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4년 조던이 NBA에 입성한 이래 올해 은퇴할 때까지 줄곧 그의 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 아니 그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후세에게 충분히 부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행운아다. 특히 올 시즌의 은퇴를 예측(?)하고 작년 97-98시즌 종일 미국에 머물면서 그의 마지막 플레이를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행운마저도 최대한 지어 짜듯 즐긴 것 같다. MSG에서 펼쳐지는 신의 농구 쇼를 생각하면…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년은 나에게 몹시 불운한 한해가 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허재의 플레이를 놓쳤기 때문이다. 76년 이래 24년간 계속된 ‘허재 지켜보기’에 단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도 역시 나는 행운아 일 수 밖에 없다. 역시 단순한 이유다. 허재의 초등학교 5학년 농구를 보기 시작한 이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그의 플레이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허재(2) No. 6
70대 후반부터 농구를 접하면서 가장 처음 알게 된 선수는 유재학이다. 허재의 2년 선배인 그는 농구 신동이라고 소개되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스타덤에 올랐던 불세출의 가드이다. 허재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줄곧 두 수 정도 앞선 기량으로 좋은 스승이자 넘어야 될 산으로 그의 앞에 있었다. 등번호 6번을 달고서..
보통 농구 선수는 첫 인상으로서 플레이를 규정짓기가 힘들뿐더러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자꾸 지켜보다 보면 괜찮아 지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여기에 무척 예외적인 선수가 내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다. 바로 78년 고대 신입생으로서 그 해 고연전에서 신들린 샷을 선보이며 화려한 신고식을 했던 이충희가 그 주인공이다. 그 날의 기억은 너무나 또렷해서 당시 스코어 84:84는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도 않는다. 무승부인 이날 경기의 유일한 승자는 이충희 뿐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영웅 등번호 6번…
70년대 말 MBC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던 NBA를 통해 국내팬에게도 잘 알려진 필라델피아 76ers의 닥터 J ? 줄리어스 어빙 ?은 여타 선수와는 차별적인 농구를 했다. 슬램덩크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농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칭송을 받는 기술 농구의 달인이었다. 그의 농구를 보면서 감탄에 빠지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역시 No. 6..
현재 9번을 달고 뛰고 있는 허재가 예전에 애지중지 하며 고집하던 번호가 바로 6번이었다. 이와 같이 필자가 농구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보아 왔던 스타들의 번호가 모두 6번이다 보니 나는 한동안 6번이 팀의 최고 에이스에게나 부여되는 번호로 착각했던 때가 있을 정도였다.
어쨌건 이 시절 나는 혼자서만 품고있는 - 즉 학교나 부모에게 말하지 않을(?)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유재학과 허재가 빨리 커서 이충희와 한 팀을 이루어 뛰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소원은 예상외로 유재학이 대표팀 합류가 늦어지면서 근 7,8년을 기다린 끝에 이루어졌다. 어쨌건 87, 88년 대표팀에서 이 세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 이 시절의 얘기는 후에 다시 한번 하기로 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 나의 흥미거리 중에 하나는 등번호 정리에 관한 문제였다. 누가 6번을 달고 뛸 것인가에 관한...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6번은 유재학이 이충희는 8번, 허재는 7번을 사용하는 것으로 6번 쟁탈전은 정리되었다. 사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을 사소한 일이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궁금해왔던 초미의 관심 사로서 허재에 대한 추억의 하나라고 생각되어 아까운 가상 세계의 공간을 낭비하며 끄적여 본다.
허재(3) 상명초등 / 용산중학
허재가 농구를 시작한 시기는 상명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당시 이 학교에는 유재학이라는 농구 신동이 허재의 2년 선배로 있었다. 유재학은 그의 초등학교 경기를 TV에서 중계를 하고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주목받고 있었다. 앞의 글에서 언급 했다시피 유재학은 본받아야 할 선배로서 혹은 넘어야 될 라이벌로서 허재 앞에 있었다.
단언컨대 청소년 시절의 허재에게 가장 적절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직도 이들 둘 사이에는 감독과 선수라는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는 천재의 자존심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인가, 나래(현삼보)와 대우(현신세기)의 게임에서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느끼곤 한다.
허재는 이 시절부터 다분히 스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도 허재의 특기는 현란한 드리블에 의한 개인 돌파 였으며 농구를 혼자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어떤 대회에선가는 1점을 뒤진채로 종료 부저 소리와 함께 자유투를 얻었다. 당시 가슴에서 투핸드로 던지는 초등학생의 자유투는 정확도가 매우 낮았으며 특별히 왼손잡이 허재는 외곽슛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위기에 강한 이 꼬마 스타는 어김없이 2점을 보태서 팀을 우승시키고 학교의 스타가 돼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허재의 유일한 패배는 소년체전에서 xx도 대표팀과의 경기에서였다. 그 팀에는 나이를 속이고 출전했다고 밖에 믿어지지 않는 거인이 하나 있었다. 당시 이와 같이 부정 선수가 소년체전에 출전하는 것은 흔한 일로서 성적 지상주의가 부른 결과였다.
그 경기는 그 거인과 허재간의 1대1싸움이나 마찬가지 였고 슬프게도(?) 허재는 패배했다.
허재도 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날이었다. 그 만큼 ‘허재 = 승리’라는 도식이 성립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허재는 78년도에 농구 명문 용산 중학교에 입학을 한다. 이 시기의 그의 농구 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관찰 기회가 많지 않아서 서술할 내용이 많지는 않다. 아마 당시에는 이충희의 농구에 매료되는 바람에 신체적이나 기량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중학농구가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적지 않게 직접 관전한 그의 경기에서 그는 여전히 돋보였다. 드리블이라던가 볼 핸들링 능력, 그리고 코트비젼 등은 왠지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국내 성인 농구선수보다 앞선 것으로 느껴졌다. 이 시기에도 어김없이 유재학이 그의 2년 선배로 있었으며 허재에게 등번호 6을 전수하고 경복고로 진학했다.
이와 같이 허재의 소년기는 좋은 농구 환경과 선천적인 운동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했으며 착실한 기본기를 다질 수 있었던 시기라고 정의될 수 있겠다.
허재(4) 용산고교 / Asia Youth Championship
허재가 용산고 1학년이던 81년 당시는 유재학의 경복고 전성 시대였다. 남상만, 김윤호등과 팀을 이룬 유재학은 그 해 전국대회를 휩쓴다.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서 전혀 손색이 없을 유재학의 특징은 광각렌즈를 장착한 듯한 시야, 낮고 불규칙한 드리블, 그리고 경기를 읽는 영리한 머리였다. 또한 작은 신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인사이드를 파고 들었다. 개인기로서 인사이드로 파고들어 수비 전열을 부순 후 내,외곽에 생겨나게 마련인 찬스를 살리거나 이가 여의치 않으면 직접 레이업을 올려 놓는 기량은 당시 성인 농구에서도 보기 힘든 감탄스런 기량이었다. 이런 유재학의 스타일에 힘과 오기 그리고 높이가 덧붙여진게 허재의 고교시절 농구였다.
비록 허재가 1학년때 쌍용기 대회의 우승을 이끌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는 했었지만, 본격적인 신고식은 고교 2년 때부터 라고 해야 할 듯 싶다. 그러니까 82년 봄에 다시 본 허재는 그 전의 허재가 아니었다. 신장이 거의 다 자란 상태였으며 몸에 근육이 붙게 되기 시작하면서 파워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의 맞수는 임달식이 있던 휘문고였다. 휘문은 내외곽에 걸쳐 좋은 선수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허재를 만난 죄로 2년동안 결승전의 단골 희생양이 되어야했다.
용산에는 포인트 가드 허재, 현재 나산에서 활약중인 이민형이 센터를 맡았고 연대를 거쳐 기아에서 활약했던 고 한만성이 외곽 슛터로서 활약했다. 때마침 불었던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바람을 타기도 했지만 당시 용산고의 플레이는 빈번히 TV에 중계될 정도로 고교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허재도 초고교급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화려하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유일한 패배는 허재가 3학년이던 쌍용기 대회 예선에서 대 휘문과의 경기였다. 이 경기는 다음날 언론에 의해 '병주고 약준 허재'란 머릿기사로 보도 되었던 경기이기도 하다. 전반전 내내 죽을 쑤던 허재는 후반 들어 맹추격을 하기 시작해서 급기야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2점차 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2초를 남긴 상황에서 휘문의 자유투. 여기서 허재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그때 휘문의 선수가 자유투율이 별로 좋지 않은 선수임을 파악한 허재는 김병철-현재 동양의 김병철이 아님 -에게 뭔가를 귓속말로 지 시했다. 1구를 실패하고 2구째를 던지는 순간 김병철은 뒤도 안보고 냅따 휘문의 골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관중이나 벤치에서도 의아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2구마저 실패한 공은 허재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휘문 골밑에 혼자 있던 김병철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는 게 아닌가. 연장전을 기대하는 순간이었다. 근데 어의없게 김병철이 이 공을 놓지고 만다. 라인 드라이브성의 이 패스의 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이었다. 물론 결승전에선 용산고는 예선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을 한다.
이 시기에도 허재를 시기하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허재의 존재를 이민형과 한만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묘사했다. 물론 이 두선수가 훌륭한 선수임에는 분명하지만 이것은 허재 선수를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다. 언젠가 용산고는 서울시 지역대회에서 예선 탈락을 한적이 있다. 이땐 허재가 청소년 대표로 차출되어 자리를 비운 시기였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고교시절 허재가 휘문에 있었다면 임달식이나 신성식, 이완규는 훨씬 각광받는 유망주가 되었을 것이며, 원래의 예정대로 고대에 진학을 했다면 당시 즐비하던 고대의 외곽 슛터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허재가 다른 팀으로 이적을 하면 그 팀엔 허재로 인해 빛을 보게 될 새로운 스타가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허재는 고교 2년 시절,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유재학, 남상만, 김윤호, 김유택 등과 팀을 이뤄 참가한다. 허재가 중국과 처음으로 맞부딪치는 경기라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대회였다. 그러나 이 대회에선 중국과 필리핀에게 연패를 당하고 만다. 특히 필리핀과의 경기에선 경기장 폭력 사태까지 발생하는 등 전혀 기대치 못했던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후 84년 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선 허재는 82년 대회를 설욕하며 청소년 농구의 대미를 장식한다. 당시 멤버로는 허재, 이민형, 한만성, 김영철, 김종석 등이 있었다. 이전해인 고3시절에 있었던 일본원정 순회 경기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며 일본 농구계의 주목을 이미 받고 있던 터라 대회 시작 전부터 '한국의 6번만 막으면 승리'라는 각팀의 전략이 서있던 대회이기도 했다. 결승전에서 만난 중국은 허재에 의해 농락당하고 만다. 만일 누군가 허재 경기 비디오 컬렉션을 생각한다면 이 경기를 꼭 구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허재의 청소년기 농구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경기였다. 허재는 이 대회 우승으로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이 ‘혜택’은 결과적으로 굴레가 되고 만다. 5년간을 동일 직종, 동일 근무처에서 종사해야 하는 그것마저도 대학 졸업 후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병역특례법에 따라 93년 봄이 되도록 해외 진출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허재(5) 80년대 초의 한국농구와 허재의 등장
허재가 고교무대를 평정하고 있을 당시 국내 성인 농구는 외곽 슛터들의 전성시대였다. 황유하, 진효준, 이충희, 이민현, 최철권, 박수교, 신동찬, 박인규, 김현준, 오동근 등등 포지션에 상관없이 슛에 관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훌륭한 선수가 무더기로 배출되었던 시기였다. 이들 중에서도 이충희는 단연 독보적인 선수였다. 고연 정기전에서 처음 봤던 이충희의 슛은 신기 그 자체였다. 상체를 뒤로 젖힌채 던지는 페이드 어웨이 슛이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던지는 슛, 완벽한 레이업 찬스에서도 오히려 외곽슛으로 가볍게 끝내 버리고 유유히 돌아서는 모습등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와 같이 많은 스타들을 탄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농구는 다소 기형적인 것이었다. 외곽의 화려한 플레이에 치중한 나머지 인사이드 플레이가 실종된 것이다. 센터의 역할은 수비 리바운드와 슛터를 위한 스크린 플레이가 전부였고, 페네트레이션을 할 만한 개인기를 보유한 가드진이 없었다. 따라서 볼의 흐름은 빠르기는 했지만 다양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러한 약점은 국제 대회를 통해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마는데 79년 나고야 ABC 대회에선 중국은 물론 일본에게까지 대패(100:85)를 당했으며, 81, 83년 ABC에서도 중국을 넘지를 못했다. 스코어가 문제가 아니라 경기 내용이 문제였다. 인사이드 없는 농구는 전망이 없어 보였다.
이런 와중에 기적같은 일이 발생한다.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의 우승이었다. 결승전, 대 중국전의 주전 멤버는 박수교,이충희,이민현,임정명 그리고 신선우가 뛰었다. 이 날 승리의 주역은 단연 신선우였다. 이충희는 전반전에 큰 활약을 했지만 후반전에 오픈 찬스를 번번히 놓치는 등 난조를 보였다. 이 날 신선우는 한국의 인사이드 플레이를 되살려냈다. 용산고, 연대, 현대를 거치면서 가드, 포드, 센터를 겨쳤던 그는 불운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이다. 볼 핸들링과 시야가 좋았으며, 상대 센터를 등지고서 펼치는 리드미컬한 드리블과 피벗 플레이가 일품이었다. 서전트 90cm의 탄력에 순발력이 있었다. 종전까지 외곽으로만 돌던 볼이 가운데로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흐름의 입체감이 생겼다. 센터로서 득점은 많이 올리지 못했지만 무수히 많은 찬스를 제공하면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후 신선우는 무릎 부상의 악화로 더 이상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으며 현대에서 재기하는가 했으나 결국 부상으로 단명하고 만다.
83년 ABC에선 중대 진학을 앞둔 고교생 신분의 김유택이 국가대표로 데뷰한 대회이기도 하다. 교체 멤버로 코트에 들어선 김유택은 승부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깜짝 놀랄 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중국선수와의 리바운드 경쟁에서 뒤지지 않았고, 겁없는 블록킹 시도를 하고, 센터 수비를 해냈다. 신장과 웨이트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대신 스피드와 푸트웍이 월등했다. 그 후 김유택은 서장훈이 등장하기까지 국내 최고의 센터로 골밑을 지켜왔다.
개인적으로, 그의 기량이나 플레이의 완성도에서 불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센터 플레이어로서 10년 이상을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농구대잔치 통산 25xx개의 리바운드(1위), 4009 득점(4위), 7xx 수비 포인트(1위) 기록이 김유택을 받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허재가 한국 남자농구 전면에 등장한다.
허재(6) 중앙대 농구의 신화 (1)
84년 봄 허재는 농구계의 관심속에 대학 무대 데뷰전을 갖는다. 고교에서는 수퍼스타 대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겨우 대학 1학년 풋내기에 불과한 그의 기량이 대학 무대에선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세인들의 관심 거리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엉뚱하게도 퍼머 머리를 한 채로 다소 생경한 모습을 보이며 코트에 등장한다. 예선 첫 경기부터 엄청난 활약을 하며 단지 몇 경기만에 초고교급 선수에서 대학의 최정상급 반열로 스스로를 업그레이드를 해버린 허재는 결승전에서 당시 최강인 고려대와 맞붙는다. 이 경기를 생각하면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경기 중반쯤 허재는 원맨 드리블 쇼를 펼치며 자기 편 코트에서부터 5명의 고대 선수를 차례로 돌파하는 신기를 보여준다. 속공도 아니고 빈 공간을 빠르게 파고 드는 그런 드리블이 아니라 느린 듯 하면서도 타이밍을 뺏는 ‘진짜 개인기’를 보여 주었다. 농구는 이런 것임을…
이 날의 우승은 중대 신화의 시작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반면, 한편으론 이날 경기부터 유감없이 발휘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는 운명의 짐을 짊어진 날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승부가 이미 갈린 후반전에 발생한 한기범 선수 집단 린치 사건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명백한 집단 폭력 사건이었다. 일방적으로 밟히고 맞던 한기범이 결국 대걸레를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그 후 한기범은 태릉 선수촌에서 한번 더 대걸레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중대 농구 또는 중대 농구를 대표하는 허재 선수가 왜 한국 농구계에서 반항아가 될 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당시 중대 농구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외곽 의존적인 기존 농구와는 전혀 다르게 철저하게 인사이드를 공략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더블 포스트에 한기범, 김유택, 포드에 이경영, 강정수 그리고 포인트 가드에 허재가 포진한 중대는 매 경기 100점 이상을 쏟아 부으며 대학을 평정했다. 새로운 볼거리에 팬들은 열광했다. 2년뒤 가세한 강동희가 포인트 가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슛팅 가드로 변신한 허재는 그의 재학 4년간 대학팀간 경기에서 한 게임도 놓치지 않고 전승으로 팀을 이끈다. 이미 그의 1학년 시절부터 대학팀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현대와 삼성이 버티고 있던 실업 농구와의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재(7) 중앙대 농구의 신화 (2)
83년 겨울부터 시작된 농구대잔치(점보시리즈)는 첫 시즌인 83-84 시즌에 현대에게 우승을 안기면서 화려한 출발을 하였다. 당시 현대와 삼성이 벌이던 용호상박의 대결은, 비록 과열된 승부욕이 만들어낸 부작용이 존재하기는 했었지만, 농구의 질을 높이고 팬을 경기장으로 모으는데 큰 기여를 했다.
허재는 84-85 시즌 신인왕을 타내면서 화려하게 데뷰를 한다. 중앙대는 84-85 시즌과 국가대표 차출로 비정상적으로 운용된 85-86 시즌에서 일약 4강권에 진입하며 정상급의 실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두 시즌동안 삼성과 현대의 벽을 단 한 차례도 넘지를 못했다. 접전을 펼쳤던 경기도 다소간 있었지만 많은 경기에서 큰 스코어 차이로 무릎을 꿇었다. 일견 보아서는 압도적인 높이와 화려한 개인기, 안정된 외곽을 지닌 중대가 삼성, 현대에 비해 뒤질게 없어 보였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내부적으로 중대의 농구는 완성도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았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림 위에서 리바운드를 걷어내고 연신 블록킹을 성공시킨 쌍돛대였지만 툭하면 파울 트러블에 걸리고 이지샷을 연거푸 놓치는가 하면 승부 고비처에서 자유투 ? 당시에는 One and one ? 를 연신 까먹는 김유택과 한기범은 전체적으로 봐선 마이너스 전력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최근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중대 농구의 특징인 과도한 턴오버도 그 당시에도 여전히 많았다. 허재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그 만은 거의 완벽했다고 말하고 싶다. 경기운영능력, 찬스 제공 능력, 골밑 돌파에 의한 득점력 등 이전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화려한 기량을 뽐내며 고군분투 했다. 하나 아쉬운 점은 화려한 기량에 비해 외곽슛 성공율이 저조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누구보다도 허재 스스로가 잘 알고 뼈져리게 느꼈던 분야라고 생각된다. 특히 삼성, 현대와 대결을 하다보면…
이러한 중대의 전력은 당시 정상을 놓고 격돌하던 현대와 삼성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대비된다. 일단 이 두 팀의 플레이에는 실책이 매우 적었고 주어진 기회를 반드시 스코어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따라서 외견상 중대의 농구가 우세해 보이더라도 실속은 이 실업 선배팀이 챙긴 셈이었다. 그리고 현대에는 이충희가 삼성에는 김현준이라는 보증된 스코어러가 있었다. 특히 이충희는 중대만 만나면 날아 다녔다. 이충희를 수식하는 여러가지 표현이 있지만 가장 적합한 말은 ‘신들린 슛터’라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아무도 저지하지를 못했다. 볼을 받는 위치가 그의 슛팅 레인지에 있고 그를 마크하는 수비수가 두세걸음만 떨어져 있으면 필요충분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뱅…...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페이트어웨이샷이 터진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만 반복되다 보면 상대팀은 전의를 상실한다. 이충희와 함께 당대 최고 슛터로 이름을 날린 김현준이 이충희와 비교되는 미세한 차이가 이런 점이 아닌가 싶다. 주저하지 않는 자와 다소 신중한게 플레이를 하는 자가 주는 느낌.
강동희가 가세한 86-87 시즌 농구대잔치에서 중대는 절호의 정상등극 기회를 잡는다. 후에 정봉섭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다시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김유택(4학년), 허재(3학년), 강동희(1학년)로 짜여진, 이른바 허동택 농구가 탄생한 역사적인 시기였다. 1,2,3차 리그를 통해 물고 물리는 접전을 계속하던 현대와 중대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는다. 당시 전적이나 스코어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중대는 억울하게 물러서고 말았던 것 같다. 여기서 굳이 억울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은 당시 심판의 자질이나 실업팀의 더티 플레이가 승부의 결과에 승복 할 만한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87-88 시즌은 다소 유감스러운 시즌이었다.
허재와 강동희의 중대 농구는 이전의 다소 덤벙거리던 약점에서 벗어나 충분히 안정화되었다고 보았는데 그만 준결리그서 선배로 구성된 기아 농구팀에게 예의차원(?)의 패배를 당하고만다. 이로서 허재의 중대는 정상권에 꾸준히 머물기는 했었지만 아쉽게도 최정상에 등극하는데는 실패를 한다. 그러나 허재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약진의 시기였다. 매년 놀랍게 변해가는 허재의 기량을 보면서 그의 기량을 기존의 잣대로 재려는 나의 시도는 한낱 부질 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허재가 1학년이던 84-85 시즌 직후 그러니까 실업팀의 공포의 외곽 농구에 좌절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더 이상 이 바닥에서 농구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NCAA에 진출하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허재는 이런 나의 생각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어디에 소속되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레벨의 선수였던 것이다.
허재(8) 전성시대 (1)
허재의 전성기를 규정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혹자는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대학시절을 이야기 할 것이고, 다른 이는 농구대잔치 5연패를 하던 시절, 아니면 연고대의 기세를 뚫고 다시 2연패를 이룩하던 시절을 이야기 할 것이다.
리더쉽과 노련미가 가세된 지금은 또 어떤가.
어쩌면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 정상에서 내려온 적이라도 있었던가…
하지만 나의 취향으로만 본다면 여타 시기와 다소 구별되는 그의 전성기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기아산업에 입단한 후 현대와의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 며 농구대잔치 3연패를 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그 이전과 비교했을 때는 훨씬 더 공격 지향적인 플레이를 했다는 점에서,
그 이후의 시기와는 게임에 임하는 성실도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88년 허재의 입단으로 기아산업은 한기범, 김유택, 유재학, 강정수, 정덕화, 한만성을 보유한 초강팀이 되었고, 허재는 게임 리딩 역할의 부담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인 스코어러로 변신하게 된다.
입단 첫 해 88-89 시즌에선 유재학과 처음 파트너를 이뤄 환상적인 패스웍과 공격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며 첫 우승을 일궈냈고, 강력한 견제를 받기 시작한 89-90 시즌에선 득점왕을 차지하며 2연패를 엮어냈다.
90-91 시즌에는 강동희가 가세했다.
당시 강동희는 1차, 2차 대회에는 상무팀 소속으로 뛰면서 득점,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는 등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던 중 이었다.
때마침 유재학이 발목 부상으로 도중 하차를 한 때라 강동희는 제대 후 자연스럽게 유재학의 자리를 대체했다.
강동희가 상무 소속일 때 허재와 두 차례의 맞대결을 벌일 기회가 있었는데 싱겁게 허재의 완승으로 끝나버렸다.
다소 긴장한 강동희가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면이 많았고, 특별히 플레이의 높이에서 두 선수간의 차이가 많이 났던 것 같다.
당시 허재는 득점왕과 MVP를 따논 당상일 정도로 맹활약 했으나 챔피언 결정전에서 임달식과의 폭력 시비에 휘말려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하고 만다.
이 당시의 허재 플레이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드리블-
허재의 플레이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분야이다.
그의 드리블은 상황과 목적에 맞도록 변화한다.
리딩 가드로서 볼 키핑이나 운반 능력이 요구될 때는 철저하게 불규칙한 드리블을 치면서 절대로 타이밍 을 읽히지 않는 플레이를 한다.
높이, 방향, 속도에 변화를 주는 이런 불규칙 바운드를 구사할 줄 아는 선수는 현역에선 그 말고 강동희, 임재현(중대)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필연적으로 높은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포스트업 시에는 놀랄만큼 빠르고 힘있는 리드미컬한 드리블을 구사하면서 중심 이동을 가져간다.
손목힘이 탁월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술로 국내 파워 포워드 그룹의 교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페네트레이션 시에는 몸의 중심에서 최대한 멀리 볼을 떼어 놓은 채 땅바닥에 붙어 있는 듯한 낮은 드리블을 유지하면서 돌파를 한다. 이런 기술 습득이 되지 않는 한 현재의 수많은 유망한(?) 국내 포워드 그룹들은 한계를 노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한가지 더. 허재 드리블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양손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선호하는 위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제일 적합한 플레이를 전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프로 출범 후 허재의 드리블은 스피드와 높이에서 다소 약화된 면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리그 최고 수준의 드리블을 보여 주고 있는 탁월한 드리블러라고 할 수 있겠다.
-어시스트-
허재는 농구대잔치 통산 어시스트 1위의 기록(782개)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로 출범 이후에도 포인트 가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시스트 분야 상위에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어시스트에 능한 선수이다.
특별히 그의 어시스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어시스트에는 순리대로 팀플레이에 충실하다 보면 만들어지는, 말하자면, 포인트 가드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어시스트가 있는 반면에 득점 상황을 창조해내는 ‘메이킹 어시스트’가 있다.
허재는 바로 후자에 능란한 선수인 것이다.
보통 코트에서 뛰는 선수보단 벤치에 있는 코치가 코트를 넓게 볼 수 있고,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 벤치보다는 해설가나 기자들이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어쩌면 코트 전체를 한 눈에 관망할 수 관중석이 훈수를 하기에 더 적절하지 모른다.
그래서 관중은, 기자는, 해설자는 그리고 코치는 자신이 발견한(?) 찬스를 이용할 줄 아는 선수를 칭찬하고, 그러지 못하는 선수를 욕하면서 대리 만족을 경험한다.
자, 허재는 어디있는가?
당연히 코트 안에서 뛰고 있는 선수이다.
그런데 허재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패스길을 찾아내고 어시스트로 연결한다.
내가 다시 한번 꼭 보고 싶은 허재의 플레이 중의 하나는 내편 네편이 뒤섞여있는 밀집된 골밑에다 스핀먹은 바운드 패스를 찔러 어시스트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다.
허재에게는 이러한 화려한 어시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올 98-99 시즌 나래의 경기를 관전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허재 - 존슨으로 이어지는 포스트 투입 작전을 보는 것이었다.
비록 존슨의 스냅이 엉망이고, 꼭 원 바운드 드리블을 하려는 이상한 버릇 때문에 기대만큼 성과는 거두지는 못했지만 허재가 마크맨 너머로 존슨에게 투입하는 패스웍의 세련미는, -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아무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어시스트를 동시에 해내는 선수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중장거리 샷-
고교, 대학까지의 허재 플레이의 최대 약점은 외곽슛이었다.
더군다나 기복도 심한 편이어서 이 분야에 관한 한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인 게 사실이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슛에 관해서는 천부적이지 못했던 그는 엄청난 노력으로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기아산업 입단 직후인 88-89 시즌부터는 놀라운 적중력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3점슛 부분에서 농구대잔치 통산 1위에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고 만다.
(652점).
다른 선수와는 달리 스스로 슛 찬스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한참 슛터로 명성을 날리던 시기(?) 에는 공만 잡으면 삼점슛을 노리는 등 슛에 대한 못말리는 자신감을 보여주곤 했었다.
그의 외곽슛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그의 폼에 관한 얘기다.
점프를 하면서 그 탄력을 받아 슛을 던지는 보통 선수와는 달리, 높은 점프와 탁월한 스냅을 보유한 그는 점프의 정점에 올라선 때 볼을 릴리스하는 호쾌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아직도 필자는 그의 적중률에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삼점슛이 성공했을 때 받는 짜릿한 쾌감에 중독되어 있어서 도무지 그의 슛을 잊을 수가 없다.
허재(9) --------- 전성시대 (2)
-페네트레이션-
허재의 돌파에 이은 레이업을 보고 있으면 농구의 득점 체계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페네트레이션은 단순한 2점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예술적 점수라도 따로 매겨야 되는 것은 아닌가 할 때가 있다.
그의 레이업을 단순한 득점으로만 보거나 단지 멋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별로 의미가 없다.
그의 모든 기술이 녹아있는 총체적인 플레이로서 감상을 해야한다.
페네트레이션에 들어가기 전의 몸짓.
두 발 사이에 볼을 넣은 채 시도하는 가벼운 아이훼이크 또는 풋훼이크 에서부터 첫번째 마크맨을 드리블로 제끼고, 두 번째 헬핑 디펜스는 스피드로 어깨 하나를 앞질러서 달고 들어간다.
멈짓 멈짓 하면서 타이밍의 변화를 주면 포스트에 버티는 상대 센터는 슛 타임인지 패스 타임인지를 혼돈하게 되고 결국 적절한 블록킹 타임을 놓치게 된다.
그 후에 비로소 레이업이 감행된다.
여기서도 그의 마지막 비기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높고 긴 체공력과 허리와 손목의 강한 힘은 마지막 순간에 올라오는 블록킹을 따돌리고 더블 클러치나 어시스트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허재는 국내 경기보다 장신자가 즐비한 중국과의 대결에서 상대의 넋을 빼앗는 이런 플레이를 상습적으로 구사하곤 했다.
허재가 페네트레이션의 첫 스텝을 밟기 시작하면 중국의 수비 진영이 도미노 마냥 우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프로 출범 이후 최근에는 낮아진 점프로 인해 허재는 이런 고난도의 플레이를 구사하는데 한계를 보여주면서 타점 낮은 언더슛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 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팬들 입장의 성을 채우지 못하고 있으니 마냥 아쉬울 뿐이다.
-리바운드-
놀랍게도 그는 농구대잔치에서 전체 3위에 해당하는 개인 리바운드 기록 (1411개)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이 기록의 대부분은 대학 1년부터 기아산업 초기 3년간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당시 그가 득점은 물론 어시스트와 리바운드에도 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허재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내용이다.
솟구쳐 올라 한 손으로 낚아채듯 건저내는 리바운드 기술, 상대 선수를 등지 고 점프를 뛰는 기술, 순발력을 바탕으로 연속적인 리바운드 다툼에서 이기는 모습등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기억속에 남아있다.
체력 최근까지 거의 풀타임을 소화해내는 그의 체력은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6년 초 태릉 선수촌에서 실시한 체력 테스트에서 내노라 하는 투기 종목이나 장거리 육상 선수를 제치고 허재가 전체 2위를 차지했던 일은 당시 체육계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허재 농구를 찬찬히 살펴보면 화려한 고난도의 테크닉, 정교한 슛에 의한 농구뿐 아니라 힘을 앞세운 저돌적인 농구가 한 축에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체적 조건이 좋은 선수는 앞으로 얼마든지 나오겠지만 과연 허재만큼 체력이 좋은 선수가 배출될 수 있을지는, 테크닉적인 면에서 그의 후계자가 나타날 것인가를 찾는 만큼이나 결과가 의문시되는 사안이다.
허재가 지금이라도 민완 가드 정도만의 역할로 활동 범위를 축소한다면 체력 문제로 은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그 외 수비, 인터셉트, 경기운영, 승부 근성, 절대 치사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자존심, 리더십등 농구에 필요한 요소를 골고루 지니고 있음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일 것이다.
굳이 만능 플레이어로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실전에서 덩크를 구사하는 능력 이나 파울없이 샷 블록을 수행하는 능력 정도가 지적된다.
흔히 허재의 NBA 가능성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가 많은데 나의 개인적 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허재는 기본이 잘 되어있는 선수이다.
그의 드리블, 어시스트, 체력, 농구에 대한 이해나 센스는 외부 환경과 별 상관없는 그만의 세계로 구축되어 있다.
이런 능력은 수 많은 국제 대회를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요소라는 것이 증명 되었다고 본다. 반면 상대에 따라 평가가 영향을 받게되는 내,외곽 득점 능력, 수비력 등은 검증이 필요한 분야로서, 해당 리그 의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는 절대 시간이 필요한 분야이다.
쿠코치가 그랬고 디바치, 사보니스 모두 그랬다. 결론적으로, 나는 허재의 자질로 보아 90년도쯤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면, 얼마간의 적응 기간을 지나 성공적인 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믿고있다.
그의 잘못이라면 스포츠 마케팅 시장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에 활약해서 좋은 스포츠 에이전트를 만나지 못했던 죄(?) 정도로 정리해야 겠다.
*** 사족 : 최근 얼마간 미국에 잠시 들린 동안, 시카고 왕국의 수모도 보았고, 닉스의 헤드 코치가 물러나는 모습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인상이 남았던 일은 마이클 조던의 86년도 판 NBA 카드가 무려 1,999달러에 거래되는 그들의 엄청난 스포츠 마켓팅 시장의 위력이었습니다. 유명한 스타는 물론 유망주가 출현하면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스타의 가치를 높이고 보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자료나 기록을 수집하여 책이나 비디오 를 통한 스포츠 비즈니스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놀랍더군요.
일천한 국내 프로 스포츠 역사나 시장의 협소함으로 인해서 국내에서 이러한 시장이 형성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허재마저 이렇게 그냥 흘려 보내기엔 그의 공헌과 재능이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가 과거의 스타인 김영기나 신동파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그저 한줄씩 가끔 스쳐가는 신문 기사가 전부 일뿐 체계적으로 남겨진 기록이 없더군요.
전 허재가 몇 년 후 이런 식으로 잊혀진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허재(10) --------- 중국과의 일전
허재가 대학 1년때인 84년은 국제 대회가 없었던 관계로 아예 국가대표 구성이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따라서 허재의 국가 대표로서의 경력은 85년 부터 시작된 셈이다.
83년 ABC 직후 대표팀 주전 가드였던 박수교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다.
허재는 85년 대표팀에 선발되자 마자 이 자리를 물려받아 주전 가드 자리를 꿰차게 되고 신동찬과 더불어 가드진을 구성하게 된다.
85년 쿠알라룸프르ABC 대회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센터진 (한기범과 김유택)을 구성해서 중국과 맞대결을 펼치게 된다.
그 이전까지의 외곽 일변도인 기형적 농구에서 벗어나 인사이드에서 정면 승부를 거는 모험이 시도된 것이다.
경기 초반 의욕적으로 기 싸움을 펼치며 골밑 공방을 벌이던 이날 경기는 한국의 쌍돛대가 너무나 쉽게 파울 트러블에 걸리면서 또 다시 골밑을 점령당하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날 경기는 마지막까지 쫓고 쫓기는 양상으로 펼쳐지면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접전으로 전개되었고 그 한가운데 대학 2년생인 대표팀 루키 허재가 있었다.
이 날의 명장명 하나를 소개하자.
허재는 경기 중반 속공 찬스에서 중국선수를 앞에 두고 좌우로 번갈아 반복 되는 몰아치는 드리블을 구사하며 수비수를 몰고 있었고, 백코스를 하는 중국 선수는 공 구경도 못한 채 방향 전환만 되풀이 하면서 자기편 코트쪽으로 뛰어 가다가 베이스라인에 몰리고 말았다.
여기서 허재는 완벽한 스톱 모션에 이은 레이업을 구사했고 중국선수는 보너스 샷 하나를 선물하면서 자신의 스피드를 이기지 못하고 베이스 라인 밖의 사진 기자들을 덮치고 마는 진풍경 을 보여주고 만다.
비록 이 날 경기에서 한국은 중국에 패하고 말았지만 허재는 이충희와 더불어 베스트 5에 뽑히면서 일약 아시아 최고수 자리에 오르게된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0세.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은 홈에서 펼쳐지는 만큼 중국 타도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몇 가지 불운이 닥쳤다.
부상에서 회복되어 대표팀에 다시 선발된 주전 센터 조동우가 대회 얼마 전 부상 재발로 로스터에서 제외되었고 경기 당일 허재는 발목 이상으로 경기 내내 벤치를 십수차례씩 들락거리면서 어려운 경기를 해야만 했다.
결국 5점 ~ 10점 사이를 반복하면서 잡힐 듯 잡힐 듯 하던 경기는 그대로 마감되고 말았다.
허재의 대 중국전 2패째의 순간이었다.
87년 방콕 ABC에선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을 겪었지만 결국 아쉽게 분투를 삼키고 만다.
대 중국전 3연패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회에선 이충희가 준우승팀의 핸디캡을 딛고 MVP를 받았으며, 허재는 베스트 5에 선정되면서 다시 한번 가치를 인정받았다.
올림픽을 앞두고 개편된 87년 대표팀은 사상 최강의 외곽 라인을 갖춘 호화 진용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충희, 김현준, 허재, 유재학이 포진한 대표팀은 그 진가를 곧바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만 존스배에서 비록 대학팀 이지만 미국팀을 꺽고 좋은 성적을 냈으며, 87년 서울 프레올림픽에선 예선에서 유고 실업 선발팀(86년 유럽 최우수선수 보유)을 격파했고 결승에선 체코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한국팀은 허재에 의한 원온원, 김유택이 상대 센터를 끌고 나오는 올-아웃, 이충희를 타겟으로 하는 패턴 플레이등 다양한 공격 전술과 끊임없이 변하는 수비 패턴을 무기로 관중을 흥분시켰다.
특히, 매 경기마다 보통 6, 7 차례의 연속된 빠른 패스로 슛팅 찬스를 만들어 내는 노 드리블 & 무빙 패스 게임을 선보이며 관중석의 관객뿐 아니라 경기를 관람하던 다른 팀의 선수까지 흥분해서 코트로 뛰어 나오게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88년 서울 올림픽의 첫 게임에서 한국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어이 없는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충희와 이문규가 경기 전날 무단 외박에 이은 음주로 방열 감독의 제재를 받는 바람에 정상적인 선수 기용이 안된 이 경기는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그러나 대표팀은 마지막 예선전인 대 유고전에서 한국 농구 사상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87년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의 주역이던 쿠코치, 페트로비치, 디바치, 라자등 전,현 NBA 스타들이 버티고 있던 유고와의 이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전을 오히려 리드를 했고 후반까지 접전을 피는 등 센터진의 절대적인 열세속 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완성도 높은 농구를 보여줬다.
이러한 상승 기조에 힘입어 9, 10위 순위 결정전에서 마침내 중국을 넘는데 성공한다.
또한 올림픽 이 후 일본에서 열린 초청 대회에서 다시 한번 중국 대표팀을 누르면서 중국전 징크스를 탈출한다.
이 시절 허재는 인터뷰에서 중국 농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89년 북경 ABC에서 한국은 무려 30점차의 완패를 당하고 만다. 강동희가 처음으로 대표로 출전한 이 대회에서, 다소 방심했을 법한 한국은 절치부심한 중국에게 큰 스코어 차이로 무너진 것이다.
중국은 절대 스피드가 부족한 초대형 센터 전략을 포기하고 높이가 낮더라도 기동력을 보유한 센터진과 강력한 파워 포워드를 무기로 85년 ABC 이후 정면 대결을 벌이며 맞짱을 뜨던 껄끄러운 상대 한국을 보기 좋게 제압하게 된다.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선 한국이 변화된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
허재 - 강동희의 투 가드 시스템을 선보인 한국은 절대적인 가드진의 우세를 바탕으로 철저한 30초 지연 작전을 펼치며 중국을 유린했다.
허재와 강동희 는 월등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중국 코트 전체를 내 집 안방인 양 드나들면서 도 절대로 완벽한 찬스가 아니면 슛을 던지지 않는 여우같은 작전을 구사한 끝에 대어를 낚는가 싶었으나, 3분 가량을 남기고 체력 저하에 의한 연속적인 턴오버 3개 (강동희 2개, 허재 1개)를 저지르면서 분투를 삼키고 말았다.
한국의 이와 같은 작전은 93년 상해 동아시아 경기대회에 다시 한번 선보일 기회가 있었다.
당시 실업선발로 팀을 구성한 한국은 경기 종료 1분전까지 리드를 잡았으나 막판 위기 관리 부족으로 역전패를 당하고 만다.
이와 같이 치열했던 80년대 중반에서 90년까지의 중국과의 일전은 근소한 한국의 열세로 판정이 난다.
당시의 경기를 통해서 얻은 패배의 공식이자 승리를 위한 해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40분 풀타임을 뛰면서 컨디션을 최적의 상태 로 유지하고,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발휘하기는 무리다.
어렵더라도 중간 중간 휴식을 제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후보 선수의 기량 향상 및 대비 전략 마련이 필수적이다.
마지막 5분에 강해지는 전략이 요구된다.
둘째, 상대 센터에 의한 1차 공격 저지율은 꽤 높았던 반면, 포워드 그룹에 의한 세컨드 리바운드에 이은 이지샷 실점에는 속수 무책이었다.
수비력과 리바운드력을 갖춘 포워드가 득점력있는 슛터보다 우선 기용되야 한다.
셋째, 김유택, 한기범 라인은 전반 초반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전반전 후반이나 후반전 초반이 되면 이미 파울 트러블에 걸리거나 5반칙으로 코트를 물러나게 되고 치명적인 전력 손상을 가져온다.
이 둘은 동시에 기용되지 말고 서로를 백업해 주어야 하던지, 볼륨있는 센터와 파트너를 이루는 방법이 연구되어야 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이것이 당시 전력의 한계 상황으로서 누구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90년 초반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다.
너무나 아쉬웠던 80년대의 중국과의 혈투에서의 주연이 이충희, 조연이 허재였다면, 허재가 주연이 되어 승부를 책임져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재(11) --------- 악운 그리고 불운 : 그를 위한 변명 (1)
농구 9단 또는 농구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농구 선수로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인기와 성취를 누리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은 험난했던 과거가 그의 이력 뒤편에서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중대 시절이 그래도 맘 편하게 농구에 전념하면서 거칠 것 없는 상승세를 타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편파 판정과 실업팀의 거친 견제로 인하여 경기 거부라든가 사소한 다툼이 있긴 했었지만 어쨌건 졸업 후 실업팀 선택의 칼자루를 쥐고 있던 쪽은 허재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허재의 고생길은 그가 실업 양대 산맥의 호의(?)를 무시하고 기아산업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서바이벌 게임
허재가 입단한 88-89 시즌에 기아가 기어코 우승을 일궈내자 본격적인 허재 견제가 시작된다. 문제는 이 견제의 수준이 정상적인 농구 룰 밖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파울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덤벼드는 더티 플레이는 더 이상 농구이기를 포기한 일종의 격투기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심판이 통제하기를 거부하는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오른 뺨을 마저 내놓던지 아니면 맞대응을 하던지… 그 외엔?
당시 허재에게 가해지던 양상이 바로 이런 더티 플레이 수준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특히 손영기와 임달식은 허재와 악연을 자청했다.
이미 89년도에 허재의 안면을 강타해서 코뼈를 눌러 앉힌 적이 있던 삼성의 손영기는 92년도 경기에서 이미 공을 잡고 스톱모션에 들어가 있던 허재에게 스틸을 가장한 ‘돌격앞으로’를 두 번 연속 감행해 장딴지 부상을 입혀 놓는다.
허재 대신 기용된 기아의 김형균은 똑같은 방식으로 손영기에게 보복을 하기에 이르고 결국 이 게임 이 후 손영기와 김형균은 코트에서 볼 수가 없었으니, 심판의 무능력과 삐뚤어진 승부욕이 불러온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90-91 시즌의 임달식 사건의 경우도 최초의 파울에 대해 악의적인 파울을 선언할 만한 심판의 상황 판단과 자질만 있었어도 후속적인 불행한 사건이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격한 파울을 해놓고도 오히려 분해하면서 나자빠진 선수를 노려 보고 있는 상대방에게 어떤 예의를 보여야 매너 좋은 선수가 되는 건지를 나는 모르겠다. 결국 이 사건으로 허재는 MVP를 날려 버렸고,
자격 정지에 국가대표 탈락이라는 커다란 불운을 겪게 된다. 허재가 심판이나 상대 선수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그의 매너나 인간성이 형편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허재가 어이없게 당하는 것을 오랫동안 같이 지켜본 심정적인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허재의 매너를 따질 정도로 농구 예절에 관심이 있다면, 우선 더티 플레이를 일삼는 선수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것과 더불어 과거 연,고대나 삼성,현대 선수들이 보여준 볼썽 사나운 난투극이나 치졸한 경기 매너에 형평을 맞춘 기준을 허재에게 적용할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술, 술, 술
음주 문제로 허재 만큼 구설수에 자주 오른 스포츠맨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허재는 술과의 악연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중대 시절의 음주는 삭발같은 다소 애교스런 징계로 되돌아 오더니만, 93년 친선경기를 앞두고 마신 술은 소속 구단 징계와 엉뚱하게도 국가대표 제외라는 고배를 안겨주고 만다. 나이트클럽에서 무례한 취객과의 시비도 술 때문에 생긴 일이고, 세계 젊은이의 축제라는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의 음주는 선수 자격 정지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중징계로 이어졌다. 93년 아들 순산을 기념하던 술 자리는 음주운전으로 연결돼 면허를 앗아가더니만 97년의 무면허 음주운전은 구속과 함께 그동안 그를 변호하던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안긴 사건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술과의 악연은 앞으로도 쉽게 정리되지 않을 문제라는 게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몸 버리고 돈 버리는 술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술을 끊고 운동에 전념해서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지? 라고 따져보고도 싶지만 나는 도저히 그런 식으로 몰아 부칠 수가 없다.
왜? 나를 포함해서 주위의 내가 아는 - 직위고하나 공인, 자연인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볍게 시작한 술이 2차, 3차로 이어지고 그러다 취하고, 실수하고 다음 날 후회하고 하는 일상을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초등학교 바른 생활 시험 문제라면 틀림없이 ‘허재의 잘못’에 O 표를 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이다.
허재(12) --------- 악운 그리고 불운 : 그를 위한 변명 (2)
감독 그리고 선수
만약 천재형의 재능을 지닌 새로운 직원이 나의 동기라면, 혹은 그가 나의 선배던지 내가 그의 선배 혹은 더 나아가 내가 지시, 감독해야 할 부하 직원이라면 그를 어떤 식으로 대할 것인가의 문제를 허재에게 적용시켜 보면 사회의 축소판과 같은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된다.
먼저 후배 입장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결론이 나온다. 한마디로 실력있는 선배를 두고 있다는 것은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교시절부터 중대, 기아를 거쳐 현재 나래에 이르기 까지 그의 후배들은 허재를 잘 따르며 허재의 플레이 스타일에 최대한 적응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기나 선배는 문제의 수준이 다르다. 재능있는 후배를 위해 자신의 위치를 양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실력은 안되니까 어정쩡한 규율이나 군기로 통제하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는 오히려 허재로 인해서 상대적인 피해를 보는 부류가 생길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모든 환경을 허재 주위에서 관찰하게 된다. 고교시절 용산고의 코치는 허재에게는 별로 잘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 세례를 펴면서 이끈 반면에 동급생인 이민형, 한만성에게는 심한 구타를 곁드린 스파르타식의 훈련을 강요하면서 결과적인 차별 대우를 저지르는 모양새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중앙대의 정봉섭 감독은 허재 스카우트 당시 그의 동급생을 한명도 뽑지 않는 등 일종의 허재에 대한 배려를 해주기도 한다. 허재의 선배중에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희생을 했던 선수도 있던 반면 아집과 시기로 늘 트러블을 일으킨 선수가 동시에 존재했다.
감독의 문제로 주제를 옮겨가면 더욱 복잡한 양상이 전개된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감독-선수와의 관계를 스승-제자의 관계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업팀에서 감독-선수와의 관계는 일반 직장에서 상사-부하의 관계에 더 근접하다. 일반적으로 상사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실력이 있는 사람이며, 경험이나 고급 정보가 부하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에 부하 직원을 이끄는데 별 무리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상사의 자질이 형편없던지 부하의 실력이 월등해서 둘 간에 의견이나 노선이 팽팽하게 상충될 때 발생한다. 이 또한 일반 직장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파워 게임이나 한쪽의(주로 부하) 일방적인 희생에 의해 승부가 갈리며 그 대신 승자는 이로 인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이 냉엄한 사회 법칙이 그 동안 얼마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체험한 필자의 깨달음이다.
방열 감독과의 트러블에서 허재는 승리했지만 반면 최인선 감독과의 그것에는 굴복했다. 두 사건에서 표면적인 이유는 MPV 선정 문제, 경기 사보타주, 팀 전술에 마이너스라는 이유로 기용을 거부한 행위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오랜 기간 쌓인 갈등의 골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표면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양자간의 문제가 반드시 이런 투쟁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풀리지도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근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래 블루버드의 신임 최종규 감독은 취임 인터뷰에서 시카고 불스의 필 잭슨과 마이클 조던과의 관계를 예로 들며 자신과 허재와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 정립해 보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방법이 한 천재적인 선수가 출현할 때 그를 갈등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보고 있다. 최종규 감독의 실험이 주목된다.
해외 진출
허재는 한국 농구 선수 중에서는 비교적 해외에 잘 알려져 있고, 다수의 해외팬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대학 시절부터 아시아권의 각종 대회를 통해 아시아권(특히 일본, 대만, 중국)에 많은 팬을 확보했고, 기아산업 시절 매년 행해지던 동구권과 북구의 기아자동차 프로모션 투어용 원정 경기를 통해서 유럽 농구에 잘 통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의 농구 관계자는 미국식의 뭐라 할까 다소 괴물스러운 개인 농구와 대별되는 허재의 정교한 개인기에 바탕을 둔 농구를 주목했다.
대만의 권위있는 농구 대회인 존스배를 통해서 맞붙게 되는 미국 대학 선발팀과의 경기는 허재를 미국 농구계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급기야 90년대 초 두 차례에 걸쳐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미국 2부리그 격인 CBA의 참여를 제의 받는다. 당시 기아와 농구협회의 협조 거부와 병역 문제, 또 NBA로 진입하기 위한 미국의 선수 수급 제도의 올바른 이해 부족이 겹쳐 결국 별 부담 없이 성사될 수 있었던 허재의 미국 진출은 성사되지 못했다.
요즘 프로 선수들의 미국의 세미 프로에 참여해서 경험이라도 얻고 오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을 보면 당시의 불허 방침이 얼마나 오만했던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경우와 차원이 다른 일생일대의 찬스가 95년 다가왔다.94년 캐나다 토론토 세계선수권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허재를 눈여겨본 NBA 신생팀인 밴쿠버 그리즐리스 구단은 계약금 3백만 달러, 연봉 80만달러에 허재의 스카우트를 제의한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미국행을 결정했어야 할 이 절호의 찬스는 그만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당시 아시안 클럽 선수권 대회 참가차 서울을 비우고 말레이지아 있던 허재는 반신반의 하며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서울의 허재 가족은 허재를 대만에 보내기 위한 물밑 작업을 거의 성사시켜 놓고 있던 터라 당시 에이전트를 자청한 한창도 감독과 트러블을 일으키고 만다. 더욱이 허재의 연고권을 갖고 그에 대한 매니니먼트 책임이 있는 기아는 허재의 대만행을 막느라 정신이 팔려서 NBA 접촉은 꿈에도 꾸지 못했으니 한국, 아니 아시아 최초의 NBA 입성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허재 자신은 물론, 가족, 에이전트, 소속 구단이 모두 힘을 합해도 될까 말까 한 프로젝트가 순전히 전략 부족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웠던 95년 가을의 일이다.
물론 허재의 진출이 꼭 NBA에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상징적인 의미가 컸으며, 아시아 농구의 한계와 가능성을 허재를 통해서 검증해 볼 수 있던 기회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은 사건이었다.
허재(13) --------- 자존심의 농구
누구라도 인정하듯이 허재는 농구에 대한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높은 기대 수준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이 때문에 다소 오만하게 보이거나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자존심이 그의 강한 승부 근성과 맞물려 단지 실력만 가지고는 성취할 수 없는 경이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자존심이 표출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대학과 실업 초반 시기의 허재는 본인은 물론, 소속팀에게도 항시 최고가 될 것을 주문했다. 모든 경기마다 봐주기 없는 농구를 하며 다득점 연승 행진을 이어 나갔으며 허재 스스로도 농구의 모든 부분에 욕심을 내며 화려한 농구를 지향했다. 화려한 어시스트와 드리블은 물론이고, 외곽슛을 던진 후엔 습관적으로 리바운드를 위해 달려드는 열정과 근성을 보여줬다. 득점에서도 얼마나 많은 골을 잡아내는가 보다는 얼마나 멋있는 플레이를 하는가가 중요해서, 하나 하나의 득점 형태가 똑같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상황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득점을 일구어냈다. 따라서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수비등 개인 기록 전분야에 걸쳐 항상 5위 안에 랭크되며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진수를 보여주게 된다.
사실 마이클 조던의 초창기의 플레이를 (비록 NBA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어도)기억하는 팬은 90년대 불스 왕국 시대의 황제 조던에 다소 실망(?)했을 법한 것처럼, 필자에 있어서 90년초 까지의 허재는 그 후의 허재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정도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기아에 강동희가 가세하고 김유택의 위력이 나날이 새로워 지던 시절, 그래서 기아가 농구 대잔치 5연패를 하던 그 때, 허동택이라는 신조어가 매스컴에서 회자되던 그 때 한국 농구는 허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한마디로 허재에게 한국 농구판은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그토록 힘들게 이루었던 농구대잔치 3연패 후 더 이상 올라갈 목표가 없어진 때, 더구나 점점 강성해 지던 기아의 전력을 보고 있노라면 수성의 의미조차도 장난처럼 느껴질 때, 이 때 허재는 떠났어야 했다.
사실 기아와 허재는 게임에 임하는 자세와 성실도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다. 최강이라던 기아는 약체인 금융팀에게 심심치 않게 발목을 잡히는가 하면, 대학팀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은 한 수 가르켜 주는 입장에서 농구를 하다가 점수차가 벌어진 후반엔 느슨한 플레이로 어이없이 경기를 내주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허재 개인적으로는 외곽슛에 의한 쉬운 득점에 치중하다 보니 허재 특유의 고난도 플레이를 보여주는 기회가 점점 적어졌다. 득점력은 오히려 증가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약세를 보여줬다.그럼에도 어쨌건 허동택은 너무 강했고, 특히 결승 리그나 라이벌 팀과의 대결에선 언제나 허재가 살아나며 92-93 시즌까지 농구대잔치 5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장신 유망주가 대거 대학으로 유입된 90년 중반부터 기아는 힘겨운 도전을 받게 된다. 멤버상으로 여전히 최강으로 평가 받았던 기아팀이었지만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전력 우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예선부터 어려운 경기를 벌이는 경우가 증가했다. 급기야 93-94 시즌에서는 8강전에서 김영만, 양경민의 중앙대에게 무너지면서 4강 진입에도 실패했고 우승컵은 당시 서장훈이 가세한 연세대가 차지하게 된다. 94-95 시즌에선 서장훈의 연대, 95-96 시즌은 현주엽의 고대의 위세에 눌려 예선전 순위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우승 후보 1순위 자리를 내놓게 된다. 당시 기아팀은 공격을 전개하는 능력에선 허동택의 워낙 뛰어난 개인기로 커버할 수 있었지만, 체력과 부상 문제가 부상하기 시작했고 수비가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기아는 94년부터 다시 농구대잔치 2연패를 이루는 위업을 달성한다. 물론 이러한 위업의 한가운데에는 허재가 있었다. SBS, 삼성, 고대, 상무를 상대로 치뤘던 94-95 시즌과 95-96 시즌의 결승 리그를 통해서 우리는 허재의 농구쇼를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이러한 일련의 시합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허재의 플레이에 누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농구는 허재하기 나름’이라는 농구 격언이 왜 생겨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즐기던 농구에서 감동하는 농구로 농구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옮겨지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이 때부터 허재의 자존심이 새롭게 내 시야에 들어왔으며 이 자존심이 바로 허재를 지탱하는 축임을 알게 되었다.그의 자존심은 위기가 닥치면 더욱 진가가 발휘된다. 어쩌면 그는 항상 위기를 스스로 몰고 다니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기를 즐기는 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고대를 포기하고 중대를 택한 것이며 삼성, 현대를 마다하고 기아에 합류한 것, 망신창이 된 몸으로 명예회복을 이루었던 지난 97-98 시즌 최종 결승 시리즈의 투혼, 다시 명문 기아를 버리고 신생 나래로 이적을 감행한 사건 모두가 그의 농구에 대한 자존심이 표출된 형태가 아닌가 싶다.
자존심의 허재 농구, 그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허재(14) --------- 중국을 넘어라 (1)
서장훈, 현주엽이 고교 농구 무대를 평정하던 91, 92년부터 농구계는 새로운 기대감에 술렁되기 시작한다. 하드웨어적으로 전혀 차원이 다른 이 두 선수의 출현은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 정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한국 농구계의 새 희망이었다. 당시 대표팀은 이미 최고 수준의 가드진을 보유했고 문경은과 같은 장신 슛터가 등장했으며 한국팀의 취약 포지션인 포워드 그룹에 정재근이라는 유망주가 있었다. 또한 김유택이 건재했고 전희철이 그를 받쳐주고 있었다.
따라서 대표팀은 로우 포스트에서 버틸 수 빅맨 센터와 강력한 파워 포워드가 다른 어떤 포지션보다도 절실하던 처지였다. 이 때 서장훈과 현주엽이 등장한 것이다.
허재와 서,현이 함께 뛰는 대표팀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드림팀이었다. 필자는 94년부터 이 드림팀이 본격 가동될 수 있을거라 의심치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이 세 선수는 서로 엇갈리면서 최강의 전력을 구축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국 격파라는 숙원도 한낮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된다.
91년 고베 ABC 대회에서, 비록 이충희가 빠졌지만 김현준이 워낙 쾌조의 상태였고, 허재와 강동희가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때라 한 번 해볼 만한 전력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대회 일주일 전에 열린 미국 대학팀과의 평가전에서 문제가 생긴다. 이 경기에서 허재는 다분히 중국을 염두해 둔 플레이를 펼치느라 의도적으로 미국팀의 골밑을 공략한다. 흑인 선수를 대상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탄력을 과시하던 허재는 경기 종료 수 분을 남겨놓고 리바운드에 참여하다 상대의 파울로 코트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만 오른손등 골절상을 당한다. 결국 깁스를 하고 참가한 ABC에서 허재는 준결승까지 한번도 경기에 참여를 못하고 벤치를 지킨다.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깁스를 풀고 코트에 나서기는 했지만 도저히 정상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가 없었고, 한국은 마지안, 공샤오빈의 중국에 유린당하고 만다.
93년 상해 동아시아 경기에서는 허재, 강동희의 맹활약으로 중국을 다 잡았으나 막판 체력 부족으로 아쉽게 분루를 삼키고 만다. 만약 한국이 실업선발이 아닌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전희철이 포함된 국가대표팀을 파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짙게 드는 대회였다.
93년 11월 자카르타 ABC를 앞두고 농구협회는 허재를 대표팀에서 제외하는 어의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허재가 어린 유망주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외한다는 농구협회의 발표는 한마디로 코메디였다.
드림팀이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던 대표팀의 결과가 어떠했는가? 승부라든가 스코어는 나중 문제였다. 실마리를 전혀 풀지 못하는 답답한 게임 전개는 결국 허재의 가치를 확인해 주는 성과만을 올렸을 뿐이었다.
다시 대표팀에 합류한 허재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중국과 격돌한다. 서장훈, 전희철등 신인 유망주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 대회에서 허재는 내외곽에서 거칠게 없었다. 사실 그 동안 중국팀은 허재를 한 번도 효과적으로 봉쇄한적이 없었다. 아니 봉쇄하기가 불가능했다. 중국 전력이 무서운 건 그들의 탄탄한 체격 조건과 착실한 기본기에 기인한다. 하지만 허재와 같은 테크니션을 상대하기에 그들의 개인기는 너무나 밋밋했다. 허재의 스텝과 방향 전환에 무수한 파울만 양산해야 했던 중국이었다. 이 대회 결승 허재의 카운터 파트너는 후웨이동이 나섰다. 후웨이동은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허재를 원천 봉쇄하는데 성공한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이 중국을 공략하던 허재에게 후웨이동은 전반 10분이 지난 시점에서 이미 4개의 파울을 저질러 벌인다. 무릎을 사용해서 허재의 허벅지에 타박상을 입히는, 한번도 듣도 보도 못한 희안한 비책에 허재는 쓰러지고 코트밖으로 물러선다.
허재가 빠지자 마자 리드하던 경기는 순식간에 뒤집히고, 한국팀은 보호자 잃은 양떼처럼 우왕좌왕하다가 대패를 당하고 만다.
94년 토론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은 사상 최초로 8강 진입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편 한국도 이 대회에서 3승을 따내며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능성의 한 축은 역시 허재였고, 다른 한 축은 서장훈이었다. 서장훈은 게임을 거듭할수록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면서 안정된 리바운드를 공급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마도 이 대회가 허재, 서장훈, 현주엽이 같이 뛰었던 유일한 대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배경을 두고 개최된 95년 서울 ABC는 한국과 중국의 진검 승부가 예상되는 대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장훈이 대표팀에서 빠지면서 김빠진 승부가 되고 말았다. 94-95 농구대잔치 준결승에서 당한 파울의 휴유증으로 도미중이던 서장훈은 코칭 스태프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합류하지 못했다. 당시 대표팀은 루키 현주엽과 전희철이 골밑에서 실력 이상의 맹활약을 보여주며 선전했고, 허재가 대회 MVP에 선정될 정도로 한층 농익은 기량을 과시했으나 문경은을 필두로 한 외곽 슛터의 극도의 부진속에서 중국에 10점 가량 뒤진 채 경기를 끝내야 했다. 경기 후 서장훈과 문경은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대회였다.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센터 없는 농구로 참패를 했던 한국은, 97년부터 허재를 제외한 채 새로운 대표팀을 구성한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97년 부산 동아시아 대회에선 22세 이하 중국 대표팀을 예선에서 물리치며 자화자찬식의 승리에 도취되더니만 결승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대만에게 패하며 우승컵을 내어주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97년 사우디 ABC에선 허재, 서장훈, 현주엽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중국을 꺾고 아시아 정상에 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낭보를 듣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경계가 풀릴대로 풀린 중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의미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여겨졌던 일본에게 뒷덜미를 잡힐 정도로 불안해진 한국팀의 전력이 오히려 걱정되는 대회였다.
허재(15) --------- 중국을 넘어라 (2)
두 시즌의 프로 경험을 살려 다시 한번 패기있게 도전한 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최악의 부조화를 보이며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문경은은 경기 내내 여전히 헛돌고 있었고 현주엽은 무리한 플레이로 일관했다. 강동희는 경기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이상민의 특색 없는 경기 운영에 실망했다. 나는 이상민의 빠른 스피드나 속공 전개 능력, 또한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할 줄 아는 영리함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대 중국전과 같이 자신보다 장신이면서 스피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상대방을 공략해야 하는 상황이나, 맥도웰에게 볼 투입하듯이 서장훈에게 투입하면 서장훈이 알아서 나머지를 처리할 정도로 중국이 골밑이 나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그의 플레이는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기를 바탕으로 코트의 어느 한 부분에서의 힘의 균형을 언밸런스 상태로 만들고 여기서 파생되는 찬스를 활용하는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반면 나름대로의 성과도 있었다. 서장훈은 간혹 무리한 플레이를 하긴 했지만 한국 농구 사상 유례가 없었던 센터에 의한 최다 득점과 함께 무수한 리바운드를 걷어냈다. 비록 그 리바운드가 주어 먹기 식의 그것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 쉬운 리바운드조차 못해서 속태워야 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한층 진일보한 발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성과가 있었다면 역시 허재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한번 공감대를 얻었고 그것이 이번 대표 선발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아닌게 아니라 99년 8월 후쿠오카 ABC를 앞두고 새로 개편된 대표팀은 최근 10년만에 처음으로 실속을 차리고 네임밸류나 학연, 연고를 떠나서 분명한 목적 의식하에 소집된 팀이다.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강동희를 계속 기용키로 한 것부터 일단 다행이다. 아마도 이번 대회부턴 이상민이 스타터로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강동희가 맡아줘야 할 몫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반쪽 자리 슛터는 모두 제외하는 결단을 내리면서 그 자리에 조상현과 같이 슈팅뿐 아니라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수비, 미들존 리바운드에서 활약이 기대되는 루키를 선정한 것도 마음에 든다. 조상현은 허재의 백업으로 나서면서 팀의 활력을 주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영만, 현주엽과 같은 수비 능력과 함께 다양한 공격 옵션을 지닌 선수를 기용한 것은 장진송, 후웨이동과 같은 내외곽에서 모두 강세인 중국의 포워드층을 상대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센터 포지션. 물론 서장훈의 비중이 절대적이겠지만 그의 체력과 파울 부담을 고려한 정경호의 선발은 현 시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일 것이다.
이번 대표팀 구성에서 가장 고무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중국의 거센 파워 포워드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지난 방콕 대회에서 현주엽은 공샤오빈에게 역부족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엔 그 자리에 박재헌과 이은호가 보강되었다. 어쩌면 현주엽의 설욕전을 기대해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중국의 전력이 두려운 건 센터진 때문이 아니었다. 한 명의 센터는 서장훈의 몫으로 남겨두면 충분하다. 어차피 중국은 두명의 빅맨을 동시에 기용하지는 못한다. 전반 후 또는 후반 초에 의도적으로 몰아 부칠 포워드진의 거센 골밑 공략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이제서야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제대로 반영되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겐 허재가 있다. 허재의 가세는 중국팀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나타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중국의 전력은 허재의 플레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중국은 다분히 서구의 높이와 체격을 염두해둔 농구만을 준비해 왔다. 아마도 중국이 의외로 대만에 매번 고전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내가 허재에게 기대하는 진짜 바람은 다른데 있다. 그것은 허재가 합류함으로서 우리팀의 선수들이 자신감을 얻어,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이 시점에서 그가 발휘해야 할 허재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된다.
첫댓글100%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제가 아는거만 맞춰보아도 조금의 과장도 없어보입니다.물론 다른선수들에 대한 얘기도요.허재 한국농구계에선 나오기 힘든 선수입니다.제대로된 협회의 지원과 옳바른 농구환경이었다면 세계에 농구로 한국을 알릴 자랑스런선수였읍니다.죽기전에 허재같은 선수 또 볼수있을지 모르겟네요.
잘 읽었습니다. 이분 정말 행운을 타고 나셨네요. 조던뿐아니라 허재의 모습까지 처음부터 보셨을테니...-_-; 허재는 정말 90년대초라던지, 한국의 수준을 벗어났던 그때에 이 바닥을; 떠났어야했다고 봅니다. (사실 95년도는 가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주기엔 늦은 시기였죠.)
휴...ㅋ 겨우 다 읽었네요...그런데 이상한건...어딘가에서 이 글을 읽었던거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요...?? ㅡㅡ;; 다시 제목을 보니...역시 [펌] 이라고 되있네요... 이거 어디서 퍼오셨나용...?? 어디서 읽었지...?? ㅡ.ㅡ 여튼...허재선수에 대해 재조명할수 있었던...좋은 글이네요...^ㅡ^
첫댓글 100%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제가 아는거만 맞춰보아도 조금의 과장도 없어보입니다.물론 다른선수들에 대한 얘기도요.허재 한국농구계에선 나오기 힘든 선수입니다.제대로된 협회의 지원과 옳바른 농구환경이었다면 세계에 농구로 한국을 알릴 자랑스런선수였읍니다.죽기전에 허재같은 선수 또 볼수있을지 모르겟네요.
진짜 멋진글입니다. 글쓰신 분의 허재에 대한 애정과 엄청난 농구지식이 느껴지네요. 과거 임달식 사건은 참 ㅡㅡ;;
정말 대단한 글이라는 말밖엔....
잘 읽었습니다. 이분 정말 행운을 타고 나셨네요. 조던뿐아니라 허재의 모습까지 처음부터 보셨을테니...-_-; 허재는 정말 90년대초라던지, 한국의 수준을 벗어났던 그때에 이 바닥을; 떠났어야했다고 봅니다. (사실 95년도는 가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주기엔 늦은 시기였죠.)
행운을 타고 나셨다고도 볼수있지만 글쓰신분의 열정이 보이네요 지금 예를들면 방성윤이 미친듯이 폭발해서 nba에서마저 성공한다해도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그의 일대기를 이렇게 유쾌상쾌통쾌하면서도 분석적으론 힘들겠죠 정말 이글쓰신분 대단
정말 길다~~하지만 읽어도 후회는 없다. ㅜ.ㅜ~~'허재' 라는 단어 정말로 농구팬 입장에서는 애증이 교차하는 단어가 아닐까요?? 저도 다시 한번 허재 같은 선수를 한국농구에서 볼수있기를~~^^
저도 정말 잘읽었습니다^^
휴...ㅋ 겨우 다 읽었네요...그런데 이상한건...어딘가에서 이 글을 읽었던거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요...?? ㅡㅡ;; 다시 제목을 보니...역시 [펌] 이라고 되있네요... 이거 어디서 퍼오셨나용...?? 어디서 읽었지...?? ㅡ.ㅡ 여튼...허재선수에 대해 재조명할수 있었던...좋은 글이네요...^ㅡ^
이 글은 '축구공 위의 수학자'라고 강석진 교수가 쓴 글 중에 있는 내용이지요. 전공이 수학이고, 또 하나의 전공이 스포츠라고 해서 여러가지 칼럼이나 글을 올리는 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서울대 수학과 부교수 역임, 현재 고등과학원 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