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무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내 귓속의 물고기 한 마리
정일근
젊은 의사는 내 귀의 이명현상을 일시적인 난청으로 진단했다
나는 의사에게 지난 주말 만어사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일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돌로 변했다는 만어산 만어사를 다녀온 후
내 귓속에 숨어 따라온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나를 괴롭히는 귀울음 현상의 주범이 아닌지를 묻지 못했다
만어사에서 돌 속의 물고기들이 내는 금종소리 은종소리를 듣다가
산수유 노란 꽃그늘에 누워 낮잠이 들었는데
그 때 나는 분명히 내 귓속으로 숨어드는 물고기 한 마리를 보았다
바위 아래 푸른 바다에 사는 물고기 한 마리가
내 귓속으로 들어와 달팽이관 안에 놀고 있다는 것을
의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절집에 걸린 풍경처럼 소리를 내는 물고기를 믿지 못할 것이다
신라사람 경문왕의 당나귀 귀를 본 복두쟁이의 마음처럼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고통이 신화를 만든다
만어산에는 소금내음 풍기며 바다가 출렁거리고
만어사 바위들이 내는 종소리가 그 바다에서 물고기로 태어나고
그 중 한 마리가 내 귓속에 들어와 일으키는 시인의 이명을
간단한 처방전을 쓴 후 이내 다음 환자를 호명하는
젊은 의사는, 그 비밀을 고백한다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