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26
2월4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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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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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svJ9qhbEzY
(양우철 야고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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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는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 동료 인간에게 경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의 제반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한 탁월한 역사가가 있었으니,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8~100)입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역사, 특히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시기 유다 역사를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는 제1차 유다 항쟁(66~70)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지역 사령관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로마 군대에 투항해서 역사에 길이 남을 매국노가 됩니다.
그 후 요세푸스는 로마 황제들의 보호 아래 ‘유다 전쟁사’ ‘유다 고대사’들의 중요한 역사적 문헌을 남기게 되는데, 그의 저작들은 신약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헤로데 2세인 헤로데 안티파스는 합법적인 아내(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와 이혼을 합니다. 그리고 동생 헤로데 필리포스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남편과 헤어지게 한 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수모를 안겨준 것입니다.
금쪽같은 딸을 소박놓은 헤로데 안티파스의 만행 앞에 크게 분노한 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는 안티파스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입니다. 그 전쟁에서 헤로데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게 되는데, 요세푸스는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성격은 서슬이 시퍼런 쌍날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강직하고 직선적이었습니다. 불의와 거짓을 죽어도 못 견뎌 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불같이 일어섰고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고 하고 싶은 말을 따박따박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투명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광야에서 초근목피의 생활을 계속했었기에, 여타 권세가들이나 인기인들이 일으키는 스캔들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재물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리 털어봐야 먼지 밖에 나올게 없었습니다.
솔직히 뒤가 구린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쓴 소리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상대가 로마 총독이든 헤로데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니다 싶을 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의 레이더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몹쓸 짓이 포착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임금이라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혼인에 대한 거룩한 계명을 폐기하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사자에게도 여러 번 경고했지만, 효과가 없자, 광장 한 복판으로 나가 크게 외쳤습니다.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불의와 위선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목소리를 높이고, 깃발을 높이 들었던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이 시대 예언직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꼭 필요한 모습입니다.
돌아보면 사제로서, 천주교 신자로서 참으로 자랑스러웠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국가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 암울했던 군부 독재 시절, 다들 두려워 숨죽이고 있던 시절, 우리 신부님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부양가족이 없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따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말씀이 제 가슴을 크게 칩니다.
“우리 모두는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 동료 인간에게 경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선한 판단을 받을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동료 인간들이 그릇된 길을 걸어갈 때 꾸짖어야만 합니다. 그 일로 내가 죽음을 맞게 될지라도 형제를 꾸짖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냉정하게 대답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마귀하고만 아무 상관이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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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4LMgTL2ee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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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사랑의 계명인 이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헤로데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냥 진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현실을 왜곡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나 옛 예언자 중 하나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 죄책감으로 장난을 칠까요? 양심일까요? 자아일까요? 양심은 그저 그것이 죄임을 알려주는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심판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있어야만 자신이 자기 주인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 대해 자주 제가 사용하는 예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죽은 오리를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이 있으면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에게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에게 모두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란다.”
여기서 오빠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동생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오빠를 부려먹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은 할머니입니다. 오빠가 할머니에게 용서를 받으면 자신은 오빠에 대한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동생은 일단 죄책감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무서운 분으로 여겨야 자신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오빠가 할머니에게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 자체이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뱀이 죄짓게 하고 뱀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만드는 일이 ‘두렁이’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려고 사용하는 위장막이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입니다.
방어기제는 무수히 많지만 대충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 억압: 예전에 안 좋았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압해서 결국엔 잊어버리게 되는 것
2. 부정: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병에 걸렸을 리가 없어’와 같은 상황입니다.
3. 투사: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싫어하면서 상대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4. 전치: 나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푸는 것입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것입니다.
5. 취소: 과거에 한 행동을 보상하는 행동입니다. 아이를 때려놓고 미안해서 안아주는 행동과 같습니다.
6. 합리화: 자신의 환경 등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7. 신체화: 감정이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이 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화병과 같은 예입니다.
8. 행동화: 감정을 바로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욕을 하고 벽을 치는 돌발행동을 합니다.
9. 동일시: 닮아가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아가며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10. 반동형성: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미운 상사에게 대들기보다 오히려 아부를 하거나 지나치게 공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출처: ‘방어기제’, 유튜브, ‘정신과 말해주는 남자’]
더 세분화하면 방어기제는 50가지도 넘습니다. 자아는 우리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이러한 것들을 해야만 한다고 시킵니다. 그런데 결국 그런 것들이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 요인이 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행동 안에 위에 제시된 이 모든 방어기제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어기제는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죄책감을 감소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단절을 가져오고 더욱 큰 죄책감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양심과 같이 자신의 죄를 말해주는 요한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죽였습니다. 방어기제로 충분히 죄책감이 사라졌기 때문에 양심의 목소리는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탄의 기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부터 사랑하는 노력입니다. 모든 죄책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방어기제는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사랑하면 죄책감에서 해방됩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했다면 두렁이를 만들어 입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도 알몸으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음란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두렁이가 필요했고 그렇게 사랑은 변질하였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입니다. 주인공 멜빈 유달은 뉴욕에서 가장 잘 팔리는 로맨스 소설가로 강박 장애에 사로잡혀서 도로의 금도 밟지 않고 피해서 걷고, 매일 같은 식당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는 인물입니다. 그를 유일하게 참아주는 여주인공이 있는데 레스토랑의 종업원 캐롤입니다. 하지만 유달은 표현력도 없고 그녀에게 고백할 자신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를 도와준 이웃이 등장하는데 유달의 아파트 이웃인 게이인 예술가 사이먼과 그의 개입니다. 사이먼은 강도 사건 중 폭행을 당해서 거의 죽을뻔합니다. 개 베르델을 돌봅니다. 처음에는 개 돌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강아지에게 감정적으로 애착하게 됩니다. 동시에 캐롤에게도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됩니다.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유달은 강아지 주인인 사이먼이 부모에게 돈을 청하러 데려가 달라고 할 때,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합니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표현력이 없는 유달에게 캐롤은 실망합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캐롤은 유달에게 더 자신의 인생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합니다.
유달과 캐롤 사이는 여전히 서먹한데 사이먼이 유달이 캐롤에게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설득을 합니다. 캐롤은 망설이지만 자신도 노력하겠다면서 고백을 받아들이고 유달과 캐롤이 함께 걸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유달은 아침에 캐롤을 위해 페이스트리 가게 문을 여는데 도로의 금을 밟습니다. 그도 밟았다는 걸 알아차리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강박증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유달이 이 강박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먼저 개를 받아들이고, 그렇게도 싫어했던 사이먼을 받아들이며, 결국에 가서는 캐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지금까지 사랑에 빠지지 못하게 만들었던 방어기제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방어기제를 만들어낸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압니다. 결국, 모든 죄는 사랑함으로써 씻겨지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양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유달에게는 강아지와 이웃, 그리고 캐롤입니다. 이렇게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면 결국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면 애초부터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고 계셨음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나아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문제인 것을 보기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양심과 같은 이웃인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자아를 살리기 위해 양심을 죽인 것입니다.
자아는 자신의 정체가 뱀임이 드러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웃 사랑은 방어기제가 보이고 그 방어기제 속에 숨어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방어기제가 무너지면 죄책감도 줄어듭니다. 죄책감이 사라지면 자아의 힘도 약해집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랑을 제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이를 진심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 이웃이 바로 나의 양심이고 거울입니다. 아내는 문제가 있을 때 눈을 쳐다보며 대화하기를 원하지만 나는 등산이나 낚시를 하러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숨는 방어기제가 아내와의 관계를 계속 멀어지게 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방어기제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없어지기 시작하며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자기 자신임을 발견합니다. 더 사랑하면 더 사랑할수록 그런 방어기제로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아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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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4-29 :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그는 부정한 죄를 지었고 그것을 계속 지적한 요한을 죽인 것까지 항상 마음에 부담을 갖고 있는데 예수님의 소문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고 외쳤다. 우리는 동료들도 똑같이 꾸짖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서 배운다. 충고는 우리의 의무이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귀하고만 상관없지, 모두 같은 축복을 받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겠다.”(23절)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그 딸이 간통한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 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어린 소녀의 춤 한 판에 자기 영혼을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여인은 헤로데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손을 대게 만들었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 한 것은 참회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말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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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마르 6,17-21)
마르코복음의 표현만 보면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에게 호의적이었고, 요한을 죽일 마음도 없었고, 보호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헤로데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표현이 아니라 표현 속에 들어 있는 뜻을 보아야 합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것은 죽이려고 그랬던 것입니다.(마태 14,5) 19절을 보면 헤로디아만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보호한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을 뒤로 미룬 것입니다. 헤로데가 헤로디아를 막은 것은, 아직 군중의 여론이 어떤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고, 아직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의 여론을 두려워하며”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군중의 여론을 두려워한 것은, 여론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나중에 왕좌에서 쫓겨나서 헤로디아와 함께 귀양살이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요한의 비판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꺼이 들었다.’라는 말은, ‘경청했다.’는 뜻이 아니라, 요한이 말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뜻입니다. ‘좋은 기회’ 라는 말은,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 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바로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헤로데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예언자의 품위를 잃지 않았고,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고, 헤로데를 비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그런 모습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진정한 예언자는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또 목숨을 잃어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여기서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라는 말은, 지킬 수 없는 ‘거짓 약속’입니다.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의 왕에게 ‘내 왕국’은 없습니다. 헤로데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했다가 금방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손님들 가운데에는 헤로데의 말을 듣고 비웃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라는 말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라고 말했다는 뜻입니다. 이 맹세도 비웃음을 살 ‘거짓 맹세’입니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4-29)
이 이야기의 내용만 보면, 세례자 요한은 왕의 사생활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또 왕과 공주 사이의 흥정의 결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세속 권력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거짓 약속과 맹세를 손님들이 비웃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을 살리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자신의 권위와 위엄을 내세우면서 요한을 군중 앞으로 끌어내어 정식으로 처형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서 공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이는 모습이 되어버렸고, 왕권을 과시하기는커녕 비웃음만 사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범죄도 생각해야 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그 살인의 주범이고, 공주는 공범입니다. 그러면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던 손님들과 헤로데의 명령을 집행한 경비병에게는 죄가 없을까? 그들 모두가 다 살인의 공범입니다. 눈앞에서 살인이 저질러지는데도 침묵을 지키면서 방관하는 것은 살인만큼이나 나쁜 범죄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마음속으로는 그 살인을 반대했다.”라고 변명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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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은 모두 신(神)을 부정하였고, 철학, 정치, 문학, 정신의 분야에게 종교를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은 인간의 자기 투사라고 하기도 했고, 신은 죽었다고 하기도 했고, 역사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라고 하기도 했고, 인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하였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상가이며, 혁명가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 모두 독실한 종교적인 기반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신학 전공 대학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유다인으로 태어나 그리스도인으로 자랐습니다. 니체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유다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이들이 예측한 대로 신은 죽고, 종교는 사라지고, 더 이상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신론을 주장하던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는 해체되었고, 신앙이 회복되었습니다.
지식인, 신앙인,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많은 경우에 교회에 있었습니다. 교회와 국가는 같은 이익을 추구하면서 제국주의를 통해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현지인들의 문화와 종교를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수탈은 물론 문화적인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서구인들의 침략에 맞서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테러를 자행하는 것도 종교의 이름이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들의 인권을 탄압하였고, 종교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현대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계율과 법의 이름으로 신앙인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윤리와 성윤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억압하기도 하였습니다. 극단적인 창조론 교육은 자명한 과학의 결과를 무시하였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원주민의 문화와 종교를 탄압하고, 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감행하고, 식민지에서 수탈한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서 화려한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러기에 지식인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인들은 죄의식에 새로운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유를 찾아 떠나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하느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교회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에 권한과 권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교리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성화상을 인정하는 주장과 성화상은 우상이라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죽이기도 했고, 서로를 파문하기도 했습니다. 성지를 회복한다는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였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소리를 외면하였고, 교회는 분열하였습니다. 교회의 창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변화되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선포되었고, 교회의 재산은 빼앗기고,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헤로데와 같은 어리석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교회는 오늘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께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습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막과 광야에 들어가서 깊은 침묵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은수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주고 수도자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도와 건물로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관상과 묵상을 통해서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썩어 고목이 될 수밖에 없는 교회는 새로운 순이 돋아나고, 여전히 외롭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21세기에도 다윗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였던 마더 데레사, 아프리카에서 헌신하였던 이태석 신부님,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이 있습니다. 21세기 교회를 이끌어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는 늘 두 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교만과 권력을 추구하는 헤로데의 깃발이 있습니다. 겸손과 회개 삶을 추구하는 다윗의 깃발이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선택의 책임 또한 우리의 몫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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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마르코 복음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의 헤로데와 조금 다르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헤로데가 헤로디아의 일로 자신에게 불편한 말들을 늘어놓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이미 품고 있었다고 전합니다.(마태 14,3-5 참조) 반면에 마르코는, 헤로데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요한을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고 보호해 주며 그의 말을 기꺼이 경청하곤 하였다고 묘사합니다.
이렇게 요한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헤로데에게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며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는데, 헤로데는 너무 기뻐 그녀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맹세까지 한 것입니다.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합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사람들 앞에서 호기롭게 약속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고 맙니다.
비판받아 마땅한 헤로데의 처신임에도, 우리 또한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의외로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또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염려 때문에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념이나 가치를 저버리고,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의 눈에 괜찮고 무난해 보이면, 정말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일까요? 그런 모습만 쫓다 보면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삶의 주도권을 남이 아닌 나 자신이 쥘 수 있도록, 사람들의 시선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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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죄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괜찮을 텐데 왜 못산다는 것일까요? 잘못이 밝혀지지 않고 감옥에 가지 않아도 마음에 상처로 남아 편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오래 전에 무엇을 훔치고 그것이 마음의 짐이 되어 고민하고 살다가 수십 년이 지나 형편이 나아진 뒤에 몇 십 배로 갚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짐으로 남는 죄의 무게란 그렇게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이라는 잣대는 예민하게 가치 판단을 작용하여 우리를 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줍니다. 오늘 복음은 죄 짓고 못산다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그는 엘리야다’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하였다.”(마르 6,14-15)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하며 불안해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헤로데의 반응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만을 듣고도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며 겁에 질립니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최고 권력자 헤로데가 왜 보지도 못한 사람을 두고 이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헤로데는 인륜을 저버리는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삼았던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잘못을 누차 지적하고 바르게 처신할 것을 간언 하였습니다. 왕 또한 세례자 요한의 말이 옳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죄를 저지르고 말았지요. 자신의 잘못을 세상에 드러내고 지적하는 요한을 거북해 하던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의 간청에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로디아 역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마르6,23)
헤로데의 이런 제안도 헤로디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지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요한이 없어지기만을 바랬던 것입니다. 마음 속에 부담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으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헤로데나 헤로디아는 잘못을 고치기보다 더 큰 죄를 짓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불러오는 법입니다.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 어둠의 세력은 더욱 퍼져나가게 되어 있지요.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의 죄가 카인과 아벨의 죄로, 그리고 거인족들의 무질서와 죄로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온 세상은 썩어서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시니, 세상은 타락해 있었다. 정녕 모든 살덩어리가 세상에서 타락한 길을 걷고 있게(창세 6,12)”되었습니다. 결국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정화시키셔야만 하셨지요.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창세 6,13)
이렇게 빠르게 퍼져 가는 죄의 특성을 우리는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뉘우치지 않고 덮으려고 하면 할수록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오지요. 뉘우치고 회개함으로써 죄의 연대성을 끊어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죄에 사로잡혀갈 뿐입니다.
이것은 이천여 년 전의 헤로데와 헤로디아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기들과 다르게 깨끗한 사람을 보면 부담스러워하고 어울리지 못합니다. 죄인은 죄인끼리 모이게 되어 있지요.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모이기를 좋아합니다.
깡패는 깡패끼리, 사기꾼은 사기꾼끼리 몰려다니며 편안해하는 것을 봅니다. 즉시 발을 빼지 못하면 온 몸이 잠기게 되고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이 지나가기만 해도 불안하고 호루라기 소리만 들어도 겁에 질리지요. 기쁨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뉘우치고 죄의 생활을 끊어버리는 결단을 내려야 하지요.
일본에서는 이런 웃지 못할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한 사기꾼이 무작위로 저명인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어 사기를 쳤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돈을 송금하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식으로 이 사기꾼에게 돈을 송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죄를 털어 버리지 않으면 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은총의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 물듦을 깨끗이 씻어주고 죄로의 연결을 끊어주는 고백성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고백성사로 우리는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죄는 바로 털어 내야 합니다. 즉시 털어내지 않으면 계속 쌓여서 털어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지요.
교회가 일년에 적어도 두 번, 의무적인 고백성사를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은 죄를 털어내어 더 큰 죄에 물들지 않도록 도와주고 새롭게 은총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자신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마저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요. 죄의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몹시 불안해 하였습니다.
죄의 상태에서 불안에 떠는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모습은 결코 남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그럴 수가 있습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함으로써 죄의 유혹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뉘우침을 받아주시고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은총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되도록 늘 깨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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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폭력으로 세례자 요한이 죽게 된 이야기입니다. 헤로데 임금이 동생의 아내 곧 제수인 헤로디아와 혼인하자, 세례자 요한이 이를 두고 여러 차례 잘못된 행실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헤로데는 그 말에 불편해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이 군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적절한 기회가 닿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을 하기 마련입니다. 헤로데에게도 그럴 만한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자꾸 비방하고 나서면 국가 분열이 일어나 안정된 정치를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참석한 생일잔치에서 약속을 어기기라도 하면,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어 국정을 운영하는 데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목이 잘릴 때 그가 외쳤던 비명도 하느님께서는 가슴 아프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른 체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폭력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폭행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셨고, 그 폭력의 악을 폭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헤로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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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헤로데의 생일과 요한의 사망일>
오늘 복음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정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착각,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들려준다.
오늘 복음은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에 봉독되는 복음이기도 하다. 마르코는 이 복음을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즉 12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하였다.
이미 과거사가 되어버린 요한의 수난기를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마르 1,14), 그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을 요한 세례자의 사망일로 만들었다.
헤로데가 요한을 잡아 가둔 이유는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17-18절)이고, 요한을 목베어 죽인 이유는 이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의 꾀임(19-28절)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17절의 기록을 오보로 인정한다. 복음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했다고 하지만, 헤로디아는 필립보의 아내가 아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아레타 4세의 딸과 이혼하여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로서 대왕의 다른 아들과 결혼하였고, 여기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다.
헤로디아의 간교함에 넘어간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 시점에서 보도하는 이유는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세례자의 수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명에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가 함께 할 것이며, 정의의 외침이 운명을 대변할 것이다.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여 사라지지만 그 외침은 결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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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혀서도 있어도 침묵으로 외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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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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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마르코6,16)
<하느님의 정의!>
오늘 복음(마르6,14-2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도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이런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르6,14)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아보질 못합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알아보았는데.
이러한 소문 앞에서, '지금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깊은 물음을 던져보게 됩니다.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는 일에 충실하다가,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헤로데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와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충실하게.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예수님에 앞서 순교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뜻)'는 '공동 선(공동이익)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모두가 함께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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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800년대 당시 평균 수명은 30~35세였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는 45~50세가 되었고, 현재는 1년에 세 달꼴로 수명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1800년대, 1900년대 사람들이 50대의 저를 보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어이구, 장수하시네요.”
그런데 현대의 사람들은 50대면 한창때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요. 분명한 것은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에게 늘 시간이 많이 남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장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갑곶성지에서 봉안당을 운영하며 안치 예식을 하면 다양한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100년을 넘게 살다 들어오시는 분도 있고,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주 어린 아이도 들어옵니다. 언제 죽을지, 언제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다면서 허송세월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날과 그때를 모르기에 늘 깨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자리에 연연하고 있어서 로마와 결탁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로마에 알려지면 자기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한 것으로 문제 제기를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이지요. 자기 부인을 내쫓고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면서 고발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군중이 동요되어 폭동으로 이어지면, 로마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마침 헤로디아의 농간으로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내어 준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도 자기 잘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해서는 안 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소문을 듣고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았구나.”(마르 6,16)라며 큰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다윗왕을 꼽습니다. 그의 삶에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지으신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입니다.(집회 47,8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은 올바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됩니다.
헤로데 임금은 정반대였습니다. 오로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살았고,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면서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요? 주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며 언제 올지 모를 그날과 그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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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맹세를 하지마라>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왕은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 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의 기회를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 라고 만(야고 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해소하기 바랍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꿋꿋하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 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임을 잊지 마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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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훈련>
-다윗, 세례자 요한-
믿음 역시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믿음 역시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통해 날로 믿음 또한 성장해야 합니다. 참으로 소망할 바 반석같은 믿음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도 믿음입니다. 가톨릭 성가 480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르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사랑을 바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즐거이 바치리 믿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는 단순소박한 성가가 고맙습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사자성어도 생각납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뢰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며 이런 신뢰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일종의 다윗에 관한 추도사로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얼마나 다재다능한 믿음의 사람인 다윗인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주목할 바 다윗의 전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다윗은 축제를 화려하게 벌였고, 그 시기를 완벽하게 정리하였으며, 주님의 성소에 울려 퍼지게 하였다.’
문무文武를 겸한 예인藝人으로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 찬미의 사람, 다윗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향한 사랑과 믿음의 표현이 바로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기도와 사랑이 훈련이듯이 믿음 역시 훈련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 믿음의 훈련인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지요! 다윗의 믿음과 사랑에 감동하신 주님의 응답이 인상적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이후의 우리 삶을 보십니다. 회개한 이들의 죄는 불문에 붙이시는 과거는 묻지 않는 주님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의 사랑과 믿음을 보십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믿는 것이 답임을 다윗을 통해 배웁니다. 나쁜 기억의 치유에도 찬미와 감사의 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치유의 처방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이런 다윗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분발하며 믿음과 사랑을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메시아 다윗에 이어 오늘 복음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좋은 믿음의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기사 위치가 의미심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적 죽음이 예수님은 물론 그 제자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습니다. 이 기사 앞에는 열두 제자의 파견 기사가 나오고 이 기사 뒤에는 바로 열두 제자의 귀환 보고에 이어 오천명을 먹이신 기사가 나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수도자들에게 ‘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의 죽음을 늘 눈앞에 두고 순교의 죽음을 예감, 예견하면서 일일일생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늘 깨어 믿음의 삶에 온 힘을 다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이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 역시 살아 있는 순교적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 사랑을 두고 순교적 삶을 사는 이들은 곳곳에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을 통해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사람은 세례자 요한뿐이요 모두가 중심 부재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과한 소문을 듣고 전전긍긍하는 헤로데를 통해 그가 얼마나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중심 없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도대체 삶의 중심이 없습니다. 이어 헤로데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그의 딸을 통해 하느님 중심 부재의 사람들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지 배웁니다. 정말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악행을 저질러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수차례 간언하다가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의 복수로 목숨을 잃은 정의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이 부재할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 지 봅니다. 여하튼 이런 세례자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도 있듯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의기소침하거나 위축되기는커녕 더욱 믿음을 새로이 하면서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날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순교적 믿음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이자 배움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믿음도 배워가면서 날로 성장 성숙해 가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자발적 기쁨과 감사로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께서는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드높으시도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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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tqro98Ay1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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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존중과
생명은
하나이다.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존중이다.
제대로된
만남이
존중이다.
존중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결과는 언제나
관계의
파괴이다.
사람은 얼마나
파괴적인가.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참으로
필요하다.
존중이
빠져버리면
생명은
죽음처럼
처참하게
가로막힌다.
생명은
모두가
평등하다.
정의의 길을
가는 사람을
막아서는
안된다.
생명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은
존중을 회복하는
길이다.
사람을
살리기로
결심하는
시간이다.
존중과
파괴 사이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있다.
복음은 다시금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허세와
두려움을
버리고
존중으로
들어서는
새로운 날
되시길
기도드린다.
존중이
생명이고
존중이
복음이다.
만남은
존중으로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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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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