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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묵상글 (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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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저는 사제수품을 앞두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사제생활의 모토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많은 경우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씀만 거창하게 선택하고는 실천 없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기도하며 갈망했던 순수하고 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를 다시금 청해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한결같이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소중하지만 한 마리 잃은 양이 결코 그 비중이 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은 아흔아홉에 마음이 가있지만 예수님은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사람은 질보다 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양보다 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잃은 양을 찾고야 맙니다. 그리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과 같습니다. 죄인이었다가 회개하는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선한 많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 편히 계시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죄인을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어떤 죄인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나쁜 길에 들어섰을지라도 그를 두고 슬퍼하시며 안쓰러워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겠습니다.
잃은 양은 바로 사랑을 잊고 사는 나, 주님을 잊고 사는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회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과의 만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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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을 보고, 배우고, 키우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 성심 상본을 보면 하트 모양의 심장이 상처를 입은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마음의 상처, 가슴의 상처, 심장의 상처를 주님께서 입으셨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게 한 것은 우리 인간의 죄라고 하고,
그렇게 상처를 입으셨음에도 우리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라는 것이 예수 성심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흩어진 양 떼를 하느님께로 모아들이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동가식서가숙하신 분이신데
그분을 우리 인간은 십자가에 못박고 가슴에 상처를 입혔지만
그분은 그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으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허망하게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상처로 우리 상처는 낫고 구원받았다고 베드로 서간은 얘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해주셨다는 말이고
주님의 상처를 보고 우리 상처가 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상처로 어떻게 우리의 상처가 낫게 될까요?
우선 주님의 상처를 보는 사람이 상처가 낫게 됩니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 자기 상처만 보는 사람은
그 상처가 나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수백 번
우리를 위해 죽으셔도 상처가 치유될 수 없습니다.
내 상처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몰되어 있다는 것은 상처만 보고
치유를 보지 않는 것이기에 치유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 이웃의 상처만 봐도 상처가 많이 치유됩니다.
그것은 나만 상처 입은 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상처를 보게 되면 더더욱 치유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서 입은 상처를 주님으로부터 치유받는 것이고,
주님의 큰 사랑 까닭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엄마에게서도 비슷하게 상처를 치유받지 않습니까?
밖에서 상처받고 와서는 그 아픔을 엄마에게 다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상처 주는 짓에도 상처받지 않고 다 받아주고 치유해주는데
그것은 엄마의 그 큰 사랑이 당신이 받는 상처는 초월하고,
곧 당신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의 상처를 껴안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나의 상처가 이해받고 위로받는 것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나의 상처에 호하고 따듯한 입김을 불어주고 약을 발라준다고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외부의 치유가 아니라 내 안에 치유의 힘이 생겨야 합니다.
면역력이 약해 병균의 침입을 받고 상처를 받을 때 면역력을 키워야 하듯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 엄마의 큰 사랑 보고 그 사랑을 배우고 키워야 합니다.
사랑이 상처를 초월하게 하는 힘이고 치유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큰 사랑을 기리는 오늘 우리는
상처받아도 상처받지 않는 예수님의 그 큰 사랑에서
우리 상처를 위로받을 뿐 아니라 그 큰 사랑을 보고, 배우고, 키워야겠습니다.
다음 주일까지
어쩌면 월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다음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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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예수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 마음”을 지닐 수가 있을까요?
‘예수 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저는 이 비유를 들을 때마다 두 글귀가 가슴을 와 두들깁니다. 하나는“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시편 8,5)라는 감격스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노래와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2,9)하시며 지금도 저를 찾으시는 주님의 애끊는 마음이 울려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면, “예수 마음”은 무엇보다도 우선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한 마리의 양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생명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곧 그가 길을 잃었건 떠났건, 병들었건 약하건, 나를 좋아하건 미워하건, 그의 전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니, 그가 아프기에 더욱 우선적으로 그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본성은 필요한 곳으로 먼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태중에 있는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마음’(르하밈)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찾아낼 때까지”끝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이는 구원의 주체가 당신이심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먼저’찾아오시고,‘끝까지’ 찾으시는 당신의 신실하신 마음과 사랑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수 마음”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 비유 뒤에 나오는 ‘되찾은 은전의 비유’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동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되찾은 후에, 부인은 잃은 은전을 되찾은 후에,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후에,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9.32)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을 넘어서 ‘이웃과 함께 나누는 기쁨’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양 백 마리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곧 한 마리를 잃은 것이 전부를 잃은 것과 같았고, 한 마리를 찾은 것이 전부를 찾은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그토록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십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기쁘지 않고는 못 배겨나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사랑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쁨’은 사랑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곧 사랑은 가쁨을 품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 결코 멈출 수 없듯이 기쁨 또한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요한복음>사가는“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듯이, 또한 그 누구도 우리를 기쁨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테살 5,16)
“예수 마음”은 바로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자신을 건네주는 사랑의 기쁨에로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이 기쁨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고 당신의 기쁨을 나누어 주십니다. 아멘.
(그런데 나는 지금 우리 주님과 더불어, 또 내 형제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고 있는가? 기쁨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혹 나누기보다 자신을 채우고 있지는 않는 걸까?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기쁘다면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쁘지도 않으면서 기쁨을 나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내가 우리 주님의 사랑을, 이미 먼저 베풀어져 건네 온, 그 큰 사랑을 본다면 기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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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성령강림 대축일 때입니다. 평화방송에서 성령의 은사를 뽑는 ‘어플’을 만들었습니다. 이름과 세례명을 입력하면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오는 프로그램입니다. 저의 성령의 은사는 ‘지혜’였고, 성령의 열매는 ‘절제’였습니다. 사제인 저에게 꼭 필요한 은사와 열매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건강과 장수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청을 좋게 보셨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덤으로 건강과 장수를 주셨습니다. 신학생 때 신부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와 지식도 필요하지만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은 ‘판단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판단을 위해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많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적도 많습니다. ‘절제’ 또한 제게 필요한 열매였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성화되어야 합니다. ‘사제 성화의 날’이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2002년 ‘사제 성화의 날’이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저에게 ‘사목 체험’을 나눠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제들 앞에서 체험을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 사제들은 저의 허물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구장 신부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본당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의 사목 체험은 교구 사목국에도 전해졌고, 사목국장 신부님이 함께 일해 보자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교구 사목국의 ‘교육담당 사제’로 3년을 일하였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연수를 기획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강사 신부님들을 섭외하면 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3년간 월례연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3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한 성가가 있습니다. ‘예수마음’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당기사 네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와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서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권한과 능력에서 겸손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지만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침을 뱉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하느님께도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수난까지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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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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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십시오
-머무름, 찾음, 기쁨-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예수성심을 공경하고 예수성심의 신비를 묵상하는 6월 예수성심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오늘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예수님과 요셉 수도원을 충심으로 한결같이 사랑하는 17년 역사를 지닌 ‘예수성심자매회’ 축일이기도 합니다. 회장 자매를 비롯한 예수성심의 딸들에게 축복을 비는 마음 가득합니다.
예수성심은 그대로 하느님 성심입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성심과 하나될 때 만사형통萬事亨通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예수성심신심입니다. 자주 부르는 예수마음이란 성가 199장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수도원 십자로 중앙 ‘늘 거기 그 자리’에 서있는 예수성심상이 한결같은 예수님 사랑, 하느님 사랑을 보여줍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며 하시는 말씀이 바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의 사랑만이 우리의 근원적 두려움을, 불안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의 빛만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의 역사가 자못 깊습니다. 예수성심공경은 성경에 근거하고,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교회의 전통적 신심입니다.
초세기의 여러 교부들은 창에 찔린 예수님 심장에서 구원의 물과 피가 흘러내렸다고 해서 예수성심을 성령과 함께 초자연 은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은 세례를, 피는 성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 둘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의 샘, 성사의 원천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1673년 12월27일부터 1675년 6월까지, 성녀 말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수녀에게 70회 발현하시며 메시지를 주셨고, 그후 교황들은 이를 받아들여 공적 공경을 허락하였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교회 축일로 선포합니다.
예수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이고, 성체성사는 예수성심의 가장 완벽하고 탁월한 표현입니다. 성체성사는 제대상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고, 당신 자녀들을 영원히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말가리타 수녀에게 주신 특기할만한 메시지입니다.
“내 거룩한 마음은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내 성심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홍수를 퍼부어 성덕과 구원의 은총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고, 마침내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내려 한다.
보라, 사람들은 이렇듯 사랑했고, 그들에게 이렇듯 많은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해 오직 배은망덕만 당하는 이 성심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성심에 관한 역대 교황님들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희망을 둘 곳은 예수성심뿐이다. 우리의 모든 불행을 낫게 하실 이(비오9세), 위험중에 있는 인류의 유일한 피난처(비오10세), 모든 신심의 종합이요, 더욱 완전한 생활규범(비오11세)이 예수성심이다.”
이어 ‘성심의 교황’으로 불리는 비오 12세는 “예수성심 신심이야 말로 매우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탁월한 방편이요, 현대 사회에 가장 긴요하고 적합한 신심으로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라 불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그 방법을 알려 줍니다.
첫째,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무르십시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영적 쉼터인 예수성심 안에 머물러 예수성심의 사랑을 관상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성심의 모범이자 대가입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 말씀은 바오로의 예수성심의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물러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는, 예수성심과 하나되는 성체조배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둘째,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으십시오.
참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는 사람은 성체성사를 찾으며, 방황하는 형제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 미사중 아름다운 감사송이 예수성심의 정체를, 예수성심을 찾는 영혼의 모습을,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흡사 어머니 교회에서 평생 영적 젖을 빠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아 해갈된 영혼들은 길잃어 방황하는 형제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의 착한목자 하느님은 예수성심의 예표입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붇돋아 주겠다.”
새삼 이런 사명을 위해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착한목자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로 아흔아홉마리 양들을 광야에 놓아둔채 잃은 양 한마를 찾아 나서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잃은 양은 물론이요 우리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성심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잃은 양 한 마리리를 찾고 기뻐 환호하는 예수 성심의 기쁨은 바로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환성歡聲이자 하느님의 환성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절정을 보여주는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참 기쁨은 예수성심의 사랑과 하나되어 길잃어 방황하는 형제들을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합류시킴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십시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예수성심의 사랑을,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1.머무르십시오.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무르는 관상이 우선입니다.
2.찾으십시오.
자주 미사를 찾아 예수성심과 하나되는 것이요,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길잃어 방황하는 영적 난민難民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길잃은 ‘양 하나’가 아니라 대부분 방황하는 ‘양떼들’ 같은 현대인들입니다.
3,기뻐하십시오.
만남의 기쁨, 찾음의 기쁨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바로 은총의 샘, 기쁨의 샘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기쁨의 사도가 되어 파견될 때 필시 찾음의 기쁨도 뒤따를 것입니다. 헤매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기쁨과 평화를 찾아 올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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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간은 부정적 경험을 많이 기억할까요? 아니면 긍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할까요?
듀크 대학의 브라이언 섹스톤 교수는 이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한 상태이면 긍정적이고 평범한 일을 인식하는 감각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피곤할 때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잠을 자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잊게 됩니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Three Good Things’라는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일종의 행복 기록으로 그날의 멋진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적는 것입니다. 매일 세 가지씩을 기록하면 평소 무심코 지나쳤을 작은 기쁨과 소소한 기쁨을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좋은 일 3가지. 적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찰을 힘들어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습관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크고 대단한 곳에서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우리도 아닌 광야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그냥 방치해놓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서 방황하고 있을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만을 찾으면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늘 함께합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보다는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제로 지내는 예수 성심 대축일은 주님의 사랑 가득한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사랑받음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은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 주님 안에서 함께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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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물이란 목표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목표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면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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