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밀어라
<마5:38-4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윗글은 마치 무슨 도덕교과서를 읽는 것 같고 게다가 앞뒤 문맥도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 문제점도 발견하지 않고 어찌하든
성급하게 믿고 천국 가고 싶은 갈망이 큰 탓인지
그저 아하, 우리예수님과 하나님은 참 사랑도 많으신 분이라고 감탄한다.
예컨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손양원목사님 이라는 분은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여 죽은 아들대신 아들로 삼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는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신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보통사람 범인은 할 짓이 못 되는데,
그렇게 실천하기까지 손양원목사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성경문자는 문자일 뿐, 문자는 그 내면의 뜻이 무엇인지 치고 들어갈
공격대상이다. 천국은 침노대상이고 침노를 당한다고 했듯이 천국에 대한
성경문자는 천번만번 읽으며 고히 모셔지는 게 아니고 비밀문서이므로
한번을 읽더라도 공격적으로 깊이 판독해야만 하는 블랙박스와 같다.
윗글을 문자 그대로 읽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기껏해야 도덕군자 반열에 올려 줄만 하다. 그럼에도 그 도덕군자는
또 헛소리를 하는 지적 장애아가 되고 만다. 왜냐면 구약제단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하라고 공정한 원칙을 말씀하셨으나,
예수님은 그에 대해
대적하지 말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내밀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외도 그 같은 패턴으로 하나님은 공정한 원칙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최상급으로 온전한 사랑의 말씀만 하셨다.
그리고 왠일인지 가장 끌 마무리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온전한 말씀이 곧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므로 그런 결론을 맺을 수도
있겠다고 할 수 있으나 문자 그대로 읽고 믿는다면 반드시 어폐가 있다.
수없이 말하는 바이지만 성경은 문자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어야 하며
뜻으로 읽어 성경이 풀리는 마지막 때는 그 상급으로 영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성경을 일컬어 생명책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코 세상의 도덕교과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라고 공정의 원칙을 세우셨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내밀라”
고 하셨으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 동행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사랑과 미움의 원칙을 세우셨으나,
예수님은 무조건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셨다.
하나님은 나와 너의 공정한 게임으로 원칙을 세우신 것이고, 예수님은
상대에 대한 전폭적인 배려와 유익을 위해 나 자신을 남김없이 몽땅 헌신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속에서 벌어지는 도덕적인 일 같이 기록되었으나
이의 본질은 절대로 도덕적인 말씀이 아니고 그 속 뜻은
하나님과 예수님은 창조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공정의 원칙을 세우셔서 이는 이로 하라고 하신 반면,
예수님은 무조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왜 그 같은 두개의 상반되는 듯한
말씀이 동일한 창조의 원리가 되는가?
맨 먼저 창조란 無에서 有를 드러내는 것이며 다시 그 有는 조잡한 혼돈에서
미려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옮겨가는 장구한 작업인데, 그 주인공은 빛되신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이 100% 빛이 아니었다.
흑암 하나님 50%와 빛 하나님 50%로 선악이 혼재된 하나님이었다(창1:2).
그러므로 창조란 빛 하나님 50%가 흑암 하나님 50%를 이겨서 모두
빛 하나님 100%를 만드는 일이 된다.
즉 100% 빛의 하나님이 될 때 창조는 완성되는 것이며 창조가 완성되면
사망이 사망을 당하여 마침내 영생의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같이 빛과 흑암이 혼재된 50%대 50%로 창조가 시작되어 완성에 이르기까지
빛과 흑암의 싸움은 계속되는 창조6일이 걸리기 때문에,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라고 하셨던 것이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고 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창조의 빛 50%는 비창조의 흑암 50%와 대적관계에
있다는 뜻에서 말씀하신 구약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론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창조작업의 이론이며 원칙론이다.
그러나 창조의 현장에서는 그 같은 이론과 원칙론이 가납될 수 없다.
왜냐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 근본이 빛 50%와 흑암 50%가 서로
따로따로 분립된 상태에서 빛이 흑암을 이겨 소멸시켜가는 창조가 아니고
하나님은 빛과 흑암이 반반씩 혼재된 일원론에서 창조가 시작되는 알파요,
창조가 마쳐지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빛 50%와 흑암 50%가 뒤섞여 혼재된 일원론의 한 몸체에서
빛의 하나님이 흑암 하나님을 이겨가야 하는 창조이므로, 혼재된 자신의 몸
전체인 100%를 투척하여 혼재되지 아니한 빛만의 100% 최상급 하나님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창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론과 원칙에서는 50%대 50%이므로 눈은 눈으로 갚아주고 이는 이로
갚아주는 공정한 원칙론이 성립되겠지만, 그것이 사실적으로는 혼재된
한 몸체이므로 자기 안에 있는 흑암을 떨쳐버리기 위해선 동시에 자기 안에
있는 빛조차도 불가불 함께 100%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창조의 현장에서는 100%를 버려야 마침내 100%의 빛의 하나님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완성된 창조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과거 원칙론을 내세운 유대당의 하나님을 능가해서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 동행해 주라고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 다음에 곧바로 결론 맺기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유대당의 하나님이 곧 예수님으로 오셨고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가 변하여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내미는 일이
사실적으로는 동일한 말씀이 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창조원리의 숨겨진 뜻을 보다 자세히 피력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말씀은 원칙론이고, 하나의 말씀은 그 원칙이 창조의 현장에서는
어떻게 시행되는지 알려주는 구체적인 상황 제시어가 된다.
빛의 하나님이 흑암 하나님을 이겨서 창조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주는 대적관계에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시 밝히지만 빛과 흑암은 처음부터 분립된 대치관계가 아니고
근본이 빛과 흑암이 한테 섞인 혼재의 하나님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혼재된 자신의 몸 전체(100%)를 버려야 비로소 100% 빛만의 하나님으로
승리의 깃발을 올릴 수 있다는 뜻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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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