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매혹 키워드6 - 봉은사 명진스님 편
봉은사 전 주지 명진스님게서 오늘 마지막 법회 후 떠나신다고 한다. 아침일직 카메라 준비하고 봉은사로 향하였다
왜 많은 사람들이 명진스님에 광신도로 비추어질 정도로 환호하는지 궁금하였다. 그 답을 "대중을 매혹하다" 책 명진스님 편에서 찾아 보기로 한다.
인생의 고통도 해학으로 풀어낸다 - 봉은사 명진스님
열심히 교회를 나가는 신자가 아니어서 밝히기는 쑥스럽지만 나는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 집안에서 컸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봉은사의 명진스님을 몇 번 뵈면서 스님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맹정주 강남구청장이 초대해 봉은사에서 명진스님을 뵌 적이 몇 번 있다. 명진스님이 내주신 깔끔한 점심도 함께하고 차를 마시면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진스님은 봉은사의 신도들에게 인기 폭발이다. 스님께 감히 “인기 폭발”이란 표현을 쓴다는 것이 외람된 것 같지만, 실제로 이표현이 잘 어울린다.
봉은사에서 들은 이야기가. 명진스님이 주지스님으로 오시기 전에는 설법 시간에 늘 스님 한분이 법당 안에서 밖을 향해 계셨다고 한다. 설법을 듣던 신도들이 중간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 그 스님의 임무였다. 그런데 명진스님이 설법을 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이제는 법당 밖에서 안을 지켜야 한다. 명진스님의 설법이 재미 있어서 너무 많은 신도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법당에 제한된 인원 이상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밖에서 지킨다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것은 엄청난 차이다. 신도들이 중간에 못나가게 지키는 일과, 신도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는 일의 차이는 크다.
명진스님은 천일 동안 문밖 출입을 삼가하고 매일1천 배를 하고 계신다. 워낙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신 분이라 처음에는 좌파 주지가 왔다는 수군거림도 있었다.
사람들은 천일기도를 시작하고 나서,200일이 지날 때까지는 여전히 수군 거리다가 300일이 지나니까 지켜보는 태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400일이 지나니까 수군거림이 수그러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다 봉은사 재정을 완전히 투명하게 공개해버리니 주지스님 멋쟁이라고까지 한단다. 떠났던 신도들도 돌아오고 시주도 늘어났다고 한다. 강남 민심에 코드가 맞는 주지스님이랄까?
명진스님은 스님으로서 하기 어려운 농담도 툭툭던진다. 어느날 박재동 화백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아이고 박 화백님, 내가 나이가 50인데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이러고 있습니다. 하하하!” 언제나 툭 트이고 호방하신 명진스님을 박재동 화백이 10년후에 다시 만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이러시더란다. “지금 60인데 아직도 못 가고 있습니다. 이제 아마 틀린 것 같아요. 하하하!“
명진스님의 설법은 생활 속 화두를 툭툭 던진다. 그것도 부처님 배꼽까지 빼놓을 정도로 재미있게 던진다. 설법이 시작되면 법왕루의 넓은 법당이 입추의 여지가 없다. 법왕루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법당 밖에 자리를 깔고 앉아 설법을 듣는다
1970~1980년대 선방에서 쉬는 시간에 경행을 하던 스님들이 한꺼번에 누군가를 빙둘러싸고 모여 있으면, 그가 바로 명진스님이었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로 명진스님을 늘 사람을 끈다.
명진스님의 참선법회에는 매회1천여명의인파가 모여든다. 그가 주지로 취임하기 전까지 봉은사 법회에는 200명이 모인 적도 드물었다. 명진스님에게 “선”은 갇힌 존재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선”의 대상을 찾고 인생의 고통도 해학으로 풀어낸다.
명진스님의 설법에서는 저승과 지옥도 유머가 된다. “한국 여자들이 죽으면 염라대왕은 골치가 아프답니다. 저승에 올사람이 제대로 왔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얼마나 깎고 밀고 성형을 했는지 주민등록증으로 아무리 대조해도 알아볼 수가 없다는 거요!" “그뿐이 아니요 다음에 들어가는 곳이 무진장 뜨거운 연옥인데 한국 여자들이 얼마나 찜질방에 단련이 됐는지, 그 열탕지옥에서 ‘아이고 시원하니 좋다 좋다‘하면서 나오지를 않는 통에 정체되어 진도가 안 나간다는 거요“
30면 전 화계사에 욕쟁이 선사 춘성이 돌아가셨을때 명진스님은 춘성이 평소 즐겨 부르던 ‘나그네 설움’ 한가락을 뽑아 상가를 ‘전국 선승 노래자랑대회’ 와 춤판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늘 유쾌하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명진스님의 옛날은 그리 밝지 않았다. 명진스님께 점심 초대를 받은 날, 그는 학창 시절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셨다. 머리를 빡빡 깎은 학생 시절, 그는 주먹대장이었다. 대단한 카리스마로 학교뿐만 아니라 일대를 휘어잡고 다녔다. 명진스님의 가족사도 어둡다.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자살했고, 재혼한 아버지도 그가 20대 때 세상을 떠났다. 유일한 혈육인 남동생도 군에서 사고고 이승을 떠났다.
한 보살이 그에게 반해 죽고 못 살겠다고 한일이 있었다 명진스님은 그 보살을 국립묘지에 있는 동생의 묘지에 데려갔다. “동생을 살려내면 보살님이 하자는 대로 해주겠다”고 해서 그 보살을 눈물로 돌아서게 했다.
명진스님의 삶의 궤적을 보면 그는 역사의 현장과 함께한 청개구리 스님이다. 그는 “운동권 스님” 이기도 했다 그의 수행처소는 선방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 이었다. 1994년 종단 개혁 때는 수 많은 비구,비구승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벗은 승복을 불전에 올린 뒤 “종단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이대로 옷을 벗겠다”고 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스님의 눈물을 쏟게 했다.
그런 그가 신도 20만의 부촌 강남의 대표적인 봉은사 주지에 임명되자 신도들은 ‘좌익 두목“이 왔다며 경계했다. 그 자유분방한 삶의 궤적을 아는 이들은 그가 과연 봉은사처럼 큰 절의 주지직을 해낼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런데 주지로 오자마자 마치 봉은사 주지직을 위해 10여 년을 준비해온 사람처럼 신나게 일을 하면서 신도들의 마음을 모두 돌려 놓았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봉은사 미래 위원회“를 만들어 봉은사를 멋지게 꾸미고 강남의 허파로 만들겠다고 추진했다.
그가 주지가 된 직후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며 천일기도를 시작하자 다른 스님들은 우스개 농담을 했다. “평생 다른 스님들 주머니만 털면서 살다가 이제 부촌의 대찰 주지를 맡아놓고 밥도 안 살라고 저런다”
명진스님을 뵈었을 때, 우리 일행에게 이런 농담도 하셨다. “제가 왜 천일기도를 시작한 줄 아십니까? 천일기도를 하면 적어도 그동안은 저를 못 쫓아낼것 아닙니까? 좌파 스님이라고 의심하는데,천일 동안 꼼짝 못 하게 해놓고 봉은사를 개혁해야지요. 천일기도 끝나고 쫓아내면 어떡하느냐고요? 그때는 끝나자마자 또다시 천일기도 시작하면 됩니다. 하하하!“
명진스님은 오늘도 직접 마당을 쓸고, 하루 세 번 빠짐없이 예불을 주관한다. 새벽에 일어나기 싫을 때도 많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신도를 생각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갈 수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으셨다. 한때 괴팍하고 예측 불가능한 분으로 유명했던 명진스님은 이제 강남의 신도들을 매혹하고 있다.
글 출처 : 대중을 매혹하다. 강미은 저 원엔원북스 2009.08.30 (매혹하는 힘이 경쟁력이다)
2011.03.06 일요일 꽃피는 봄 출판 기념일에 새로은 곳에서 다시 만날것를 기약하며, 많은 신도들의 배웅을 받으며 봉은사를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왜 명진스님을 환호하고, 열망하는지 물음에 대한 답은 그 동안 봉은사에서 법문한 내용으로 책이 나온다니, 그 책에서 찾아보아야겠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봄이 오기를 기대하여 본다.
명진 (한기준) 승려 출생 1950년 (충청남도 당진)
~2010.11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
▶ 가져온곳 : http://cafe.daum.net/emego
▶ 마음을 전하는 선물 몰 : http://www.빛나는기술.kr |
출처: 이뭐꼬 원문보기 글쓴이: 이뭐고
첫댓글 단지불회에서 삭제요청이 있습니다. 삭제부탁드립니다.(단주, 카페지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