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를 키우기 전에는 우리나라 농업은 전부 친환경이었다.
비료, 영양제, 제초제, 농약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어릴 때 여름방학 숙제가 풀 한 리어카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그 풀을 썩혀서 학교 밭의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실과 시간에 농업을 배웠고, 실습도 했었다.
정학 맞은 아이들은 학교 밭에서 일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 말썽을 피고 나도 생전 처음으로 밭에서 일을 했다. 그 때 경험이 내가 어설픈 농부가 되기도 했다.
농업의 문제는 생산량과 관계가 깊다. 통일벼가 탄생한 이유도 생산량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등장한 것이 비료와 살충제와 영양제 였다.
통일벼 때문에 밥을 하면 기름이 잘잘 흐르던 과거의 쌀들이 사라졌다.
일본은 통일벼 같은 생산량 많은 품종에만 집착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일본의 쌀은 기름이 흐르는 코시히카리가 일본인들의 밥상을 점령하고 있다.
일본의 술은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기준으로 종류가 다양하다. 쌀은 술 맛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술도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통일벼가 나오고, 박정희는 막걸리를 금지 시켰다.
각 마을마다 존재했던 막걸리 공장이 사라졌다. 농임들은 밀주를 담궈 먹어야 했던 범죄자가 되었다.
생산량과 함께 작업 방식과 유통도 영향을 미쳤다.
기계화에 의한 영농 방식과 대형마트를 통한 판매가 시작되었다.
그 덕분에 재래시장과 5일장의 존재가 힘을 잃었다.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농산물 수입 자유화다.
외국의 농산물이 들어오고, 농촌의 농작물 가지 수가 훨씬 적어졌다.
이제는 어릴 때 늘 먹었던 작물들을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다.
과거의 농산물은 친환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야생 조수들도 많지 않았다. 산에 먹이가 풍부하여 굳이 민가로 내려올 필요가 없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이 농촌을 현대화 했다고는 하지만, 통일벼를 만들어 쌀생산량이 급격히 높아 졌지만 결과적으로 쌀은 여러 곡물들 사이에서 눈치나 보고 있다.
과거 우리가 먹었던 기름 잘잘 흐르던 쌀이 남아 있었다면, 쌀은 우리 밥상의 주인으로 남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