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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갇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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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고별 / 김상기
동산 추천 0 조회 110 18.07.15 19:2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고별 / 김상기

 

 

아내가 많이 아프다
눈 꼭 감고 참고 있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묻는다
‘날 사랑해?’

 

나는 화들짝 놀라 대답한다
‘그럼! 사랑하고말고!’

 

아내가 생전 하지 않던 청을 한다
‘나 한 번 안아 줄래?’

 

나는 고꾸라지듯 아내를 안는다
목구멍 속으로 비명이 터진다
‘여보! 제발 가지 마!’

 

이윽고 아내가 가만히 나를 민다
‘이제 됐어… ’
여간해선 울지 않는 아내 눈이 흠뻑 젖어 있다

 

장례식 날 관 뚜껑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를 안았다
얼어붙은 눈물
얼음 같은 체온

 

사람들이 나를 떼어 놓는다
나는 아내를 보낸다
내 남은 삶과 꿈도 함께 보낸다
  

 



 

**************************************************

 

‘스물여섯에 기자가 된 이후 쓴 시는 이것뿐’이라는

‘젊은 기자의 초상’을 1974년에 쓰고 시를 놓은 시인이

 2011년 가을에 묶시집 ‘아내의 묘비명’에서 옮겼다.

병상에서도 현명하고 사랑 깊었던 아내에 대한 절절한

애모의 정이 질박하게 담겨 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버릇 중 하나는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테다.

얼마나 이기적인 바람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 보내는 이의 가장 큰 고통은, 이제 세상 어디에서도

이 사람을 만나볼 수 없다는 것일 테다.

떠나는 이는 남은 이가 자기 없이 어떻게 살까, 오직

그 걱정과 안쓰러움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도 못 느낄 테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크나큰 상실감과 슬픔은 남은 이의 몫. 그걸 겪는 사람이

당신이 아니고 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사랑일 테다.


시인은 병상의 아내를 ‘고꾸라지듯 안는다’.

‘얼음 같은 체온’의 아내를 옆에서 떼어놓을 때까지

부둥켜안는다.

이리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이

없지 않을까. 그러나 사랑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시집을 읽어 보면,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도 더 잘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시인의 ‘남은 삶과 꿈’이

노래가 되기를!

결혼을 보험이나 계약으로 생각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부부애가 신화처럼 느껴질 테다.


/ 황인숙 시인





‘아내의 묘비명’의 시인 김상기


<span style="font-family: Batang,바탕,serif; font-size: 12pt;"><span style="font-family: Batang,바탕,serif; font-size: 12pt;"><span style="font-family: Batang,바탕,serif; font-size: 12pt;">.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span></span></span> 편집자주: MBC방송 보도국장과 대전 MBC 사장을 역임한
김상기1946-2015)씨가 지난 8월 16일 타계했다.
그는 2011년 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시집을
상재했었다. 2015년 7월 그 역시 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그의 절절한 사연을 취재하기로 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인터뷰는 미루어지다가 그가 타계함으로 인해 인터뷰는
불발되었다. 그와 생전에 나눈 여러 대화와 그의 친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가상의 인터뷰를 마련했다.  

1화. 아내의 묘비명 

<아내의 묘비명>이란 시집을 낸 김상기 시인과 “다음 주쯤에
통화를 해서 인터뷰 약속을 잡지요”라고 했던 것이 지난 7월 말
이었다. 이 시집은 신간이 아니라 2011년에 12월에 출간되었으니
5년이나 된 책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별한 아내를 그리는 한 남자의 절절한 마음이 애잔하게 들어
있는 그런 시집이었다. 그 중 <아내의 무덤>이라는 시.

겨울 눈밭에 내가 서 있다 
손발보다 가슴이 더 시리다 

새봄이 또 와도 
기다리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름 소나기가 하늘 무너진 듯 울고 간다 
내 눈물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가을 마른 잔디 위로 빈 바람이 흩어진다 
내 영혼도 부서진다 

하릴 없이 무덤가를 서성인다 

오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한 줌 흙으로 다시 만날 날이 허깨비 같은 내가

독자들은 이 시를 통해 짐작하겠지만 시인은 2008년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시인은 아내를 묻고 난 뒤 4년 동안
매주 아내의 묘지를 찾았다.
가서 아내의 영혼과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한다.
아들 녀석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업신여기는지’ 고해 바치기도
하고, ‘왜 꿈에도 보이지 않느냐고 생떼’를 쓰기도 한다.
아내는 시인의 상상 속에서 ‘때로 깔깔 때로는 눈시울을
붉힌다.’ (- 사랑 때문이 아니다)  

이런 시를 쓴 김상기는 어떤 사람일까?
드러난 그의 경력은 대전 출신으로 대전고, 서울대 국문과,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73년 MBC에 발을 들인 후
90년 보도국 편집부장, 경제부장, 94년 방송심의국 심의부장,
96년 보도취재담당 부국장, 97년 보도국장, 98년 스포츠 국장을
거쳐 보도국 해설위원, 2002년 대전 MBC 사장을 역임했다.  

시와 관련된 그의 이력을 보면, 대학원에 다니던 ‘10월 유신’
바로 전 해인 1971년 <어두운 세상>이라는 다소 불온한 시를
대학신문에 발표했다가 약간의 불편을 겪기도 했고, 1974년
‘유신철폐’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가두시위를 보고 <젊은
기자의 초상>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시위를 한 학생들은 전부 경찰에 연행되었고, 보도는 통제되어
기사를 내보낼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는 “부끄러움 속에 휘갈겨 쓴 이 시는 물론
발표할 곳도 없었고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다.
나는 시를 잃었고 시도 나를 버렸다.
1992년 여름 ‘민주화’ 이후 많은나의 동료와 후배들이 갑자기
마음 놓고 투사로 돌변했다. 희극이었다.”라고 진술한다.  

드러나지 않은 그의 이력 중 아내와의 인연은 이렇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아내는
그가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그가 정동에 있었던 MBC에서
기자를 할 때 고등학생이 된 아내가 찾아왔다.
이후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그 만남을 그는, 

빛이 어둠을 쓸어내고 
나는 문밖으로 나섰다 

꽃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고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논리가 없다 

맨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나는  
누구와 함께 살고 죽어야 하는가를 비로소 알았다
 
- 맨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30년을 함께 살았다.
그리고 아내가 암으로 먼저 남편 곁을 떠났다.
남편 김상기는 아내를 보내고 연민과 회한(悔恨)으로
가득 차 30년 동안이나 접어두었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시들은 모두 가슴에서 우러난 시였고, 그 시편들을 모아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을 낼 때 편집을 도와 준 인연으로 필자는 가끔 그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올해 5월 그는 전화를 걸어와 필자에게 아주
담담하게 남 얘기하듯 말했다.
“하선생, 이제 내 차례가 온 것 같아요. 말기라고 하네요.”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내면으로 고통 받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지난 몇 년간 그는 멋있고 건강하게 보이는 노신사였으니까.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를 생각하다가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돌아가시기
전에 그의 순백의 사랑에 대한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7월에 통화를 해서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8월이 가고 9월이 지나도록 바쁜 일정이 있었고, 10월이
되어서야 나는 전화를 했다.
신호음만 가고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며칠을 두고
여러번 전화를 했고 문자도 남겨 두었지만 연락이 없었다.
며칠 전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 그의 부고 기사가 떴다.
8월 18일 발인이라는 기사. 두 달도 더 지난 것이었다.
나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화. 아내 곁으로 간 시인 

멀쩡하던 아내가 몸이 좀 이상하대서 병원에 갔더니
말기 유방암 판정을 받는다.
6개월 전에 검진을 받았을 때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6개월 만에 말기라니. 그때부터 마흔 다섯의 아내는
항암치료를 하고 남편은 그녀를 보살핀다.
그런 와중에도 아내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 간다.
남편은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말기 판정을 받고도 5년을 살았다면, 의학적으로는
오래 버텼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그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아내는 미리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모든 것을 정리한다.
하지만 그 준비는 자신의 마감이 아니라 산 자인 남편과
자식들을 위한 준비다. 이를테면 남편을 백화점에 데려가서
자신이 떠난 다음에도 입을 옷을 준비한다.  

...그런 사람이 떠나기 전 
나를 백화점에 끌고 갔다. 
여름옷 겨울옷 티셔츠에 오리털파커까지 
‘궁상맞게 살지 마!’ 

- 유품, 부분 

그런 아내도 임종 직전에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 외로운 길을 가기 위해선 사랑이 필요하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확인한다.

아내가 많이 아프다 
눈 꼭 감고 참고 있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묻는다 
‘날 사랑해?’ 

나는 화들짝 놀라 대답한다 
‘그럼! 사랑하고 말고!’ 

아내가 생전 하지 않던 청을 한다. 
‘나 한 번 안아 줄래?’ 

나는 꼬꾸라지듯 아내를 안는다 
목구멍 속으로 비명이 터진다 
‘여보! 제발 가지 마!’ 

이윽고 아내가 가만히 나를 본다 
‘이제 됐어...’ 
여간해선 울지 않는 아내 눈이 흠뻑 젖어 있다 

- 유품, 부분 

그리고 아내는 부탁을 한다.
‘갈 때가 되면 알려줘’라고. 남편은 약속을 하지만 주치의가
말린다. 평화롭게 갈 수 있도록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남편은 주치의 말을 따른다.
마지막 날 밤 아무도 그날 아내가 갈 줄을 몰랐다.
“아들도 친정 동생도 의사였지만 아무도 아내가 그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을 몰랐다."

‘집에 갔다 올게’ 
맹추 같은 나 
‘...왜?’ 
힘없는 질문 

‘아침에 다시 올게’ 
한 치 앞도 못 보는 나 
...가... 
잦아드는 목소리 
아내의 마지막 음성 

- 유언 

‘가’가 아내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아내는 가라고 보내주었지만 정작 남편은 아내가 가고 나서
갈 곳이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도 없다.”
휠체어를 밀 수 있을 때는 살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었지만
남편은 살아가야 할 의지조차 없다. 

남편은 아내를 보내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나에게 잡혀 하늘을 날지 못하는
네 젊음과 자식들에게 묶여 꽃피우지 못한 네 꿈을 늦게나마
조금이라도 보상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음을
통탄한다. 남편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다.
아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남편은 자상한 성격이지만 기자로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가 마흔 다섯에 병이 걸려 쉰에 저 세상으로 갔다.
남편은 그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자책하는 것이다.
아내가 일찍 결혼한 것, 가사만 전담한 한 것, 암에 걸린 것,
그리고 죽음까지도. 아내가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그 신랑이라는 못난이는 당신에게 목숨 한 조각도 나눠
줄 수 없었음을 남편은 통탄한다.

그때부터 남편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다.
아내를 추억하며 시를 짓고, 일주일에 한 번은 대전으로
내려가 아내의 묘지를 찾는다.
아내의 묘지에서 넋두리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텅 빈
거실에서 자살 충동을 느낀다.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움, 사랑, 죄책감... 온통 아내만을 생각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아내의 묘지에 찾아가니 그는 주말 부부로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8월16일 오후 3시
그리던 아내 곁으로 갔다.

3화. 미리 써 놓은 묘비명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그와의 인터뷰 약속은 지킬 수 없다.
내가 늦었기도 했지만 그는 언론인이었기에 그 스스로도
인터뷰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의 죽음에 추도시를
쓴 분을 찾을 수 있었다.
대전에 살고 있는 그의 고교 선배이자 치과원장님이었다.
그분과 통화를 해서 내가 모르던 몇 가지를 확인하고 그가
비록 망자지만 그와의 인터뷰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그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공적인 활동은 기부였다.
한 매체에서 그와 관련된 기사를 찾았다.  

대전고 동문이 생전에 모교발전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거액의 학교발전기금을 기탁한뒤 운명해 동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17일 대전고에 따르면 신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김상기(44회
졸업)씨는 지난 12일 후배 및 모교발전 기금 1억원을 기탁했다.
김씨는 발전기금 기탁 4일 후인 지난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10여년간 1대1 결연장학금 기탁에 적극적이었던 김씨는
지난 5월 "올해 몸이 불편해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살아있는 지금 모교발전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고 싶다"고
말하고 이번에 실행에 옮겼다.
대전고와 총동창회는 김씨를 기념하기 위해 대전고 재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한모생활관 학습실을 '김상기 스터디 홀'로
명명하고 개관식을 가질 예정이다.

(뉴시스 2015.8.17.)


김상기 시인은 아내를 보내고 난 뒤부터 모교에 1대1 결연장학금을
냈고, 그리고 마지막 가기 4일 전에도 거액을 쾌척했다.
아내 없이 산 8년을 아내만을 생각하고 살았고 그 나머지에는
그는 그저 감사하면서 살았다.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살았다. 

모교에 장학금을 기부한 것도 소중한 인연에 대한 감사의 인사
였을 것이다. 2014년 6월 즈음에 그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시인 한 사람(황인숙)의 주소를 물은 적이 있다.
모일간지의 아침 칼럼에 자신의 시를 인용하고 부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을 글을 보았다며, 그녀에게
감사의 편지라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황시인에게 정중한
감사의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사에 감사하며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2012년 그가 시집을 낼 때 필자는 편집자 자격으로 시집의
제목을 다른 것으로 제안했지만 그는 완강히 <아내의 묘비명>
이라는 제목을 고집했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생각하니 ‘아내의 묘비명’이란 부제를 단
<연가>라는 시에 바로 답이 있다. 

연가 - 아내의 묘비명 

목숨이 백 년은  
푸르를 줄 알았다 

사랑은 천 년도 
짧을 것만 같았다 

차운 비 한 서슬에 
놀라 깨니 적막한 꿈 

꽃향기 새소리도 
무명(無明)으로 쓸려간다 

깊은 강 건너 
잊혀진 내 무덤가 

그리운 그대 음성 
바람결에 뒤채인다  

이 시의 후반부는 산 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죽은 다음에 아내의 음성을 듣는 시인의 영혼을 묘사하고 있다.  

아내가 죽고 난 뒤 그는 합장묘를 준비했고, 2015년 8월 18일
마침내 아내와 함께 묻혔다. 세상 사람들은, 자식조차도
그 무덤을 언젠가는 잊을 것이다.
그 무덤에서 그는 아내와 지상에서 못다 한 사랑의 밀어를
영겁의 세월을 넘어 영원히 속삭일 것을 작정했다.
그래서 그 시 제목이 ‘연가’이자 ‘아내의 묘비명’인 것이다.
아내의 묘비명은 합장을 택했으니 자신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그들의 합장 무덤의 묘비명이 바로 ‘연가’였던 것이다.
그는 그 묘비명을 시집을 통해 미리 써 놓았고, 그것이
그가 시집을 낸 이유였던 것이다. 

아! 어리석은 평론가여. 이제야 그것을 알아챘다니.
그가 수없이 생각했을 묘비명의 의미를 이제야 알아챘다니. 

/ 하응백 문학평론가 hbook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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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7.15 22:25

    첫댓글 ........!!!!!!!

  • 18.08.07 15:59

    가슴이 아퍼요.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신은 왜 빨리 떼어 놓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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