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342 (9권 8. 김홍신. 펌글)
새벽 한 시쯤 골목길을 차가 쏜살같이 들어오도니 신사복 차림이 손을 흔들고 내렸다.
자동차가 회전을 하는 사이에 신사복의 사내가 초인종을 눌렀다. 방상무였다.
내가 재빨리 뛰어가 방상무라는 걸 확인하고 뒷덜미를 나꿔채어 우리 차에 실었다.
우리 차가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방상무는 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반항을 시작했다.
"시끄럽다. 우린 널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고 온 저승사자다. 정복현을 안다면 반항할수록 일찍 죽는다."
"뭐라구?"
방상무는 술이 깨는지 몸을 바로하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하고 이중흥정을 할 수도 있지. 돈이 아니라 정복현을 옭아쥔 서류라면. 넌 일억 원에 우리가 처치해야 돼.
네 목숨 값은 그래도 비싼 편이지. 널 일억에 죽여달라는 걸 보면 그 문서가 수십억 원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우린 네가 서류만 넘겨주면 살려 주겠어. 서류를 뺏기 위한 공작이 아니라 확실한 보장 아래 약속하는 거다.
우린 시간이 없다. 네 시체를 들고 가든가 널 살려두든가 둘 중에 하나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
"살려 주십쇼.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생각 잘했다. 어차피 넌 훔쳐낸 문서로 이만큼 잘 먹고 잘 살았잖느냐."
"그 문서가 집에 있습니다."
"어떤 거냐?"
"민회장과 정회장이 공증한 서류인데 두 사람이 한 통씩 가져야 할 서류를 정회장이 두 통 모두 챙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그걸 또 가로챘지?"
"전혀 우연이었습니다. 민회장이 외국에서 죽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서류를 챙기길래 왜 그러나 했습니다.
그래서 뭔가 냄새나는 게 있구나 싶어서 몰래 훔쳐봤더니 그런 엄청난 서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통을 빼냈습니다."
방상무는 살기 위해서 두서 없이 술술 불어대기 시작했다.
제가 생각해도 정복현이가 전문가를 보내 죽이려 한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우린 확실한 선택을 한다. 정복현을 선택하거나 널 선택하거나는 네 행동에 달렸다. 정복현이가 어떤 인물인데,
싸구려 일을 시켰겠냐. 그래서 우린 뭔가 큰 게 있다는 짐작을 하고 네가 원한다면 너를 선택하기로 했다."
"살려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뜯어냈냐?"
"칠팔억쯤 됩니다. 때때마다 사업 자금 명목이었지요. 정복현은 째째합니다. 처음엔 오억만 내면 서류 전부를 주겠다고 했는데도,
회사 하나 차려 주고 쓱 입 닦으려고 하기에 버틴 거죠. 그런 인간의 돈은 빼먹어도 정말 아까울 게 없습니다."
"네 놈은 더 쩨쩨하고 치사한 놈이다. 부정한 놈과 타협해서 먹고 산 놈이니까."
"......"
방가 녀석은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자동차를 돌려 방상무네 집앞에 도착한 것은 삼십여 분쯤 지난 시간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나더니 애원조로 말했다.
"제발 식구들이 눈치 채지 않게 해 주세요."
"아까 말한 대로 네 행동에 달렸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이 열리고 잠기 가시지 않은 여자가 잠옷 바람으로 현관을 열었다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사내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깊숙이도 감추어 두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잡동사니를 모두 들어내더니 한쪽 벽의 쇠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 안의 소형 철제금고를 열고 직사각형의 누런 봉투를 내밀었다.
성근이가 얼른 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릴 큰길까지만 바래다 줘라."
"여부가 있습니까."
우리가 지하실에서 나오자 그 사이에 옷을 갈아입은 방가 마누라가 의아한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방가는 거래처 사람들인데 급히 서류를 챙길 것이 있어서 같이 왔다면서 얼렁뚱땅 둘러붙이고 황급히 앞장서 나갔다.
성근이는 차를 몰고 앞장서고 나는 방가의 어깨를 끌어안고 걸었다.
"살려 두시는 거죠?"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 이렇게 물었다.
"물론이지. 나는 약속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미안하고 또 미안하지만,
두들겨 패지 않겠다는 약속은 안했네. 내말이 틀렸나?"
"......"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얘긴데 자네를 그냥 두고 간다면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모독하는 결과가 되네.
그동안 치사한 짓으로 먹고 살았으니까 얼마쯤은 다이어트를 좀 하게. 병원에 가지 말고,
집에서 죽을 먹어가며 한두 달 반성하란 말일세. 분명하게 얘길 하겠는데 병원엘 다녀도 낫지 않으니,
한두 달 속죄하면서 기다리면 저절로 나을 만큼만 때려 주겠네. 다시는 부정한 놈과 타협하지 말고 살게나."
"선생님, 제발 좀 봐 주십쇼. 하란 대로 다했잖습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이 골목에서 네 목청껏 동요를 한 열 곡만 불러라. 동네 사람 다 깨우고 방범대원 쫓아오고,
그러면 우린 자연스럽게 도망갈 거 아니냐. 그럼 맞지 않아도 될 테고. 그러나 내 기준과 내 판단으로,
목소리가 화통 삶아먹은 것처럼 크지 않으면 가엾게도 넌 철강으로 갈비뼈를 만들었거나 찰고무로 살점을 만들지 않은 이상,
염라대왕 문전까지 갔다 와야 한다. 이 절호의 찬스에 염라대왕 전 구경하는 것도 꽤 낭만적 아니냐.
시간 없다. 목청껏, 네 죄 없는 자식들이 부르는 동요나 불러라. 내 귀청이 멀쩡하면 넌 공짜로 극락 구경한다."
방가 녀석은 큰 기침을 한번 하더니 우람한 체격답게 목청을 뽑았다.
학교 종이 땡땡땡.... 산토끼 토끼야.... 나리나리 개나리....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아요.... 나란히 나란이....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우리 엄마 이름은 여보이구요....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마지막 노래는 목청이 잔뜩 쉬어서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다.
성근이가 콧노래처럼 앞 소절을 알려 주는 대로 따라 부른 것이 열곡이 넘었는데도 사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목청을 뽑았다.
"이제 그만 놀아라. 아직 내 귀가 멀쩡해서 안됐다."
"선생님...."
나는 골목길 가운데서부터 큰길 쪽의 전봇대 있는 곳까지 끌고 가며 때렸다.
비명 지를 목청이 잔뜩 쉬어서 쫓아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방가 녀석은 엉금엉금 기어서 자꾸 제 집 쪽으로 한 발짝이라도 더 가려고 했다.
"임마, 그런 수법은 엉덩이에 뿔난 정치쟁이나 구둣속에 달러 숨겨 나가는 목사나 벼룩의 간 빼먹는 재벌,
겉으로 폼재고 속으로 썩은 지식인쯤이나 할 짓이지 너 같은 얕은 꾀 가진 놈 할 짓이 아니다. 내 말 알겠냐?"
"예예."
"임마, 노래 연습 그만큼 했으면 유치원이나 차려서 죄 없는 맑은 어린애들한테 인생을 좀 배워라.
앞으로 돈 훑어먹으려면 총 맞아 죽은, 멧돼지 같은 뭐시깽인가 하는 친구 돈쯤 떼어먹는 배짱쯤 가져라. 알겠냐?"
"예."
"만수무강해라. 건강하고 행복하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성근이가 이렇게 말하고는 자동차 문을 힘차게 닫았다.
자동차는 쏜살같이 밤길을 달렸다.
우리는 담배를 나누어 맛있게 피우기 시작했다.
정복현의 꿈자리가 꽤 사나울 것이다.
아침에 현상된 사진과 복사된 문서를 성근이가 챙겨가지고 왔다.
열 대여섯 장의 사진은 아무리 보아도 기삿거리로는 특종감이었다.
성주화의 놀란 나신과 정복현의 굳은 표정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사진이지만 성주화는 생김새답게 하얀 모습인데 정복현은 시커먼 멧돼지 같았다.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는 걸 쉽게 알수 있었다.
"이젠 애들을 철수시켜라. 그동안 고생들 했다."
"그러잖아도 철수시킬 참이었습니다."
"발 빠르고 눈치 빠른 애들 두어 명은 계속 정복현한테 붙여라.
어렵지만 카폰 달린 차를 오늘 하루쯤 배정시켜 줘라. 오늘밤에 잡아야겠다."
"별장에 갔던 애들도 별 소득이 없는 것 같애요. 도전해 보겠다고 버티던데요."
"그쪽 뒤져봐야 탈세하기 위한 이중장부가 고작일 거다."
이제 정복현의 덜비를 완벽하게 잡은 것이었다.
혜라의 기록이 사실이란 것이 명백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촌이나 당숙, 조카나 사돈의 음흉한 간계도 거짓이 아니란 결론이었다.
재벌이 죽으면 자식들끼지 재산쟁탈을 위해 암투를 벌이는 건 차라리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청렴결백한 공직자로 알려진 거물급 인사 죽음뒤에 이렇게 치사한 이면이 도사리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로든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해외로 빼돌린 재산만 없다면,
그 돈이 결국 우리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국부적인 관점으로 보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위장분산할 정도의 인사라면 해외에도 막대한 재산을 빼돌려 놓았을 거라는 가슴 아픈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한때는 스위스 은행에 우리 나라 모모한 인사들의 비밀구좌가 상당할 거라는 소문이 떠돈 때도 있었다.
세계 도처의 독재자들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에 엄청난 액수를 예치해 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비밀이 보장된 그 구좌에서 제대로 돈을 빼쓰고 죽은 정치가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현명하게 물러나지 못하고 쫓기거나 독재의 단죄 때문에 돈을 찾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전의 민회장은 그래도 현명했었던 것 같았다.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흥청거리며 돈을 썼고 제법 여유 있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다만 국내에 위장분산시킨 재산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남 좋은 일만 시킨 꼴이었다.
그의 아들 민대식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위장분산된 재산을 찾으려다가 실패한 당사자가 된 것이기도 했다.
"이제 민대식을 찾아야 한다. 일본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모양인데....
정신 차리기만 하면 제 애비의 죄업을 씻어가며 좋은 일을 할 수가 있을 텐데."
"형님,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차라리 형님이 맡아서 좋은 일에 투자를 하든가....
아니면 지금부터 준비해서 사 년 후에 국회의원에 출마를 한번 해 보죠.
형님 고향에는 학교나 하나 세우고 공장이나 두어 개 짓고 여기저기 적당히 선심이나 쓰다보면,
국회의원 한 자리쯤이야 누워떡먹기 아닙니까? 시시껄렁한 친구들이 정치하는 거 보니까 밸이 꼴려요."
"임마, 세세연년 대대로 해먹는 황제라면 출마하지만 그 정도에 나를 내보낼 작정은 아예 하지 마라."
"행정대학원 같은 데 적을 두고 학력이나 높여놓고 그러면 되죠. 난 형님이 한번 휘둘렀으면 좋겠어요."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해라. 돈 찾으면 병태 형 학교 세우는 데 조금 보태고 나머지는 민대식한테 고스란히 줄 거다."
"왜요?"
"그의 몫이니까."
"부정한 돈 아닙니까?"
"부정해도 주인은 주인이니까. 대신 좋은 일에 하겠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주겠다."
"형님, 혜라인가 하는 그 여자 때문이죠?"
"물론 그것도 있다. 난 신세를 갚아야 돼. 배고프게 살고 있는 민대식에게 대신 갚는 길도 내가 할 짓이다.
부정한 돈이라고 해서 아무나 빼먹어도 된다면 그것 또한 부정한 짓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자면 여유만만한 사람들 돈도 죄 뺏어야 한다는 논리가 생길지 모른다. 노력한 것은 인정해야지."
"일할 흥이 안 납니다."
성근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대신 좋은 일에 꼭 쓰도록 하겠다. 민대식이도 알아들을 거다. 또 제 애비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위장분산했다가 당한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속죄하는 의미로도 가치 있게 쓰려고 할 거다. 저도 사람새끼 아니겄냐."
"그렇다치고.... 정복현이가 이중 삼중으로 해먹은 것 같애요. 친척과 친구들한테 위장분산시킨 공증서류를,
몽땅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제 것은 싹 빼고 재산 먹은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눈 감아 줄 테니,
얼마쯤 떼어내라고 흥정을 해서 제 배를 불렸을 가능성이 많다 이거죠. 부동산과 회사 인수과정을 보면,
그 여자가 주장한 것처럼 민회장 재산 동태를 너무 훤히 알고 차근차근 먹었다는 인상이 짙어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 민회장의 극비서류를 가장 먼저 챙겼으니까,
누가 민회장 재산을 어떻게 먹었는지 훤히 알고, 제 자신은 시치미를 뚝 떼고 달겨 들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