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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학/행장.시장(謚狀)
송암 김면장군 행장-윤선거 지음
야촌(1) 2016. 5. 30. 00:50
■ 송암(松菴) 김면(金沔) 장군 행장(行狀)
절충장군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 증정헌대부 이조판서 김공 행장
折衝將軍 守慶尙右道兵馬節度使 贈正憲大夫 吏曹判書 金公 行狀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찬
공(公)의 휘(諱)는 면(沔)이고, 자(字)는 지해(志海)이고, 호(號)는 송암(松菴)이다.
김씨(金氏)의 계통은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에서 나왔는데, (경상도) 고령현(高靈縣)을 본적(本籍)으로 삼고, 대대로 고령현의 양전촌(量錢村)에서 살았다.
7대조 휘(諱) 남득(南得)은 고려(高麗) 말엽에 현달(顯達)하여 일찍이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내고, 풍영루(風咏樓)를 창건(創建)하였는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기(記)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시(詩)가 있다. 그는 책훈(策勳)되어 추충 보조좌리공신(推忠補祚佐理功臣)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가 휘(諱) 무(畝)를 낳았는데,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지냈다. 사간은 휘(諱) 사행(士行)을 낳았는데, 여산군수(礪山郡守)를 지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되었다. 사복시 정이 휘(諱) 자숙(子肅)을 낳았는데,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공(公)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諱) 장생(莊生)인데, 감찰(監察)을 지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조부(祖父)는 휘(諱) 탁(鐸)인데, 도승지(都承旨)를 지냈고, 형제(兄弟) 6인중에 3인이 현달(顯達)한 벼슬에 올랐다.
선고(先考)는 휘(諱) 세문(世文)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냈고, 사촌동생 김수문(金秀文)과 함께 모두 장수(將帥)의 재질이 있었는데, 김수문은 여러 번 병사(兵使)를 맡아서 공(功)을 세우고, 관직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선비(先妣)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인데,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을 지낸 휘(諱) 중손(仲孫)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고양군(高陽郡)의 구리(舊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뜻을 두어 과거 준비하는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절친한 벗이 되었으며, 군자(君子)의 고을에서 사숙(私淑)하여 몸을 다스리어 성리학(性理學)을 강독하고 닦아서 후생(後生)을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배우는 자들이 그 문하(門下)에 줄지어 모여들었다.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유일(遺逸)로서 발탁되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자, 힘써 대궐(大闕)에 나아가서 사은(謝恩)한 다음에 바로 고향에 돌아가 조용하게 구학(丘壑)을 지키면서 세상에 출세할 생각을 다시 하지 않았는데,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에 왜란(倭亂)이 일어나서 여러 진(鎭)들이 모조리 무너지자, 영남(嶺南) 지방의 온 도(道)가 장차 온전하고 무사한 땅이 없을 지경이었다.
공이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정의(正義)를 부르짖고 조종도(趙宗道)ㆍ곽준(郭)ㆍ문위(文偉) 등과 더불어 거창(居昌)ㆍ고령(高靈) 사이에서 군사를 규합한 다음에 군사와 군량미를 조달하고 모집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달려왔다.
왜적(倭賊)들이 지례(知禮)ㆍ금산(金山)ㆍ개령(開寧)의 지경에 주둔한 군사가 10만 명에 가깝다고 일컬었는데, 공이 우지(牛旨) 사이에 진(陣)을 치고, 그 왜적의 충돌(衝突)을 막으면서 군율(軍律)로써 호령하니, 그 군사의 위용(威容)이 지극히 장엄하여 여러 의병(義兵)들이 공에게 의지하며 존중하였으므로, 낙동강(洛東江)의 오른쪽 (경상도) 사람들이 공을 대장(大將)이라고 일컬었다.
개령(開寧)에 주둔한 왜적들이 많은 무리를 이루어 와서 장차 우지(牛旨)를 엿보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맞아 싸워 그 예봉(銳鋒)을 크게 꺾어서 물리쳤다.
이윽고 성주(星州). 무계(茂溪)의 승리를 얻었는데, 왜적의 화함(花艦)을 포획하고 재화(財貨)와 보물을 얻은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공이 모조리 관찰사에게 수송(輸送)하여 보내어 행재소(行在所-임금이 임시 머물고 있는 곳)에 바치도록 하였다.
6월에 조정(朝廷)에서 공을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임명하였으며, 9월에 공을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하였다가 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시키어 많이 포상(褒賞)하였다.
11월에 임금이 공의 위망(威望)이 가장 드러났다고 하여, 이에 공에게 의병 대장(義兵大將)의 칭호를 내리고 1도(道)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는데, 교지(敎旨)가 이르자, 공이 진중(陣中)으로 맞아들여 왕명(王命)에 절하고 통곡(痛哭)하니, 온 군사가 감동하였다.
그때에 호남(湖南)의 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 공이 종사관(從事官) 문홍헌(文弘獻) 등과 더불어 거창(居昌)에 진(陣)을 쳤는데, 호서(湖西)의 여러 의병장들도 또한 가까운 지경에 있었으므로, 공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개령(開寧)에 주둔한 왜적을 함께 소탕할 것을 모의하였다.
최경회 공이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고 여러 소장(小將)들도 모두 이르렀으므로, 약속을 이미 정하였으나 마침 군교(軍校)가 전투할 시기를 잘못 잡아서 큰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3도(道)의 군사가 모여서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면서 왜적을 사로잡거나 목 베는 일을 서로 계속하였으므로, 왜적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윽고 명(明)나라 군사가 서울을 회복(恢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서 왜적들을 내몰아 남하(南下)하였는데, 두 왕자(王子)가 전에 왜적에게 포로 된 바가 되어 바야흐로 적중(賊中)에 있었으므로, 공이 또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길을 막아서 탈취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개령의 왜적과 성산(星山)의 왜적이 합세하여 다시 세력을 크게 떨친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곽준(郭)과 오장(吳長)을 방백(方伯)에게 보내어 장차 군사를 옮겨 공격하기로 상의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 정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교지(敎旨)를 유시(諭示)하였다.
2월에 공이 왕명을 받들고 이에 호남(湖南)ㆍ호서(湖西)의 군사들과 함께 금산(金山)의 경계에 나아가 진(陣)을 치니, 개령ㆍ성산의 여러 왜적들이 주둔한 군사를 거두어서 도망하여 가므로, 공이 마침내 개령에 나아가 진을 치고서 선산(善山)의 왜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여, 바야흐로 장차 요해지(要害地)에 매복(埋伏)을 설치한 다음 죽현(竹峴)의 길을 차단하려고 군모(軍謀)가 크게 정해지자 부서 나누기를 이미 정비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병이 나서 3월 11일에 진중(陣中)에서 졸(卒)하니, 군민(軍民)들이 애통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곽준(郭)ㆍ문위(文偉)ㆍ정유명(鄭惟明)ㆍ성팽년(成彭年) 등이 함께 염습(殮襲)을 참관하여 24일에 고령(高靈)의 칠동(七洞)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지냈다. 감사(監司) 김성일(金誠一)이 행조(行朝, 행재소(行在所)에 치계(馳啓)하여 계문(啓聞)이 이르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특별히 명하여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하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문(祭文)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예(例)에 따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가증(加贈) 되었고, 광해군(光海君) 초년에 또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장수(將帥)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강개(慷慨)하게 큰 절개가 있는데다 유술(儒術)이 저절로 드러나고 덕망(德望)과 인선(仁善)으로 의로움을 행함으로 해서 사류(士類)들에게 추앙받았으나, 공은 주저하면서 뒤로 물러나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 군자(君子)다운 행동이라 칭하였고 유람(遊覽)하면서 돌아다니는 습관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힘쓰는 일은 근실한 공부(工夫)에 두었으므로,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이 항상 칭송하고 성심으로 복종(服從)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사공(府使公), 김세문(金世文)이 북진(北鎭), 경원(慶源)에서 졸하였을 때는 공이 남쪽의 고향(故鄕)에서 도보(徒步)로 급히 달려가서 몸소 영구(靈柩)를 부축하여 돌아왔는데, 비록 전패(顚沛)의 위급한 즈음에 있으면서도 상제(喪祭)를 한결 같이 예제(禮制)에 따라 행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집에서 모시고 살 때는 좌우(左右)로 나아가 봉양(奉養)하며 정성과 공경을 갖추 다하였는데, 상(喪)을 당하기에 미쳐 애척(哀戚)과 역복(易服)을 예절(禮節)에 알맞게 하 기를 한결같이 전의 아버지상 때와 같이 하였다.
거처하는 마을의 뒷산기슭에 나아가, 선영(先塋)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땅에다 대(臺)를 쌓아 그 이름을 회선대(懷先臺)라고 하여, 아침저녁으로 무덤을 바라보면서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의탁하였다.
공은 서제(庶弟) 4인이 있어 사천(私賤)이었는데, 본종(本宗)에서는 주고서 대속(代贖) 할 만한 노비(奴婢)가 없었으므로, 이에 어머니 집안의 물자(物資)를 가져다가 그들을 바꾸었으나 4인에 대하여 줄 것이 없어 궁색하자, 또 어머니 집의 물자를 가져다가 도왔는데,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가 의병장(義兵將)으로 있을 때에 가족(家族)이 10리(里) 바깥에 있었지만 한 번도 가서 보지 아니하였고, 유리(流離)하고 굶주렸으나 조금도 고휼(顧恤)하지 아니하였다.
선산(先山)이 있는 곳을 지나갔을 때는 본현(本縣)에서 제수(祭需) 올릴 것을 준비하였는데, 공이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능침(陵寢)에도 제사지내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공청(公廳)에서 마련한 것을 받아서 나의 선조(先祖)에게 제사를 지내겠는가?” 하고, 제문(祭文)을 지어서 무덤에 고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공의 결백한 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가 거창(居昌)에서 의령(宜寧)을 순행(巡行)할 때에 종사관(從事官) 12인, 군관(軍官) 40인, 군졸(軍卒) 수백 명이 스스로 따랐는데, 여러 가지 깃발[旌旗]이 연달아 20리에 뻗쳤으므로, 혹자는 공이 짐짓 자랑하고 뽐내는 행렬(行列)을 짓는다고 의심하였으나 공의 뜻은 실지로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모두 조서(鳥鼠) 처럼 달아나 숨어서 군사의 위세(威勢)가 떨치지 못하고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않을까 의심하였기 때문에, 위무(威武)를 크게 벌여서 이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 정인홍(鄭仁弘)ㆍ곽재우(郭再祐)와 같은 때에 군사를 규합하였는데, 곽재우는 감사(監司) 김수(金睟)가 군사들에게 옹호되어 왜적을 피해버린 것을 보고 격분하여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 죄목(罪目)을 헤아리니, 김수도 또한 곽재우가 교만하고 난폭하여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열거(列擧)하여 조정(朝廷)에 보고하였다.
장차 감사와 의병장사이에 서로 다투려는 형세가 보이자, 공은 ‘금일에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선무(急先務)이므로, 곽재우는 마음대로 국가의 관리[王官]를 쫓아낼 수 없을 것이고, 김수 또한 의병(義兵)을 모함에 빠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마침내 글을 만들어 보내어 그들을 서로 화해시켰기 때문에 변고(變故)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정인홍은 성격이 남을 시기하여 이기려고 하였고, 그 무리 중에 권양(權瀁) 같은 자는 경솔하고 약삭빠르며 패려하고 거짓되어 자기스승을 추켜세워 여러 의병의 우두머리를 삼으려 하였는데, 공의 위명(威名)과 성적(聲績)이 정인홍의 위에 높이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로 선동하고 비방(誹謗)을 조장하여 여러 사람들이 함부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대장(大將)에 임명되기에 미쳐 임금이 은총(恩寵)의 교지(敎旨)를 내려서 공을 포상(褒賞)하자 정인홍은 원한을 머금고 서로 승강이하는 일이 많았으나, 공은 모두 그 주장을 받아들이고 따지지 아니하니, 정인홍도 또한 감히 성질난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인홍은 자기 재주를 믿고 다른 사람에게 괴팍하게 굴며 힘써 남의 위에 올라서려고 하였으므로, 관련하여 알게 되었던 자들은 이끌려 들어감을 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모함(謀陷)하여 해를 입혔는데, 공은 능히 미워하지 아니하고 엄정하게 이치로써 이겼으므로, 조령(鳥嶺) 오른쪽에 거주하면서 끝내 흉간(兇奸)이 더럽게 패배시킨 바가 되지 아니한 사람은 오로지 공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같이 종사하였던 자들은 모두 충성과 신의로써 서로 맺어져서 생사(生死)의 위기에도 변하지 아니하였는데, 그 뒤 곽준(郭)과 조종도(趙宗道)는 황석산성(黃石山城)을 같이 지키다가 산성이 함락되자 절개를 지키고 모두 죽었다.
조종도는 시(詩)를 짓기를, “먼 산성(山城)을 순행하는 중에 죽는 것 또한 영광이로다[巡遠城中死亦榮].”라고 하였는데, 대개 역시 공에게서 얻은 바가 있는 것일진저.
아! 공이 돌아가신지 70여년 만에 함안(咸安)의 조봉원(趙逢原)이 고령현감(高靈縣監)이 되어 처음으로 많은 선비들을 창도(唱導)하여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공을 향사(享祀)하였으며, 또 공의 묘소에 갈석(碣石)이 없다고 하여 공의 세손(世孫)들에게 고하여 돌을 다듬어 비명(碑銘)을 청하게 하고 관가(官家)에서 재력(財力)을 내어서 도와주었다.
공의 전후(前後) 부인(夫人)이 모두 종실(宗室)의 따님이었는데, 두 분이 다 자식이 없어서 공의 동생 현령(縣令) 김자(金滋)의 아들 김의립(金毅立)을 데려다 길러 후사(後嗣)로 삼고자 하였으나, 김자는 출계(出系)하여 판윤공(判尹公), 김수문(金秀文)의 후사가 되었고, 김의립도 또 형제(兄弟)가 없었으므로, 그 본가(本家)로 도로 돌아갔다.
공이 죽은 뒤에 이씨부인(李氏夫人)은 그 선조(先祖)의 제사(祭祀)를 김의립에게 옮겨 주고 공의 후사를 부탁하였다. 김의립은 현령(縣令)을 지냈고, 그 아들 김정황(金鼎黃)은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모두 공의 제사를 받든다고 하여 녹권(錄券)에 수록됨을 입었다.
김정황은 아들이 4인이 있었는데, 그 장자(長子) 김화진(金華鎭)이 아버지의 명(命)을 받들고 나에게 와서 공의 행적(行蹟)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고 당시의 문인(聞人)에게 비명(碑銘)을 요구하여 조후(趙侯, 조봉원)에게 돌아가서 고하였다. 내가 김화진 부자와는 집안끼리 통래(通來)하는 의리가 있고, 조후에게는 뜻을 같이하는 벗이 되기 때문에, 문득 그 가승(家乘)의 것을 주워 모아서 위와 같이 차례대로 적는 바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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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折衝將軍 守慶尙右道兵馬節度使 贈正憲大夫 吏曹判書 金公 行狀
公諱沔。字志海。號松庵。金氏系出新羅敬順王之後。而籍于高靈縣。世居縣之量錢村。七世祖諱南得。顯於麗季。嘗牧尙州。創風詠樓。有牧隱之記,陶隱之詩。策勳封推忠補祚佐理功臣高陽府院君。生諱畝。司諫。司諫生諱士行。礪山郡守。贈司僕寺正。正生諱子肅。贈刑曹參議。是公之高祖也。曾祖諱莊生。監察。贈兵曹參判。祖諱鐸。都承旨。兄弟六人。三登顯仕。考諱世文。通政慶源府使。與堂弟秀文。並有將帥才。秀文累分閫立功。官至判尹。妣金海金氏。禮賓寺判官諱仲孫之女。以嘉靖辛丑某月某日。生公於高陽舊里。幼而志學。不屑爲擧子業。與鄭寒岡逑諸人。爲莫逆交。淑艾君子之鄕。講磨性理之學。以敎誨後生爲務。學者坌集於門。初擧孝廉除參奉。不就。俄以遺逸擢授工曹佐郞。黽勉赴闕謝恩。卽歸守靜丘壑。無復當世念。壬辰亂作。列鎭奔潰。嶺南一路。將無乾淨地。公慷慨奮義。與趙宗道,郭䞭,文偉等。糾旅 於居昌高靈間。調募兵糧。遠近爭趨之。賊之屯於知禮金山開寧之境者。號近十萬。公陣于牛旨之下。以禦其衝突。號令以律。軍容克壯。諸義徒倚公爲重。江右人以大將稱之。開寧賊盛衆以來。將窺牛旨。公與晉州牧使金公時敏逆戰於知禮。大挫其鋒以却之。已而有茂溪之捷。獲其花艦。得貨寶甚多。公悉輸送方伯。俾上于行在。六月。朝廷拜公爲陜川郡守。敎書諭公曰。爾沔挺身糾師。刻意討賊。乃於數月之內。總得累千之兵。義氣所感。烈士響應。揚兵鼎津。則遁賊褫魄。接刃茂溪。則流尸混江。官軍一何善崩。義旅一何齊勝。卽幸天朝見憐。猛將承命。狂寇惡積。天誅當加。緬爾多士。更礪精忠。九月。拜掌樂正。尋陞僉知中樞府事。 以多褒之也。十一月。上以公威望最著。乃賜公以義兵大將之號。以統一道之軍。 敎書曰。義莫重於急病讓夷。忠莫大於忘身殉國。承命盡責。是臣子之恒規。居官貢誠。亦職分之常道。惟其不董而效其勤。不督而赴於難。方可謂之忠臣烈士。當此之時。勁兵銳卒。束手於營鎭之伍。金章玉佩。竄身於林藪之間。爾能拔跡於俎豆。繼武於箕裘。義士附尾而承風。武夫關口而奪氣。夫豈功利乎見誘。蓋非職守焉是階。惟其耿耿忠義之心。了不規規死生之際。是用拜爾慶尙道義兵大將。洒深讎恢舊業。非爾誰也。敎至。公迎入陣中。拜命痛哭。一軍感動時。湖南義兵大將崔公慶會與從事文弘獻等陣于居昌。而湖西諸義將。亦在近境。公遣使邀之。謀共勦開寧之賊。崔公率千餘兵來會。諸小將皆至。約束旣定。適軍校誤戰期不大 捷。然三道兵聚。聲勢相倚。捕斬相繼。賊不敢動。已而聞天兵恢復京師。驅賊南下。而兩王子前爲賊所虜者。方在賊中。公又欲糾合諸軍。遮道奪之。未及發。聞開寧賊與星山賊合。復有鴟張之勢。遂遣郭䞭,吳長於方伯。議將移軍擊之。癸巳正月。拜右道兵馬節度使。上特遣宣傳以諭旨。 旨曰。天兵旣克平壤。乘勝長驅。假息兇賊。逃遁相繼。卿其悉其精銳。邀截勦滅。期使隻騎不返。又以通諭于諸陣將士。協心奮勇。毋得違誤軍機。二月。公受命。乃與兩湖兵進陣金山界。開星諸賊。拔屯遁去。公遂進陣開寧。謀討善山之賊。方將設伏要害。遮截竹峴。軍謀大定。部分已整。而公忽遘疾。以三 月十一日。卒于陣中。軍民莫不哀慟。郭䞭,文偉,鄭惟明,成彭年等同視襲斂。二十四日。葬于高靈七洞先塋之下。監司金誠一馳啓行朝。 啓曰。兵使本以多病之人。養痾山林。變生之初。奮不顧身。倡義起兵。誓不與賊俱生。經年血戰。屢挫賊鋒。高靈,知禮,開寧次第收復。江右一帶至今保存者。皆其功也。長在知禮陣。經夏涉冬。暴露於風雨霜雪之中。人知其必死。而屹不動念。爲國之誠。炳然如丹。兵使除授之後。尤以任大責重爲懼。親督諸軍。進駐金山開寧之境。與善山賊相持。賊頗畏縮。燒盡府境內閭閻。顯有遁去之跡。積傷之餘。卒遘大癘。畢命軍中。長城一毀。三軍飮泣。天不助順。一至於此。啓至。上震悼。特命贈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又遣禮官。具文致祭。丁未。以宣武原從功例。加贈吏曹判書。光海初年。又遣禮官致祭。公生於將家。慷 慨有大節。以儒術自著。德善行義。大爲士類所推許。逡逡然稱退讓君子。不喜爲游行習氣。所務者在朴實工夫。宗族鄕黨。莫不稱道而誠服焉。府使公卒於北鎭。公自南鄕徒步奔往。躬扶返轊。雖在顚沛之際。喪祭一遵禮制。奉母夫人家居。左右就養。備盡誠敬。及丁憂。戚易中節。一如前喪。就所居後麓去先塋相望地。築臺名之曰懷先。朝暮粤瞻。以寓終身之慕焉。公有庶弟四人。私賤也。本宗無臧獲可與贖者。乃取母家物以易之。而四人窮無所給。又取母家物以資之。人以爲難。其將義兵也。家屬在十里之外。而一不 往見。流離饑餓。略不顧恤。行過先山。本縣爲備奠需。公却之曰。主上不能薦祀陵寢。吾豈敢受公具而享我先乎。爲文以告墓。文曰。
國家不幸。島醜窮兇。宗社爲墟。大駕西狩。當時奮發。不能自居。招集鄕兵。計保鄕井。先急後緩。歸守居昌。守將無良。使賊闌入。兇焰所爇。舊業蕩然。忠孝難全。奉祭無所。經年他守。今過故山。瞻拜封塋。昊天罔極。觀此可知公之素心也。其自居昌巡宜寧也。以從事十二人,軍官四十人,牙卒數百人自隨。旌幢旗纛。連延於二十里。或疑公徒作夸耀之行。而公之意則實惡方伯連帥輩。皆鳥鼠竄伏。軍勢不振。人心靡定。故欲以張皇威武。聳動瞻聽也。初與鄭仁弘,郭再佑同時糾旅。再佑憤監司 金睟擁兵避賊。移檄數罪。睟亦列再佑驕桀難制之狀。以上于朝。將有相鬪之勢。公以今日討賊爲急。再佑不可以擅逐王官。睟亦不可以搆陷義兵。遂作書交解之。變得不作。仁弘性本忌克。其徒如權瀁輩。輕儇悖妄。欲隆其師。爲諸義兵之首。而公威名聲績。高出仁弘之右。故煽訛釣謗。不勝噂沓。及拜大將。寵旨褒公。仁弘嗛恨。多所撕捱。公皆受而不校。仁弘亦不敢以色辭加之。蓋仁弘負才愎物。務欲上人。所與知識者。不被鉤引。則必見陷害。公能不惡而嚴。以理自勝。居嶺右而終不爲兇奸所汚敗者。唯公一人 而已。其同事於義擧者。皆以忠信相結。不變於死生。其後郭䞭,趙宗道同守黃石山城。城陷。守節以死。宗道有詩曰。巡遠城中死亦榮。蓋亦有得於公者歟。嗚呼。公歿之七十有餘年。而咸安趙侯逢源士達甫爲守於靈。始倡多士。建祠宇以享公。又以公墓無碣。諗公世孫等。俾伐石請銘。而官出力以助之。公前後夫人。皆宗室女也。俱不育。取弟縣令滋之子毅立養之。欲以爲嗣。滋出爲判尹公後。而毅立又無兄弟。還歸其宗。公歿後。李夫人以其先祀移于毅立而托公之後事焉。毅立縣令。子鼎黃縣監。俱以奉公之祀。得蒙 收錄。鼎黃有子四人。其長曰華鎭。以父命來請余記公之行蹟。求銘于當世聞人。以復于趙侯。余與華鎭父子有通家之義。而於趙侯爲同志友也。故輒摭其家乘序次如右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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