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지난 주일에는 의심의 사도로 알려졌던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신하게 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 사건의 충격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 죽음에 크게 실망한 제자들이 낙향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뜨거운 체험을 갖고 감격에 겨워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때 체험을 다른 여러 제자들과 나누게 되는데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 요한복음과 오늘 루카복음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은 부활하셨다!"입니다. 그리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부활에 확신을 갖게 됐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기도하고 노래하며 세 번째 부활 주일을 지내고 있는데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부활의 확신에 젖어들고 있습니까?
오늘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 사도 모습을 보지만 그 역시 어느 날 한순간에 최고 사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생계 수단인 배도, 그물도 버리고, 가족마저 떠났던 예수님과 3년간 공생활이 있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죽음 위협이 다가왔을 때 스승을 배반하고 꽁무니를 뺐던 그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에도 유령으로 알고 겁에 질려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제자들처럼 미숙한 베드로였지만 이제는 목숨 바쳐 예수님을 증언하는 최고 사도가 됐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서서히 성숙돼 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한 순간 신앙의 성숙을 기대합니다. 단숨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단숨에 하느님 축복이 나에게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아프리카 사막에 사는 어느 부족 추장이 서울에 왔습니다. 서울에 온 추장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휘황찬란한 문명에 그만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어디서나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였습니다. 추장이 사는 아프리카는 늘 물이 부족해서 무척 고생스러웠으니까요. 그래서 추장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수도꼭지를 잔뜩 사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고향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틀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지니까 집에 가져가서 꽂고 쓰시오."
사람들이 신나하며 수도꼭지를 집으로 하나씩 가져가 붙이고는 틀어봅니다. 그런데 물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집안에서 물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지요. 과정도 없이 결과만을 고대한다면 미신행위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신앙이 이 아프리카 추장만큼도 못한 것은 아닐까요?
아무 준비도 없이, 하느님께 감사 한번 드린 적도 없이 오히려 수도 없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삶을 살고는 필요하면 어느 날 하느님께 불쑥 청합니다.
"하느님, 해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부활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성급하고 내가 나로 꽉 차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 때 유행했던 유행가 '가시나무새' 가사에도 있더군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나로 꽉 차면 예수님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삶에서 나를 죽이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나를 떠나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살펴야합니다.
지금 가족과 관계가 어렵다면 '나'에서 벗어나 아내 입장이 돼보고 남편 입장이 돼보고, 자녀 입장이 돼보면 조금은 쉽게 해결이 될 것입니다. 이웃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욕심을 줄이고 나를 비우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나를 완전히 죽이는 각고와 인내 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희망하는 삶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주님과 이웃을 채우는 노력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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