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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榮州 浮石寺)
절은 어디나 같다. 내 친구들의 말이다. 그러나 알면 다르다.
무량수전 서편에 부석(浮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는 어디서 옮겨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채석하다 무너진 돌 같다. 혹 토속신앙의 거석문화의 제단은 아니었을까 의문이 들지만 부석사를 지을 때 토속신앙의 세력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하나 ‘부석’이란 바위는 부석사보다는 더 오래 된듯하다.
사찰로는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합천 해인사를 삼보사찰이라 하지만 부안내소사, 서산개심사, 강진 무위사, 청도운문사, 영주부석사 또한 고졸미와 자연미를 간직한 사찰로 명성을 낳고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석(石)자가 든 사찰이 다섯이 있다는데 부석사와 흑석사만 답사하고 나머지 셋 사찰은 가본적도 없고 들어 본적도 없다.
부석사 일주문에는 ‘太白山浮石寺’ 현판이 걸렸고 안양루에는 鳳凰山浮石寺 현판이 걸렸다. 부석사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봉황산부석사라 하고 넓은 의미의 태백산이라 한가본데 ‘太白山浮石寺’란 현판과 일주문은 좀은 어색하고 억지스럽다.
일주문에는 문짝은 없다. 이게 사찰건축의 전통이요 특징이다. 문짝이 없으면 안과 밖이 통하고, 문짝이 있다 해도 문을 중심으로 한 울도 없고 담도 없다. 불가에서 말하는 공이요 비움인가 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으로 천년을 훌쩍 넘긴 고즈넉한 절간이다. 건축과학생이면 필수적으로 찾는 코스이지만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10단의 돌축대와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이 많다는 것은 대상의 위치가 높은데 있다는 말이다. 석축마다 양쪽으로 이어 쌓은 축대는 페루의 마추픽추의 석벽처럼 잘도 쌓았다.
열 단의 계단들은 화엄불교의 십지를 따랐다지만 석축 아래는 큰 돌을 놓고 위로 갈수록 좁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려다 볼 수밖에 없고 내려올 때는 안정감을 주고 있다. 석축의 이끼며 담쟁이들은 부석사가 만든 연륜이 아닐까.
나뭇결의 약어승천도(躍魚昇天圖)
쉬엄쉬엄 돌계단을 오르다 누각을 버틴 낡은 기둥의 나뭇결에 한 자 크기의 물고기 한 마리가 솟구치는 면면을 볼 수 있다. 이를 躍魚昇天圖라 이름 지었다. 뜻이 있으면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무량수전만 있고 이런 면은 보아도 스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나뭇결에서 해맑게 기도하는 동자상도 찾아서 눈 맞춤은 어떨는지.
안양루 누각 밑, 돌계단에서 마당에 있는 석등의 화창을 통해 무량수전 현판을 넣어 사진기를 들러대는 순간도 영겁의 형상을 찰나에 포착할 수 있는 안목이요. 부석사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묘미다.
안양루 누각 밑에서 돌계단을 오르면 무량수전 뜰이다. 돌아보면 면면이 이어가는 태백산맥의 연봉들이 첩첩, 산줄기로 이어져 가고 있다. 때로는 자욱한 운해로, 때로는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부석사에서 만나고 볼 수 있는 서방정토의 풍광이요 사무치는 품격이다.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고 멀리서만 볼 수 있는 불영(佛影)은 아닐는지.
절간 뜰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는 돌계단과 건물들은 휘어져 놓여있다. 이게 부석사의 건축미라 한다. 무량수전의 기둥들의 특징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조금씩 높아 ‘귀솟음’이고 그 기둥들이 가운데로 쏠림 현상은 ‘안쏠림’이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들은 중간 정도의 직경이 크고 기둥머리와 아래로는 직경이 점차 줄여 곡선의 미를 갖는다. ‘귀솟음’ ‘안쏠림’ ‘배흘림’하는 용어는 전통건축의 묘미를 만들어 내는 한 방법이다.
부석사의 얼굴은 무량수전이고 무량수전의 얼굴은 현판이다. 이 현판은 틀과 장식이 특이하다. 무량수전 현판의 바탕은 원래 금장을 칠했지만 오랜 풍우로 희게 퇴색했다. 무량수전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이란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개성)을 버리고 영주를 피난지로 삼았다. 그 이유로는 안향과 안축의 고향이고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며 공민왕의 부친인 충숙왕의 태실이 있어 명당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안양루 누각의 ‘부석사’라는 현판은 이승만대통령이 쓴 친필이다. 이승만은 미국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듣던 중 담당교수가 고국에 가거든 영주 부석사에 가보면 동양철학의 진수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교수의 말을 따른 것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교통이 불편한 영주 부석사의 거동은 대단하였다. 안양루의 ‘부석사’란 현판에서 ‘浮자의 삼수변’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상 같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이다. 부처의 수인을 보면 아미타불이 아니라 본존불의 항마촉지인이다. 수인으로 보면 무량수전은 대웅전이 아닌가. 이를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본존불을 모신 전각에 왜 무량수전이란 현판을 걸렸을까? 의문을 가져 본다. 무량수전은 남향이고 부처의 좌향은 동향이라 동향은 일출과의 대면으로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모습이다.
무량수(無量數)는 10의 68승이다, 10의 12승이 조(兆)이고, 인도 갠지스강변의 모래알 수가 10의 52승으로 항하사(恒河沙)이면 무량수가 상상이나 되는지는 몰라도 조(兆) 정도에도 해롱해롱하다. 백수 천수가 아니라 무량수(無量壽)만큼 살고 싶은 소망의 불전이란 말이다.
무량수전의 대좌와 불단은 가림 천으로 덮어 놓았다. 가림 천을 들추면 부처는 원형 좌대에 앉아 있다. 부처는 광배가 있으면 닫집은 필요 없다. 하나 무량수전에는 닫집도 있고 부처에게 광배도 둘렸다. 이 닫집은 인근 폐찰에서 가져 와 그냥 두기엔 아까워 설치한 가 본데 이런 고증을 참고로 무량수전의 원래의 모습을 찾았으면 한다.
부석사에 들리거든
• 무량수전은 언제 적 건축물인지?
• 무량수전은 누가 쓴 글씨인지?
• 안양루에서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를 보라
• 무량수전 석등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 무량수전의 묘미는
길을 따라오다, 길가 맛집, 도토리묵 집에서 점심 겸 저녁을 때우고 나니 온종일 쏘다닌 여정이 소백태백양백지간(小白太白兩百之間) 소백산자락(自樂)길이었다.
첫댓글 귀중한 말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