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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모든 것] (20) 강론
성경으로 해석한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인 생활 규범
나처음: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빠져나오면 신부님 말씀이 기억나지 않는데 꼭 강론이 필요한가요?
조언해: 나도 엄마가 아침밥을 뭘 차려주셨는지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엄마의 정성스러운 아침 밥상이 하루를 지탱하게 하는 일용할 양식이고 내 생명의 자양분임을 알아. 신부님 강론도 마찬가지야. 우리를 신앙인으로서 삶을 지탱하게 하는 영적 양식이야. 그래서 강론은 꼭 필요한 거야.
라파엘 신부: 언해가 좋은 비유로 강론을 설명해 주었구나. 신자들은 강론을 듣기 어렵고 사목자들은 강론을 하는 게 어렵지. 강론은 말씀 전례의 한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찌우는 데 반드시 필요하단다. 신자들이 강론을 통해 하느님을 강렬하게 체험하기 때문에 강론은 중요하단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강론은 거행되는 신비를 이해하도록 이끌고 사명으로 초대하는 것이어야 하며, 회중에게 신앙 고백과 보편 지향 기도, 그리고 성찬 전례를 준비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고유한 직무에 의하여 강론을 맡은 이들은 참으로 이 임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셨지. (「주님의 말씀」 59항)
나처음: 종종 신부님들께서 강론 때 정치나 사회 현안에 관해 과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봐요.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성직자는 종교 문제에만 관여해야 하는 게 바람직한 게 아닌가요.
조언해: 사실 저희 부모님도 신부님들이 밖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만 미사 강론 중에는 하지 않았으면 하셔요. 일부 신자들은 신부님의 강론이 복음 말씀과 상관없이 정치ㆍ사회 문제에 치우쳐 있다 해서 미사 참여를 하지 않거나, 전혀 그런 말씀을 하지 않는 신부님들의 미사에 찾아가요.
라파엘 신부: 강론은 하느님 말씀을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의 말로 다시 전해 주는 역할을 하는 거란다. 그렇다고 하느님 말씀을 단순히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성경의 메시지를 현실화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지금 삶 안에서 그 뜻을 되새기는 것이 강론의 본질이지.
하느님 말씀이 우리 삶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려면 자연히 우리 삶 전체와 관계되어야 하지 않겠니. 신앙생활뿐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인간의 삶에 대해 교회가 말해야 하는 것이지. 성직자는 신앙생활에 관해, 그 종교에 관해 말하라는 요구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기도의 청만 들어주고 복만 내려주는 분으로 한정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어.
물론, 사제가 강론 때 지나치게 자기 취향에 따라 정치 발언을 하거나 사회 문제를 다룬다면 결코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위라 할 수 없겠지. 아울러 그날 미사의 말씀 전례 독서 내용만 해설하는 정도로 그치는 강론 역시 신자들로 하여금 피조물과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잊게 만든다는 점에서 옳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지. 강론의 대상을 복음 해설에만 국한할 수 없고, 인간 삶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신자들이 이해하면 좀더 기쁜 마음으로 사제의 강론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나처음: 강론은 언제부터 미사에 도입됐나요?
라파엘 신부: 강론은 헬라어 ‘ομιλια’(호밀리아)를 우리말로 옮긴 말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또는 동료끼리 대화 형식으로 하는 이야기를 뜻한단다. 전례에서 ‘강론’은 신앙의 신비와 신앙생활의 규범을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을 뜻해. 그래서 전례와 상관없이 회중에게 교리나 신앙을 주제로 말하는 ‘설교(praedicatio)’와 구분해 사용하고 있지.
강론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당에서 율법서와 예언서를 봉독한 후 회당장이나 미리 지정한 성인 남자가 그 말씀을 풀이해 준 예식을 그대로 미사에 받아들인 것이야.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나자렛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지.(루카 4,16-21 참조) 또 초대 교회 사도들도 복음을 선포하면서 강론을 중요시하였단다.(사도 13,15-41 참조)
미사 강론에 관해 증언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유스티노 성인의 「호교론」이야. 유스티노 성인은 이 책에서 “독서가 끝난 후에 주례자는 이와 같은 좋은 모범을 본받으라고 가르치고 교훈하기 위해 강론을 한다”고 설명하였지. 하느님 말씀을 읽고 이에 대해 해석하면서 현실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제시하는 방식의 이러한 강론은 특히 교부들에 의해 교리교육의 한 방편으로 발전하였단다.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노 성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같은 교부들의 많은 글이 사실 강론 때 했던 것이지. 특히 성 레오 대교황의 「성탄 강론」을 읽으면 미사 강론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자리를 잘 알 수 있어요.
조언해: 중세 때에는 강론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라파엘 신부: 중세로 접어들면서 신자들의 전례 생활이 아주 빨리 쇠퇴했단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반인들이 전례 때 사용하는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지. 4세기 초까지만 해도 로마 교회 전례 공용어는 당시 국제어로 통용하던 헬라어였지. 그러나 4세기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이 더는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아 성 다마소 1세 교황(재위 306~384년)께서 로마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라틴어를 전례 공용어로 채택했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그리스도교가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많은 이민족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지. 그럼에도 불구에도 교회는 미사를 비롯한 전례 때 라틴어 외에는 다른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어. 사정이 이러니 강론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봉독한 하느님 말씀을 신자들에게 그 나라 말로 번역해 주는 것이 거의 전부였지. 이렇게 됨으로써 본래 의미의 강론은 미사 안에서 거의 무시됐고, 결국 신자들의 무관심으로 강론은 미사 안에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단다.
강론의 쇠퇴는 말씀 전례의 쇠퇴를 불러왔고, 신자들은 하느님 말씀보다 성체께 대한 신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돼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고 말았지. 이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전례 개혁을 단행해 미사를 비롯한 모든 전례에서 각 민족의 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단다. 이후 미사 중에도 말씀 전례가 활성화되도록 개혁해 강론의 중요성이 다시 두드러지게되었지.
나처음: 좋은 강론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파엘 신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강론자가 강론을 할 때 “친밀함과 따스한 어조, 가식 없는 말씨, 기쁨에 넘치는 태도로 해야 한다”(「복음의 기쁨」 140항 참조)고 조언하셨지. 강론은 성찬 예식에 앞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나누는 대화에서 최고의 순간으로서 모든 교리교육을 뛰어넘는 것이란다. 그래서 강론자는 먼저 자기 공동체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해. 그래야 그 공동체가 하느님께 생생하고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한때 사랑으로 넘쳤던 그 대화가 어디에서 끊어지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지.
사제가 좋은 강론을 하려면 먼저 자신이 하느님 말씀으로 깊이 감화되어 그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해.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좋은 강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셨단다. 먼저 주제가 통일되고 문장이 명료하고 일관되어서 사람들이 강론자의 말을 쉽게 따라가고 그 논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 마라’고 지적하기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해 언제나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좋은 강론은 신자들에게 주님의 기쁨을 전하는 강론이지. 너무 어려워. 강론은…
[미사의 모든 것] (19) 복음 봉독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하는 말씀 전례의 절정
나처음: 지난번 말씀 전례의 요소와 예식을 설명하면서 “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복음이 뭔가요?
라파엘 신부: 복음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계시의 말씀이란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으로부터 바로 하느님이셨단다.(요한 1,1 참조) 그 영원한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지. 바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란다.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강생’(잉태와 탄생-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다)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 신비에 비추어 보아야 해요. 신약 성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담은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라고 저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복음서는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으뜸가는 증언이기 때문에”(「계시 헌장」 18항) 모든 성경의 핵심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그래서 체사리아 성녀는 “복음서보다 더 훌륭하고 소중하며 더 빛나는 교리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행동으로 실현하신 것을 직접 보고 간직하기 바랍니다”라며 신자들에게 복음서를 가까이하길 권면했단다.
나처음: 복음 봉독은 전례 안에서도 특별한 권위가 있겠네요.
라파엘 신부: 교회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는 주님의 명에 따라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있지. 그래서 교회를 ‘말씀의 집’이라고 표현하기도 해. 말씀의 집에서 가정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전례란다. 전례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탁월한 장소란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친히 말씀하신단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전 안에서 장엄하게 선포하기 위해 말씀 전례 복음은 사제와 부제만이 봉독하게 되어 있단다.
조언해: 복음 봉독 때 미사 참여자들이 일어서는 것도 직접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겠군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과 환영을 드러내며 주님의 말씀을 경건히 경청하고 실천하겠다는 표현으로 모든 미사 참여자들이 일어서지. 교회는 다른 독서에 견주어 특별한 영예의 표시로 복음에 가장 큰 경의를 드리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복음 선포를 하도록 정해진 봉사자는 축복을 받거나 기도를 바치며 복음 선포를 준비하고, 신자들은 환호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현존하시며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조언해: 이때 모든 이들이 독서대를 향해 서는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특별한 공경을 표하는 것이군요.
라파엘 신부: 말씀 전례 예식을 자세히 보면 복음이 봉독 되기까지 여러 예식과 기도가 행해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먼저 모든 이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일어서고, 복음 환호송이 불리는 동안 향을 쓸 경우 사제는 향로에 향을 넣지. 그다음에 복음 봉사자인 사제와 부제가 주례 사제 앞에 나아가 깊은 절을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축복하여 주십시오”라며 축복을 청한단다. 주례 사제는 “주님께서 그대의 마음과 입술에 머무시어 그대가 복음을 합당하고 충실하게 선포하기를 빕니다”라며 십자 성호를 그으며 축복해요. 그러면 복음 봉사자는 “아멘”하고 응답하고, 향로와 촛불을 든 봉사자들과 함께 독서대로 향한단다. 복음 봉사자 없이 주례 사제가 복음을 봉독할 때는 손을 모으고 제대에서 허리를 굽히고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며 속으로 기도한 후 독서대로 향하지.
나처음: 복음을 봉독할 때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 이유가 뭐예요.
라파엘 신부: 복음 봉사자인 사제나 부제가 독서대에 서면 먼저 교우들에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며 인사를 하지.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부제)의 영과 함께”라고 화답해요. 이 인사는 12~13세기께 미사에 도입된 예식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란다.
그런 다음 복음 봉사자는 “(○○○)가(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며 선포되는 복음 말씀을 알려주면서 책과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한단다. 복음 명칭을 알리는 관습은 700년 이전부터 미사에 도입되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복음서의 참저자는 하느님이시고, 복음사가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가(이)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야. 복음 봉사자가 복음서에 십자 성호를 긋는 것 역시 복음이 주님의 말씀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란다.
복음 봉사자와 교우들이 함께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11세기 이후 미사에 도입됐는데 ‘복음을 믿고’(이마) ‘고백하며’(입) ‘실천한다’(가슴)는 뜻을 포함하고 있단다. 이렇게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은 7세기께 동방 교회 전례에서 도입된 예식으로 주님을 환영하며 영광을 드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란다.
향을 피우는 경우에는 복음서에 분향한 후 복음을 선포하지. 그리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 금요일의 수난 복음 봉독 때에는 복음 전 인사, 십자 표시, 분향, 촛불 등이 모두 생략돼요. 스스로 죄인이 되어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보류하는 것이지. 또 파스카 성야 때에는 부활초가 있기 때문에 복음서 옆에 촛불 봉사자를 세우지 않는단다.
복음 봉독이 끝나면 복음 봉사자가 독서 봉독 때와 같이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고, 교우들은 모두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환호해. 로마 전례에서는 이후 복음 봉사자가 존경의 표시로 복음서에 입을 맞추지만, 한국 주교회의는 우리 정서에 맞게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절을 하도록 정했단다. 복음 봉사자는 이때 “이 복음의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라며 속으로 기도지.
조언해: 미사 복음은 어떻게 정해지나요.
라파엘 신부: 지난번 말씀 전례 독서와 복음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설명했는데 다시 간단히 알려줄게. 주일 미사 복음은 3년 주기(가해, 나해, 다해)로, 평일 미사 복음은 2년(홀수해, 짝수해) 주기로 배분돼 있단다. 연중 주일에는 공관복음을 기준으로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서’,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서’, 다해에는 ‘루카 복음서’를 낭독해. 이중 나해의 마르코 복음서는 분량이 짧기에 연중 제17~21주일에는 ‘요한 복음서’로 보충하고 있단다. 요한 복음서는 앞의 연중 시기뿐 아니라 성삼일과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 팔일 축제 등과 같은 특수 시기에 봉독된단다.
[문화사에 따른 전례] 초기 그리스도교의 장례
그리스도교는 구세사를 완결하는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삶을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았음을 선포하는 계시종교이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부터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옮아감이며 운명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날(dies natalis)이라고 기도했다.
성경의 장례는 1일장, 매장하는 일은 선한 행위로 이해했다
장례와 관련한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은 죽은 이를 특별한 주의와 정성으로 묻었다. 집회서에서 “죽은 이에 대한 호의를 거두지 마라.”(7,33)라고 하였으며, 죽은 이를 매장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선한 행위로 이해하였다(토빗 1,18; 2,3-7; 12,12 이하). 그리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에서 분리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상태로 표현되기도 한다(시편 88,6).
구약시대의 장례 예식 풍습은 대강 다음과 같다. 죽은 이의 눈을 감기고, 고인과 입맞춤하며 시신을 씻긴 뒤 기름을 바르고 아마로 싼 노끈으로 향기 나는 약초와 함께 시신을 묶는다. 시신을 안치하고 애도가를 시작하며 시신은 대부분 죽은 날에 관도 없이 들것 위에서 무덤으로 내려놓는다. 많은 경우 기름과 발삼을 섞어 향료로 사용했다. 묘지로 가는 길에서, 또 장례 때 애도가를 노래한다.
신약에서 죽음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을 지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뛰어넘는 자신의 능력, 곧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이미 지상의 삶에서 보여 주신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예수님의 부활 신앙에 대한 희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초대 교회는 유다인의 장례 풍습을 따랐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는 대다수가 히브리인이었으므로 장례 예절도 히브리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다인들의 거주 지역에서 이방인의 지역까지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이방인들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먼저, 죽은 이의 눈을 감긴 다음 몸을 가지런히 하고 수의를 완전하게 입힌다. 그리고 죽은 이의 가족과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외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방법은 공적인 재앙이 닥쳤을 때, 또는 참회의 시기에 행하던 관습을 따랐다.
또한 죽은 이의 가족은 단식하기도 했고, 커다란 고통을 표시하고자 반복적으로 곡을 하였다. 그리고 죽은 이의 친지와 친척들은 빵과 잔을 가져와 상을 당한 가족을 위로하였다. 이를 통해 히브리인들의 장례 관습에서 중요한 요소는 슬픔의 표명과 위로라는 걸 알 수 있다.
반면에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장례식에서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140년 무렵 교부 아리스티데스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장례식에서 슬픔과 비애감을 표시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상을 떠난 그 형제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복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장례의 형식과 찬가와 기도문 등을 유다이즘에서 빌렸으나 부활 신앙을 중심으로 한 파스카적 예식으로 발전시켰다.
로마인들의 관습을 발전시킨 노자성체와 성찬례 거행
초기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관할권에서 확장하였기에 자연스럽게 고대 로마의 장례 문화를 만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역사가요 문명 비평가인 토인비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는 임종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불러 모아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 관습은 임종자를 위한 초대 교회의 밤샘 기도를 연상시킨다.
로마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정리하였다. 먼저 눈을 감기고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른 뒤 수의를 입히고 입안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 이것이 임종 직전 성체를 노자성체의 전통으로 변화시켜 남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인들의 관습에서 죽은 이의 집에서부터 묘지까지의 장례 행렬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장례식을 일컫는 ‘Exsequiae’, ‘Prosegui’는 이 행렬을 “뒤따른다”는 뜻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로마 관습에 시신을 매장한 뒤 ‘Silicernium’이라고 하는 장례 뒤 음식 나눔이 있었다. 이 관습은 정해진 날, 곧 기일에 음복의 형태로 거행되었다. 그리스도교는 ‘Refrigerium’이라고 부르는 음복 관습으로 차용하였다.
죽은 이를 기념하는 기일 관습은 처음에 순교자들에게 적용되어 장엄한 성찬례와 함께 거행되었다가 뒤에 모든 죽은 이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이 관습이 위령 미사로 발전하게 되었고 2세기부터 봉헌되었다는 흔적을 아리스티데스 교부의 「호교론」과 외경인 ‘요한 행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세기 말 무렵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노도 매장한 날과 기일에 드리는 미사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9,12)에,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서 거행한 그의 모친 장례식에서 어머니를 묻은 뒤 이어 성찬례를 거행했다고 전한다. 장례 미사가 일반화된 것은 6-7세기 이후부터이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의 동반으로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부각하는 장례 예식
초대 교회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전해 주는 문헌들로서는 1세기 중엽에 형성된 이집트 트무이스(Thimuis)의 주교 세라피온의 기도서(Euchologion)와 작자 미상의 「사도 헌장」(Constitutiones Apostolorum) 제8권, 5세기 말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위-디오니시오의 작품으로 알려진 「교계」(De ecclesiastica hierarchia) 등이 있다.
위-디오니시오의 「교계」에 나오는 당시 교회의 장례 예식은 두 부분, 독서와 시편으로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중심 예식으로 구성되었다. 중심 예식은 대부제가 예비 신자들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간 낭독과 보편 지향 기도는 각각 죽은 이를 포함시킨 가운데 전례의 정점으로 이끈다. 이와 관련하여 집전자와 참석한 모든 사람이 행하는, 시신에 대한 입맞춤과 도유로 작별 예식을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집전자는 개회(영접과 감사기도)와 마찬가지로 장례 예식의 마침 부분에서 축복하고 이어서 시신을 매장하는 곳으로 공동체를 파견한다.
집전자는 주교이며 부활을 통한 죽음의 조명이라는 관점을 잃지 않고 참석한 공동체 구성원이 죽은 이와의 친교를 입맞춤으로 표시한다. 도유는 병자 도유가 아니라 세례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띤다는 점에서 파스카적 의미를 드러낸다.
[미사의 모든 것] (18) 화답송과 복음 환호송
하느님 찬미하고 공동체 성화시키는 전례 음악
나처음: 말씀 전례 독서는 꼭 독서대에서 해야 하나요?
라파엘 신부: 독서대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란다. 그래서 말씀 전례 독서는 반드시 독서대에서 해야 해. 미사에서 하느님 말씀의 식탁과 그리스도 몸의 식탁(성찬 제대)이 똑같이 마련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독서대는 하느님 말씀의 존엄성에 어울리게 정성 들여 만들고 꾸며져야 해요. 이런 이유로 독서대는 말씀 전례 동안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성당 구조에 주의를 기울여 제대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야 해. 특히 신자들이 독서자를 잘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곳에 독서대를 고정해 설치해야 해. 이동식 간이 독서대를 놓아서 안 돼요.
조언해: 미사 때 보면 독서대에 말씀 봉사자뿐 아니라 해설자나 선창자, 또 공지사항 때 성당에 도움을 청하러 온 손님들이 올라오던데 결코 전례에 바람직한 건 아니죠.
라파엘 신부: 독서대가 하느님 말씀이 봉사자를 통해 선포되는 장소라는 본질적인 사실을 잊거나 무시해선 안 돼. 독서대에서는 오로지 독서들, 화답송,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나 복음 전 노래) 예식만 거행돼야 해. 그리고 강론과 보편 지향 기도도 독서대에서 할 수 있단다. 따라서 독서대의 품위에 비추어 말씀의 봉사자만 거기에 올라갈 수 있고 이들 외에 해설자나 선창자, 성가 지휘자, 일반인이 독서대에 오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단다.
나처음: 화답송과 복음 환호송은 뭔가요?
조언해: 말씀 전례 제1독서와 제2독서 사이, 그리고 제2독서와 복음 사이에 부르는 노래를 화답송, 복음 환호송이라고 해. 이들 노래는 하느님 말씀을 더욱 심화하고 강화하는 말씀 전례의 주요 요소들이야.
라파엘 신부: 언해가 잘 설명해 주었구나. 말씀 전례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신앙 공동체가 화답하는 대화 형식으로 진행된단다. 제1독서 말씀을 듣고 화답송으로, 제2독서 말씀을 듣고 복음 환호송으로, 복음과 강론을 듣고 신앙 고백으로 응답하는 순서로 거행되지. 그래서 화답송과 복음 환호성은 말씀 전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전례로나 사목적으로도 매우 중요해.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식이고 전례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단다.
조언해: 화답송으로 주로 시편을 노래하는 이유가 있나요.
라파엘 신부: 언해 말대로 화답송 대부분은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원래는 ‘화답 시편’이라고 하는데 이를 간단히 ‘화답송’이라고 부르고 있어. 과거에는 층계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해서 ‘층계송’이라고도 했지.
화답송은 유다인들이 회당에서 모세오경이나 예언서를 봉독한 뒤 시편을 노래한 데서 유래됐단다.(에페 5,19; 콜로 3,16)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과거에는 지금처럼 「매일미사」가 없었기에 선창자가 먼저 응답 구절을 노래하면 미사에 참여한 회중이 그것을 따라 불렀고, 그다음 선창자가 시편의 각 구절을 노래할 때마다 회중들은 그 뜻을 음미하고 응답 구절을 되풀이하였단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시편을 기계적으로 노래하지 마십시오. 독서자가 낭독할 때 여러분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보다 앞서는 것도 없고 그분만을 위한 사랑에 불타겠다는 믿음을 선포하는 뜻으로 노래하십시오”라며 화답송을 하는 회중의 자세에 관해 잘 설명해 주었지.
현행 미사에서도 화답송은 노래로 하는 것이 원칙이란다. 이때 시편 선창자는 독서대나 다른 적당한 자리에서 후렴과 시편 구절을 부르고, 회중은 앉아서 후렴으로 화답하며 화답송에 참여하지. 또 화답송을 노래로 하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는 데 더욱 어울리는 방법으로 시편을 낭송할 수 있단다.
나처음: 화답송은 말씀 전례 독서처럼 앉아서 노래하고 복음 환호송은 서서 하는 이유가 뭐죠.
라파엘 신부: 복음 바로 앞에 오는 독서가 끝나면 전례 시기에 따라 복음 환호송, 곧 ‘알렐루야’나 ‘복음 전 노래’를 부르지. 복음 환호송은 봉독된 말씀 전례 독서에 대한 묵상의 응답인 화답송과 달리 복음을 통해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한 환호이기 때문에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서서 불러요. 복음 환호송은 단순히 복음을 준비하는 노래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복음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실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예식이란다.
나처음: 알렐루야가 무슨 뜻인가요
라파엘 신부: 알렐루야(Alleluia)는 히브리말로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뜻이란다. 힐렐(hillel, 찬미하다) 동사의 명령어 ‘할렐루(hallelu)’와 야훼 하느님의 약자 ‘야(Jah)’가 합해진 합성어이지. 라틴말에서는 첫 자리에 오는 ‘h’를 발음하지 않기에 알렐루야가 되었단다. 알렐루야는 ‘아멘’ ‘호산나’와 함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당이나 성전에서 예배 중에 하느님을 찬미할 때 즐겨 사용하던 환호로 시편에 자주 등장해. 하지만 신약 성경에는 요한 묵시록의 ‘천상 찬가’(19,1-6)에만 나온단다. 초대 교회에서 유다인의 예배 전통과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아멘’과 함께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묵시록의 감사와 승리의 환호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환호로 알렐루야를 사용한 것이지.
알렐루야가 미사에 도입된 것은 3세기께라고 해. 이 시기에 화답 시편이 독서 화답송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야. 도입 초기에는 축제 환호로 주님 부활 대축일과 부활 시기에만 불리다가 차츰 주일과 축일에도 사용됐고,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재위 590~604) 이후 평일 미사에서도 알렐루야를 노래했다고 해. 알렐루야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야 전까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기에 불러요. 과거에는 장례 미사나 위령 미사 중에는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았으나 이제는 부를 수 있단다. 알렐루야가 주님 안에 죽은 이들이 부활한다는 믿음과 희망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지.
나처음: 그럼 복음 전 노래는 무언가요
라파엘 신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야 전까지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는다고 했지. 이 시기에 알렐루야 대신 ‘복음 전 노래’를 해. 복음 전 노래도 알렐루야와 마찬가지로 모두 서서 노래하거나 낭송하지. 복음 전 노래는 알레루야와 같은 시기나 그보다 약간 늦게 미사에 도입되었다고 해. 처음에는 시편으로 구성됐으나, 현재는 그날 복음의 한 구절이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자세, 믿음을 반영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단다.
조언해: 부속가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라파엘 신부: 부속가는 특별한 축일 미사 때 제2독서 후 알렐루야를 하기 전에 노래하거나 읽는 찬미가를 말해. 9세기 프랑스 교회에서 부르기 시작해 16세기에는 거의 모든 미사에 다 들어갈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단다. 그러다가 성 비오 5세 교황(재위 1566~1572)이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전례 개혁을 단행하면서 4개의 부속가만 허용했지.
현대 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 정신에 따라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부속가 4개만을 허용하고 있단다. 이중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부속가는 의무적으로 해야 하고, 나머지 둘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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