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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다리(橋)
그 날 나쓰에는 게이조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귀가 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게이조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밤은 좀 쌀쌀하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나쓰에에게 넘겨주고 나서 게이조는 현관 마루에 걸터앉았다. 털 양말을 신고 있어 장화를 쉽사리 벗을 수 없어서였다.
나쓰에는 몸을 굽혀 장화를 벗고 있는 게이조의 등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매일같이 이렇게 서둘러 마중을 나왔던가!’
나쓰에는 성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게이조가 벗은 장화를 가지런히 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기운이 없어 보이는군.”
게이조는 언제나 마중을 나오던 요코가 보이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어깨가 약간 뻐근해서요.”
나쓰에는 어깨에 손을 대고 목을 좌우로 돌렸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나쓰에는 마음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자기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모른 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큰 타격을 줄 만한 방법을 찾아 게이조에게 보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코는 거실에도 없었다.
게이조는 침착성을 잃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빠 오셨어요?”
이층에서 도오루가 내려왔다.
“응.”
게이조는 도오루의 뒤를 따라 요코가 내려올 것 같아 코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
“옷 갈아입으세요.”
“그래.”
요코가 지금까지 자신을 마중 나오는 것을 한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쌀쌀맞게 대한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이기도 했다. 요코가 보이지 않는 게 이렇게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 게이조로서는 뜻밖이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게이조는 줄곧 요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간혹 사나워지는 나쓰에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거실에 가니 도오루가 의아한 얼굴로,
“요코는 어디 갔어요, 엄마?”
하고 물었다.
“방에서 책이라도 읽고 있는 거 아니니?”
나쓰에도 아까부터 요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명랑하고 활기찬 요코라도 오늘 일만은 어린 마음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네, 엄마에 대한 일을 요코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라고 말한 요코의 말에 나쓰에는 감동을 받았다. 동시에 일종의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해요. 요코가 보이지 않아요.”
요코의 방에 갔다온 도오루가 마치 탓하기라도 하는 듯이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뭐?”
“나쓰에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뭐, 요코가 없어? 설마 루리코처럼 된 건 아니겠지.”
게이조의 말에 도오루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게이조는 도오루의 예민한 감수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고 아차 싶었다.
“아직도 밖에서 놀고 있을 테지. 곧 돌아올 거야. 그러니 어서 밥이나 먹자. 배고파.”
게이조는 불안을 감추고 태연스럽게 식탁 앞에 앉았다.
“네.”
나쓰에는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게이조는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도오루에게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말했다.
“걱정 마.”
게이조의 말에 나쓰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역시 요코는 사이시의 딸이구나. 남편이 이렇게 냉담한 걸 보니…….”
나쓰에는 말없이 게이조의 밥공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요코를 걱정한다면 남편은 속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게 있으면 이상하게 여기겠지.’
나쓰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판국이었다.
‘요코에게 만일 불행한 일이라도 일어났다면…만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쓰에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무슨 볼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엌으로 갔다.
‘요코, 어디 있니? 빨리 돌아와. 엄마가 잘못했어.’
나쓰에는 요코의 목을 졸랐던 일을 생각을 하니 요코가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엄마!”
날카로운 도오루의 목소리에 나쓰에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거실로 돌아오니 도오루는 게이조를 내려다보면서 서 있었다.
“엄마, 요코는 데려온 아이에요?”
도오루가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게이조와 나쓰에는 동시에 얼굴을 마주 보았다.
“왜 그래?”
게이조가 부드럽게 물었다.
“요코는 엄마가 낳았잖니, 달이 떠 있는 추운 날 밤에. 도오루, 왜 그러는거야?”
나쓰에도 상냥하게 말했다.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도오루와 요코가 진짜 남매라고 우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 이상하잖아요? 요코가 이렇게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는데 아빠와 엄마는 태평스럽게 밥이나 먹고 있으니 말이에요.”
“어둡기는 해도 아직 다섯 시 반밖에 안 됐어. 요코는 똑똑하니까 길을 잃거나 하지 않을 거야.”
게이조는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아빠는 요코를 예뻐한 적이 없잖아요? 아빠는 요코를 안아준 적도 없잖아요? 요코가……요코가 불쌍해요.”
도오루는 반쯤 울상이 되어 게이조를 노려보았다.
요코는 물빛 코트 위에 빨간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집을 나온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막상 집을 나오긴 했으나 갈 데가 없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저금통을 열쇠로 열고 돈을 갖고 나왔다. 어쨌든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르던 나쓰에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것이 요코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요코는 나쓰에의 모든 것이 좋았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 주는 것도, 언제나 몸에서 향수 냄새를 풍기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품위 있고 부드러운 말씨도 좋았다. 어린 마음에도 웃을 때의 입 언저리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설거지를 할 때의 뒷모습도 좋았고, 걸레질을 할 때의 재빠른 몸놀림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요코야.”
하고 부를 때의 약간 나직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나쓰에만 곁에 있어주면 쓸쓸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이토오에게 돌로 어깨를 얻어맞았을 때에도 그다지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이조의 쌀쌀한 태도가 요코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지 않은 것도 나쓰에의 사랑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쓰에가 요코의 목을 조른 것이다. 그대 마치 무엇에 씐 것 같던 나쓰에의 얼굴이 요코는 정말 무서웠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엄마인 나쓰에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무서운 모습을 보였을 때 요코의 마음에도 딴 생각이 들었다.
나쓰에게 싫어졌다기보다는 그저 무서웠다. 지금까지 요코는 어두컴컴한 곳이나 커다란 개도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나쓰에의 무서운 모습은 어린 요코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었다.
요코는 죽은 것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죽임을 당하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요코는 가구라 농협 앞에서 버스를 탔다. 아사히가와로 가려면 다리를 하나 건너야 했다. 버스가 다리 위를 지나갈 때 요코는 난생 처음 ‘쓸쓸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요코는 지금까지는 혼자서는 아사히가와까지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다리 밑을 흐르고 있는 겨울 강물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버스 창에 이마를 대고 요코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리 아래 사무라이 마을의 어떤 집 창문에 빨간 헝겊이 매달려 있엇다.
‘저 빨간 게 무엇일까? 머플러일까?’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다리를 건너자 아사히가와 시내가 나왔다.
버스는 이윽고 마루이 백화점 옆에 정차햇다. 나쓰에와 함께 왔을 때는 언제나 이곳에서 내렸다. 요코는 오늘도 이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요코는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휩쓸렸다. 사람들은 아사히가와 역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개찰구의 철책에 기대어 요코는 방금 도착한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창가에 흰옷을 입은 아기를 안은 여자가 앉아 잇었다. 그 여자는 요코를 내다보고 웃어주었다. 친절한 아줌마였다.
‘우리 엄마처럼……..’
여인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뭐라고 말했다. 여인은 웃으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요코는 그 아줌마가 다시 한번 자기 쪽을 바라보지 않을까 하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발차를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려왔다. 그 아줌마는 끝내 요코 쪽을 내다보지 않았고 남자와 뭐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기차는 떠났다.
기차가 떠난 맞은편 구내에는 검은 화차가 정차해 있었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커다란 원목이 잔뜩 실려 있었다.
‘엄마처럼 친절한 아줌마였다’
요코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화차를 바라보면서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왜 그러니?”
역원이 요코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요코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마루이 백화점 앞까지 돌아왔을 때,
‘무용하는 아줌마한테 가자.’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는 다쓰코를 ‘무용하는 아줌마’라고 불렀다. 요코는 다쓰코 생각을 한 순간 갑자기 기운이 솟았다.
다쓰코의 집은 6조(條) 10가(街)에 있었으므로 약 8백 미터쯤 걸어가야만 했다. 거리에서 2미터 정도 들어간 곳에 있는 견고한 목조 이층집이었다. 집 앞에는 ‘하나야기류 후지오 연구소’라고 먹 글씨로 굵게 쓴, 약간 거무스름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2미터쯤 되는 복도가 나 있고, 그 끄트머리에 연습실이 있었다. 복도 오른쪽에는 화장실, 부엌, 욕실이 있고 왼쪽에는 제자 두 사람이 거처하는 방과 응접실이 있었다. 다쓰고의 방은 이층의 두 칸을 쓰고 있는데 올라가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응접실은 다섯 평 가량 되었는데, 이 응접실은 아주 재미있는 곳이었다. 무용과는 그다지 관계도 없는 교사, 의사, 은행원, 상점 주인, 신문 기자 등 잡다한 직업을 가진 남자들이 이렇다 할 볼일도 없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들은 낮이건 밤이건 틈만 나면 찾아 들었다.
그들은 다쓰코가 있건 없건 개의치 않았다. 벌렁 드러눕거나 문턱에 걸터앉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자리를 잡고 잡담을 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을 마시는 사람, 직접 밥을 해먹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자기 집인지 남의 집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쌀이 떨어졌어.”
하고 누가 말하면 이튿날 누가 가져왔는지 벌써 쌀독이 가득 채워져 있게 마련이었다.
이 응접실에서는 니체도 피카소도 사르트르도 베토벤도 마치 친한 친구나 되는 것처럼 화제에 올랐다.
연습이 없을 때면 다쓰코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문기둥에 기대어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자이 오사무가 죽었을 때 만나 본 적도 없는 그를 위해 이 방에서 밤샘을 한 적도 있었다.
다쓰코는 이 방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응접실 패거리’라고 불렀다.
술도 안주도 누가 얼마를 내는 식으로 각자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생긴 것을 가지고 마시고 먹고 하는 것이었다.
“발이나 닦고 올라오세요.”
하고 다쓰코에게 핀잔을 듣게 되면 오히려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거나 수줍어하는 패들이었다.
가끔 나쓰에가 요코를 데리고 들르면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기꺼이 박수로 맞아 주었다. 그러나 그런 후에는 자기들끼리,
“자유란 정말 인간에게 주어진 건가?”
하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쓰에는 이런 응접실의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요코는 어쩐지 활기가 있어 보여 좋아했다.
“실례합니다.”
하는 따위의 형식적인 인사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자기 집처럼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질서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어딘가 불문율 같은 것이 있었다.
아무도 다쓰코를 독접하려 들지 않았다. 연습장을 함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제자들에게는 말을 걸지 않고 목례만 했다.
그 날 요코도 말없이 신발을 벗었다. 곧바로 연습장으로 갔더니 연습이 없는 듯 다쓰코가 혼자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두 제자가 전축 옆에 얌전히 앉아서 다쓰코의 움직임에 따라 눈으로 쫓고 있었다.
요코가 들어가도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다쓰코는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요코는 무슨 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은빛 버들잎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은 다쓰코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아름답게 보였다.
음악이 멈췄다. 요코는 다쓰코가 곧 자기에게로 와 줄 것이라 생각하자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그러나 음악이 다시 시작되고 다쓰코는 계속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이 시작되자 다쓰코의 몸에 마치 다른 영혼이 깃들인 것처럼 이상하게 여겨졌다.
요코는 그것을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춤을 추는 다쓰코의 표정이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흩어진 것처럼 변화하는 것이 요코에게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런 후에도 춤을 서너 번 더 추고 나서야 비로소 다쓰코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엄마는?”
다쓰코는 무심코 물었다.
다쓰코는 요코가 귀여워 어쩔 줄을 몰라싿. 무심하게 보이는 것은 정을 억제할 때의 타쓰코의 태도였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천성이 그랬다.
“집에 계세요.”
“요코 혼자서 왔니?”
“그럼요.”
“저런.”
어째서 혼자 왔느냐고 다쓰코는 묻지 않았다. 말없이 요코의 어깨에서 책가방을 벗기고 나서 물었다.
“학교에서 오는 길이니?”
“집에서 오는 길이에요.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요.”
요코의 말에 다쓰코는 크게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야, 집을 나왔다고? 건방지게. 요코, 너 1학년이지?”
“그래요.”
“그래요라니? 기막혀라. 1학년짜리의 가출이라. 이거 신나는구나.”
다쓰코는 웃으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네댓 명의 남자들이 돌아보았다.
“뭐가 신난다는 거요, 다쓰코 씨?”
“이 1학년짜리가 글쎄 집을 뛰쳐나왔대요.”
“반골정신이 대단하군.”
“얘깃거리가 되겠는걸.”
남자들은 손뼉을 쳤다.
요코는 영리해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꾸벅 인사를 했다.
“엄마한테 꾸지람 들었니?”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이치가와(市川)가 요코에게 물었다.
“아뇨.”
“그럼 뭐야, 꾸지람도 듣지 않았는데 집을 뛰쳐나왔어?”
요코는 오늘 낮에 본 나쓰에의 얼굴 표정을 떠올렸다.
다쓰코는 요코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요코는 책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밖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심심하지 않아?”
얼굴이 인형처럼 생긴 제자가 물었다.
요코는 말없이 방긋 웃었다. 다쓰코는 보고도 모른 체했다.
제자가 저녁 식사로 만든 세모꼴 김초밥과 삶은 계란을 갖고 왔다. 아사쿠사 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둑을 두는 두 남자만 남고 다른 패거리들은 돌아갓다.
“요코의 엄마가 걱정하고 있을 텐데, 다쓰코 씨 전화 안 걸어요?”
“어리석은 소리 말아요. 엄마란 존재는 걱정하는 게 일인걸요. 걱정하게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다쓰코 씨가 그렇게 말하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군요.”
“사실 그렇잖아요. 이런 꼬마가 집을 뛰쳐나온 데는 엄마에게도 그만큼 잘못이 있거든요. 엄마도 걱정하면서 자기가 잘못했다거나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반성할 게 아녜요. 걱정 좀 하게 내버려둬요.”
다쓰코는 샤미센(일본 음악에서의 대표적인 현악기)의 줄을 늘어뜨리면서 요코를 보고 생긋 웃었다.
“이 애는 말이에요.”
하고 나쓰코는 요코를 눈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난 지금까지 바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생글생글 웃기만 하거든요. 조금도 화를 내는 일이 없어요. 화를 내지 않는 인간이란 어쩐지 정직하지 못한 것 같아 난 싫거든요.”
밤색 스웨터를 입은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이치가와가 요코를 빤히 바라보고 나서,
“화를 내지 않는 인간은 정직하지 못하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책가방을 메고 와서는 집에 있기 싫어서 왔다는 거예요. 마음에 들었어요. 이 애는 머리는 좋지만, 인간이란 머리만 좋아서는 안 되거든요. 성깔도 있어야지요.”
“그런데 다쓰코 씨는 성깔이 너무 있어서 탈이지요.”
이치가와가 바둑판을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요코는 생전 처음으로 엄마의 곁을 떠났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쓰코의 방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밤 아홉 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드디어 왔군.’
다쓰코는 혼자 씩 웃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과연 나쓰에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다쓰코, 나야.”
“나? 웬일이야?”
“저기, 요코가 없어졌어.”
“흥.”
“일단 경찰에 신고하기는 했지만, 나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런데 요코가 왜 없어졌어?”
“글쎄 말이야…….다쓰코, 만일 요코가 루리코처럼 되었다면…..”
다쓰코는 나쓰에가 울먹이자,
“요코 여기 있어.”
하고 일단 진정시켜 놓고 가볍게 혀를 찼다.
“어머! 정말? 너무해.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 정말 너무해.”
나쓰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쓰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다쓰코, 듣고 있어?”
“응. 너무해, 너무해 하는 소리가 들려.”
“어머, 정말 기막혀. 나 지금 데리러 가도 되지?”
“그건 곤란해. 새벽 연습 때문에 네 시에는 일어나야 해서 지금 잠자리에 들려는 중이야. 요코도 벌써 잠들었고 아무 데도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내일 데려다 줄게.”
“하지만 난 요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마음 편히 잘 수 없을 것 같아.”
“요코는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나 보지?”
“………..”
“어젯밤에 엄마가 전화를 걸었더라.”
아침 식탁에서 다쓰코는 요코에게 말했다.
“그래요…….?”
요코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이 다쓰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걱정이 되어 울고 있었어.”
“울었어요? 엄마가?”
요코는 난처한 듯이 젓가락을 놓았다.
“울게 놔둬, 그런 엄마는…….”
다쓰코의 눈은 웃고 있었다.
“가엾어요, 울었다면.”
“하지만 요코를 야단치지 않았어?”
다쓰코는 어젯밤부터 요코가 자신이 데려온 아이라는 것을 알고 집을 뛰쳐나온 게 아닌가 해서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야단 맞지 않았어요.”
“그럼 왜 아줌마 집에 왔니?”
“………..”
요코는 어제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나쓰에에게 목을 졸린 것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무서웟다.
“야단도 맞지 않았는데 몰래 집을 뛰쳐나오다니 우스운 일이구나.”
‘역시 요코는 자기가 데려온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지도 몰라.’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요코의 모습을 보자 다쓰코는 차츰 불안해졌다.
“오늘도 집에 가고 싶지 않니?”
“아니, 갈래요.”
요코는 밝은 목소리로 분명히 말했다.
“오빠하고 싸웠니?”
“아뇨.”
“친구들이 뭐라고 그랬나 보구나.”
“아뇨.”
“그럼………?”
다쓰코는 요코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요코, 아빠가 좋아?”
“좋아요.”
“엄마는?”
“좋아요.”
요코의 눈빛이 약간 흐려지는 것을 다쓰코는 분명히 본 것 같았다.
“오빠는?”
“아주 좋아요!”
요코는 방긋 웃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애는 집을 나왔을까?’
보통 때 같으면 다쓰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을 테지만 요코처럼 얌전한 아이가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아 이유를 어느 정도 알아두고 싶었다.
‘나쓰에한테 물어 보는 게 빠를가?’
다쓰코는 식사를 마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줌마, 우리 엄마 좋아해요?”
요코의 눈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글쎄다…….”
다쓰코는 요코의 심각한 눈을 보자 솔직하게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해. 하지만 싫은 점도 조금은 있어.”
“다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함게 갖고 있는 거야.”
“아줌마한테도 나쁜 점이 있어요?”
“그럼, 있지 않고.”
“하지만 요코는 아줌마의 모든 면이 다 좋은 걸요.”
“어머, 기뻐해야겠네.”
다쓰코는 정말 기쁘다는 듯이 빙그레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꼭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는 없어. 반대로 싫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나쁜 것도 아니고.”
“왜 그렇죠?”
“싫다고 생각하는 쪽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1학년짜리 요코에게는 어려운 말일지도 모른다.’
다쓰코는 담배를 피우면서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래 맞아. 저기, 요코의 친구 중에도 사람들을 싫어하며 욕만 하는 아이가 있지? 그럴 때는 욕하는 쪽이 나쁜 거야.”
요코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요코는 웬만한 사람은 다 좋아하지?”
“네, 그래요. 아줌마는요?”
이렇게 묻자 다쓰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줌마도 웬만한 사람은 다 좋아. 하지만 그건 아줌마에게 친절히 대해주기 때문이야. 사람이란 그다지 영리하지 못해. 그 친절한 사람이 조금만 잘못해도 곧 싫어지지.”
요코는 눈을 깜빡거렸다.
“요코도 엄마가 늘 잘해 주다가 한 번 잘못 대해 주면 싫어질지도 몰라.”
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는 어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아. 정말이야. 엄마는 언제나 내게 잘해 줬어. 그리고 잘못 대해 준 건 어제 한 번뿐이야.’
요코는 갑자기 엄마가 그리워졌다.
“웬만큼 싫은 일은 참아야 해. 싫은 일이 있다고 아줌마 집에 왔다가 이 아줌마가 싫어지면 어디로 갈 거야? 거기도 싫고 여기도 싫으면 점점 갈 데가 없어져. 그래서 마지막에는 자살도 하게 돼. 요코는 자살이 뭔지 알아?”
“알아요. 스스로 약을 먹고 죽는 거죠?”
다쓰코는 어린 요코를 상대로 자살 얘기까지 꺼낸 것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조금 싫은 일쯤은 참아야 해.”
“아줌마도 싫은 게 있어요?”
다시 요코가 반문했다.
“물론 있지. 싫은 일도, 쓸쓸한 일도.”
다쓰코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다쓰코는 어젯밤 나쓰에의 전화로 미루어 보아 아침에 부랴부랴 데리러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곱 시가 지나도록 전화 한 통 없었다. 다쓰코는 나쓰에가 어떤 하룻밤을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나쓰에는 요코의 행방을 알게 되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요코가 다쓰코에게 몽땅 일러 바쳤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요코는 얻어 온 아이예요?”
하고 도오루가 내뱉은 것도 결국 요코가 집을 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나쓰에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화가 나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도오루가 보는 앞에서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키워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게이조가 한층 더 미워졌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요코를 생각하니 자신과 도오루의 앞날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집을 나가는 것을 보면 그 명랑하고 구김살 없는 요코의 마음속에 무엇이 숨어 잇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나쓰에는 요코가 있는 한, 앞날의 모든 희망이나 행복이 끊겨 버린 것처럼 여겨졌다.
나쓰에는 하룻밤 사이에 요코에 대한 감정에 확연히 거리감이 생겼다.
이런 나쓰에의 심정을 다쓰코는 물론 알 턱이 없었다.
나쓰에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자동차 멎는 소리가 났다.
“요코다!”
도오루가 창밖을 내다보고는 현관으로 뛰어갔다.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샌 나쓰에는 눈 아래가 약간 거무스름해 보였다.
“어머, 다쓰코, 미안해.”
마중을 나간 나쓰에는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
요코가 구두를 벗어 던지고 나쓰에의 어깨에 매달렸다.
“요코!”
그것은 어젯밤 나쓰에가 미워했던 요코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쓰에는 무심코 요코를 껴안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도오루가 두 사람의 모습을 쏘아보았다.
“딴 따따 딴.”
다쓰코가 연극의 막이 내리는 것을 알리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 집에 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다쓰코가 보기에는 지금의 일은 다만 축하할 만한 한 토막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게이조와 도오루, 요코가 집을 나선 후에 나쓰에와 다쓰코는 페치카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벌써부터 그래서야 엄마로서 실격 아냐?”
다쓰코는 나쓰에의 기분전환이라도 해주려는 듯이 명랑하게 말했다. 거무스레한 눈언저리가 어딘지 침울해 보이는 나쓰에의 모습을 보자 다쓰코는,
‘자신의 배 아파 낳은 아이처럼 많이 걱정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코도 집을 나갈 만큼 컸다고 생각하면 대견하지 않아?”
“……….”
“대견하기로 말하면 정말 놀라운 아이야. 아줌마 집에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눈곱만큼도 야단 맞았다는 말을 하지 않지 뭐야.”
“……….”
나쓰에는 의아한 눈초리로 다쓰코를 바라보았다.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느냐, 도오루와 싸움이라도 했느냐 하고 물었더니 아무하고도 싸우지도 않았고 야단도 맞지 않았다는 거야.”
“………”
“1학년자리의 가출에도 탄복했지만 일체 뒷말이 없는 데 더 놀랐어.”
나쓰에는 다쓰코의 말에 거짓이 섞여 있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요코의 목에 손을 댄 어제 일을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살인 미수’라는, 신문 기사에서 흔히 보는 활자가 커다랗게 눈앞에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쓰코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쓰에는 몰래 한시름 놓았다.
“여자 아이란 어려서부터 수다스러워 남의 험담이나 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듯한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잖니? 그런데 그 애는……..”
‘어떤 부모의 자식이야?’
하는 말을 다쓰코는 얼결에 입밖에 낼 뻔했다.
7년 전에 나쓰에가 요코를 낳았다고 말했을 때도 다쓰코는 선선히 속아 주었다.
“……….모자라는 거야, 영리한 거야?”
“글쎄, 어느 쪽인지………”
나쓰에는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튼 요코는 좋은 애 같아. 머리도 좋지만 마음 바탕이 됐어.”
“그렇지도 않아………..”
나쓰에는 다쓰코가 요코를 칭찬하는 바람에 차츰 마음이 무거웠졌다.
요코가 어제 일을 다쓰코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나쓰에로서도 감동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순순히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걱정했겠지?”
“글쎄……..”
‘사이시의 자식을 걱정할 리가 없지.’
“나쓰에, 피곤한가봐. 잠을 설친 거야? 요코를 어제 돌려보낼 걸 그랬나?”
다쓰코는 나쓰에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단지 피곤해서라고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