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 蘇氏曰: “孔文子使太叔疾出其妻而妻之. 疾通於初妻之娣, 文子怒, 將攻之. 訪於仲尼, 仲尼不對, 命駕而行. 疾奔宋, 文子使疾弟遺室孔姞. 其爲人如此而謚曰文, 此子貢之所以疑而問也. 孔子不沒其善, 言能如此, 亦足以爲文矣, 非經天緯地之文也.” 소씨가 말하길, “공문자는 태숙 질로 하여금 그 처를 내쫓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질이 첫 번째 부인의 동생과 사통하자, 공문자가 노하여 장차 그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중니를 방문하였는데, 중니가 상대하지 않자, 수레에 명하여 떠나갔다. 질이 송나라로 도망가자, 공문자는 질의 동생 유로 하여금 공길을 처로 맞게 하였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았음에도 시호를 文이라 말하였으니, 이 때문에 자공이 의심하여 물었던 것이다. 공자가 그 선함을 묻어버리지 않고,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면, 이 또한 文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 것이니, 문왕과 같은 온 천하를 경영하고 다스리는 文은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云 哀公十一年冬 衛太叔疾出奔宋 初疾娶于宋子朝(子朝宋人 衛大夫) 其娣嬖 子朝出 孔文子使疾出其妻(出宋朝之女) 而妻之 疾使侍人誘其初妻之娣寘(치)於犂(衛邑) 而爲之一宮如二妻 文子怒欲攻之 仲尼止之 遂奪其妻(文子遂奪其女不嫁太叔疾) 或淫于外州 外州人奪之軒以獻(奪太叔疾之軒車以獻於君) 恥是二者(以奪妻奪軒二事爲恥) 故出 衛人立其弟遺(遺疾之弟) 使室孔姞(孔姞文子之女疾之妻也 使遺室之) 孔文子之將攻太叔也 訪於仲尼 仲尼曰 胡簋之事(胡簋禮器也 夏曰胡周曰簋) 則嘗學之矣 甲兵之事未之聞也 退命駕而行 춘추좌씨전에 이르길, 노나라 애공 11년 겨울에 위나라 태숙 疾이 송나라로 도망쳤다고 한다. 처음에 태숙 질은 宋子朝(자조는 송나라 사람이고 위나라 대부였다)에게서 처를 얻었고, 그 여동생을 사랑하였다. 송자조가 위나라를 떠나자, 공문자는 태숙 질로 하여금 그 처(출국한 송자조의 딸)를 내보내게 하고서, 그를 사위로 삼았다. 태숙 질은 시종을 시켜 그 첫 처의 동생을 유혹하여 犂(위나라 읍)땅에 거두어 두고서, 그녀를 위하여 궁 하나를 만들어주어, 마치 두 명의 처가 있는 것처럼 하였다. 문자는 노하여 질을 공격하고자 하였지만, 중니가 제지하자, 마침내 그 처(문자가 마침내 자기 딸을 빼앗고서는 태숙 질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다)를 빼앗았다. 태숙 질이 외주에서 음탕하게 놀자, 외주 사람들은 그의 수레를 빼앗아 바쳤다(태숙 질의 수레와 마차를 빼앗아 임금에게 바쳤다). 태숙 질은 이 두 가지 일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처를 빼앗기고 수레를 빼앗긴 일을 부끄러움을 삼았다), 위나라를 떠났던 것이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의 동생 遺(유는 질의 동생이다)를 그의 자리에 세웠고, 그로 하여금 孔姞(공길은 공문자의 딸로서 태숙 질의 처였는데, 유로 하여금 그녀를 내실에 들이도록 한 것이다)을 내실에 들이도록 하였다. 공문자가 장차 태숙을 치고자 하였는데, 중니를 방문하자, 중니가 말하길, “호궤의 일(胡簋는 禮器다. 하나라는 胡라고 말했고, 주나라는 簋라고 말했다)은 일찍이 배운 적이 있습니다만, 갑병의 일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문자는 이에 물러나, 가마에 명하여 떠나갔다.
史記諡法解 惟周公旦太公望嗣王業建功于牧野終將葬 乃制諡 遂敍諡法 諡者行之迹 號者功之表 有大功 則賜之善號以爲稱也 車服者位之章也 是以大行受大名 細行受細名 行出於己 名出於人 名謂諡號 經緯天地 文 道德博聞 文 勤學好問 文 慈惠愛民 文 愍民惠禮 文 賜民爵位 文 사기 諡法 解편에, 오직 주공 단과 태공 망만이 왕업을 이어서 목야에서 공을 세웠는데, 끝내 장차 장사지내려 할 때, 마침내 諡를 제정하니, 마침내 諡法을 서술하였다고 한다. 諡라는 것은 실행한 자취이고, 號라는 것은 공의 징표이니, 큰 공이 있으면 좋은 호를 내려서 칭송으로 삼는 것이다. 수레와 복식이라는 것은 지위를 나타내는 표장이니, 이런 까닭으로 큰 행실에는 큰 이름을 받고, 작은 행실에는 작은 이름을 받는 것이다. 행실이란 자기에게서 나오고, 이름은 남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이름을 일컬어 諡號라고 부른다. 천지를 경영하여 다스리는 것이 文이고, 덕을 따르고 널리 듣는 것도 文이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文이고, 자비롭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도 文이며, 백성을 걱정하고 예를 베푸는 것도 文이고, 백성에게 작위를 내려주는 것도 文이라고 하였다.
朱子曰 此章因論諡而發 然人有一善之可稱 聖人亦必取之 此天地之量也 주자가 말하길, “이 장은 시호를 논함으로 인해서 유발되었지만, 사람에게 칭찬할만한 善이 하나라도 있다면, 성인께서는 또한 반드시 이를 취하셨다. 이는 천지와 같은 커다란 도량이다.”라고 하였다.
問孔姞事如此不好 便敏學好問 濟得甚事 曰古諡法甚寬 所謂節以一惠(言只有一善亦取之 節者節略而取其一善也) 孔文子固是不好 只敏學下問 亦是他好處 周禮諡只有二十八字 不成說孔文子與文王一般 蓋人有善多者 則摘其尤善者一事以爲諡 亦有只有一善 則只取其一善以爲諡而隱其惡 如孔文子 是也 惟無一善可稱而純於惡然後 名曰幽厲耳 누군가 묻기를, “공길의 일이 이와 같이 좋지 않으니, 영민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게 무슨 일에 소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옛날 시법은 매우 관대하였다. 이른바 節以一惠(그저 선한 것 하나만 있더라도, 역시 그것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節이라는 것은 간략하게 절제하되, 그 선한 것 하나를 취한다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공문자는 본래 좋지 않은 자이나, 단지 영민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역시 그의 좋은 부분이다. 周禮의 諡法에는 겨우 28글자만 적혀 있다. 공문자와 문왕이 같은 부류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대체로 善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중에서 더욱 선한 것 하나를 잘라내어 시호로 삼고, 또한 단지 선한 것을 하나만 갖고 있다면, 그저 그 하나의 선을 취하여 시호로 삼으면서 그 악을 숨기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공문자 같은 경우가 이러한 것이다. 오직 칭송할만한 善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순전히 惡만 있은 연후에 비로소 이름 지어 말하길, 幽나 厲라고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如織布絹 經是直底 緯是橫底 經天緯地 是一橫一直 皆是文理 故謂之文 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此便是經緯天地之文 마치 베나 비단을 짜는 것처럼, 經은 세로로 곧은 것이고, 緯는 가로로 걸친 것이다. 經天緯地는 가로 하나 세로 하나로서 모두 文理(문채 나는 이치)이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文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지의 道로 裁成(불필요한 것을 잘라냄)하고, 천지의 마땅함으로 輔相(모자람을 채워줌)하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를 경영하여 다스린다는 文이다.
胡氏曰 日月星辰風雨霜露 天文也 山嶽河海草木花卉 地文也 微而鳥獸蟲魚 皆有文焉 舜在璿璣玉衡以齊七政 經天之文也 封山濬川 若草木鳥獸 緯地之文也 天文粲乎上 地文陳乎下 聖人處乎中而經緯之 所以裁成輔相之以爲用也 호씨가 말하길, “해와 달, 별과 바람과 비, 서리와 이슬은 天文이고, 산악과 강과 바다, 초목과 화훼는 地文이다. 미세하지만 새와 짐승, 곤충과 물고기는 모두 여기서 문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순임금이 ‘선기(璿璣: 천문기구)와 玉衡을 두어 칠정(七政: 木火水金土와 日月)을 고르게 하셨다.’는 것이 하늘을 경영하는 文인 것이다. 封山濬川(산을 봉하고 내를 준설함)을 하고 초목과 조수를 순하게(若) 한 것은 땅을 경영하는 文인 것이다. 天文은 위에서 밝게 빛나고, 地文은 아래에 펼쳐져 있으며, 성인은 가운데에 처해서 그것을 경영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裁成輔相을 用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諡法之爲文者六 而勤學好問居其一 殆取諸此歟 후재풍씨가 말하길, “諡法에서 文으로 삼는 것은 6개인데, 勤學好問이 그 하나에 해당하니, 거의 여기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