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폭력 피해 학생 전문 심리⦁예술 치유기관
해맑음센터
“피해는 피해자 속에서 찾아야 해요”
(사)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회장 조정실)가 위탁운영 하는 학교폭력 피해 학생 전문 심리⦁예술 치유기관인 해맑음센터. 개원한 지 벌써 올해로 11년째이다. 이 센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학교폭력 피해 학생 치유기관이다. 이 센터의 센터장인 조정실 회장을 만나 학교폭력과 센터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글. 최윤희(계간 ‘치유’ 편집장) │ 사진. 김행옥
그녀도 피해 가족이었다
“우리 딸이 중학교 2학년 때 돈을 뺏기고 괴롭힘을 당했는데, 전 그동안 알지 못했어요. 학교에서 오라고 해서 갔다가 알게 됐어요. 그것도 다른 피해 학생 중 한 명이 견디다 못해 피해사실을 부모에게 얘기해서 학교에 알려준 거예요. 피해 학생이 여섯 명이었는데, 학교에서 잘 처리했고 다음에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다짐을 받고 잘 끝냈는데, 이런 일이 그 이후에도 계속된 거예요. 그때 가해 학생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졌어야 했는데 저희가 학교를 믿고 학교에서도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자고 해서 부모들이 동의한 것이 문제였죠. 부모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잘 보살펴달라고만 하고 그냥 물러났는데 또 문제가 될지 몰랐어요.”
딸이 폭행당하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딸은 계속해서 돈을 빼앗겼다.
“나중에 제가 그 상황을 알게 됐는데 ‘더 이상 학교를 믿을 수가 없겠구나’ 생각해서 직접 제가 나서게 됐어요. 가해 학생 엄마를 만났어요. 그 엄마가 하는 말이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더군요. 정말 화가 났어요. 그렇지만 마음을 잘 다스리고 ‘이번 한 번은 넘어가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주고 왔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의 돈을 뺏은 아이가 주동자가 아니더라고요. 그 위에 또 있더라고요. 우리 아이한테 돈을 뺏어서 주동자 아이한테 상납하는 거였어요. 저희 아이 돈을 뺏은 아이가 주동자 아이에게 가서 제 얘기를 한 모양이에요. 저희 아이가 주동자 아이 집으로 끌려갔어요. 아이들은 제 딸아이를 코뼈가 부러지도록 때리고 머리를 쥐고 흔들어서 머리 삼분의 일이 거의 다 빠질 정도로 폭력을 행사했더라고요.”
5일 만에 깨어난 딸
그 자리에는 그녀의 딸뿐 아니라, 다른 피해 학생 여섯 명도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을 부른 이유는 ‘만약 너희들도 이렇게 부모한테 알릴 경우 이렇게 똑같이 당할 줄 알라’는 것을 교훈 삼아 알려주려고 그랬던 거래요. 더 화가 나는 건 주동자 엄마가 알고 있었는데 아무런 제지도 안 한 거예요. 저는 그때 아이가 학원 갈 시간이 됐는데 일찍 안 들어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이가 들어오더니 그냥 혼절해 버리는 거예요. 딸아이를 살펴보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됐더라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곧장 딸아이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갔어요. 그리곤 딸아이는 5일 만에 깨어났어요. 그러더니 ‘엄마, 그냥 조용히 있어’라고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엄마가 상대할 수 없는 부모들이야’라고 하더라고요.”
딸 얘기를 들어보니 가해 학생 부모가 학부모회장이기도 하고, 학교가 그 아이들 편이라 그전에도 덮고 지나간 경우가 있어서 소용없을 거라는 말을 한 거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저는 아이가 피해를 본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피해 학생 부모들을 만나 함께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 부모들이 한결같이 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빠져버리더라고요. 저는 이해했어요. 아이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 이상 부모들은 어쩔 수가 없거든요.”
가해 학생들이 병원으로 찾아오다
딸아이가 깨어났을 때 학교에 연락했단다. 아이가 다쳤다고. 그런데 학교에서는 다 알고 있으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단다.
“‘누가 그랬냐?’고 묻지도 않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우리 아이를 폭행한 아이들이 병원으로 찾아왔어요. 처음엔 게네들이 누군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갑자기 제 목을 조이더니 반말로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아냐?’는 등의 말을 하더라고요. 저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액션을 취하려고 했는데 옆에 계신 환자 보호자들이 제가 그 아이들을 건드리는 순간, 제가 오히려 피해 볼 거라면서 제 손을 잡고 제 몸을 가로막으면서 그 아이들을 못 건드리게 했어요. 그리고 환자 보호자들이 그 아이들을 쫓아냈는데, 그다음 날 가해 학생 부모들이 찾아왔더라고요. 와서는 ‘얼마면 되겠냐?’, ‘정말 사실이냐?’ 등을 물어보는데 제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심지어는 제가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제 딸아이 머리를 들춰보고 ‘이거 우리 애들이 그런 거 맞느냐?’면서 확인까지 했대요. 그러니까 우리 애는 발작을 일으키고...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 문제를 해결해 주다
딸아이 사건이 해결되고 나니 부모님들이 자꾸 그녀를 찾아왔다고 한다.
“부모님들도 어디 한군데 도움 받을 데가 없으니까요. 저는 그때 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사실 딸아이 문제 때문에 영업이고 뭐고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아이들이 죽었다고 하면 영안실에 가고, 재판하는 데까지 찾아가고, 탄원서도 다 써주고,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까 결국 파산까지 했어요. 생활이 몹시 어려운데도 차비만 있으면 전단지를 붙이러 다녔어요. 그게 벌써 올해로 24년이 됐어요. 이건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고, 돈을 위해서도 아니에요. 그 고통을 너무 잘 아니까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저도 아이가 크면서 희망도 없고, 아이가 아무런 변화도 없으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했어요. 딸아이를 씻기고 짐 정리를 다했는데, 딸아이가 제 눈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엄마, 나 때문에 속상해서 떠나면 할머니랑 가족들은 어떻게... 나도 여기 와서 친구들 새로 사귀었는데 우리 친구들이 가슴 아파할 거야.’”
예전으로 돌아가다
그러면서 가지 말자고 했단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내가 엄마로 태어날 거니까 그때 엄마가 자식으로 태어나서 지금의 10배, 20배 나한테 속 썩여’ 그러더라고요. 그때 제 가슴이 쿵 했어요. 그래서 딸아이 손을 끌어안고 제 가슴에 대고 그랬어요. ‘엄마가 미안해.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앞으로는 엄마 가슴 뛰는 소리 들리지? 이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너를 위해 엄마가 끝까지 너를 지킬 거니까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 제일 먼저 했던 게 제 마음속에 있던 분노와 증오를 빼는 작업이었어요. 다 버리자고, 다 치워버리자고. 그게 제일 좋은 거라고. 그랬는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저를 떠났던 주변 사람들이 다시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곤 제 손을 잡으면서 ‘그때는 네가 너무 무서웠다’고, ‘그래서 옆에 올 수조차 없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제는 제 표정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새벽 2시만 되면 전화하던 엄마
중학교 2학년 딸을 잃은 엄마가 있었단다.
“새벽 2시만 되면 전화가 오는 거예요. 저는 그때 믿음이 없었을 땐데 성경책을 읽어주면서 찬송하는 걸 5시까지 하더라고요. 무려 3시간 동안. 믿음 없는 사람이 그걸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전화를 안 받으려고 해도 안 받으면 그 엄마가 위험할 것 같아서 전화를 2주 동안 받아줬어요. 나중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리고 그다음 날 제가 그랬어요. 나를 만나서 벼랑으로 밀든가, 날 실컷 때리든지 하라고요. 그 엄마랑 삼성역에서 만났는데 저를 오산리금식기도원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어요. 그들의 모습이 저에게는 온전히 보일 리 없었어요.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서 화가 밀려 올라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막 뒹굴고 발길질하면서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욕을 하다가 그만 혼절까지 했어요. 그런데 깨고 나니까 통성기도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엎드려서 ‘제가 이 길을 꼭 가야 한다면 길을 만들어주시고, 아니면 저를 평온하게 해달라’고 통곡했어요.”
결국 센터를 개원하다
그는 딸아이의 경험을 통해 그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성격도 한몫했다.
“저희 아이한테 치유가 필요한데 당시에는 정신과 약물치료나 폐쇄병동에 입원하는 정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아이가 심리적으로 안정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으면서, 치유도 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런 공간이 전혀 없더라고요. 이런 걸 느끼는 부모님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피해 부모님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이런 시설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교육부나 국회까지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저희가 10년을 치유센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어요. 대학로에서 한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토요일마다 오후 3시에서 5시까지 6년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앞에서 피해 부모님들과 피해 학생들 그리고 교사들도 참여하는 집회와 캠페인을 했어요. 학교폭력에 대한 특별법에 대한 서명운동도 했어요. 그러다가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살던 덕원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남학생이 집단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7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계기가 돼서 해맑음센터를 만들게 됐어요.”
따돌림당하는 학생들이 오다
센터에는 따돌림 당하는 학생들이 제일 많다고 한다.
“폭력당한 거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따돌림의 경우는 정신적으로 마음에 상처 입은 아이들이거든요. 그래서 그 상처가 꽤 오래가요. 정말 고통스러운 거거든요. 더군다나 내 친구, 내 또래친구들한테 따돌림 당했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겐 큰 상처이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에요. 아이들이 폭행당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따돌림 때문에,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요. 그건 반드시 치유가 되도록 도와줘야 되는 거예요. 얼마 전에 자살한 표예림씨도 안타까웠던 게 회복이 됐다면, 그때 치유가 됐다면, 저렇게 자살까지 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점이었어요.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에 부딪히면 바로 쓰러지거든요.”
처음 오는 아이들에게
센터에 처음 오는 아이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올 것이다. 그 아이들의 반응은 어떨까?
“선생님들이 무엇을 해준다기보다는 그냥 관망해요. 왜냐하면 아이들도 처음부터 친절하게 다가가면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선생님들이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다 알아서 해요. 먼저 왔던 아이들은 먼저 겪어봤잖아요. 아이들이 먼저 처음 온 아이들에게 접근해요. 제일 먼저 하자고 하는 게 ‘밥 먹으러 가자’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아요. 그러면 새로 온 아이는 좋아서 따라가요. 그리고 밥 먹으면서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아이의 얼굴이 피기 시작해요. 그래서 여기 오면 적응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보통 한 이틀 안에 금방 애들하고 친구가 돼요. 워낙 고립돼있던 아이들이기 때문에 누가 자기한테 와서 말 걸고 손잡고 하는 거 별로 없다가 그렇게 해주면 행복한 거죠.”
기억에 남는 아이들
오랜 시간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보면 기억에 남는 아이들도 많을 것 같다.
“6개월 동안 말 한마디 안하던 아이가 있었어요. 여자아이였는데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커서 말을 안했던 거더라고요. 그 아이가 수료식 하는 날, 아이들하고 합창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그게 너무 감동이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또 한 아이는 꼬챙이 같은 아이가 있었어요. 말에 늘 가시가 박혀있는 아이였어요. 또래들보다는 어른들에 대한 반감이 있는 아이었는데, 선생님한테 상처를 받았던 아이었어요. 피해를 당했을 때 선생님한테 도움을 요청했다가 실망한 아이에요. 선생님한테 도움을 요청했는데 글쎄 ‘네가 문제’라고 했대요. 뭔가 위로의 말을 듣기 원했을 텐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상처가 컸겠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수료식 날 울면서 자기 마음을 얘기하는데, ‘자기는 어른들한테 상처를 참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 산속에서 천사들을 발견했다. 바로 선생님들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선생님들이 너무 행복해했어요. 또 한 아이는 엄마가 무속인이었어요. 아이들한테 그것 때문에 놀림을 당한 아이었어요. 그 아이는 엄마를 되게 사랑한 아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엄마를 아이들이 놀리니까 충격이 심했던 거예요. 그 아이가 센터에 3년 있었는데 우리 선생님 중에 성악을 전공한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 선생님이 그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곤 발성법을 가르쳤는데, 글쎄 그 아이가 고등학교 때 나가는 곳마다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아침마당’ 방송에도 두 번이나 나가고, 글쎄 트로트가수가 됐지 뭐예요. 앞으로 크게 될 거예요.(웃음)”
전공이 결정되다
아이들은 심리⦁정서 회복 프로그램으로 미술치료, 원예치료도 하고, 자아존중감 회복 프로그램으로 음악활동, 체육활동, 자격증 취득도 하고, 지역 연계 활동 프로그램으로 곶감 만들기, 두부 만들기, 이⦁미용 봉사 등도 하다 보니 이곳에서 전공이 결정되기도 한단다.
“저희 아이들의 학교로의 복귀율은 97%예요. 복귀율이란 학교로 가서 안착한 아이들이 졸업까지 한 아이들을 말하는 거예요. 이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많이 갔는데, 제일 많이 가는 과가 ‘사회복지학과’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프로그램 중에 동물치유프로그램을 통해 애견학과를 간 아이도 있고, 네일아트를 배워 네일학과를 간 아이도 있고, 사진을 유독 잘 찍는 아이는 사진학과를 간 아이도 있어요.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이 치유도 되지만 적성도 발견되더라고요. 사진학과 간 아이는 지난주에 우리 센터에서 캠프를 했는데 봉사하고 갔어요. 그래서 저희 학생 부모님들이 그 아이들을 보면서 희망을 품어요. ‘우리 애도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하고요.”
변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외부 체험수업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것을 좋아하지 않을 학생이 있을까?
“아이들은 외부 체험수업 나가는 걸 좋아해요. 한 학기에 한번 선생님들하고 같이 2박 3일 여행프로그램 가는 게 있어요. 공예 만들기도 하고, 캘리그래피도 하고, 춤 치료도 하고, 뮤지컬도 한 편 만들어보고.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짜서 여행가는 게 있는데 이걸 제일 좋아해요. 이건 선생님들이 절대 관여 안 해요. 아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율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아이들한테 온전히 맡겨요. 그러면 아이들은 장소를 선정하고, 숙소도 정하고 맛집도 찾고 예산까지 다 짜요. 세 팀이 나눠서 경합을 벌이는데 제일 잘하는 애들이 예산을 제일 많이 받아요. 예산이 제일 많은 조는 센터 차를 타고, 그다음 팀은 기차를 타고, 그다음 팀은 버스를 타고 가는 등 차등을 둬요. 서로 경쟁하면서 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까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치는 거죠. 하루 만에 패자부활전을 해서 뒤바뀌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 스릴을 느끼면서 해요. 나중에 부모님들에게 들은 얘기인데, 실제로 가족여행을 가는데 아이들이 다 알아서 하더래요. 그래서 너무 놀랐다고 해요. 애들이 경제관념도 생기고, 스스로 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느끼고, 부모님께 칭찬도 받고 하니까 아이들이 여행 프로그램을 제일 좋아하더라고요.”
개혁
그녀는 그동안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해 학생들에 대해서 생활기록부에 기재하자고 한 것도 저희 측에서 제안했던 거예요. 무슨 얘기냐 하면, 생활기록부에 가해 행동을 기록했다가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재발하지 않으면 삭제해 주고, 만약에 재발하면 가중처벌해서 대학 갈 때 불이익을 당하게 하자는 그런 거였어요. 그럼 가해 학생들의 부모가 아이들을 잘 관리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아이 대학입시에 반영된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목숨 걸고 지키지 않겠어요?”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의 위원이 되다
국무총리 산하에 학폭위가 있다고 한다. 그곳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학폭위에 14개 부처 장관님이 다 모였었어요. 제가 위원이니까 피해 부모들의 의견을 모아서 요청했어요. 그것들이 받아들여져서 산림청에서 치유프로그램을 하기도 했어요. 보통 그들이 하는 얘기들이 다 탁상공론이에요. 해외에서 좋다고 하는 거면 들여오는데, 예를 들면, 핀란드에서 하고 있던 스톱(stop) 정책이 도입됐었어요. 반에서 누가 괴롭히거나 때리면 피해자가 스톱하는 거예요. 그러면 때리던 친구들도 스톱하는 거예요. 그런데 맞고 있는 아이들이나 그걸 지켜보는 아이들이 가해 학생들이 무서워서 스톱을 할 수 있겠어요? 제가 오죽하면 아이들한테 물어봤어요. ‘너 맞는데 아이들한테 스톱하면 어떻게 되니?’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존나 깨지죠’였어요. 예산을 엄청나게 풀고, 애들 교육하고 강사 양성하고 그랬는데, 결국 실패작이 됐죠. 해외하고 우리하고는 상황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가 계속 위원으로 들어가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서 계속 제안하고 얘기를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개선이 되지 않아요.”
부끄러워서 시작했다
그녀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24년을 일했는데 개선된 것은 별로 없다. 그러니 할 말이 많은 게다.
“우리 딸이 피해를 당했을 때 참 부끄러웠어요. 올바른 부모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저와 똑같은 마음으로 자기 돈 들여서 사무실 내서 애쓰시는 부모님들이 많은데, 솔직히 이건 국가에서 해야 할 일잖아요. 최소한의 뒷받침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분들한테 가서 붙잡고 사정해서 ‘도와주십시오’ 해야 할 판이에요. 그분들이 자기 돈 내서 개인 희생 하면서 하는 거는 아니라고 봐요. 우리 센터만 해도 전국에서 하나인데, 이 하나로 전국을 커버하고 있어요. 어떤 사명감으로 하긴 하지만, 이건 제가 할 일이 아니라, 나라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학교폭력에 대한 연구는 피해자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피해자 부모님들이 호소하고, 뭐가 고통스러운지 아이들의 고통 속에서 뭔가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안 돼 있어요. 그래서 저희끼리 모여서 하는 거예요. 지금 피해자들을 위한 설문조사들도 거의 외국계 논문에서 짜깁기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하니 무슨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겠어요? 답답해요. 그래서 저희끼리 설문 조항 다 만들고, 부모들끼리 모여서 줌으로 회의도 하고,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책도 내고... 이거 국가에서 나서서 해주면 안 되는 건가요? 피해는 피해자 속에서 찾아야 해요.”
모두가 같이 해요!
이게 안 된다는 게 제일 안타깝다고 했다. 사회에서 나서서 모두가 내 자식 지키는 일에 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저는 피해 학생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어떻게 보면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가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점에서 변화를 좀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면 방송에서 미친 듯이 피해자를 찾고 인터뷰를 하자고 하고, 그러다가 한 2주 지나면 또 가라앉고... 매번 그런 식으로 하니까 행사처럼 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뿌리 못 뽑아요.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반드시 이 아이가 치유돼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해줘야지 학교폭력의 심각성도 알게 되고, 주변에도 학교 폭력이 잘못됐다는 거를 알려줄 수도 있는 거예요. 지금 형태로 하면 피해자들만 자기 아픔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서 힘이 느껴졌다. 피해자 엄마로 살아온 24년의 세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동안 얼마나 몸부림치면서 부끄럽지 않은 엄마로서 살기 위해 애를 썼을까? 지금도 어딘가에서 피해를 당하고 있을 아이들과 그 아이를 보면서 가슴을 치고 있을 부모들. 학교 폭력은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내 자식의 일이고 내 가족의 일이다. 제발 남 일처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피해는 피해자 속에서 찾아야 해요.”
주소: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4길 8
Tel. 070-7119-4119
홈페이지:www.uri-i.kr
|
첫댓글 제발 남 일처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바로 내 자식의 일이고 내 가족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