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과 ‘푸른 하늘을’
김윤배/시인
김수영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한국사회의 전환기적 삶을 경험하면서 치열한 시작 활동을 펼쳤던 시인이다. 김수영의 시세계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시각으로 양분할 수 없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특한 자신의 시세계를 열어갔던 인물이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종로 2가 18번지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김희종은 정삼품통정대부중추의관의 벼슬을 지냈다. 조부 김희종은 경기도 김포평야 일대와 강원도 홍천 등지에서 500여 석의 추수를 하는 지주였다. 형제로는 아우 수성, 수강, 수경, 수환, 여동생 수명, 수연, 송자 등이 있다. 같은 해 종로 6가 116번지로 이사했으며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1924년 4세에 조양유치원에 들어갔다. 1926년 6세에 계명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했다. 1928년 8세에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 14세에 폐력과 뇌막염으로 1년여를 요양했다. 1938년 선린상고 야간부 3년을 졸업하고 주간부 2학년으로 진학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성북고등예비학교에 들어갓으나 곧 포기하고 미지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다녔다. 1943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게 되자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한 김수영은 연극 무대에 섰다. 1944년 봄에 만주에서 귀국한 어머니를 따라 길림성으로 가서 임헌태 등의 청년들과 번역극 ‘춘수와 같이’를 모대에 올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가족들과 개천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충무로 4가에 집을 마련했다. 1946년 시 ‘묘정의 노래’를 썼다. 1948년 박인환, 임호권, 김병욱, 양병석, 김경린 등과 동인 ‘신시론’을 결성했다. 1949년 동인 신시론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아메리카 타임지’ ‘공자의 생활난’을 발표했다.
1950년 30세에 김현정과 결혼을 했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 종로 2가에서 연행되었다. 의용군으로 강제징집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평남 개천의 양영훈련소에서 1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순천군 중서면 부근의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유엔군의 평양 탈환으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해서 서울에 도착했으나 경찰에 체포, 포로 신분이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6.25는 그에게 비극적인 역사의 체험으로 레드컴프렉스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레드컴프렉스는 후에 5.16 군사 쿠데타기 일어나자 숨어 지냈다. 이때 ‘신귀거래사’ 연작을 쓰게 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김수영은 직설적인 화법의 시편들을 폭포처럼 쏟아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4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좌절 한다.
김수영의 자유의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시편으로 ‘푸른 하늘을’을 꼽는다. ‘푸른 하늘을 압도하는/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자유를 위하여/비상하여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 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냄새가 섞여 있는 가를’
이 시는 자유와 혁명에 대한 직설적인 시다. 매개항으로 쓰인 노고지리는 시인 자신의 투사이다. 노고지리는 자유에 섞여 있는 피 냄새를 알고 자유를 노래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김수영이 말하는 자유는 저항과 희생으로서의 자유다. 피의 냄새는 자유와 결합하여 더욱 비자임를 띠고 고독은 혁명과 결합하여 더욱 강인한 고독으로 읽힌다.
김수영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어둠은 그의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를 얼마나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마리서사’라는 산문이다.
‘나에게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체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