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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금당’이라고 크게 새겨진 상호명을 보고 돈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 범행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인사동 거리로 기사와 무관함.
물건이 어디에 있죠? 골동품은 일단 제가 눈으로 직접 봐야 합니다. 물건만 좋다면 값은 얼마든지 후하게 쳐드려야죠.
1979년 6월 19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소재한 금당골동품상 주인 정석기 씨(가명·38)는 한참 동안 수화기를 붙들고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정 씨는 “진귀한 골동품을 판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며 무척이나 들뜬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오전 8시 30분경. 정 씨는 골동품을 팔겠다는 남자와 또 한 차례 통화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 씨는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인 세종문화회관 근방에 있는 한 다방으로 향했다. 그것이 정 씨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정 씨의 부인과 운전기사도 잇따라 사라졌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지난 1979년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금당골동품상 살인사건’이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 당일로 시계바늘을 돌려보자.
희귀한 골동품들을 팔겠다는 남자는 박영환 씨(가명·38)였다. 6월 20일 오전 9시경 약속장소인 다방에 나타난 박 씨는 건장한 체격을 지닌 호남형의 인물이었다. 박 씨는 골동품에 대해 상당한 애착과 관심을 드러냈다. 박 씨는 “물건을 보러 가자”며 정 씨를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성산동에 소재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승용차 내에서 박 씨는 “진품 조선청자와 조선백자, 족자와 병풍 등 희귀한 물건들을 몇 점 소유하고 있다. 합하면 최소 3억 원을 호가한다”고 설명했다. 정 씨는 여지껏 듣도보도 못한 진귀한 물품들을 거래할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집에 도착한 박영환은 내연녀 김순애 씨(가명·29)와 집 지하방에 세들어사는 할머니(75)에게 ‘간만에 영화나 보고 오라’며 자신의 승용차 키를 줘서 내보냈다. 그리고 정 씨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박 씨는 애초 얘기와는 달리 뜸을 들였다. 물건을 보고 싶어하는 정 씨에게 그는 ‘사실 물건들은 수원에 있다. 진귀한 물건들이라 감춰뒀다. 돈이 급해 처분하려는데 그동안 고액의 현금을 마련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당신이 어느 정도 돈을 조달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며 흥정을 시작했다. 이에 정 씨는 ‘청자와 백자만 사고 싶다. 물건을 직접 봐야 정확한 금액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1억 원 정도는 전화 한 통만 하면 금방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박 씨는 정 씨에게 재차 현금 조달 가능성을 확인했다. 정 씨는 물건도 보여주지 않고 현금조달 가능 여부를 자꾸 캐묻는 박 씨가 점차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정 씨는 일찌감치 거래를 포기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했다. 그때였다. 박 씨는 갑자기 TV거치대 밑에서 군용 대검을 꺼내 정 씨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반항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나일론 끈과 철사줄로 정 씨의 손발을 결박했다.정 씨는 꼼짝없이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에서 수 시간이 지나 시간은 오후 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원하는 것이 뭡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줄 테니 이것 좀 풀고 얘기합시다.”
정 씨는 사정했다. 범인이 노리는 것은 돈이 분명했다.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갖고 오라고 하시오. 쓸데없는 얘기를 할 경우 당신 목숨은 보장할 수 없소.” 일단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정 씨는 가게로 전화를 걸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정 씨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직원이었다. 정 씨는 직원에게 ‘물건 매입을 하려하니 애들 엄마에게 계약금 500만 원을 준비해서 3시 30분까지 OO다방 주차장으로 나오라고 해라. 그 앞으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통화를 마친 정 씨는 “시키는 대로 했으니 그만 풀어달라.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주겠다”고 사정했다. 하지만 박 씨는 정 씨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박 씨는 정 씨를 의자에 앉힌 채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다. 그리고 안방 문을 잠근 뒤 택시를 잡아타고 OO다방으로 향했다.
약속장소에는 정 씨의 부인 김혜숙 씨(가명·32)와 운전기사 이정수 씨(가명·28)가 함께 와 있었다. 이들은 아무 의심없이 박 씨를 따라나섰다. 성산동 박 씨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경. 박 씨는 운전사 이 씨를 집 앞에서 기다리게 한 뒤 부인 김 씨만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박영환을 따라 안방에 들어선 김 씨는 깜짝 놀랐다. 남편이 손발이 묶이고 얼굴에 수건이 덮인 상태로 의자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지만 이미 늦었다. 박 씨가 흉기를 든 채 안방 문을 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박영환은 공포에 떨고 있는 김 씨를 향해 ‘나는 기관에서 나온 사람이다. 조사할 일이 있어서 그런다. 딱 보면 모르겠냐’며 윽박지른 뒤 김 씨의 손발을 묶은 뒤 정 씨 옆에 앉혔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운전기사 외에 여기에 온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느냐’고 물었다. 김 씨는 ‘아무도 모른다. 신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무사히 보내달라. 어린 자식이 4명이나 있다’고 사정했다. 하지만 박 씨는 목을 졸라 김 씨를 살해하고 만다.
완전범죄를 노린 박 씨는 집 밖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들어와서 차 한 잔 하라”며 집 안으로 유인했다.
방 안에 들어선 이 씨도 눈앞의 상황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채고 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박 씨의 대검이 더 빨랐다. 대검으로 이 씨를 제압한 박 씨는 이 씨의 손발을 철사줄로 결박한 뒤 이 씨마저 목졸라 살해하고 만다.순식간에 세 사람을 살해한 박 씨는 정 씨의 부인이 가지고 온 500만 원을 챙긴 후 3명의 사체를 끌어다 작은방 벽장 속에 유기했다.
그리고 집 앞에 주차돼 있는 정 씨 일행의 승용차를 직접 운전해 자신의 집에서 약 1km 떨어진 망원동의 주택가에 버리고 달아났다.당시 관할인 종로경찰서 수사팀은 사건 당일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시에 주변인들에 대한 탐문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수사팀은 가게 직원으로부터 사건 당일 오전 정 씨가 신원미상의 남자로부터 골동품을 매입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그날 낮 부인 편으로 돈을 보내라는 정 씨의 전화를 받고 부인과 운전기사가 함께 나갔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하지만 용의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에 착수한 지 어느덧 석 달을 훌쩍 넘겼다. 수사팀은 피가 말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9월 중순경 인천에 사는 K 씨가 한 말이 경찰 정보원에게 들어왔다. 내용인즉 K 씨의 딸이 ‘남편이 기관원을 사칭하고 다닌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K 씨의 딸은 박영환의 내연녀 김순애였고, 그녀는 박 씨의 범행 직후인 21일 새벽 박 씨의 남동생으로부터 박 씨의 범행 사실을 전해 들은 것으로 드러났다.”
얼핏 보기엔 골동품상 사건과는 무관한 듯했지만 수사팀은 당시 아주 사소한 제보라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수사팀은 9월 24일부터 박 씨의 집 주변에서 잠복근무를 실시했다. 박 씨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잠복 나흘 만인 9월 27일 오전. 박 씨를 미행하던 수사팀은 내연녀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박 씨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서로 데려가 몇 시간에 걸친 추궁 끝에 범행사실을 자백받았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그날 밤 10시 30분경부터 사체발굴이 시작됐다. 놀랍게도 박영환이 사체를 유기했다고 지목한 곳은 자기 집 정원이었다. 암매장한 장소는 집 현관 계단에서 2m가량 떨어진 정원 담 밑이었다. 거기엔 향나무와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개집이 놓여 있는 등 그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암매장한 장소로 보기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나무들을 뽑아내고 80cm를 파내려가자 커다란 검정색 비닐백 두 개가 나왔다. 그 안에는 피해자들의 시계와 주민등록증, 구두 세 켤레, 통장 다섯 개 등이 들어있었다. 피해자들의 소지품이 발견된 곳에서 약 2m 떨어진 부분을 파내려가자 피해자들의 사체가 나왔다.”
박 씨의 범행동기는 사업자금 마련이었다. 박 씨는 “지금껏 해온 사업이 잘 안되서 많은 빚을 졌다. 진공소재기 전국총판을 새로 맡아 빚을 갚아보려 했지만 사업자금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조사결과 교사였던 전처를 수년 전 암으로 잃은 박 씨는 당시 충무로에서 의류중간도매상을 하고 있었으나 영업부진으로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평소 거래관계가 있었을 거라는 수사팀의 예상과 달리 박 씨는 정 씨부부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박 씨는 “5월경 사무실에 걸 족자를 살 겸 인사동 골동품거리를 방문하게 됐다. 그런데 우연히 ‘금당’이라고 크게 상호가 걸린 것을 보고 이 집 사장이 돈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사결과 박 씨의 동생 박영국 씨(가명·33)가 사체유기에 가담한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박영국으로부터 “사건 당일 작은 방 벽장 문고리가 철사로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 열어봤고 그때 사체를 보게 됐다. 21일 새벽에 이 사실을 형수님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날 마당 밑을 파두라는 형의 말에 따라 구덩이를 팠고 망을 보고 형이 사체를 암매장하는 것을 도왔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박 씨는 “범행 당일 벽장 안에 숨겨둔 사체를 동생이 보고 내 범행을 알게 됐다. 동생이 울면서 자수를 권유했는데 늙은 부모님 생각에 그럴 수 없었다. 심지어 동생이 약을 먹고 자살하라는 말까지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주범 박 씨는 강도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박 씨의 동생은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됐다. 박 씨는 수감생활 중 박 씨는 기독교에 귀의, 참회의 나날을 보냈고 후에 수기까지 썼다.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라는 그의 수기는 재소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은 박영환은 1982년 여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 씨는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신장과 눈 등 장기를 꺼져 가는 다른 생명을 위해 기증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