루는 저습지역(底濕地域)에 옛 황산포(黃山浦)가 형성되어있었다. 즉 강경포에 이르는 ‘ㄹ’자형의 사행곡류를 따라서 선박들이 깊숙이 들어가 접안할 수 있었던 지점에 형성된 상업지역이 ‘황산포’였다. 이 사행지류를 따라서 충남(은진현)과 전북(여산부) 사이의 도계(道界)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행지류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1910년에 작성된 강경지역 최초의 근대지도에서 그 도계를 아래와 같이 확인할 수 있다.4)
1)강경포(江景浦)를 중심으로 합류하는 여러 지류(샛강)들의 천변(河岸)을 따라서 여러 나루터(津)들이 만들어지고 선박들을 이용하는 물류거래의 상업지가 형성되었다. 그런 상업지에 자연스레 상가(점포들)와 주택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 곳들이 강경포(江景浦) 황산포(黃山浦)등 포(浦)들의 명칭이 되었다. 이러한 곳들에는 정부당국(조정과 지방관아)이 조세로써 세곡(稅穀)을 모아 보관하는 세창(稅倉:강경창, 황산창 등)을 두게 되었다. 각 지역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곡들이 각 포(浦)에 운반되는 통로는 육로도 있었지만 강경 인근까지 내륙의 하천 물길을 따라 선박들에 의해 운반되었고, 그 세곡을 선적한 조운선(漕運船)이 금강을 통하여 서해로 나아가 한강의 마포(麻浦)에 이르게 되었다. 세곡을 운반하는 선박들이 여러 지류들의 물길을 따라 강경포구에 이르게 된 다음에(세곡을 그곳 江景倉에 하역했다가) 조운선(漕運船)이 옮겨 선적해서 서해로의 해운(海運)을 시작하는 곳이 강경포였다. 그러한 본류(本流)와 지류(支流)의 수운선박(水運船舶)을 연결시켜주는 ‘결절점(結節點)’이 강경포였다. 그 강경포 주변일대를 일컬어 강경(江景) 혹 강경이(江景伊·속어로 갱갱이)라 하였다. ‘물의 도시’와 같은 이 강경(江景)을 江鏡이라고 기록한 사람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행정구획변경을 하면서 ‘강경면(江景面 · 후에 邑)’이라는 행정명칭이 되었다.
2)옥녀봉을 ‘강경대(江景臺)’ 혹 ‘강경산(江景山)’이라고도 했다.
3)상강경(上江景)은 현 강경상업고등학교가 소재한 주변인데, 그 일대는 과거 강경포보다 지대가 높은 곳이었다.
4)이 ㄹ자형의 지류를 따라 조선시대에 충남과 전북의 도계(道界)를 이루었고 강경포(충남 지역)와 황산포(전북지역)가 형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 지류의 사행(ㄹ자형)을 변형시켜 그 일대가 ‘강경면(읍)’의 중심지가 되고 도계는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변형된 이 하천은 오늘날 ‘대흥천’이라 불린다.
▲ 지도1 : 일본인 사카우에 도미구라(板上富藏)가 1910년에 제작한 강경지역 최초 근대식 지도
우리는 이 하천이 변형되기 전의 형세를 파악함으로써 옛적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정박한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금강하류는 서해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그러한 금강과 합류하는 그 사행지류(대흥천)의 깊숙이까지 선박운항이 수월하였다. 만조(滿潮) 때나 우기(雨期)에 하천이 범람하면 강경포에 이어진 ‘ㄹ’자형 사행지류에 물이 가득하여 금강본류와 어우러진 광경은 수상도시(水上都市)였던 것이다. 그러한 이 지역의 일제강점초기의 시장형성과 당시의 광경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신문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5) 그 신문의 보도기사 중에 “江景伊는 조선
5)오늘날의 강경읍 시가지가 형성되기 전까지의 그 ㄹ자형 사행곡류 지역에 대한 일제강점기 초반의 사정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하는 당시의 신문기사가 있다.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 1916년6월14일자에 ‘江景의 船商客主 同盟 移住할 計劃’이라는 제하의 보도 내용의 일부가 다음과 같다. “내지인(일본인)어시장과 영업에 衝突되야 – 강경어시장과 선상객주 사이에 患難되던 事는 이미 本報에 보도 한 바 어니와, 이 문제가 생긴 때는 작년 삼월 즉, 魚市場 설립 당시부터이라 江景伊는 조선에서 屈指하는 三大시장의 하나로 시장의 한 가운데를 貫通하는 潮水가 있어 하루 두 번 식 출입하는 큰 포구라 강 좌우에 주민은 모두 선상 객주를 영업으로 하여 장사배가 해산물을 싣고 들어오는 때는 자유로 자기 親近한 객주를 찾아가서 물건의 판매를 委託하면, 객주는 물건을 판 후 그 대금을 사간 사람에게 받고, 못 받는 것을 不拘하고 객주가 先으로 全數히 지불하고 그 물건 값에 의하여 수수료를 받는 것인데 강경에서 一個 年의 産物 출입의 總額이 수 십 만원의 큰돈이 모다 객주의 손을 거치여 거래되며 所爲 강경이 강경이 하면서 대단히 유명한 상업지라 云云 함도 맞지만(…이하생략)
6) 관보 489호 : 朝鮮總督府官報 第四百八十九號 明治四十五年四月十七日 朝鮮總督府官房總務局
에서 屈指하는 三大시장의 하나로 시장의 한 가운데를 貫通하는 潮水가 있어 하루 두 번 식 출입하는 큰 포구”라 했듯이 대호지형(大湖地形)의 그 일대를 일컬어 강경(江景) 혹 강경이(江景伊)라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강경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여 도계가 그어져있던 ㄹ자형 사행곡류의 전북 여산부(礪山府) 북일면(北一(面) 지역의 하안에 형성된 상업지역이 ‘황산포’였다. 그리고 이 사행곡류의 샛강 입구에서부터 충남 은진군(恩津郡) 김포면(金浦面)에 속하는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장시(場市)를 강경포(江景浦)라 했다. 이 2개포(兩浦)지역 전체를 ‘강경’이라 일컬었던 대로 ‘황산포’역시 ‘강경 황산포’라 했다.
그런데 전북(여산부)에 속하던 황산포가 한일강제합방(1910)후 1912년에 충남(은진군)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912년4월17일자 총독부관보6) 에 다음과 같이 도계변경을 공포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85호
충청남도 및 전라북도의 관할구역 중에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명치(明治) 45년 4월 17일 조선총독 백작 테라우치 마사타케(伯爵 寺內正毅)
-하나.
충청남도 임천군 세도면 계양리 중의 월포(越浦:금강좌안지구)를 전라북도 여산군 북일면(北一面)에 편입한다.
-하나.
전라북도 여산군 북일면 중의 학동리鶴洞里, 황산리黃山里와 토동리兎洞里, 하작리下鵲里, 신량리新凉里와의 사이에 있는 충청남도 은진군 채운면 소재의 채운산彩雲山 지맥支脈의 분수선分水線 이북에 속하는 토동리兎洞里, 신량리新凉里의 각 일부 및 학동리鶴洞里, 황산리黃山里, 염대리鹽垈里, 도대리島垈里, 교정리橋頂里, 신대리新垈里, 환대리換垈里, 원대리院垈里, 월포리月浦里를 충청남도 은진군 김포면金浦面에 편입한다.
-(참고)
충청남도 은진군恩津郡과 전라북도 여산군礪山郡과의 새 도계(新道界) 부근 약도는 다음과 같다.
▲ 지도2 :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85호(1912.4.17)로 강경 지역 도계를 변경한 구획도
위와 같이 일제총독부가 도계를 변경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우선 한일강제합방 전부터 이미 일본인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강경에 거주하기 시작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때까지 강경에 거주하던 인구변동현황을 아래 도표에서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 도표1 : 일제총독부 농상공부 발행, 1910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3권, 624쪽7)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1876년)의 체결로 조선은 사실상 관세자주권을 상실했고, 조선에서 일본화폐가 유통되며 일본인들의 곡물(특히 쌀) 반출이 무제한적이었다.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에 의해 청국(중국)인들도 조선과의 교역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한 추세에 의해 한일강제합방(1910) 전에 강경에 거주해온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의 현황을 위 도표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을 적극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강경 지역의 상업을 장악해왔다. 그리고 한일강제합방 이듬해(1911)에 발간한 조선지(朝鮮誌)는 전북 여산군(礪山郡)의 황산포(黃山浦)에 대해서 파악한 것을 아래와 기록하고 있다.9)
黃山浦
군(郡)의 북부 금강연안에 있는 한 중요한 나루(一要津)이며 강경(江景)과 한 지류(支流)를 사이에 두고 2곳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미곡 반출기에 이르면 선박의 출입이 매우 빈번하게 된다. 조선인 180호 700여명, 내지인(內地人=일본인) 40명이 거주한다. 10)
7) 이 도표1은 論山市誌 제2권, 논산시지편찬위원회 2005발행 235쪽에서 발췌한 것임.
8) 한일강제합방(1910년) 이전에 이미 강경 지역을 일본인들이 눈독들여온 사실을 역사지리학자 나도승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나도승, 錦江水運 中繼河港 變遷에 關한 硏究 - 江景을 中心으로, 국회도서관 KINX1983071599호 126쪽) : “강경포(江景浦)가 대 시장(大 市場)으로 크게 부각하게 된 것은 1870년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를 위시하여 외세의 침입이 많았으며(…중략), 특히 1876년 일본 함포의 시위 하에 맺게 된 강화조약(江華條約)(…중략)에 의거하여(…중략) 한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행사하게까지 되었다.(…중략) 1870년 부산, 1874년 원산, 1877년 인천의 순으로 개항케 되었는데, 금강하구의 군산(群山)부근은 아직도 저습지(低濕地)로 미개발 상태였으며, 게다가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커서 하구안(河口岸)에는 선박이 정박할 수 없었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농경적 배후지를 갖고 있었고, 게다가 남과 북에 전주와 공주의 2대 수부(首府)를 장악(掌握)하고 있었던 강경포(江景浦)는 내륙부(內陸部) 기항지(寄港地)로 하구부(河口部) 개방에 앞서 지방이나 국내 상인들은 물론, 이미 외래상인들의 상행위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이후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행상범위는 종전의 사방 40리에서 100리로 확대되면서 사실상 전국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들은 미개방 하구(未開放 河口)에서 밀무역행위(密貿易行爲)는 금강 연안의 경우 쌀, 大豆, 牛皮 등이 큰 것이었다.(…이하생략)”
9) 한일강제합방 이듬해(1911)에 일본인 요시다 에이사부로(吉田英三郞)가 발간한 조선지(朝鮮誌)의 제15절 여산군(礪山郡)에는 그 연혁(沿革)과 군세(郡勢)를 서술하고 여산읍(礪山邑)과 더불어 군내 주요지로 유일하게 황산포(黃山浦)의 현황을 기록해놓았다.
1910년 강제합방을 이룬 일본인들이 기존의 충남과 전북의 도계가 상권통합에 걸림돌이라고 보았던 시각을 이 조선지의 황산포에 대한 기록에서 감지할 수 있다. “미곡 반출기에 이르면 선박의 출입이 매우 빈번”하고 “한 지류를 사이에 둔 2곳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는 지적은, 물류교역에 있어서 동일지류의 수운(水運)을 도계로 갈라놓은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본 것이다. 즉 강경(江景)과 함께 황산포의 중요성을 이렇게 일본인들이 간파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총독부는 1912년에 전북 여산군 북일면의 황산포를 충남 은진군 김포면에 편입시킴으로써 강경포와 행정적으로 한 묶음으로 만들었다. 즉 도계를 변경한 것이다.11) 그리고 이어서 2년 후(1914년) 총독부는 전국 행정구역을 전면적으로 개편할 때 위와 같이 편입한 전북 여산군 지역까지 포함한 김포면의 행정명칭을 논산군 강경면(論山郡 江景面·후에 邑)으로 변경시킨다.12) 일련의 이러한 일본인들의 조치는 황산포와 강경포가 한 지역에 붙어있었던 현실을 행정적으로 통합 적용함으로써 강경을 상업적으로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강경지역 장악을 미리 추진하기 위해서 이 지역에 대해 근대식 측량법으로 지도를 작성한 사람이 사카우에 도미구라(板上富藏)라는 일본인이다. 그는 한일강제합방(1910년)에 맞추어 발간한 ‘강경사정(江景事情)’이라는 저술에 강경지역의 근대식 지도를 발표하였다. 그는 한일합방 후 강경면(읍)장, 학교조합이사장, 일본인회장, 강경미곡신탁(주)이사, 중선일보 부사장 등의 직을 역임하면서 행정적-상업적으로 강경지역을 장악한 일제(日帝)의 실력자였다. 그가 작성한 강경 최초의 근대식 정밀지도는 황산포의 위치를 강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여하튼 강경포와 더불어 황산포는 도계 변경 전이든 후이든 강경의 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황산포를 일컬어서 사람들은 ‘강경 황산포’라 불렀던 것이다. 강경포와 황산포는 동일한 수운지역에 하나의 장시(同一場市)를 형성하고 있었고, 실제 지리적으로 한 지역이었다.
강경포와 황산포를 한 지역의 시장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강경포구(江景浦口)라는 한 포구로 물류출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강경포구는 내륙하천의 어귀라기보다는 실제에 있어서 해항(海港)으로 인식될 만큼 지리적인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금강 지류유역의 내륙수운(內陸水運)과 서해해운(西海海運)의 결절점(結節點)이었던 강경의 포구(浦口)는 서해로부터 내륙 깊숙이 선박이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13)
10) 원문 : 黃山浦 郡の北部錦江沿岸に在る一要津にして江景さ一支流を隔て二地の關係頗る密接なり米穀移出期に至は船舶の出入頗る頻繁なり朝鮮人百八十戶七百餘人,內地人四十人居住す
11) 그때 변경된 도계가 현재의 도계이다.
12) 한일강제합방(1910)후 조선총독부가 1912년에 다음과 같이 강경 지역의 도계를 변경시켰다. 충남 임천군 세도면의 월포(越浦:금강 좌안 지구)를 전북 여산군 북일면(北一面)에 편입시키고, 북일면의 황산리 포함 11개 리를 충남 은진군 김포면(金浦面)에 편입시켰다. 이 김포면의 기존 범위와 여산군으로부터 편입된 지역이 1914년 충남 논산군의 강경면(江景面 그후 1931년 邑승격)으로 된 것이다.
금강이 서해에 합류하는 군산(群山)에서 강경까지의 하구간(河口間)은 수로(水路) 37㎞이다. 하폭(河幅)이 넓은 그 하구간은 평균조고(平均潮高) 3m이고, 수심(水深)은 평균 5∼6m이면서 암초(暗礁)가 적고 하도(河道) 변경이 적다. 그래서 전국의 다른 큰 강 하구들에 비하면 선박 운항이 가장 수월했던 곳이 서해에서 강경포에 이르는 금강하류였다.14) 그리고 금강하류 좌우하안의 야산에 부딪치는 골바람과 서해로부터의 조류(潮流) 시간을 맞추면 선박운항이 매우 용이하였다.15)
이렇게 서해와 내륙의 지류를 연결하는 수운이 용이한 덕에 물산 집산지로 각광을 받던 ‘강경포구(江景浦구口)’였다. 이러한 강경의 포구(浦口)는 동시에 육로(陸路)를 통한 물류를 수운(水運)에 연결하는 수륙간중계항(水陸間中繼港)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세종실록에도 강경포에 대한 기록이 나올 정도였고16), 조선조 전기부터 세창(稅倉)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숙종실록 39권에는 강경포를 종친부(宗親府)에 소속시켜 세(稅)를 거두게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18) 숙종조(肅宗朝)의 이러한 조치 후 영조조(英祖朝)에 강경포에서 제기된 문제점이 다음과 같이 영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은진(恩津)과 강경포(江景浦)는 상선(商船)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므로, 본디부터 이굴(利窟)이라고 일컬어 왔다. 본현(本縣)에서도 여기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관(官)의 비용을 충족시켰는데, 숙종(肅宗)15년(己巳·1689년)에 어의궁(於義宮)에 획급(劃給)하였으나 궁차(宮差)(궁에서 보낸 원역員役)들이 백성을 침학하는 폐단이 있어 어사(御史)의 논계(論啓)에 따라 곧바로 혁파(革罷)하였다. 이때에 와서 어의궁(於義宮)에 도로 예속시키고 본현(本縣)과 함께 거둬들인 세금을 반분(半分)하도록 하는 판부(判付)가 있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장계(狀啓)를 올려 도로 중지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는 판부대로 시행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궁차들의 횡포한 것을 금억(禁抑)하라고 청하였다.19)
13) 결절점(結節點) : 내륙의 지류들이 금강에 합류하여 서해(西海)의 해로(海路)와 연결되는 매듭과 같은 강경의 지리적 특성이다. 강경포구(江景浦口)가 그 결절점이다. 그래서 강경포구를 해항(海港)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페레올 주교가 “강경의 항구에 정박하기로 했다(aller mouiller au port de Kang-kien-in)”라고 서한에 적은 것은 강경포구를 항구(port)로 보던 당시의 인지라는 증거이다.
14) 나도승, 금강수운의 변천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공주 금강원의 역사 지리’, 1980, 219쪽 참조.
15) 나도승, 위 논문 213쪽 : “금강은 군산항에서 조류가 1시간 4절이므로 한강에 비하면 완속이며 입조(入潮) 시에는 약 6시간, 출조(出潮) 시에는 약 5시간을 요하게 된다. 선박은 출입조를 이용하면 매우 편리하며 구조곡간의 곡풍(골바람)을 이용하면 주행시간은 더욱 단축된다. 또 하안은 암초가 적은 편이어서 대소 선박의 안전운행을 할 수 있게 한다.”
16) 세종실록 49권(태백산사고본 53책19권-국편영인본 5책 632쪽)에 석성현(石城縣) 남쪽에 있는 은진(恩津) 강경포(江景浦)의 위치가 기록되어있다.
17) 이철성, ‘19세기 강경지역 포구 실태와 인근 민간지역에 대한 역사 지리적 고찰’, 2014.9.18, 학술대회 발표 논문 4쪽 참조.
18) 숙종실록 38권(태백산사고본 44책38권-국편영인본 40책 29쪽).
19) 영조실록 6권(태백산사고본 5책6권-국편영인본 41책 520쪽).
이렇듯이 강경포를 ‘이굴(利窟)’이라 할 정도였기 때문인지 18세기의 은진현 인구 현황 자료에 의하면 강경포가 위치한 김포면(金浦面)은 인근의 타 지역에 비하여 인구가 월등히 많았다. 즉 돈이 많이 오고가는 이곳(이굴)에 사람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조선조 후기 강경포의 이러한 경제력은 1759년도(영조35년) 세곡선 하역 기록과 조운(漕運) 현황에서 엿볼 수 있다.20) 그래서 선박들이 모여들고 자유롭게 운반되는 ‘금강의 대도회(大都會)’21)라 알려져 왔던 ‘강경(江景)’이다.
2. 김대건 신부는 왜 강경을 입국지점으로 택하였나?
위 1항에서 필자가 옛 강경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쓴 까닭은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입국지점으로 왜 강경을 택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김대건 신부가 이러한 강경에 대해서 미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해로부터 용이하게 선박이 드나들 수 있었던 강경이었기 때문에 ‘라파엘호’가 1845년10월12일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 필자가 언급할 것인데, 입국 후에 해야 할 일을 위해서도(다 부서진 라파엘호의 폐선 후 새로 라파엘2호를 장만하기 위해서도)22) 항구시장 강경을 김대건 신부는 염두에 두고 그곳을 향해서 항로변경을 했다고 봐야 한다. 주교님의 명령에 따라서 향후 추가로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선박을 새로 마련해야 하는데, 그 적합지가 바로 수많은 선박이 드나드는 큰 항구 강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가 입국항로를 금강하류로 변경하고 강경을 향하여 들어온 것은 우연히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풍랑을 피하거나 또는 어디인지 모르는 상태로 우연히 ‘갈대 우거진 한적한 곳’을 만나서 배를 댈 정도로 어리석은 김대건이 아니었다. 서해에서 금강하류를 통하여 조선 반도의 내륙 깊숙이 운항하여 들어올 수 있음을 김대건 신부는 미리 숙지했었던 것이다. 더욱 김대건 신부는 강경에 신자들이 비밀리 거주하고 있다는 것도 미리 파악해 두었었다.23) 그러므로 도착 직전에 그 신자들과 미리 내통했다는 사실24)은 40여 일간의 도전적인 항해의 도착지로 강경을 선택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20) 이철성 교수의 같은 논문 7-8쪽 참조.
21) 이철성 교수의 같은 논문 7쪽에서 인용.
22) 1846년 체포된 김대건 신부가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던 중에, 강경 도착 후(1845년10월12일 이후) 구순오 집에서 머물면서 임성룡을 시켜 ‘라파엘2호’를 마련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실토하였다 : “저는 교우를 만나보고자 작년 8월에 이재용과 임성룡과 함께 은진 구순오의 집에 가서 머물렀는데, 임가가 배를 사서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왔으므로 호서의 산천을 역력히 기억하여(…중략)”(일성록, 丙午 윤5월3일 김대건 신부의 15번째 포도청 진술 중 일부).
23) 김대건 신부는 강경으로의 입국 이전에 이미 부제 시절 1844년 말에 만주 육로를 통하여 입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던 1845년 상반기에 강경 거주 신자들과 교류하였었다. 이를 확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김대건 신부 자신의 진술이다.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체포되고 포도청 문초를 받던 중에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 “은진(恩津)의 구순오(具順五)는 제가 교우로서 일찍이 친하게 알았는데, 장사를 널리 벌려 집안이 자못 풍족하였으므로 제가 약간의 돈을 구가(具家)에게 맡겨두고(…중략)”(일성록, 丙午5월30일 김대건 신부의 11번째 포도청 진술 중 일부).
그리고 더욱 몇 달 전에 서울에서 11명의 신자들과 식량 등 많은 물건을 싣고 출항하던 선박(라파엘호)을 한강 나루(마포)에서 수상쩍게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김대건 신부(당시 부제)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25) 그 수상한 배가 장기간 돌아오지 않다가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나타나면 의혹의 대상이 될 것임을 김대건 신부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귀국항로를 금강하류로 변경하여 강경에 도착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의 한강에서는 오고가는 선박들이 삼엄한 조사를 받고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페레올(J. Ferréol) 주교가 서한에서 아래와 같이 상세히 기록하였다. 26)그 서한의 일부를 아래와 같이 읽어 보기로 한다.
“(…전략) 우리가 서울로 바로 갔더라면 아마 붙잡혔을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이 나라 남쪽에 영국배가 한 척 나타난 것으로 인하여 조정은 공포에 쌓여 있었고, 서울 주변을 감시하고 강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아주 세밀하고 엄하게 조사하였습니다. 우리 배가 오랫동안 떠나가 있은 탓으로 그 배가 떠나는 것을 본 사람들의 마음에는 의심이 일어났었으니, 그 때에 식량을 보통과 달리 장만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배가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도착하면 천만 가지 말썽이 일어났을 것인데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면하게 하여 주셨습니다.(…중략) 우리는 계획을 바꾸어 남도(南道) 북쪽의 내륙 60리 되는 조그만 강을 끼고 있는 강경(江景)에 정박해야 할 것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얼마 전에 교회에 들어온 신입교우가 몇 집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경계를 하면서 15일 동안을 항해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중략) 우리는 종선(從船)을 뭍에 보내서 길을 묻고는 하였습니다. 마침내 10월12일 우리는 포구(浦口)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에 닻을 내렸습니다.(…이하중략)”
24) 제주도 표착 후 서해 연안을 힘겹게 항해하여 올라오던 라파엘호가 서울로 입국하기 위해 한강으로까지 계속 운항하기에는 너무 형편없이 파손된 상태였고, 발각될 위험성 때문에, 목적지를 강경으로 변경한 김대건 신부는 금강하류로 들어오면서 하선하기 이틀 전에 승선인 중 하나를 육지로 보내서 강경에 살고 있는 교우들에게 알리고 맞이할 준비를 당부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편지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강경에 거주하는 신자들과 내통할 수 있는 루트를 김대건 신부가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더욱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서양인 모습을 효율적으로 감추고 행동할 수 있도록 상복 등을 미리 준비시켰다는 것은 정작 라파엘호의 접안지점에 대해서도 강경의 신자들에게 숙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어둠을 틈타서 그 정박지점을 정확히 찾아왔던 것이다. 이런 추정에 의하면 그 정박지점의 안전성에 대해서 신자들과 김 신부 상호간에 협의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선지점과 잠입해 들어갈 곳(신자들의 집)의 사이가 최단거리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김대건 신부가 치밀하게 정박지점을 정해두었음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24) 그해 4월30일(음력 3월24일)에 한강 마포에서 출항했다.
26) 신임 조선 교구장(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비밀리 입국하기 위해서, 즉 교구장 주교의 부임을 성취하기 위해서, 서해 왕복운항을 감행한 김대건 신부였다. 그의 선박은 한강에서 중국을 향해 출항하던 때(1845년4월30일)에 나름대로 위험천만한 장거리 운항을 위해 식량 등 철저한 준비를 하여 선적하고 한강 마포(麻浦)에서 서해(西海)로 나갔던 것이다. 그 선박의 형세를 마포나루에서 수상쩍게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박이 6개월 후 형편없이 파손된 상태로 마포나루에 돌아온다면 사람들의 시선에 어찌 여겨질 것인가? 그 선박이 거친 폭풍우(아마 태풍)에 시달려서 파손되고 떠밀려가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서해의 여러 섬들 사이로 15일 동안 어렵사리 항해하여 한강이 아닌 금강의 강경포에 1845년10월12일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을 페레올 주교가 도착 17일 후(10월29일) 강경 현지의 비밀가옥(아마 구순오의 집이 아닌 아주 가난한 집)에 머물면서 파리의 바랑(Barran) 신부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한 편지에 강경 도착시의 상황을 상세히 피력하였다.
위 페레올 주교의 서한에서 감지할 수 있는 정황을 보면, 라파엘호는 김대건(선장 겸 항해사) 신부의 의도적인 결단에 의해 항로를 금강하류로 변경하여 강경포의 어느 지점을 미리 정해놓고 용의주도한 잠입접안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한 의도적인 경로(물길)를 택하여 조그만 강을 끼고 있는 강경(江景)의 포구(浦口)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에 닻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외딴 곳’은 강경의 어디인가?
3.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닻을 내린 강경의 ‘외딴 곳’에 대한 추정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대건 신부는 배타고 오다가 숨어들기 위해서 우연히 ‘갈대 우거진 한적한 곳’으로 찾아들 정도로 무기력하게 요행에 운명을 맡긴 분이 아니다. 그는 작정하고 접안지점을 향했다. 발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선 후의 안전한 이동과 향후 작전을 위해서 내통해두었던 협력자들(강경 신자들)과 약속한 ‘외딴 곳’을 향해서 김대건 신부는 라파엘호의 조타기(操舵機)를 굳은 의지로 손에 잡고 나아갔던 선장이다. 그 김대건 선장이 접근해갔던 그곳, 강경의 그 ‘외딴 곳’을 밝혀내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서울에서 중국까지 그리고 중국에서 강경까지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동행했던 최 베드로가 그 도착지를 ‘강경이 황산 동네’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는 1886년(41년 후)에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조사 중27) 그렇게 증언하였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페레올(J. Ferréol) 주교와 다블뤼(A. Daveluy) 신부의 서신에는 당시 ‘강경(강경이)’라는 지명만을 적시했다. 페레올 주교는 강경에 도착한 후 1845년10월29일(도착 후 17일 만에) 위에 제시한 서신을 작성하였는데, 도착지 강경(江景)을 프랑스어 표기로 ‘Kang-kien-in’라 썼다.28) ‘강경이’를 이렇게 쓴 것 같다. 그리고 다블뤼 신부는 신자들의 은둔지 ‘공동’에서 29) 10월25일 작성한 편지에 “10월12일에 우리는 충청도 강경에 도착했습니다.”고 기록하였다.
27)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조사 수속록, 100회차(1886.11.3.)
28) 페레올 주교의 1845년10월29일자 강경 발 서한 중 ‘강경’표기 원문:“Nous décidâmes qu’il fallait modifier notre plan, et aller mouiller au port de Kang-kien-in, situé au nord de la province méridionale, dans une petite rivière, à six lieues dans l’intérieur.” 강경이의 항구에(au port)에 정박하기로(mouiller) 했다는 내용이 선명하다. 그 항구는 작은 강(dans une petite rivière)에 있다면서 페레올 주교는 강경을 ‘항구’로 인식하였는데, 이 서한의 말미에 발신일자 앞의 발신지의 표기에는 ‘강경이’라고 씌어있다. “Kang-kien-i, dans la province méridionale de la Corée”
29) 강경 도착 다음날에 다블뤼 신부가 신자의 안내로 아홉 시간 걸어서 ‘공동’이라는 신자촌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프랑스 파리의 바랑(Jean Barran)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10월25일에 작성했다. 조선어를 익히면서 사목을 시작한 그곳은 서울에서 박해를 피해 이주한 일곱 가정의 30여명 신자들이 숨어살던 산골마을이었다. 그곳은 현 부여군의 은산면 지역이다. 옛 공동면 소재지인 금공리의 ‘귓골’, 또는 현 은산면 가곡2리의 옛 이름 ‘옥가실’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옥가실’을 현 부여군 외산면 수신리의 성태산 깊은 계곡 ‘옥가실’과 혼동하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현 부여군 외산면은 조선시대에 홍산현이었다. 병인박해에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한 임 아나타시아와 김 바르바라 등이 숨어살던 ‘홍산 옥가실’이었다. 때문에 ‘공동 옥가실’과 혼동하는 추정이 있다. 그러나 다블뤼 신부가 숨어 지내다가 서한을 쓰고 그 발신지를 표기한 ‘공동(면)’은 당시 홍산현이 아니다. 다블뤼 신부는 그곳 형세에 대해서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매우 호젓한 곳”이라고 서신에 썼는데, 그 형세는 현재의 은산면 금공리와 비숫하지 않다. 다블뤼 신부가 묘사한 형세에 어울리는 곳은 가곡리의 ‘옥가실’이다. 강경에서 아홉 시간 걸어서 도착했다고 했는데, 그 정도 걸렸을 것으로 필자도 동의한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의 도착지를 증언하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현 나바위 성지 화산 정상에 서있는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가 그 자료이다.
▲ 나바위 화산에 1955.10,12. 건립한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
왼쪽사진 (순교비 앞쪽)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
아래쪽사진 (순교비 뒤쪽) ‘1845 10 12 밤 충남 황산포 부근에 상륙’
라파엘호가 도착한지 110년만인 1955년10월12일에 전주교구의 주최로 ‘화산성당 건립 50주년 기념 겸 김대건 신부 현양 신앙대회’가 개최된 바 있다. 그 신앙대회를 거행한 전주교구는 ‘나바위로 알려져 있는 전북 화산 교회’에 김대건 신부가 도착했다
면서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를 화산(華山)에30) 세우고 그 신앙대회 당일에 제막하였다. 그 순교비의 뒷면에 새겨놓은 김대건 신부의 약력 가운데 ‘1845 10 12 밤 충남 황산포 부근에 상륙’이라 새겨져 있다. 위 사진의 김대건 신부 순교비 뒷면에서 이 글을 확인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나바위(화산) 성당 도착을 기념한 행사에서 ‘충남 황산포 부근에 상륙’을 기념비에 새긴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김대건 신부 순교비에 새겨져 있는 ‘충남 황산포 부근’과 1886년에 증언한 최 베드로의 ‘강경이 황산 동네’라는 증언과 페레올 주교의 ‘강경 항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31) 이라는 도착지 기록을 우리는 어떤 연관성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바위로 알려져 있는 전북 화산 교회’에 김대건 신부가 도착하였다고 1955년10월12일 전주교구의 신앙대회가 천명한 바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래서 우선 ‘강경의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과 ‘강경이 황산 동네’와 ‘충남 황산포 부근’은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여기서 ‘황산 동네’와 ‘황산포 부근’의 공통된 지명표기는 ‘황산’이다. 그리고 ‘강경이 황산’과 ‘강경 포구’라는 표기의 ‘강경’도 공통된 지명표기이다. 그렇다면 ‘강경’과 ‘황산’은 상호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는 지명이다.32) 이어서 강경의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과 ‘황산포 부근’은 위치에 대한 근사적(近似的) 표현이다. 그런데 ‘강경의 포구’와 ‘황산’은 사실상 강경(江景)의 일원(一圓) 즉 한 지역(一帶)에 속한다. 강경의 포구와 황산은 한 지역 안에 있다는 것이다.
30) 현재의 ‘나바위 성당’은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번지’에 소재한다. 1899년부터 자리 잡은 ‘화산리’의 그 성당은 소재지의 명칭에 따라서 ‘화산 성당’이라 공식적으로 일컬어지다가 1989년부터 나바위 성당’이라 하고 있다. 현 나바위 성당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이 성당은 한때 ‘화산성당’이라고 불렀으나 1989년부터 본래이름대로 부르고 있다.”고 씌어있다. 본격적으로 ‘성지’로 부각되면서 ‘나바위 성당’이라 하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금강변의 그 동산을 ‘화산(華山)’이라 했다는데, 이 동산의 명칭에 따라 지어진 동리명이 ‘화산리’이다. 그러나 ‘나바위’라는 명칭은 본래 조선조에 ‘나암창(羅巖倉)’이라는 세창(稅倉)이 설치되었던 ‘나암포(羅巖浦)’와 연관성이 있다. 조정에 올라가야 할 세곡(稅穀)을 운반할 조운선(漕運船)이 드나들 수 있었던 포구지점을 ‘나암포(羅巖浦)’라 했던 그곳은 조선조의 자료에 ‘화산’의 위치와 연관성이 없다. ‘화산’의 바로 아래에 어느 때까지 선박이 접안할 수 있었는지는 따로 규명해야 한다. 화산 아래 금강변은 현재 광활한 농경지로 변해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조선총독부가 강경 일대의 강안(江岸) 제방축조를 하고 인정지(認定地)로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나암포(羅巖浦)라는 곳은 조선조 1790년대에 이미 포구 구실을 상실할 정도로 강변에서 멀어진 곳으로 지형이 바뀌어 있었다. 즉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도착하던 1845년보다 50-60년 전에 이미 포구(浦口)로서는 기능이 상실된 곳이 ‘나암포’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아래에 소개할 조선조 후기 관변문헌을 제시하여 따로 설명한다.
31) 페레올 주교의 1845년10월29일자서한 중 “항구에서 떨어진 외딴곳에 닻을 내렸다.”라고 쓴 원문: “Enfin le 12 octobre, nous jetâmes l’ancre à distance du port, dans un lieu isolé.”
32) 강경포와 황산포를 한 지역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위 1항에서 설명하였지만, 우리가 더욱 주시해야할 사항은 ‘포구(浦口)’에 대한 해석이다. ‘포구’란 선박이 출입하는 어귀를 뜻한다. 즉 ‘포(浦)’의 출입구(出入口)이다. 그런데 금강 본류로부터 지류에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이면서 그 지류의 물길 따라 입구에서부터 바로 형성된 것이 강경포(江景浦)이고 이어서 물길을 더 거슬러 들어간 곳에 형성된 것이 황산포(黃山浦)이다. 그러므로 2개 ‘포(浦)’의 어귀(입구)는 하나, 즉 ‘강경포구(江景浦口)’ 하나이다. 이 강경포구를 통하여 황산포에 이르기 때문에 ‘강경 황산포’라 일컬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이라는 페레올 주교의 서술은 최 베드로의 ‘강경이 황산 동네’라는 증언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바위 화산의 순교비 뒷면 ‘충남 황산포 부근’과 부합한다.
33) 기록된 역사의 행간(생략된 내용)에 대한 추정은 합리성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34)공동에서 1845.10.25. Barran 신부에게 쓴 서한 중.
35) 강경포구를 ‘강경항(江景港)’이라고 흔히 일컬었다. 금강의 수운(水運)과 서해해운(海運)을 이어주는 결절점이었던 강경을 지리36) 학에서 일컬어 수륙간중계항(水陸間中繼港)이라 하여 흔히 해항(海港)으로 보았음을 위 1항에서 살펴보았다.
위 같은 서한 중.
그 하나의 지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을 ‘부근’이라 할 수 있다. 그 ‘약간 떨어진 곳’을 ‘외딴 곳’이라 한 것이다. 그 ‘약간 떨어진 외딴 곳’과 ‘부근’을 강경포구에서 직선거리 2-3㎞ 떨어진 곳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2-3㎞는 매우 먼 거리이다. 강경포구에서 화산(華山)의 ‘나바위’는 약간 떨어진 거리라 할 수 없는 2-3㎞이다. 네이버지도(Map Naver)에서 거리 3㎞, 도보 시간 44분으로 측정된다. 그러한 거리를 1845년 10월12일 밤 라파엘호 하선 후 14명이 이동했다는 것을 쉬 납득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강경이 황산 동네’라는 최 베드로의 증언과 ‘충남 황산포 부근’이라는 나바위 화산의 순교비의 기록이 적시하는 지점을 페레올 주교의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이라 보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황산 동네’는 어디이며, ‘황산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가 말한 “강경에 정박하기로 결정한 그곳,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
4. 라파엘호의 입항과 접안 후 하선까지의 경위를 합리적으로 추정해야 한다.33)
앞에서 보았듯이 강경에 다수의 신자들이 비밀리 거주하고 있음을 미리 파악해두었던 김대건 신부는 라파엘호의 선장 겸 항해사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금강하류의 물때를 잘 맞추어서 항해하였을 것이다. 그 금강하류와 강경포구 사이에서는 선박들이 물때를 잘 알고 운항해야 한다. 서해의 조수간만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그 물때를 맞추어서 선박을 소항(溯行 · 강을 거슬러 운항)하는 것이 배꾼들의 기본적인 운항요령(運航術)이었다. 그런데 물때가 아닌 시간에 홀로 라파엘호가 금강하류를 소항한다면 어찌되었겠는가? 심하게 손상된 라파엘호가 그랬더라면 금강하구(河口)에서 강경까지 올라가기 어려웠을 것이고, 더욱 “물때도 아닌데 저 배는 왜 무리한 운항을 하고 있는가?”하고 하안주변의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래서 김대건 항해사는 물때를 맞추어 소항하는 많은 선박들 틈에서 의심받지 않을 만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소항하는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강경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합리적으로) 상상해본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항해술(航海術)과 기지(機智)로 강경포구에 무사히 입항한 라파엘호의 접안(정박) 시간에 대해서는 필자의 상상에 앞서 다블뤼 신부의 기록이 확인해준다. 입항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블뤼 신부는 서한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분명히 남겼다.
“(…전략) 항구로 진입하는 길에는 암초가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암초들이 있는 곳에는 물속에 장대를 꽂아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우리 선원들은 매우 노련했고 암초를 피해가려는 노력을 하다가 급류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아주 세게 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하게 암초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고함을 쳤습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신호 장대를 밀치고 암초 위를 통과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만조였기 때문에 우리는 항구에 도착했습니다.(…이하생략)” 34)
이렇게 라파엘호는 10월12일 강경의 만조(滿潮)시간대에 항구(포구)에 도착했다. 그런 라파엘호는 이어서 물길을 따라 ‘외딴 곳’을 찾아 접근하여 정박하고 하선준비를 하였을 것이다. 다블뤼 신부는 같은 서한에 그 하선시각에 대해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다블뤼 신부의 이러한 기록으로 라파엘호가 강경항(江景港)35) 에 입항할 때의 정황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하선시간을 명시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상하이를 출발한 지 6주 만인 10월12일, 일요일 저녁 8시에 배에서 내렸습니다.”36)
그 정황기록의 핵심은 이렇다. 즉 만조 시에 강경항(江景港)에 입항했고, 오후 8시에 하선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입항에서 하선까지의 시간에 강경의 수로(水路)가 어떠했는지를 짚어보아야 한다. 이런 정황파악에 있어서 1845년10월12일이 음력으로 9월12일이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날의 간만(干滿) 시간과 물높이를 추정해서 정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력 12일의 간만 차이는 3물이다. 그리고 라파엘호가 정박한 후 하선했다는 시간이 오후 8시이므로, 그 하선시간에 물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항구에 도착한 때가 다행스럽게도 만조였다는 것과 10월12일 저녁 8시에 하선했다는 다블뤼 신부의 이러한 증언이 사실과 부합한 것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즉 1845년의 10월12일(음력9월12일) 금강하류의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시간대(時間帶)를 정확히 알아보아야 한다. 175년 전의 물때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타임닷컴(www.badatime.com)에서 「서해안 물때표」를 175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필자의 조회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서해안 물때표」를 참고하여 1845년 음력9월12일(양력10월12일)의 서해 조수간만의 시간대를 짐작해보려 한다. 175년 전의 달(月)과 지구(地球)의 인력(引力)관계는 오늘날에도 변함없기때문이다. 다만 우리 지구상에서 금강하류와 강경의 상황은 오늘날 많이 달라져있다. 1990년 축조한 금강하굿둑(錦江河口堰) 때문에 서해로부터 강경에 선박운항이 불가능해진 오늘의 달라진 상황이다. 하지만 금강하굿둑이 없다면 오늘의 강경포구는 175년 전과같이 서해 조수간만의 영향을 직접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강하굿둑 밖의 서해와 금강하구 접점인 장항(長港)의 물때표를 아래와 같이 관찰해보았다. 올해(2020년) 음력9월12일 전후 며칠간 장항 해안의 물때는 아래와 같다.
▲ 도표2 : 2020년 음력 9월 10일-15일 충남 장항 해안의 물때표
위 도표에서 물높이의 숫자는 평균해수면보다 높거나 낮은 ㎝를 나타낸다. 그리고 ‘+’ 혹 ‘-’의 표시가 붙은 숫자는 그 앞의 만조나 간조시의 물높이와의 차이를 ㎝로 나타낸 것이다. 이 도표2에서 볼 수 있는 금년(2020) 음력9월12일 장항 해안의 조수 3물의 물높이는 만조586-간조159-만조579-간조155이다. 간만(干滿)의 시각을 보면 만조01:19-간조08:05-만조13:42-간조20:21이다. 음력12일은 3물이므로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물 흐름이 매우 안정적(잔잔한)인 날이다. 사리 때인 보름(음력15일)에서 19일까지는 간만의 물 흐름이 거세고 폭이 넓다. 그러나 음력12일의 3물에는 출어하기에 알맞은 물때인 것이다. 위와 같은 음력 12일을 기준으로 하는 전후 며칠간의 물때표와 더불어 매년 9월12일(음력)의 물때는 어떠한가를 지난 10년간 장항의 해안 물때표로 아래와 같이 살펴볼 수 있다.
▲ 도표3 : 2020-2010년 음력 9월 12일 충남 장항 해안의 물때표
위 도표3에서 조수간만의 시간대가 10년간에 대략 1시간30분 정도의 시간차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음력9월12일은 항상 3물이고, 물높이에 있어서 큰 격차가 없다. 여하튼 음력9월12일은 배를 움직이기에 적합한 물때이다. 1845년의 9월12일(양력10월12일)에도 역시(다블뤼 신부가 기록했듯이 “바람이 아주 세게 불지 않았기 때문에”) 배를 움직이기에 적합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이날 항구(강경포구)로 진입할 때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장대를 꽂아 표시한 수로(水路)를 따라서 라파엘호를 움직이도록 선원들을 지휘했음을 다블뤼 신부의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선원들이 노련하게 암초를 피해가다가 그만 급류에 휘말려서 암초에 걸터앉게 된 아찔했던 순간을 다블뤼 신부가 기록하고 있다. 그 순간 기도했다는 말을 덧붙이는 다블뤼 신부는 선원들이 장대를 밀치고 암초를 벗어났다면서 다행히 만조였기 때문에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저녁 8시에 하선했다면서, 상하이에서 출항하여 그 험난하고 길었던(6주간) 라파엘호의 운항기록을 맺는다.
이렇게 강경 입항의 정황을 살펴본 우리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왜 저녁 8시에 하선했는지를 합리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주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어두워진 시간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 저녁 8시에 하선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위 도표2-3의 ‘물때표’에서 짐작할 수 있다. 금강하구(장항) 해안의 2020년 음력9월12일 오후 만조시간은 오후 1시42분이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의 물때표를 살펴보면 오후 만조는 대략 오후 12시20분대에서 1시40분대에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175년 전의 그날에도 점심시간을 지나면서 금강하류는 만조였다. 그 만조란 3물의 물높이와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금강하류의 조수(潮水)를 잘 소항하여 라파엘호가 항구(강경포구)에 들어오다가 급류지점에서 순간 실수를 하였지만 수로표지 장대를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했다고 다블뤼 신부가 증언하고 있다.
그렇게 만조 때에 무사히 입항한 라파엘호에서 일행이 하선한 시간을 저녁 8시라고 다블뤼 신부가 기록했다. 그 하선시간을 콕 집어서 기록한 다블뤼 신부의 뜻을 잘 읽어야 한다. 항구(강경항)에 입항한 라파엘호가 그다음에 어디에 정박했는가를 추정하자면, 페레올 주교가 기록한 ‘항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동해간 경로를 앞의 1항에서 설명한 강경의 ㄹ자형 사행곡류를 더듬어 올라갔다(소행했다)고 필자는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최 베드로가 증언한 ‘강경이 황산 동네’의 천변(川邊)에 정박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외딴 곳-황산 동네’에서 라파엘호는 즉시 하선하지 않고 기다려야 했다. 외국인 2명과 다른 1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게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지만, 동시에 물이 가라앉아야 하선할 수가 있다. 그래서 하선시간이 저녁 8시였던 것이다. 즉 간조 때에 하선해야 했다. 물이 빠지면 강안(江岸)의 둔덕에 배가 걸터앉게 되어 정박한 배에서 사람이 내릴 수 있다. 그 ‘외딴 곳’의 둔덕에 마중 나온 강경신자들이 그래서 저녁 8시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업어서 내려드릴 수가 있었다. 그래야만 그 일대 습지를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와 미리 약속한 그 저녁 8시에 강경신자들이 그 약속지점(외딴 곳)의 둔덕으로 마중 나왔던 것이다. 다블뤼 신부의 말대로 ‘노련한’ 선장인 김대건 신부는 이렇게 용의주도하게 라파엘호를 약속한 지점에 접안했고 아주 알맞게 어두워진 간조시의 하선작업을 무사히 마쳤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접안과 하선시의 안전성을 우연히 ‘갈대 우거진 나바위 강가’에서 찾은 게 아니다. 강경신자들과 함께한 합동작전으로 그 ‘외딴 곳’에서 ‘저녁 8시’에 용의주도하게 상륙입국을 완료했던 김대건 선장이었다. 그리고 더욱 신자(구순오)의 집에까지 이동하려면 최소한의 짧은 시간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어둠속에서 질퍽거리는 길을 가다가 물에 빠질 수도 있는 먼 거리를 일행이 걷다가는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하선과 이동을 고려하여 라파엘호가 접안한 곳이 ‘황산 동네’였던 것이다. 그러한 안전지점을 우연히(비합리적 추정의 표현) ‘갈대 우거진 곳’에서 찾았던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가장 적합한 곳을 선택한 김대건 신부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 된다.
다시 말하면, 하안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만조 때를 맞추어 입항하고 물이 빠지는 간조 때에 하선하도록 진행했던 김대건 신부이다. 그는 매우 유능한 항해사이자 대범한 기지를 갖춘 선장이라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가 입항-접안 시간을 정확이 맞추었다는 것을 다블뤼 신부가 서한에 기록으로 남겼다. ‘만조에 입항-저녁 8시(간조)에 하선’했다고! 강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물때와 장소를 잘 알고 있는 신자들과 미리 약속해두었던 김대건 선장이 그렇게 일행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러한 선장이 ‘번잡한 강경포구를 피하여 갈대 우거진 나바위의 한적한 곳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배를 대었다’는 추정37)은, 한강에서 상하이까지 그리고 상하이에서 또 6주간 풍랑을 헤치고 금강하류를 찾아 운항한 김대건 선장신부를 그저 우연(偶然)에 의지하여 무모하게 행동한 사람으로 폄훼하는 것이다.
37) 이런 추정은 나바위 화산 아래에 라파엘호가 정박했다고 근거 없이 말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다.
5. ‘외딴 곳’이라는 그 ‘황산 동네’는 황산리(黃山里)이다.
김대건 신부가 강경의 신자들과 미리 약속해둔 라파엘호의 접안지점, 그 ‘외딴 곳’이라는 지점을 규명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그곳이 저녁 8시에 하선한 곳이기 때문이다.
라파엘호가 충청도 강경(다블뤼 신부의 말대로), 강경이(페레올 주교의 말대로), 강경이 황산 동네(최 베드로의 증언대로)에 정박하였다는데, 여하튼 그곳은 1955년 나바위 화산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에 기록된 ‘충남 황산포 부근’이라는 그곳이어야 한다. 그 1955년의 기념비보다 110년 전 1845년에 몸소 라파엘호에 의해 귀국 도착한 3인의 증언은 ‘강경(강경이)’라는 지명을 공통적으로 적시했다. 그 3인중 1인이 강경의 구체적 지명으로 ‘황산 동네’를 적시했고, 나바위 화산의 기념비는 ‘강경’에 대해서는 생략하여 ‘황산포 부근’이라면서 ‘충남’을 앞에 붙여(다블뤼 신부의 말대로 ‘충청도’를) 적시했다. 그래서 우리는 ‘강경 황산 동네’와 ‘충남 황산포’를 찾아내어야 한다.
나바위 성지 화산의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는 ‘황산포’라는 구체적 지명 앞에 ‘충남’을 적시했는데, 그 황산포가 충남에 있다는 뜻이다. 그 충남에 속하는 ‘황산 동네’(최 베드로가 증언한 곳)를 ‘강경’에서 찾아내어야 한다. 그 순교비가 적시한 ‘충남 황산포’는 라파엘호가 도착하던 조선시대에 전북 여산부 북일면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화산의 순교비를 존중하면서 그 기록에 다음과 같은 괄호 속의 말이 생략되었다고 생각하여 읽을 수 있다. 즉 “(전북이었다가) 충남(이 된) 황산포에 상륙”으로 기념비를 읽을 수 있다. 위 1항에서 살펴본 바대로 도계가 변경된 사실에 따라서 이렇게 기념비를 읽을 수 있다.
도계가 변경되었다 하더라도 여하튼 ‘강경이 황산 동네’든 ‘충남 황산포’든 간에 땅덩이가 움직여서 전북에서 충남으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황산 동네’나 ‘황산포’는 예나 지금이나 지구(地球)에서 움직이지 않지만 사람들(일제총독부)에 의해 그 지도(地圖)에서 선(線·도계)이 움직였을 뿐이다. 그 선(線)을 변경한 사람들(일제총독부)은 1914년 행정개편에 의해서 한국의 수많은 지명을 임의대로 변경시켰다. 한국인들이 부르던 마을 이름이나 산천의 명칭을 총독부가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버린 곳이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서, AB라 부르던 마을과 CD라 부르던 마을을 행정적으로 통합하면서 그 2개 마을의 이름 중 한 글자씩 따다가 AC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서 통치를 했던 일제강점기의 지역명칭이 오늘날까지 전국에 허다하다.
그런데 그 일제총독부는 전북 여산군 북일면의 여러 동리(洞里)를 충남 은진군 김포면에 편입시킴으로써 도계를 변경시키더니(1912), 종래 전국적 행정개편(1914)으로 여산군은 익산군으로 병합, 은진군은 논산군으로 병합하여 통치하였다. 하지만 전북에 속하던 ‘황산리’가 충남에 속하도록 도계를 옮겨 그었는데도 그 동리 이름은 바뀌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황산리’이다. 이러한 일련의 강경 지역 역사 속에서 통합변경 된 동리가 많지만, ‘황산리’라는 동리의 명칭은, 오늘날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있는 ‘황산(黃山 · 속칭 ‘돌산’이라 부르기도 하지만)’의 이름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는 동리의 이름이다.
그 황산(黃山)의 명칭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그곳 기슭에 임리정(臨履亭)과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세워지게 된 내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에 따라 확인할 수 있다. 임리정(臨履亭)에 있는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臨履亭記碑(임리정기비)
臨履亭者在湖南礪山府黃山之麓世傳以我先祖文元公沙溪先生杖履樓息之地也亭舊一架芽棟循麓而不有先生遺濾之距先生連山之居爲四十里
임리정은 호남의 여산부 황산 자락에 있다. 세상이 전하기를 우리 선조 문원공 사계 선생께서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으시고 쉬시던 곳이다. 정자는 오래되었으나 선반이 놓여지고 기둥이 산기슭을 따라 있으니, 선생께서 남기신 거리가 없도다. 선생께서는 이곳에서 40리 연산에 계셨다.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이 여기 황산기슭(黃山之麓)에 임리정(臨履亭)을 세운 사실을 알려주는 비문이다. 황산에 세워졌기 때문에 원래 황산정(黃山亭)이라 했는데 임리정으로 명칭이 바뀐 사실에 대해서 그 현장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임이정(臨履亭)은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번지 금강가의 언덕에 자리 잡은 건물로 1626(인조4)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후학들을 가르치고자 건립하였다. 원래는 황산정(黃山亭)이라 하였으나 임리정기(臨履亭記)에 의하면 시경(詩經)의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한 것 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은 것 같이 하라)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한다.…(아래 생략)
또한 황산(黃山)의 서쪽 기슭(西麓)에 세워져 있는 죽림서원(竹林書院·舊黃山書院)의 묘정비문(廟庭碑文)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다.
竹林書院廟庭碑文 宋時烈書(죽림서원 묘정비문 송시열 쓰다)
壺山郡之西麓蜿迤而北斗恩津界臨大湖而爲黃山黃山實兩湖之會也湖之勝甲於東南境且出靜兩湖之士共立書院以奉五先生之神位或者以爲文元公固嘗杖屢於此矣
호산군의 서쪽은 산기슭이 비스듬하게 연이어 있고, 북두 은진을 경계로 큰 호수에 닿아 황산이 되었다. 황산은 실로 두 호수가 만나는 곳이요(호서 호남 만나는 곳이요), 호수의 경관은 동남지방에서 으뜸이며, 또한 고요함도 지극하다. 호서 호남의 선비들이 함께 서원을 세워 5위 선생 신위를 모셨다. 혹자는 문원공께서 실로 일찍이 (이곳에서) 자주 지팡이를 짚으셨다 한다.
위 비문은 본 서원이 건립된 황산(黃山)은 대호(大湖)에 임(臨)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황산에 건립되었기에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했는데, 후에 조정이 죽림서원(竹林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이에 대해서 현장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서원은 유현(儒賢: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을 제사 지내는 사(祠)와 양반의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로 구성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이 서원은 인조 4년(1626) 창건 당시에는 지명에 따라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으나 현종 5년(1665)에 죽림서원으로 사액(賜額:임금이 사당·서원(書院)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적은 현판을 내리는 것) 받았다. 그 후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훼절시 철폐되었으나 1946년에 다시 제단(祭壇)을 설치하였고 1965년에는 사우(祠宇)를 복원하였다. 송시열이 쓴 「죽림서원묘정비(竹林書院廟庭碑)」를 보면, 서원이 세워지게 된 유래를 설명하면서 황산(黃山)의 위치가 호서와 호남의 중간에 위치한 관계로 서원이 들어섰다고 하였다.…(아래 생략)
이렇게 죽림서원은 원래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현종실록8권의 현종5년(己未·1664년) 2월26일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있다.
황산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전라도 유생 송유광 등의 상소
양호(兩湖) 사이에 황산(黃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인이 그 황산이 바로 장생이 일찍이 왕래했던 곳이라 하여 원우(院宇)를 창건하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장생의 사승(師承)이라 하여 모시었다. 그리고 또 이이·성혼의 연원(淵源)을 찾아 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까지 함께 모셨었다. 이때 와서 전라도 여산(礪山) 유생 송유광(宋有光)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원우가 중복으로 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38)
현종개수실록10권의 현종5년(乙丑·1664년) 3월3일에는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있다.
(…전략) 중보와 두표가, 양호(兩湖) 유생들이 황산서원(黃山書院)의 사액(賜額)을 요청한 것에 대해 허락해 주라고 청하니, (…중략)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 서원에 사액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겹쳐서 설치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중략) 대신이 계달했기 때문에 윤허했는데 사리에 있어 온당치 않으니, 시행하지 말라."하였다.(이하 생략)39)
현종 후 숙종대의 실록18권의 숙종13년(辛酉·1687년) 4월14일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인 전(前) 부사(府使) 한성보(韓聖輔) 등이 송시열을 위해 상소하여(…중략) 계사년(효종4년 ·1654)7월에 송시열이 윤선거 등과 황산서원(黃山書院)에 모였을 적에 윤휴는 이단(異端)임을 극력 말하자, 윤선거가 말하기를,…(이하생략)40)
이렇듯이 황산(黃山)의 명칭에 따라서 사적(史蹟)의 명칭도 주어졌었다. 그렇다면 동리의 명칭 또한 그에 따라 주어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황산(黃山)의 명칭과 더불어 ‘황산진(黃山津)’이라 일컫는 곳이 있다. 고지도에 이 ‘황산진’이 표기된 지점을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의 정박지점과 연관시키는 견해가 있다. 2014년9월18월에 논산시 주최로 강경읍 강당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차기진 박사가 「성 김대건 신부 일행의 1845년 입국장소와 강경 유숙지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차기진 박사는 논문 중에 황산진이 표기된 지도를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8)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00면
39)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69면
40)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99면
41) 차기진, 성 김대건 신부 일행의 1845년 입국장소와 강경 유숙지 연구, 2014.9.18. 강경 학술대회논문 7-8쪽에서 해당부분을 가감 없이 옮김.
42) 류홍렬, ‘증보 한국천주교회사’(가톨릭출판사1975.8.15.)에서 이 같은 혼동을 볼 수 있다. 그 상권(上卷) 462쪽 [김 대건들의 입국]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라파엘 호는 (…중략) 전라도의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리어 전라도와 충청도의 사이에 있는 금강(錦江)으로 접어 들어간 후 60리쯤을 올라가서 은진군(恩津郡) 강경리(江景里) 나바위(羅岩)라는 조그만 교우촌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이 서술에서 류홍렬은 나바위(나암)를 (충청도의) ‘은진군 강경리’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나바위(羅岩)’라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은진군(현재의 충청도 논산시)일 수가 없다.
(…전략)“현재의 강경읍 황산리는 본래 전라도 여산부(礪山府) 북일면에 속해 있다가 고종 32년(1895) 충청도 은진군 김포면(金浦面)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 지방도>에도 황산리는 은진군 지도가 아니라 여산부 지도에 나타난다. 또 1872년의 여산부 지도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 중엽의 <비변사인방안지도> 중 ‘호남 여산부 지도’를 함께 살펴보면, 이곳 황산의 남서쪽에 있던 죽림서원(竹林書院, 일명 황산서원, 현 강경읍 금백로 20)과 팔괘정(八卦亭, 현 황산리 86), 임리정(臨履亭, 현 금백로 20-8) 아래에 진선(津船)이 그려져 있다. 이 진선이 바로 황산리에서 부여 임천으로 건너가는 배다리[舟橋] 즉 옛 황산포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이곳 황산포를 ‘은진군 강경리 나바위’ 혹은 ‘황산포 나바위’, ‘화산(나바위) 성당 아래’로 볼 수 있을까? 앞에서 제시한 지도들을 보면 현재의 전북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羅岩]는 1845년 당시 전라도 여산부 북일면 나암리에 속해 있었고, 황산포는 북일면 황산리에 있었다. 현재의 강경 지역에도 나바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며, 혹 강경 지역에 또 다른 나바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김대건 신부 일행의 입국 장소와 관련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기존 기록에 나오는 은진군 강경리 나바위도 결국에는 전라도의 옛 북일면 황산리가 아니라 북일면 나암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64년경에 편찬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誌)를 보면, 나암리의 나암포(羅岩浦)에는 읍창과 나암창이 있었다. 1872년의 여산부 지도에도 나암리 아래에 세창(稅倉)과 사창(社倉)이 그려져 있다. 현 지도상에서 볼 때, 이곳 나암포(나암리)와 강경읍 황산포(황산리) 사이는 직선거리로 2km 정도가 떨어져 있다. 따라서 황산포와 나암포는 동일 장소가 될 수 없으며, 강경 황산포를 강경리 나바위 혹은 황산포 나바위, 나바위 성당 아래로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이하생략)”41)
위 차기진 박사의 언급 중에, “황산포와 나암포는 동일 장소가 될 수 없으며, 강경 황산포를 강경리 나바위 성당 아래로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는 말은 맞는 지적이다. 차기진 박사가 지적한 그러한 혼동의 대표적인 예는 류홍렬 박사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아래 주를 참고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차기진 박사의 언급 중에 필자가 지적하여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있다. 전라도 여산부 황산리가 충청도 은진군 김포면에 속하게 된 도계변경을 고종32년(1895)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차기진 박사가 잘못 알고 말하는 것이다. 1912년 일제총독부에 의해 도계가 변경되었음을 필자가 앞에 밝혔다.
그리고 차기진 박사는 2개 지도에 그려져 있는 진선(津船)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배다리(舟橋)로써 황산포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진선이 바로 황산리에서 부여 임천으로 건너가는 배다리[舟橋]”라 말하고 있는 이것 역시 차기진 박사가 잘못 알고 있다. 진선(津船)은 ‘주교(舟橋)’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진선(津船)은 ‘나룻배’이다. 차기진 박사가 말하는 주교(舟橋)는 다른 말로 ‘부교(浮橋)’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운항선박이 아니다. 물위에 띄워서 고정시킨 배를 ‘배다리’라 하는데 그게 주교(舟橋) 또는 부교(浮橋)이다.
위 2개 지도에 진선(津船)과 진(津)의 표시는 바로 황산리에서 부여 임천으로 건너가는 나룻배를 띄우던 곳이었기 때문에 진(津·나루)이라 할 수 있다. 즉 나룻배가 접안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차기진 박사가 말하는 “황산리에서 부여 임천으로 건너가는 배다리”는 역사상 여기 황산 앞 금강에 설치된 일이 전혀 없다. 다만 1990년에 현대식 콘크리트 ‘황산대교’가 건설되었을 뿐이다.
여하튼 진선(津船)은 나룻배(일종의 바지선)다. 강경에서 건너편 부여군(옛 임천군)의 세도면으로 오갈 수 있는 나룻배(津船)를 이 지점에서 운항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1872년의 여산부 지도에 표기되어있는 것이다. 그 진선(津船) 표기의 지점에 도로표기가 있고 강 건너편에 또한 도로 표기가 있다. 좌우강안(左右江岸)의 도로를 연결해주기 위한 도강(渡江) 선박이 나룻배 즉 진선이었다.
그러한 나룻배(渡江船舶)를 띄우던 진(津)은 금강좌우안에 여러 곳 있었다. 여산부 북일면의 랑정진(浪亭津), 임천군 세도면의 랑청진(浪淸津)이 있었고, 여산부 북일면(현 강경읍) 황산리의 황산진(黃山津)과 임천군 인의면 언고개리(言古介里)의 고성진(古城津)을 고지도에서 찾아보면, 그 진(津·나루)에 이르도록 인입도로(引入道路)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진(津)들은 도강(渡江) 나루터로써 그 기능을 하는데, 강경에 있어서는 그 나루터를 통하여 강경포(江景浦)의 여각(旅閣)까지 물자를 운반하는 선박이 연결되기도 했다. 그렇다 해서 황산의 그 나루터(황산진)가 곧 황산포는 아니다. 황산나루(黃山津)란 강경의 황산포(黃山浦)로 통하는 나루(津)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강경 주민들이 일컫는 ‘돌산’이 원래 황산(黃山)인데, 그 산의 금강변 암벽을 부수어 석재를 채취했기 때문에 돌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암벽을 깎아내고 지금은 도로가 놓여있는데, 그 암벽을 깎아내기 전에 금강 변은 장시(場市)를 이룰 만한 곳(浦)이 못되었다. 즉 물류운반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실제로 그곳 강변은 물살이 센 곳이다. 이러한 황산 북면(금강 쪽)의 경사지였던 황산진에서 현 강경읍의 대흥천(옛 ㄹ자형 샛강)에 이르는 범위가 황산리이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강경에 도착하면서 황산진에 정박할 수는 없었다. 라파엘호가 들어와서 정박하던 때(1845년)의 최 베드로가 알고 있었던 그 ‘황산 동네’는 ㄹ자형 사행곡류(현재의 강강읍 대흥천)를 인접한 ‘한적한(외딴) 곳’일 수밖에 없다.
그 ‘황산 동네’의 라파엘호 정박지점을 강경의 앞의 1항에 제시한 지도1에서 추정해본다. 그 지도위에 필자가 물길과 지역을 식별하기 쉽도록 색깔을 칠하고 여러 지점의 표기를 얹어보았다. 아래의 지도3이다.
아래 지도3은 금강과 지류들을 식별하기 쉽도록 필자가 푸른색으로 칠하고, 기호와 색깔을 넣어보았다. 옥녀봉 아래에서 여러 지류가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이 강경포구(江景浦口)이다. 그곳으로부터 오늘날 대흥천이라 부르는 ㄹ자형 사행지류를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행곡류의 물길로 들어가서 강경포와 황산포에서 떨어진 강변(황산리 맞닿은 곳)에 라파엘호 정박 추정지점을 표기했다. 그 지점에 오늘날 염천교가 놓여있다. 염천리에서 황산리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 지도3 : 板上富藏가 제작한 지도1에서
필지가 강경의 옛 물길(지류)들을 식별해볼 수 있도록 파란 색으로 칠하고,
강경포지역(분홍색), 황산포지역(노란색), 황산리(녹색)를 구분했다.
이 지도3에 분홍색을 칠한 지역이 강경포(江景浦)이고, 노란색을 칠한 지역이 황산포(黃山浦)였다. 그 황산포에서 동북쪽 작은 물길 끝머리의 표기가 구순오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황산포 내에서 ㄹ자형으로 휘돌아 흐르는 물가의 매립지가 후대(1960년대)에 현 강경성당이 세워진 곳이다. 황산진, 황산, 황산소포를 따로 표기하였다.
이 지도상의 라파엘호의 정박 추정지점을 표기한 오늘날의 강경읍 염천교 부근에서 구순오의 집(강경읍 홍교리 101-1번지)까지 직선거리 500m 가량이다. 옛적에 물길을 돌아서 갈 경우라면 600m 정도 될 것이다. 도보로 10분 이내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오늘날의 강경 시장 길을 따라서 「네이버 길 찾기」로 조회해보면 560m로 8분가량 걸을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황산리에서 현재의 나바위(화산)까지는 직선 2㎞이상의 거리이다. 화산 아래 경작지와 맞닿은 금강변을 라파엘호의 정박지점으로 추정한다면, 그곳(화산리 1949-8번지)에서 구순오의 집까지는 「네이버 길 찾기」로 조회하여 3㎞이고 도보로 44분이 소요된다.
「네이버 길 찾기」를 출력하여 아래와 같이 비교해볼 수 있다.
▲지도 4 : 황산리 염천교→구순오 집 (550m 8분소요)
▲지도 5 : 나바위 화산 아래 강변→구순오 집 (3㎞ 44분소요)
만일 라파엘호가 지도5의 현 나바위 성지 화산 아래에 정박하였다면 페레올 주교와 비밀리 입국한 14명의 사람들이 구순오의 집에까지 가기 위해서는 밤중에 금강과 여러 지류의 물을 여러 번(최소 3회 이상) 건너야 하고 주변 저습지의 진창을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네이버 길 찾기」의 44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시간이 많이 요구되는 길을 걷는다면 그만큼 발각될 위험성이 많다.
하지만 지도4의 정박 추정지점인 황산리 하천변에서 구순오의 집까지 도보 10분이내의 짧은 이동은 발각될 위험성이 그만큼 적은 것이다. 필자가 현지를 정밀답사하고 이 지도4의 출발지점으로 찍은 곳은 현 염천교인데, 여기서 구순오의 집 자리(홍교리 101-1)까지의 현 강경읍내 시가지 길을 답사한 오늘날의 구간은 옛 황산포지역이다.
염천교의 부근 좌우 하안(河岸)에는 선박의 ‘벌이줄(繫留索)’을 매는 계선주(繫船柱)가 여러 군데 있었다고 증언하는 강경주민들이 있다.43) 김대건 신부가 도착하던 시절에도 그 계선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하선 작업 후에 라파엘호를 묶어두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까? 새로 배를 장만해야 할 그가 수상한 배를 그냥 버려두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상상이다. 외딴 곳의 펄에 걸터앉은 배는 여섯 시간 후에 물이 가득 차면(다시 만조가 되면) 둥둥 떠서 주인 없이 이리저리로 떠다니면서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김대건 신부는 미리 다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은 나바위 아래 갈대밭에 정박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하튼 염천교 부근의 하안(河岸) 좌우에서 70세가량의 주민(필자가 만난 주민)이 소년시절에 계선주들을 보았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자면, 이 지류(현 대흥천)의 하상(河床)이 퇴적토로 높아지기 전에는 그곳 지점까지 선박들이 드나들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은, 그 계선주들이 있던 지역은 지류가 강경포구(江景浦口 즉 현 서창갑문)에서 깊숙이 들어온 곳으로, 강경포-황산포에서 ‘약간 떨어진 곳’ 즉 ‘외딴 곳’이었음은 앞의 지도1과 지도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곳을 라파엘호의 정박지점으로 보는 필자의 확신에 대해서 누구든 거부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할 분이 있다면 공개토론의 기회가 있기를 필자는 기다린다.
앞에 언급했듯이, 김대건 신부는 강경 지역의 지형과 주변상황 및 교우들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확보하여 ‘강경이 황산 동네’에 도착하였다. 여하튼 그곳은 오늘날 ‘황산리’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 즉 강경포구(江景浦口)에서 거슬러 들어가 물길 따라 이르는 곳이 ‘황산포(黃山浦)’의 변두리이다. 그 ‘황산 동네’란 황산의 그 배후나 그 기슭에 있는 동리라는 것을 어느 누구든 부인할 수 없다. 즉 황산(黃山 · (오늘날 강경 주민들이 ‘돌산’44) 이라고도 부르는 산)의 이름과 연관 지어 예나 지금이나 일컬어지고 있는 ‘황산리’이다. 이 황산리에 관한 추정에 합리적인 뒷받침을 제공하는 것은 황산과 황산포에 대한 조선말엽(朝鮮末葉)의 관변문헌이다. 그것을 아래 6항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6. 조선조 말엽 관변기록의 황산포(黃山浦)
앞에 보았듯이 최 베드로가 증언한 ‘강경이 황산 동네’(황산리)는 황산포 지역의 변두리이다. 그러므로 황산포에 대해서 조선조 후기의 관변 문헌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황산포가 강경포와 어떻게 구분되었는지를 위 1.2.3항에서 설명했다. 옛적의 도계에 따라 구분되면서도 현재의 강경읍내에 속하는 두 지역이었는데, 그 도계가 일제 강점초기에 변경되었으므로, 그 도계변경 직전의 기록부터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래와 같이 황산포를 찾아보기로 한다.
(1) 강경 전화교환구역 황산포(1908년)
1908년(隆熙二年) 10월6일 내각법제국관보과(內閣法制局官報課)의 관보 제4195호에 9월30일자 내각고시 제15호가 게시되었다. 이 내각고시는, 경성(京城)으로부터 전국 12개 전화교환 가입국(加入局)을 고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강경국(江景局)의 가입구역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東南方 : 上江景及 黃山浦 竝 以上 各地와 同距離 內의 地
東北方 : 虹橋村及 此와 同距離 內에 在ᄒᆞᆫ 線 江左岸 內의 地,
西南方 : 西北方 錦江 左岸 內의 地
이 내용 중 강경의 동남방(東南方)은 상강경과 황산포를 합하여 이르는 각지와 동일거리 내의 땅(上江景及 黃山浦 竝 以上 各地와 同距離 內의 地)이란, 당시 강경포의 동남동 외곽으로 현재 강경상업고등학교 지역(上江景·현 남교리)에서 염천교와 인접한 황산리에 이르는 지역이다. 현 강경읍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구역인 것이다. 이렇게 강경전화국의 교환 범위에 있어서 상강경과 한 범위로 황산포를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황산포가 현 강경읍내 지역이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43) ‘벌이줄’은 뱃머리를 강안(江岸)의 고정말뚝에 묶어두는 굵은 밧줄이다. 계류삭(繫留索)이라고도 한다. 그 벌이줄을 묶어두기 위해 땅에 박아놓은 것이 ‘계선주(繫船柱)’이다. ‘벌이목’ 또는 ‘벌이말뚝’이라고도 한다. 썩지 않는 나무 말뚝이거나 쇠말뚝이거나 돌기둥으로 된 계선주에 또는 현대식으로 콘크리트 기초에 박아놓은 쇠고리(繫船環계선환)에 벌이줄을 잡아당겨 매어서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킨다.
44) 지난날 그 황산의 강변 쪽 기슭을 깎아내어 많은 석재(石材)를 채취했기 때문에 ‘돌산’이라 불린다고 강경 주민들이 말한다. 실제로 강변 쪽의 암벽이 잘려나간 현장을 볼 수 있다.
45) 그 설명 내용의 요약 : 강경포는 당시 충남 은진현 김포면(恩津縣 金浦面)에 속하는 곳이었고, 황산포는 전북 여산부 북일면(礪山府 北一面)에 속하는 곳이었다. 도계(道界)는 ㄹ자형의 사행지류(蛇行支流)를 따라 그어져 있었다. 그 지류의 하안(河岸)을 따라서 실제로 강경포와 황산포가 근접하여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도계로 구분되는 2개 포(浦)이지만 강경(江景)의 한 지역이다. 이러한 점을 현 강경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현 강경 성당 본당 건물의 반절 부분까지 그 옛 도계가 지나는 물길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의 강경읍 시가지를 사행곡선으로 흐르던 물길(샛강)을 통하여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와 같은 선박들이 드나들 수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강경의 금강변 제방축조와 더불어 읍내 저지대 매립작업으로 지류(샛강)의 사행곡선을 변경시켜서 오늘날과 같이 변형된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46) 이 내각고시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의 명의로 포고(揭佈)되었다.
47) 괄호로 표기한 (천주교)라는 것은 본 공문에는 없는 것인데 필자가 첨가했다. 천주교 신자를 敎民이라 했다.
48) 神父를 敎士라 했는데, 이 張敎士는 베르모렐(Vermorel) 신부를 칭한 것이다. 그는 1897년 강경의 사목자로 발령 받아 부임했는데, 강경 옥녀봉 중턱에 성당 터로 50여 평을 매입한 후 더 이상 부지 매입이 어렵던 차에 동학농민혁명 때 파괴되어 염가로 내놓은 여산군 망성면 화산리(현 나바위 성당)의 땅을 매입하여 그곳에 본당을 설립하였다.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이유로 그곳에 본당을 설립한 것이 아니다. 강경에서 본당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목자가 자리 잡은 그곳(화산 나바위)에 ‘화산 성당’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2) 강경포교안사건 관련 문서(1899년)에 언급된 황산포
강경포교안사건(江景浦敎案事件·1899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제19권에 수록된 내용(法案 1046-1047호)에서 살펴볼 수 있다. 프랑스 공사(公使)가 조정의 외부(外部)에 조회(照會)하여 대신서리(外部大臣署理) 이도재(李道宰)가 사건의 발단(發端)을 통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경포에 거주하며 염상(鹽商)을 하는 조흥도(趙興道)가 (천주교의) 교민(敎民) 김치문(金致文)이 소금 외상값을 갚지 않아서(鹽價를 負次하고 報償하지 않음에), 조흥도가 누차 독촉하였던 것인데, 그 시(時)에는 (천주교)교인(敎人)은 본국의관(本國衣冠)이 불가(不可)하다하고 비록 千名이라도 타살(打殺)하기에 어렵지 않다는 등의 (천주교)敎門을 비난하는 말이 있었다. 이의 보고를 받은 장교사(張敎士 장신부)는 여산군(礪山郡) 라암 교도(羅岩敎徒) 수십 인을 보내 조흥도를 잡아서(捉하여) 주점에 묶어 가두어(繫囚하여) 상하(上下·몸 위아래)를 묶고 악형(惡刑)을 가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조흥도의 여인(旅人·보부상) 및 崔星振·尹成汝·金樂文·崔聖圭·崔一彦·趙興伊·千長玉 등이 江景 黃山浦人 千餘名과 함께 張敎士의 우소(禹所)에 난입하여 문호(門戶)를 때려 부스고(破碎하고) 교인 6명을 亂打하고 張敎士를 구박(驅迫)하여 江景浦에 이르렀다가 돌려보내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천주교 조선교구 측의 우려를 접한 프랑스 공사가 구한국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종래에는 사법적 처리로 통고하게 되었다. 그 사법심리를 담당한 한성부재판소(漢城府裁判所)의 수반판사(首班判事) 김영준(金永準)이 의정부찬정외부대신(議政府贊政外部大臣) 박제순(朴薺純)에게 올린 보고서의 사건경위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었다. 1899년8월10일자의 보고서로 올린 한성부거래안(漢城府來去案) 중 일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략)被告 金樂文 所供은 本年陰曆二月二十四日에 貿米次 黃山浦에 往ᄒᆞ얏슨즉 趙興道가 金致文과 爭鬪捉去ᄒᆞᆫ 顚末을 初不參見이오며 洞民等의 聚往作鬧ᄒᆞᆷ은 追後得聞이라ᄒᆞᆫ바(…중략)”49)
“(…전략)피고 감락문이 말하는 바는 금년 음력2월24일에 쌀을 팔려고 황산포에 갔었는데, 조흥도가 김치문과 서로 싸우고 사람을 붙잡아간 일의 소상한 내용(顚末)을 처음에는 몰랐으며, 동네사람들이 (화산리로) 몰려가서 싸운 것은 추후에 들은 바(…중략)”
위 문장은, 황산포의 상인(商人) 조흥도와 천주교신자 김치문의 싸움이 대규모 폭력대결의 발단이 된 사실에 대하여 폭력에 가담했던 피고 김락문이 공초(供招) 중에 진술한 대로 판사가 기록한 내용이다. 미곡거래 차 황산포에 갔다가 사건발단을 알게 된 김락문이 진술한 것을 요약한 부분이다. 그걸 판사가 외부대신에게 보고하는 문서 내용의 일부이다.
위의 두 기록문서에 적시된 이 황산포(黃山浦)는 당시 강경포(江景浦)와 동일한 상업 지역이었다. 이 상업지에서 토호재력가(조흥도)와 천주교 신자(김치문)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급기야 강경지역의 토호세력과 망성면 화산리의 천주교 신자들 사이의 폭력적 대립으로 확대된 사건이 강경교안(江景敎案)이다. 결국 조정의 외부(外部·외교부)와 프랑스 공사관 사이의 외교적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었던 강경교안사건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룰 여지가 없다. 이 글에서의 관심은 그 교안사건의 발단이 황산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그 황산포는 강경의 동일한 시장(市場)에 속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 황산포의 강경시장 사람들이 분개하여 대거 몰려가서 대규모 폭력사태를 일으킨 곳은 전북 망성면의 나바위 성당 소재지인 화산리(華山里)였다. 그러므로 황산포와 화산리는 동일지역일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바이다.
(3) 팔도사도삼항구일기(1885-1887년)의 황산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작성한 8도4도3항구일기(八道四都三港口日記)의 1885년6월22일자에는 제중원(濟衆院)의 의약구매에 필요한 재원 마련(財用)을 위해서 황산포구(黃山浦口)를 복구하도록 감독관(監官)을 파견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간에 황산포의 상업적 기능이 저조하던 중에 이러한 조치를 하여 어느 정도 황산포를 활성화함으로써 제중원의 약품 구매비용을 부담시키려 했다. 그에 따라 황산포구에서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강경포의 여각(旅閣) 주인이 소요(騷擾)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여각주인을 징계하게 되었다는 그해 9월10일의 기록이 나온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황산포구는 강경의 황산포를 지칭한 것이다. 황산포는강경포와 상업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리적으로 강경포와 한 물길(하천)로 연결되는 곳이 황산포였기 때문이다. 앞에 제시한 1910년 일본인 사카우에 도미구라(板上富藏)의 지도에서53) 볼 수 있듯이 사행(蛇行)으로 흐르는 한 물길의 하안(河岸)에 연이어 형성된 강경포와황산포였다.54)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강경포와 황산포는 근접한 상업지이지만, 위에 설명했듯이 전자는 충청도 은진현에, 후자는 전라도 여산부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제중원을 위한 황산포의 세금징수는 강경포와의 이해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아래 (4)항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1886-1887년에 충청감영(공주)과 전라감영(전주) 사이에도 상호 견제하는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4) 충청도와 전라도 공문철(1886-1887년)의 황산포
충청도관초(忠淸道關草)의 1886년8월4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역이 수록되어있다.
“강경과 논산은 8도의 상선이 모이는(湊會하는) 대항구(大港口)로 주민(居民) 수 천호가 선업(船業)의 재물로 살아왔는데, 십여 년 전부터 황산(黃山)이라는 소포(小浦)의 흉험(凶險)한 무리들이 선여객(船旅客:배를 통한 객주상업)에 관여하는 까닭에 강경포의 수 천호 거민들이 흩어질 지경에 이르른 바, 양도(兩道)의 감영(監營) 및 본읍(本邑)에 공문을 보내어 황산포민(黃山浦民)의 객주업(旅閣名色)을 혁파케 하고,(…중략) 강논(江景論山)의 객주(船旅閣主人) 등이 전례(前例)대로 수납(受納)토록 청원(白活)함.”
이에 대하여 전라도관초(全羅道關草)에는 다음과 같이 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도(本道) 여산(礪山) 황산포(黃山浦) 선여각(船旅閣)의 수세명색(收稅名色:거두는 각종 세금)은 본 아문(本衙門)에 부속되는데 은진관아의 강경(江鏡) 논산포(論山浦) 거주민들이 와서 소(訴)하길 황산포구(黃山浦口) 수세를 영구히 혁파해 달라 하여 공문(關)을 발하니 그 포(浦)의 감관(중앙정부에서 보낸 監官)에게 명령하여 이미 납부(成給)한 절목(節目)과 각항문적(各項文蹟)을 본 아문(本衙門:은진관아)에 수취환납(收聚還納:거두어들인 것을 되돌려줌)하고 해감관(該監官: 중앙정부에서 그곳에 보낸 監官)은 즉시 상송(上送:중앙정부로 올려 보냄)하도록 공문(關文)함.”
그리고 1886년10월20일의 전라도관초에는 지나가는 배를 황산소포(黃山小浦)에서 붙잡아 협박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그 자들을 잡아오라는 공문을 보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어서 10월30일자에는 “황산포의 선여각(船旅閣)을 폐쇄하고 강논(江景論山)의 포에서 그 역할을 하도록 전교(傳敎)한다”고 기록되어있다.57) 이에 대하여 ‘1886년 말부터 1887년에 강경포가 황산포의 세를 대신 상납토록 하고 거주민 등이 세금을 연체할 경우 강경 논산의 감관이 대납하도록 하는데 끝내 납부하지 않는 자는 체포해오도록 지시한다.’는 내용의 충청감영 공문이 관초에 철해져있다.58)
(5) 1895편찬 전라도 호남읍지(湖南邑誌)의 여산군 황산포(礪山郡 黃山浦)59)
1895년의 읍지에 여산군(礪山郡)의 세창(稅倉)과 황산포(黃山浦)를 표기한 지도가 실려 있다(아래 지도6 참조). 이 고지도에 보면 팔괘정(八卦亭)과 임리정(臨履亭)의 위쪽에 황산포(黃山浦)가 표기돼있다. 그리고 창고(倉庫)의 위치를 제시한 기록은 읍창(邑倉)과 황산창(黃山倉) 2개뿐이다. 읍창은 읍의 남쪽 기울어진 터에 있다고 씌어있고(邑倉 在邑南頹瀍), 황산창(黃山倉)은 읍 북쪽 변두리 35리에 있다고 씌어있다(黃山倉 在邑北邊三十五里). 그리고 장시(場市)는 ‘邑底市在邑西邊二里 黃山市在邑西邊三十里’로 기록되어있다. 황산시(黃山市)를 황산포라 본다면 여산읍에서의 서쪽 30리와 부합하는 것이다.
49)이 문장은 1899년(光武三年) 8월10일 한성부재판소수반판사 김영준이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올린 漢城府去來案 문서번호 通牒 제15호 중 ‘강경포사건’의 수사내용에서 피고 김락문이 미곡 거래를 위해 황산포에 갔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한 대목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김치문이 조흥도에게서 소금 외상값의 독촉을 받고 서로 거친 말이 오고갔는데, 조흥도가 천주교 신자를 모욕하는 폭언과 신체적 가해를 하자 격분한 신자들이 합세하여 폭력사태가 커지게 되고, 화산리 성당 베르모렐 신부가 개입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확대되었다. 베르모렐 신부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받은 경성의 교구청이 프랑스 공사관에 의뢰하여 조정(외교부)을 움직이게 하였다. 결국 충청도(공주)감영과 전라도(전주)감영의 군대까지 동원될 정도로 사태가 비화되었다. 강경지역사회와 화산리 천주교회 사이의 대결은 결국 교회 측에서 프랑스 공사관을 통하여 사법적 처리를 요구하여 강경포와 황산포의 주민 중 폭력주동자들이 처벌받게 된 후 종료된 사건으로써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강경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그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천주교의 입장으로서는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50) 1882년(高宗19년)에 외교(外交)와 통상(通商)을 관장하는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약칭 外衙門)을 설치하고, 군국(軍國)과 내정(內政) 일체를 장악하도록 統理軍國事務衙門(약칭 內衙門)을 설치하였다.
51) 8도(八道)는 경기도 충청도 등 전국8도, 四都는 도호부(都護府)의 소재지 강화, 개성, 수원, 광주(경기), 3항구(三港口)는 丙子修好條約(1876년) 후 개항한 부산, 원산, 제물포이다. 1885년6월22일의 ‘8도4도3항구일기’에 제중원의 재원확보를 위해 황산포의 활용 사안을 수록하고 있다.
52) 중앙정부가 임명한 포구(浦口)의 우두머리
53)위에 제시한 지도1이다. 강경포와 황산포가 한 물길로 연결되어 있음을 지도3에서 참조할 수 있다.
54) 금강의 지류가 강경포를 지나 사행(蛇行)으로 휘돌아 들어간 하안(河岸)에 황산포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물길은 후에(일제시대에) 변경되었다. 옥녀봉 아래의 서창갑문에서 염천교(鹽川橋)에 이르는 곳까지는 옛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염천교에서부터 하류구간의 예전 ㄹ자형 사행(蛇行)이 바로잡아져서 현재의 대흥교(大興橋)로 이어지고, 대흥천이라는 이름으로 호남선 철로 밑을 지나 외곽의 강경천(江景川)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옛적의 황산포(黃山浦)에 이르는 사행구간(蛇行區間)의 물길은 사라지고 현재의 강경성당 지역과 강경 하시장(下市場) 지역의 시가지가 옛 황산포이다.
55) 關草는 공문서철(公文書綴)을 뜻한다.
56) 위에 제시한 지도3에 황산소포(黃山小浦)의 위치를 필자가 표기했다. ㄹ자형으로 휘돌아가는 하안(河岸)의 황산포(黃山浦)까지 선박이 들어가기 전에 지나는 지점이다. 이곳 역시 전북 여산부에 속하여 황산포의 앞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이르기 전에 강경포 지역의 물길을 지나오는 선박들이 강경포 사람들과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관계를 전제로 하여 충청도관초와 전라도관초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57) 礪山 黃山浦 船旅閣 및 場市 收稅를 革罷하는 것으로 이미 關飭하였는데, 들으니 崔潤得, 金聖月, 金仁元, 徐學汝 등이 지나가는 배를 잡아 依舊執捉한다하니, 해당 邑과 船旅閣에 嚴飭하여 革罷케 하고, 잡는 놈이 있으면 上使하여 律에 따라 조사하고 馳報하라는 關
58) 忠淸道關草(1887.5.15)에 議政府로부터 恩津縣(강경)과 盧城縣(논산군 병합된 옛 노성현)의 해당 죄인들에 관한 지시 내용
이다.
59) 韓國地理志叢書,湖南邑誌 五卷 全羅道⓶,아세아문화사,1983의 538쪽과 541쪽에서 인용
▲ 지도6 : 1895년 호남읍지의 여산부 지도
(6) 1871편찬 전라도 호남읍지(湖南邑誌)의 여산부 나암창(礪山府 羅巖倉)
1871년의 읍지에 여산부(礪山府)의 읍창(邑倉) 나암창(羅巖倉) 사창(社倉) 등 창고 3개가 적혀있다. 읍창(邑倉)은 읍내의 남쪽변두리에 있다고 씌어있다(邑倉 在邑內南邊). 그리고 이어서 나암창(羅巖倉)이 읍 북쪽 변두리 35리에 있다고 씌어있다(羅巖倉在邑北邊三十五里). 사창에 대해서는10면에 있다고 씌어있다(社倉 在十面).
▲ 지도7 : 1871년 호남읍지의 여산부 지도
1871년의 읍지에 제시된 여산부의 위 지도7에 읍창의 표기는 없고 부내면(府內面·읍)의 변두리에 사창(司倉)이 표기되어 있다. 나암창은 부내면으로부터 멀리 북서쪽으로 북삼면(北三面)과 북일면(北一面)의 삼각점에 표기되어있는데(지도7 참조), 임리정( 臨履亭)과 팔괘정(八卦亭)의 아래 삼각점에 위치한다. 이를 보면 현 나바위와 근사적 위치라 할 수 있다. 이 고지도에서 사창(社倉)은 표기되어있지 않다.
위 (5)항과 (6)항에서 살펴본 내용 가운데 주목할 것이 있다. 1871년과 1895년의 차이점이다. 이에 대해서 아래의 7항에서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7. 나암창(羅巖倉)과 황산창(黃山倉) 그리고 황산포(黃山浦)
위 6항의 (5)-(6)에서 살펴본 내용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황산창과 나암창에 대한 혼동을 밝혀야하기 때문이다.
나암창(羅巖倉)에 대해서 1871년 읍지에는 본문과 지도에 명기되어있는 반면에 황산창의 언급과 지도의 표기가 없다. 그와는 달리 1895년 읍지의 본문에서는 나암창은 기록되지 않고 읍창(邑倉)과 황산창(黃山倉)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95년의 지도상에는 세창(稅倉)과 황산포(黃山浦)가 표기되어있다.
그런데 1895년의 본문에 기록된 황산창(黃山倉)과 1871년 나암창(羅巖倉)의 위치가 동일하게 ‘읍 북쪽 외곽35리에 있다(在邑北邊三十五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2개 읍지의 지도에서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2개의 읍지에 그려져 있는 팔괘정(八卦亭)과 임리정(臨履亭)의 위치와 창(倉)들의 위치를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2개의 읍지에서 팔괘정과 임리정의 위치가 다르게 배치되어 있는데, 그 2개 건물위치의 아래쪽에 있는 1871년의 나암창(羅巖倉)이 1895년에는 세창(稅倉)으로 표시되어 있다. 즉 1871년의 나암창은 사라지고 1895년에는 세창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1871년의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은 황산포(黃山浦)가 1895년에는 팔괘정과 임리정의 위쪽에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도상에서 ‘1871년의 나암창’이 1895년에는 ‘세창’으로 바뀐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한편 팔괘정과 임리정의 위쪽에 표기된 황산포가 이 2개 정자의 아래쪽에 있어야 할 1871년 나암창의 위치를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871년에 표기된 나암창의 위치가 현재의 나바위(옛 나암포)라면, 오늘날에도 그 위치가 변하지 않은 팔괘정과 임리정에서 2㎞ 거리이다. 그러므로 나바위(나암포)를 이름이 바뀐 황산포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황산포(黃山浦)가 1895년에 나타나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암창이 있던 위치가 황산포의 위치범위에 포함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1871년 읍지와 1895년 읍지의 본문기록과 지도표기에서 볼 수 있는 차이점에 대하여 면밀히 규명하지 않고 1871년의 나암창이 1895년의 황산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위 6항 (5)-(6)에 살펴본 기록의 나암창(羅巖倉)과 황산포(黃山浦)의 위치를 동일한 것으로 추정하여 그곳에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1845년 도착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명확한 규명 없는 추정이 ‘나바위에 김대건 신부 일행이 도착하였다’는 통설로 되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잘못된 그 통설이다.
화산은 금강 강변에 있었다. 산밑 서북쪽으로는 물이 닿았고 갈대숲이 우거졌다. 화산의 꼬리가 끝나는 지점에는 나바위(羅巖)라는 광장 같은 바위가 있었다. 그곳은 정부미를 실어 나르는 나루였고 정부미 창고가 있었는데, 이것을 나암창(羅巖倉), 또는 황산창(黃山倉)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 부근은 ‘창고라실’이라고 전해진다. 나암창이라 부르는 것은 1872년 이전이었으나 그 후에는 황산창이라 불렀다. 그런 이름은 이곳이 황산포(黃山浦)에 있기 때문이다. 이 황산포의 화산 기슭은 1845년 10월 12일 한국의 첫사제인 김대건이 9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하여 고국 땅에 첫발을 디딘 곳이다.
이러한 통설에는 김대건 신부의 1845년 도착지라는 ‘나바위’의 ‘나암창’이 어떠한 상태의 어느 곳이었는지 정확한 고증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 ‘강경에 정박하기로 결정’한 김대건 신부 일행이 “1845년 10월 12일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의 나바위 화산 밑으로 배를 대었다.”고 단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이 확증되지 않은 상황의 추정일 뿐이다. 즉, “강경에 배를 댈 수 없었던 것은 강경은 당시 한국의 3대 어시장이었으므로 번잡해서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63)는 추정이다.
이러한 추정에서처럼 김대건 신부 일행이 과연 “나바위 화산 밑으로 배를” 댈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곳에 1872년 이전에는 ‘나암창’이라 하다가 나중에는 “이곳이 황산포에 있었기 때문에” ‘황산창’이라 불렀다는데,64) 이렇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나암창(羅巖倉)이라는 창(倉)은 과연 어떤 곳에 있었던 ‘정부미 창고’였는지65)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황산포(黃山浦)와는 구분되어 ‘나암포(羅巖浦)’라는 별개의 포(浦)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면서 일컬어져야 할 창(倉)의 명칭이다. 1871년 호남읍지의 기록보다 81년 전의 문헌, 즉 1895년 호남읍지의 기록보다 105년 전의 문헌을 통하여 ‘나암포(羅巖浦)’의 존재를 아래 8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8.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14년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와 나암포(羅巖浦)
1871년 호남읍지의 기록보다 81년 전, 1790년에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윤시동(尹蓍東)이 올린 장계(조선왕조실록 정조14년庚戌7월12일)의 내용 중에 나암포(羅巖浦)에 대한 보고사항이 기록되어있다. 이 장계로써 1784년 나암포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김대건 신부의 1845년 라파엘호의 도착보다 61년 전의 사정인 것이다.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의 장계는 성당창(聖堂倉)과 군산창(群山倉)의 상황을 시찰하고 작성한 보고내용이다. “신이 고을들을 순찰하는 걸음에 고을 진영으로 길을 잡아 두 창고의 형편을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하며 군산(群山) 옥구(沃溝) 함열(咸悅) 등지의 현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 내용 중에 성당창(聖堂倉)의 형편과 관련하여 그 인근 지형의 상태를 아래와 같이 진술하고 있다.
(…전략)성당창(聖堂倉)은 함열(咸悅)에서 동북쪽으로 들어가서 산을 끼고 설치되었는데, 창고의 앞과 좌측은 평평한 육지이고 오른쪽과 뒤는 포구를 끼고 있습니다. (…중략) 그 포구의 앞으로 그 후(帿) 되는 지점에서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중간에 초등(草嶝)이 있는데, 그 한 갈래는 성당길이고 한 갈래는 임천(林川) 경계입니다. 물이 많은 곳은 넓으면서 세차고 물이 적은 곳은 고여 있으면서 완만합니다. 그러므로 초등에 조수가 오르면 점점 배 대는 곳까지 찰 것 같습니다, 조운군(漕卒)에게 물으니 그들의 말이 “이 물은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의 하류로써 용안(龍安) 완포(薍浦)의 물과 합류하여 창고 앞 배 닿는 곳으로 흘러드는데, 갑진(甲辰·1784)년 여산(礪山)의 나암포(羅岩浦)가 막히면서 임천(林川) 망포(望浦)의 물목이 터져 그 물길이 갈라져 곧바로 아래쪽의 건너편 언덕으로 쏟아지게 되고 중간의 초등이 점점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옛날의 사마도(沙麻島)입니다. 그 섬이 육지와 닿는 곳이 바로 임천 땅이며 대장에 올라있는 전답은 갑진년 이후 갯바닥이 되고 말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조수가 물러갈 때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보았으나 끝내 바람을 피하여 배를 매어둘 만한 곳을 찾지 못하였으니(…중략)
1784년에 이미 물길이 막혀버렸다는 나암포에 “조수가 물러갈 때 배를 타고 올라가 보았으나 끝내 바람을 피하여 배를 매어둘 만한 곳을 찾지 못하였”다고 관찰사의 장계는 진술하고 있다. 관찰사 윤시동은 이렇게 배를 댈 수 없는 나암포의 사정에 대하여 1790년에 보고했다. 그래서 관찰사는 이 나암포의 기능이 이미 상실되어 있으므로 그에 대한 징세(徵稅)를 재고해야한다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이러한 윤시동 관찰사의 1790년 장계에 언급된 여산(礪山)의 나암포(羅岩浦)가 오늘날의 나바위와 동일한 곳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한다. “1784년에 이미 배를 댈 수 없었다는데, 그 후 61년이 지난 1845년에 김대건 신부가 그곳에 라파엘호를 접안할 수 있었는가?”
마침말 : 나암포와 관련 없는 황산포(黃山浦)의 언저리 ‘황산 동네’
이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나암포(혹 나바위)와 황산포는 서로 다른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호남읍지에서는 나암창과 황산창의 명칭이 혼용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100년 전쯤 윤시동 관찰사가 올린 장계 내용에 따른다면, 나암포와 황산포라는 2개의 ‘포(浦)’를 혼용하거나 동일시할 수 없다.
그리고 나암포라는 곳에는 김대건 신부의 도착에 앞서 이미 61년 전에 배를 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나바위’가 1790년 관찰사의 장계에 언급된 그 ‘나암포’라면 “김대건 신부가 황산포의 나바위 화산 밑으로 배를 대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나바위’를 ‘나암포(羅巖浦)’와 동일시하면서 그곳을 ‘황산포’라 부르기도 했다는 추정은 앞에 우리가 살펴본 호남읍지에 대한 판독에서 혼동을 일으킨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명칭이 ‘황산포’라 바뀐 본래의 ‘나암포’에 접안한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는 어떠한 선박이었단 말인가 하는 반문이 제기된다. 즉 나바위를 황산포와 혼동하고 있는 오류에 더하여,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는 오늘날 해병대에서 사용하는 수륙양용전차(LVT)와 흡사한 선박이란 말인가? 하는 해괴한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나바위 성지의 화산 정상에 우뚝 서있는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를 존중하여 거기 새겨져있는 ‘충남 황산포 부근에 상륙’이라는 기록을 우리 모두는 신뢰할 수 있다. 그 ‘황산포’는 어느 곳인가? 이에 대한 규명작업을 위해서 필자는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선의의 신자들(순례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새로 부임하시는 조선교구장(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을 모셔오기 위해서 그렇게 숱한 고생을 하신 김대건 신부님께서 서울로 곧장 가지 않고 사정상 강경으로 뱃길을 돌리셨다는데, 그러면 모시고 온 주교님을 가장 안전하게 모실 수 있기 위해서 강경의 어디에 라파엘호를 정박하였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해서 위에 여러 자료를 검토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신뢰하며 이 글의 마침말로 삼는다. : “라파엘호가 정박한 곳은 ‘강경이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이라고 페레올 주교님께서 기록하신 그곳이다. ‘강경이 황산 동네’라고 최 베드로가 증언한 곳이 그곳이다. ‘충남 황산포 부근’ 그곳이 오늘날 강경읍내 ‘황산리의 샛강 언저리’라는 것을 어느 누구든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을 쓴 필자의 마침 말은 딱 한 마디이다 : 그곳은 ‘황산리’이다.
60) 韓國地理志叢書,湖南邑誌 四卷 全羅道⓵,아세아문화사,1983의 252쪽과 255쪽에서 인용
61)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Ⅰ,1998.9.20. 도서출판 빅벨, 453쪽 참조 / 이러한 추정은 한국 천주교회 모든 기관과 저술에서 정설로 굳혀져 있다.
62) 김진소, 같은 책, 453-454쪽
63) 따옴표 “…”로 인용 된 문장은 위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Ⅰ, 454쪽의 것임.
64) 1872년 이전에는 나암창이라 불리다가 후에 황산창이라 불렸다는 주장은 호남읍지 1871년과 1895년 자료를 근거로 하는 것 같다. 1871년과 1895년의 읍지에 나암창과 황산포의 위치를 ‘在邑北邊三十五里’라 명시한 것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871년의 지도에 나암창(羅巖倉)이라 표기된 반면에 1895년의 지도에는 ‘황산창’이든 ‘나암창’이든 표기된 것은 없고 황산포(黃山浦)만 표기되어 있다. 임리정(臨履亭)과 팔괘정(八卦亭)의 위치를 기준으로 보면 1871년 나암창의 위치와 1895년 황산포의 위치가 반대 위치에 표기되고 있다. 1871년 나암창의 위치에 1895년에는 세창(稅倉)이 그려져 있고 1871년의 지도에는 나암창도 황산창도 없고 황산포(黃山浦)만 표기되어있다. ‘在邑北邊三十五里’라는 거리표기가 동일하면서 지도상에서는 그와 일치하지 않은 상이한 명칭들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문헌과 지리상의 실제를 면밀히 고증하지 않고 “나암창이라 불리다가 후에 황산창이라 불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1871년과 1895년의 읍지에 포(浦)를 칭하는 ‘나암포(羅巖浦)’의 언급이 전무하다. 그러나 더욱 1871년 읍지보다 81년 전에 일컬어진 나암포에 관한 기록이 있다. 1790년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의 장계(狀啓)에 나오는 기록인 것이다.
65) 위 주(註) 57에 인용된 용어인데, 조선시대에 세곡(稅穀)을 거두어 보관하다가 조운선(漕運船)으로 서울에 보내기 위해 지방관(地方官) 감독 하에 관리되던 창고를 일컬어서 ‘정부미 창고’라 한 것 같다.
66) 위 주(註)에 언급한 바대로
67) 이와 같이 황산포(黃山浦)와 나바위(羅巖?)와 화산(華山)을 동일한 곳으로 본다는 것은 큰 오류이다.
글 쓰고 나서 붙이고 싶은 뒷말(推移)
이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소회(所懷)를 덧붙이고 싶다.
첫 번째, 여태 지켜온 나바위 성지의 김대건 신부님께 대한 신심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심의 발단은 김대건 신부님의 인품(성덕)으로 향한 우리의 존경심이지 그분의 행적을 말해주는 물증을 숭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증은 역사가 판별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앞에서 가림막(遮面幕) 안에 신심을 가두어서는 아니 된다. 즉 역사의 왜곡 속에서 신심을 이끌 수는 없다.
두 번째, 우리 모두는 역사가 증언하는 열린 마당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행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분은 정말 그러한 분이셨구나!” 하는 감탄으로 우리의 그분께 향하는 신심을 더욱 고양할 수 있다. 그분께서 행적을 남기신 분명한 장소는 현 강경읍내(江景邑內)라는 걸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그 역사의 말을 들어보고자 해서 필자는 볼품없는 글로써 역사에게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필자가 역사를 더듬는 솜씨가 매우 서툴지만 그래도 역사적 진상(史實 factum historicum)에 사심 없이 접근하고자 했다.
세 번째, 그러므로 필자의 사심 없는 소망을 말하고 싶다.
➀ 현 나바위 성지 자체의 역사는 거기 본당의 역사이다. 강경에 1897년 베르모렐 신부가 본당(주임)신부로 부임하여 본당 자리를 물색하던 중 화산(華山)에 자리 잡게 된 사연은 필자가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더라도 현 나바위 본당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다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거기 화산에 사목자가 자리하기 시작한 이후의 역사가 나바위 본당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곳이 김대건 신부님의 라파엘호가 정박한 곳이었기 때문에 본당의 자리가 된 것은 아니다. 그곳이 사목의 거점(본당)이 되어 복음화를 기록한 역사는 김대건 신부님께 향한 신심과 더불어 대단히 존중되어져야 한다.
➁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한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곳은 강경이다. 그분이 도착한 곳, 그리고 그분이 상당기간 활동한 곳이 강경이다. 그분이 그곳에 도착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분이 그곳에서 중대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교구장을 모시고 강경에서 상당기간 지내셨다는 것(강경에 조선 대목구의 임시 교구청이 있었다는 것), 교구장을 서울로 모시기 위한 정지작업을 한 것, 조선교회의 전망을 도모한 곳(라파엘호를 폐선시키고 라파엘2호를 장만하여 추가로 선교사들을 영입할 준비를 한 것),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비밀리 협력한 교우들이 있었던 곳이 강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정황을 차가진 박사가 2014년 9월 18일의 강경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중에 잘 규명해주고 있다.
68)차기진 박사의 그 논문 중 해당 부분(8-9쪽)을 가감 없이 여기 싣는다.
강경 유숙 기간
강경 황산포 인근에 하선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현석문과 최형 등 조선 신자들은 일단 그곳의 신자 집에 유숙하였다. 그중에서 다블뤼 신부는 하룻밤을 지낸 10월 13일 공동 교우촌으로 갔고, 페레올 주교의 서한을 보면 조선 신자 대부분도 같은 날 모두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설명되어 있다. 이때 임성룡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유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는 얼마 동안 강경에 머물다가 상경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1846년에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을 때 “임가(즉 임성룡)가 배를 사서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왔으므로 호서의 산천을 정확히 기억해서 그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의심을 받고 있을 라파엘호를 타고 서울로 간다면 신분이 노출되거나 체포될 위험이 있으므로 이 배를 처분하고 새로 배를 매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그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5년 11월 20일자> 서한을 서울에서 작성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에서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은 주님 안에 평안하시고, 조선어를 공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중국에 있는) 매스트르(J. Maistre. 이 요셉) 신부님과 (최양업) 토마스 부제를 영접할 여행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경하여 신자들과 함께 영입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김대건 신부는 임성룡이 강경에서 새로 매입한 배를 타고 상경하여 페레올 주교의 영접을 준비하는 한편, 주교가 상경하기 전까지 서울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가 강경에서 머문 기간은 10월 12일부터 새로 배를 매입할 때까지였을 것이다. 11월 20일자의 서한으로 미루어볼 때, 그 이전에 상경했을 것이 분명하므로 김대건 신부가 강경에서 유숙한 기간은 한 달 남짓으로 보면 될 것 같다.
페레올 주교는 이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강경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는 강경에 도착한 지 17일 만인 1845년 10월 29일 그곳 유숙지에서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서한에서 그는 “사람들은 내가 위험을 가장 덜 당하게 될 곳은 서울이라고 단언합니다. 나는 아마 오는 한겨울에 서울로 갈 것입니다.”라고 하여 1845년 겨울에 상경할 때까지는 강경에 머물 것이라고 하였다. 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5년 11월 2일자 서한>에서는 상하이에서 사온 서양 마포(麻布)들을 구입한 값의 두 배에 팔았다는 내용과 함께 “중국산 은괴를 조선식 은괴로 녹여 (조선 엽전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다행히 이곳에 그런 일에 능숙한 신자가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전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곳’은 강경을 말한 것이고, ‘그런 일에 능숙한 신자’는 다음에 설명하는 구순오(具順五)를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페레올 주교는 <서울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5년 12월 27일자 서한>에서 “저는 수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상복을 입고 상경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처음에 예정했던 것과 같이 2개월 이상 강경에 머물다가 그 해 겨울 즉 12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상경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 인용한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서 보는 것처럼, 페레올 주교는 강경 유숙지에서 주로 조선어를 공부하였다.
➂ 덧붙여서, 김대건 신부님의 귀국 후 체포되시기 전까지 약8개월의 사목활동기간 중 약 1개월 이상 강경 체류로 볼 수 있고 서울에서 강경에 한번 이상 오갔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분의 불꽃같이 뜨거웠던 사제생활 기간 중 1/4가량을 강경에서 불태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분이 태어나신 곳과 생을 마치신 순교 터가 중요하다면, 역시 그보다 못지않은 중요성을 강경에서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탄생하신 곳이 베들레헴이었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곳이 예루살렘이었듯이, 김대건 신부님께서 탄생하신 솔뫼와 치명하신 서울 새남터를 우리가 성지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만을 기억하고 갈릴레아 지방은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가?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호수 주변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일을 복음서가 그렇게 많이 기록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듯이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로서 귀국하여 활동하신 기간의 1/4을 열정적으로 바치신 강경의 그 값은 솔뫼에 미치지 못하는가?
➃ 그리고, 그분의 라파엘호가 제주도에 표착한 사실로 그곳을 성지화 하여 기념하면서도 정작 그 목적지 도착을 기념해야 할 ‘강경이 황산 동네’에는 그 표식 하나 없고, 나바위 도착을 말하는 왜곡은 바로잡아지지 않고 있다. 더욱 그 나바위의 주변에 그분의 첫발 디딘 곳이라면서, 혹은 들어오신 지점이라면서, 순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근거 없는 주장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역사를 대면해야 하는 심정은 아연해진다.
위 ➀-➃에 피력한 필자의 소회에 대하여 교회 당국(관련교구들)의 관심과 평가를 요청하며, 필자가 쓴 이 글에 대하여 교회사(敎會史) 전문가들의 양심적 비판과 공개적 학술토론을 기다린다.69)
69) 이와 같은 요청을 우선 대전교구장 주교님께 말씀드리기 위해서 필자의 이 글을 주교님께 올리고 어떤 조치가 있으시기를 기다린다. 특별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동안에 김대건 신부님의 강경(황산리) 도착과 그곳에서 중대한 활동(사목)을 하셨던 사실에 대한 기억을 함께 하는 희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에 따라 교회사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강경 연구’를 기대하며, 필자의 이 글에서 혹 지적할 오류가 있으면 기탄없이 비판해주기를 기다린다.
첫댓글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주일 보내세요. ^^*
기록이 있으니 참 좋습니다.
윤종관 신부님이 지금은 원로사제이신데 대전교구의 성지 조성을 많이 하셨답니다.
조금 아까 눈이 내리더군요.
햇빛이 비치고 있는데, 눈송이들이 훨훨 날아다니고 창문 가까이 와서 서로 인사를 했지요.
주님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