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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같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합니다. 반은 흐리고 비가 내렸습니다. 이런 5월은 언제 경험했는지 기억도 없습니다. 아무튼 아픈 날들이 많아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덥잖게 흘러갑니다. 어쩌겠습니까? 살다보면 그런 날들도 있는 거죠. 때가 그런 만큼 별로 안타깝지도 않습니다. 덕에 거리두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면도 있으니 말입니다. 핑계 김에 안 나갔으니까요. 그나저나 정말 맘껏 다니고 싶습니다. 귀로만 만나는 것도 한계가 있지, 답답합니다. 보고 싶고요. 이제 곧 백신을 맞습니다. 점점 많아집니다. 이 여름만 잘 버티면 어쩌면 가을에는 자유로운 만남들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
사실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벌써 1년 반이 되어갑니다. 그 긴 시간을 그래도 잘 버텨왔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가을의 전설을 만들 준비나 할까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 꿈이 있으니 오늘을 견디는 것이지요. 기회 있을 때 백신 맞고 그 날을 빨리 당기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새 달을 기다립니다. ^&^
2021년 5월 29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5-23주일설교(어른이 되셨나요?)
성경 히브리서 5 : 12 - 14 2021년 5월 23일
설교 : 어른이 되셨나요? 김종우 목사
사람이 태어나면 자라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론 잉태되는 순간부터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자라갑니다. 그렇게 엄마 뱃속에서 자라다가 때가 되면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서도 자라나는 것은 쉬지 않습니다. 만약 자라지 않는다면 어디엔가 이상이 생긴 것이지요. 병들었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성장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의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그 순간이 아마도 탄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자라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만약 자라지 않는다면 이 역시 병들었거나 죽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엡 4 :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르리니” 아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적인 문제이니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육적인 문제라면 당장에 눈에 보이니 큰일 났다고 야단이겠지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를 않으니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릅니다. 우리 자신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이것부터 깨닫는 사람이 성장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십니다.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물론 신앙에 입문한지 겨우 1,2년이 된 사람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벌써 10년을 넘어 20년, 30년을 교회에 다니는 신자도 무슨 성경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나서 몇 장 몇 절’ 하면 이 성경이 신약에 있는 것인지 구약에 있는 것인지 성경을 다 훑어 내리는 성도들 있지요.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그런데 선생은 고사하고 성경의 초보도 모르는 처지에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질책이지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자라지 않는 것은 그것이 희귀병이 아닌 한은 기본적으로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도 역시 먹지 않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모르는데 신앙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먹지 않고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먹어야 합니다. 교회를 열심히 성실하게 다니면 신앙이 자라리라 생각하는 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지요. 아이가 먹지는 않고 잘 논다, 그래서 잘 자란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일단 하나님 말씀 곧 영의 양식을 먹어야 자랍니다. 그런데 말씀은 일주일에 겨우 한두 번 설교 말씀 듣는 것으로 때우고 다 먹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고서 자라기를 바란다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생각해보십시오. 더구나 그 먹는 음식이 혹 불량음식 아니면 부정식품 또는 상한 것이라면 어쩌겠습니까?
복잡한 것은 접어두고 일단 말씀을 보도록 합니다. 히 5 : 12 - 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아멘! 여기 두 가지 음식이 있고 두 가지 사람이 있고 그래서 두 가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선 두 가지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 곧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이지요. 더구나 때가 오래 된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연륜이 장성한 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성경을 모르면 어린아이일 뿐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연륜만 앞세워 교회 중직을 맡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교회를 주관하는 꼴이 된 셈이지요. 그나마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이끌어간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중직을 맡긴 사람들이나 그것을 맡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이겠지요. 모두 미숙한 사람들이고 그러니 그 교회 역시 미숙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세상처럼 자기 배나 불리고 자기 세력만 키우면서도 교회가 제대로 부흥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하나님의 원하시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그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먹는 것이 다릅니다. 어린아이는 젖을 먹고 장성한 자는 단단한 식물을 먹습니다. 그들의 결과를 먼저 보겠습니다. 13절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어린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교회를 다니고는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 반대로 장성한 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쉬울 것입니다. 장성한 자는 어떤 결과를 나타냅니까? 14절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예,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한다고 합니다. 그까짓 선악분별이 큰 문제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장성한 자의 특징이 결국 선악을 분변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선악을 분변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선악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착하다, 악하다 수준의 분변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세상 윤리도덕 수준의 책으로 만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마 19 :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다시 말해서 ‘선하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 백성의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약속하신 것도 영생입니다. 그 영생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요 6 : 53 - 5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사실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이 놀라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으라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63절에서 설명해줍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은 영으로 말씀하시는데 육으로 들으니 못 알아듣고 도망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데 소위 가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척하나 마귀의 말입니다. 이것을 분변하는 것이 곧 선악을 분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이것을 분변하지 못하고 그냥 먹으면 마귀의 말 곧 생명을 죽이는 독을 먹는 줄도 모르고 먹는 것입니다. 반드시 분변해서, 쉽게 말한다면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린아이와 달리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게다가 연단까지 받습니다. 그야말로 갈수록 태산이네요. 장성한 자가 되는 길, 만만한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단 세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고 선악을 분변하는 것입니다. 우선 ‘지각 있다’라는 말씀을 봅니다. 시 53 : 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이 말씀을 보니 지각 있는 자와 하나님을 아는 자를 대등하게 보고 있습니다. 시 14 :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마찬가지입니다. 지각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요일 5 :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역시 하나님이 지각을 주셔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말씀합니다. 곧 지각이 있어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기에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입니까? 나쁜 짓 하지 않고 남 해치지 않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일반 윤리도덕을 배우는 사람들도 모두 할 줄 아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과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다 비슷한 수준으로 사는 거네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고 그것만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져야 한다면 너무 과격한 처사가 아닐까요? 그 사람이나 우리나 뭐가 다릅니까?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그것으로만 편 가르기를 한다면 우습지요. 우리 하나님이 고작 그 수준의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시 145 : 3 - 5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아멘!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요 4 :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렇지요.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도 없습니다. 딤전 6 :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분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수준 또한 영적이어야 합니다. 육적 세상에 머무는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그것은 기본이고 우리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다시 보겠습니다. 눅 18 : 1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아멘! 하나님만이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 악입니다. 악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쫓겨난 자입니다. 하늘의 천사장에서 쫓겨나 마귀 사단이 된 자입니다. 그가 공중권세를 잡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곧 악입니다. 때문에 영계에서는 성령과 악령으로 구분되고 이곳 육계에서도 하나님의 사람과 마귀의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이지요. 하기는 이것조차 모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백성을 이 땅에 세우십니다. 태초에 아담을 불렀고 다시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애굽에서 번성케 하여 모세를 통해 이끌어 내셨습니다. 약속의 땅에 당신 백성을 심으셨고 제사장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 세상에 당신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되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하나님은 구원자까지 약속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오히려 대적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쩌시겠습니까? 더 이상 어쩌시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을 들어봅니다. 마 23 :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육적 이스라엘 곧 혈통으로 이어지던 이스라엘은 끝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은 영적인 조건으로 바뀌었지요. 요 1 : 12 -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멘!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먼저 부름 받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냥 구원 받고 영생하는 수준으로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음 아담을 창조하신 것도 이어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를 택하신 것도 결국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그것이 담겨 있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누구 나라가 어디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겁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곳에 임하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을 쥐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우리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택함을 받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로 제사장 나라를 삼으시고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벧전 2 :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가 제사장이 되었으면 마땅히 세상에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문제가 생깁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변질되어 우상천국을 만든 것처럼 지금 또한 그렇게 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24 - 25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이 기쁜 구원의 소식에 다른 것이 끼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밭에 두 가지 씨 곧 말씀이 뿌려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것은 선이고 마귀의 것은 악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이고 마귀의 말은 사망입니다.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지만 지금 문제가 된 곳은 바로 주님의 밭 곧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마귀의 말이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그것을 분별하는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왜요?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 겉으로 보면 착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이랍시고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데 누가 의심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장성한 자는 바로 이 선악을 분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과 마귀의 말을 분변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단도 따라옵니다. 예, 그렇습니다. 결코 쉽지 않다는 뜻이지요. 어려움이 따릅니다. 혹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면 성도들로부터 곱지 않는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그나마 이름도 없는 조그만 교회라면 문제랄 것도 없겠지요. 누가 알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다 아는 이름 있는 큰 교회라면 문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야단나겠지요. 더구나 존경 받고 추앙 받는 목자라면 큰코다칠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연단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무튼 이 말씀을 분변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지각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적인 수준의 능력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뜻이지요. 그 지각을 갖추기 위해서는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젖 먹는 정도의 능력 가지고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단단한 식물이 무엇인가요? 여기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때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 말씀을 먹지요. 똑같이 먹는데 누구는 젖을 먹고 누구는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입니다. 즉 모두가 성경을 읽고 듣고 보고 배우는데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잘 알듯이 성경에는 중요한 4 가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역사와 교훈과 예언 그리고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이 들어있습니다. 역사와 교훈은 구태여 해석이나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기에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물론 그 역사나 교훈이 장차 있을 일의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노아 때, 롯 때와 같다고 하셨으니 그 역사적 사실은 다소의 해석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나 교훈은 그냥 읽어도 성도들이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먹을 수 있는 젖과 같은 음식이지요. 문제는 예언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먹기 힘든 음식입니다. 단단한 식물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먹는 자가 장성한 자요 선악을 분변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선악을 분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장래의 일인데 누가 감히 풀어내느냐 하는 것이지요.
일단 이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세상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묵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로 받아 말씀하였습니다. 사 7 : 14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한 아들이 올 것입니다. 그 아들이 누구로 올 것인지 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도 모릅니다. 그 후 6백년이 넘도록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니 실체가 나타나기 전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니 반드시 이룰 때가 옵니다. 합 2 :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아멘!
때는 반드시 옵니다. 물론 그 때도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우선 정한 때가 있다는 것이고 계시를 받는 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감히 ‘나다,’ 하고 나서겠습니까? 마지막 때 우리는 바로 그 계시 받은 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게 살 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지각이 있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하신 대로 장성한 자 곧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전하는 말씀의 선악을 분변할 것입니다. 즉 하늘의 말씀인지 세상 말인지, 하나님 말씀인지 사람 말인지, 영인지 육인지 분변합니다. 모두 어른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이저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요건이 있을 것입니다. 쉽게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사람만의 특징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흔하게 나오는 답변 중 하나가 이성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감성적 존재가 인간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일반 동물들도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동물의 감정과 사람의 감정은 차이가 없을까요? 똑같이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 그 감정의 회로를 차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똑같이 본능에 따라서 움직일까요? 그러나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감정은 없어도 이성적 판단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감정의 개입이 없는 이성적 판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아마도 그것을 겨냥하고 작업을 하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식수에 감정 억제제를 투여하였습니다. 물은 연한 청색을 띄며 이름을 ‘블루’라고 하였습니다. 수시로 마시는 물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어떤 물질이 섞여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전체 탑승객의 관리자인 ‘리처드’만 알고 있습니다. 바로 감정 억제제입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어쩌면 공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요인일 수 있습니다. 다툼이나 분열 등 충돌이 일어난다면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생활범위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에 피할 곳도 없고 큰 사고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모든 기획이 무산되고 오랜 시간 계획하여 실행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살리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이 무산되고 인류가 멸망당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고려했을 대책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실이 드러난다면 당사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우리가 사람 맞아? 그냥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하잖아. 산다는 의미가 뭐지? 우리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어쩌면 ‘존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왜 존재해야 하나? 왜 살아야하지? 삶의 의미가 뭐지? 그러면서 다른 한편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소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연관성도 생각합니다. 나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 사회적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에게서 출발하여 확장되어갑니다. 그 안에서 질서가 필요하고 위계가 생깁니다.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단한 기획입니다. 처음부터 대비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양육하였습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통제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우주선에 탑승하고 지구를 떠났습니다. 더 이상 살기 힘든 지구를 버리고 그 비슷한 행성을 찾았기에 그곳으로 이주할 원대한 기획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시간만 86년입니다. 우주선 안에서 세대가 교체될 것입니다. 목적지에는 새로운 세대가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탑승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대를 이어주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사실은 리더인 리처드 한 사람만 알고 있습니다. 모든 대원은 통제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자연히 억제할 수 있는 약물이 투여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서 이제는 십대 후반 이십 대에 들어섭니다. 우연히 마시고 있는 물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됩니다. 느끼고 싶어, 그 욕망으로 ‘블루’를 마시지 않습니다. 차츰 이성에 대한 갈망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한 이성에 대한 경쟁도 생깁니다. 리처드가 자기네를 속이고 있다는 것에 반발이 생기고 탑승객이 된 이 30명은 자신의 인생도 없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소위 ‘나도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의견충돌, 반항과 다툼과 나아가 반역이 일어납니다. 결국 리처드는 희생되고 우주선 안은 혼란에 빠집니다. 두 팀으로 분열되어 싸웁니다. 감정이 폭발하니 걷잡을 수 없게 흔들립니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이제는 살기 위해 왔다 갔다 합니다. 힘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생존본능이라 할 수 있지요. 달리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긴박감과 불안, 공포를 야기합니다. 자연히 권력을 가진 자가 우세합니다. 세상이 그렇지만 물론 꼭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머리 쓰기에 달려있고 뜻밖의 우연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일단 리더가 사라지면 힘을 쓰던 조직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다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한번 감정의 폭풍을 지나자 깨닫는 바가 생깁니다. 평온을 찾아 재정비가 이루어집니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과연 사람의 본성은 선일까요, 악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생존과 연결될 때 제대로 작용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지요?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본능적 욕구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은 구별될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통제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훈련만으로 가능할까요? 그리고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만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보이저스’(Voyagers)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혼자 사세요? 물론 요즘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전에는 혼자 산다는 것이 좀 유별난 일이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그런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래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1/3이나 된다는 통계도 나왔습니다. 그러니 유별날 것도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령화되면서 배우자 한쪽을 먼저 보내고 나면 홀로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아픈 젊은 세대를 반영하는 면도 있습니다. 소위 ‘N포 세대’라 하여 어쩔 수 없이 나이든 청년들이 마지못해 택한 1인 가구도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택하여 홀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배우자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 간섭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 편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배우자의 잔소리든 부모님의 간섭이든 구애됨이 없으니 얼마나 마음 편하겠습니까. 그래서 구태여 결혼하지 않아도 나이 차는 대로 빨리 독립하여 나와서 사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황혼 이혼의 경우도 얽매여 살다가 자식들 모두 출가시키고 홀가분하게 자유를 누리려고 선택합니다. 젊든 늙든, 남자든 여자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은 바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부담될 필요도 없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기 뜻대로 맘껏 활용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만 없다면 시도해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1인 가족도 가족이다, 이 말은 일단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1인 가구도 가구 수에 넣어야 한다, 그러면 말이 됩니다. ‘가족’이란 아무래도 2인 이상이 그려집니다. 말 자체가 집합명사이니까요. ‘가구’라면 수를 헤아리는 단위이기 때문에 ‘1인 가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성원이 한 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말을 해도 ‘홀로 가족’보다는 ‘1인 가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싶습니다. 아무튼 혼자서 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각자의 기호와 경우가 다르기에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본인이 선택하여 그렇게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유진아’ 선택적 ‘홀로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살다가 아버지가 바람나 가출했다가 돌아오셔서 집을 나오게 된 듯합니다. 아파트를 얻어 홀로 사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이 나서 집안에 CCTV를 설치하고 어디서든 시시때때로 들여다봅니다. 감시가 아니라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지켜보는 것입니다. 보호이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봅니다. 옛날과 다르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우들이 찾아와 예배드리는 모습까지 다 봅니다. 어머니 유산으로 남긴 집을 차지하였습니다. 따지자면 진아가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아비에게 양보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더 즐겁게 사십니다. 엄마에게 미안한 감정은 없어 보입니다. 볼수록 화가 납니다.
카드회사 콜센터에서 일합니다. 잘 아는 대로 감정노동자입니다. 고객의 전화를 받고 응대하는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얼마나 격차가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차이는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역시 혼자서 응대하니 진아는 큰 어려움 없이 자기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신입사원 ‘수진’을 붙여줍니다. 훈련시키라는 것이지요. 혼자의 생활이 깨집니다. 그 불편함을 옆 자리에서 배우고자 하는 수진이 그대로 받습니다. 선배로 깍듯이 모시려 해도 매우 힘듭니다. 귀찮아하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니 말입니다. 결국 무단결근까지 합니다. 수진이는 지방에서 올라와 역시 홀로족입니다. 그래도 조직과 어울려보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자기 마음 같지 않습니다.
진아 사는 아파트 옆집에 홀로 살던 젊은이가 세상을 떠났답니다. 갑자기 휑하니 빈 그 집을 언뜻 들여다봅니다. 얼마 전에도 본 듯한데, 언제 갔지? 새로 이사 온 사람은 다리가 불편한 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웃사람들과 마음과 힘을 모아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을 위해 제사까지 드립니다.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하고 청합니다. 관심도 없는데 왜 건드리지? 하는 태도입니다. 진아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 하루하루 지냈습니다. 사무실 근무 외에는 스마트폰과 이어폰을 달고 지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사무실과 집, 그게 다입니다. 그런데 건드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혼자서 살 수 있는 것일까요? 볼 사람 없이, 말 걸 사람 없이 그냥 오로지 홀로 살 수 있을까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처럼 사고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떻든 사람들 속에서 삽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수단이 사람들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사실 자유를 외치며 ‘혼자’를 고집한다 해도 혼자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하며 살아야 합니다. 1인 가구이든, 홀로족이든 우리는 사회 속에서 존재합니다. 행여 관계가 두려움을 유발할까 지레 겁을 먹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자신의 삶을 보다 성숙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Aloners)을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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