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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柱單子 전통 혼례 이어가기 1 - 사주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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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 양가가 정혼定婚을 하면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으로 혼인 날짜를 잡아달라는 뜻으로 신랑의 사주四柱인 생년 0월 0일 0시의 네 간지干支 :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10간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12지를 적어서 보내는데, 이를 흔히 ‘사성四星 보낸다’, ‘단자單子보낸다’라고 말한다. 즉 신랑의 사주를 적은 종이를 사주단자四柱單子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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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앞면에는 사주 혹은 사성이라 쓰고 그 봉투는 봉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숫대나 싸릿대의 끝부분이 갈라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운데 부분만을 쪼개 그 속에 봉투를 끼우고, 양쪽 끝을 청실, 홍실로 감으며 매듭은 동심결로 맺는다. 이때 수숫대나 싸릿대 대신 대나무를 사용하는 지방이 있는가 하면, 아예 끼우지 않는 지방도 있다. 사주단자를 싸릿대 등에 끼우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에는 가방이 없고 손수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야 하는데, 혹 구겨질 염려가 있어 그랬다는 말도 있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잘 휘어지는 싸릿대처럼 앞으로 말 잘 들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도 일부 지방에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청홍색 보자기를 두를 때는 신랑을 의미하는 홍색이 밖으로 가도록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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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모자_ 사모관대
전통혼례에 대한_ 더욱 상세하고 짱짱한 정보
혼례를 육례라고도 한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혼인절차를 6개의 예절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 육례이다. 이것이 전통사회에서도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육례를 치렀다는 말은 복잡하고 어려운 여러 의례절차를 지냈다는 말이며 이것은 따라서 신중히 대하여야 한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전통사회에서 행하여진 혼례는 복잡한 것이었다.
첫째, 수소문부터 시작하여 상대방을 물색하고 어느 정도 정보를 입수한 다음은 탐색을 하여 모든 것을 종합하여 선을 보고 최종결정을 한다.
양가에서 처음 정식으로 표현화된 의례가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사주(四柱)와 청혼서(請婚書)를 보내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답이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택일과 허혼서(許婚書)를 보내는 것이다. 만약 신부 집에서 사주를 받지 않으면 그것은 혼인을 거부한 것이 된다.
원래 서울에서는 결혼식 전날 밤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함을 보내는데 지방에서는 이와 다르다. 지방의 경우 신랑 집과 신부 집의 거리가 있기 때문에 함이 초행을 따라간다.
신랑과 상객 그리고 대표일행과 '함진아비'와 '중방' 등이 신부 집에 혼례를 올리러 가는 것을 초행이라 한다.정방에 안내한다.
혼례시간에 맞추어 거리가 멀면 일찍 떠나야 한다. 신랑 일행이 신부 마을에 가까이 오면 '인접' 또는 '대반(對盤)'이라 하는 신부측 안내원이 나와 신랑 일행을
신랑이 대례청(大禮廳)인 신부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함진아비가 얼굴에 먹칠을 하고 "함 시시요."하면서 집안으로 들어선다.
함을 받기 위해 신부 집에서는 멍석을 깔고 상을 놓고 병풍을 쳐 놓는다. 이때 시루떡을 하여 놓기도 한다. 함진아비에게 수고하였다고 여비를 준다.
함은 신부 어머니가 받기도 하지만 복 많은 여인이 받아 들이기도 한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함을 들고 안방으로 가져가 깔고 앉으면서 "복 많이 왔네"하고 소리친다. 신부 어머니가 함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첫번에 잡히는 옷감의 색을 보고 신부가 첫아들을 낳을 것인지 첫딸을 낳을 것인지를 본다.
함에는 제일 밑바닥에 숯, 고추, 목화씨 등을 넣는다. 이것들은 장수, 득남, 복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다. 그리고 신부 옷 두벌을 넣고 혼서지(婚書紙)를 넣는다. 옷 두 벌은 노랑과 빨강 저고리, 청색과 빨간 치마를 말한다. 혼서지는 여자가 평생 지녀야 할 귀중한 문서로 신랑 신부의 이름과 사주가 적혀 있다.
함도 중요하지만 함을 지고 온 흰 광목의 멜빵은, 신부가 안방에서 대례청으로 나오는 길에 깔아 신부가 그 위로 걸어가게 한다. 그리고 후일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신행을 갈 때 그 가마를 이 흰 광목으로 X자로 엮어 신부 가마임을 표시한다. 그리고 첫 아이가 나면 이것으로 옷을 해서 입힌다고 한다.
함이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혼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함진아비가 얼굴에 먹칠을 하여 흉한 모습을 하는 것이다. 신랑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혼례 문서인 혼서지에 가장 미천한 사람이 짊어지고 간다는 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것은 가장 천한 것이 가장 귀하다는 한국적 해학을 말하는 것이고,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은 잡귀를 쫓는다는 주술적 의미가 있으며, 함진아비가 함을 판다고 익살을 부리는 것은 경직되기 쉬운 엄숙한 순간을 농으로 넘기는 한국인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함진아비가 신부집이 어디냐며 소리를 지르고, 함을 얼마에 사겠느냐고 흥정을 하고 익살을 부리다가 신부 집 인접의 안내로 함을 상 위에 놓는 것이다.택일에 적힌 시(時)에 맞추어 신랑이 대례청인 신부 집에 들어선다.
신랑은 사모관대로 정장을 하였다. 신랑이 행하는 의례를 전안지례(奠雁之禮)라 한다. 대례청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소반상을 놓고 빨간 보자기를 씌웠으며 뒤쪽에 병풍을 쳐 놓았다.
신랑이 이 상 앞에 다가와 앉으면 일을 돕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오리, 즉 목안(木雁)을 신랑에게 준다. 신랑은 이것을 맏아 상 위에 놓고 일어서 4배(拜)를 한다. 절을 하는 사이에 신부 어머니가 치마로 목안을 싸서 신부가 있는 안방에 던진다. 이것이 서면 첫아들을 낳고 이것이 누우면 첫딸을 낳는다고 한다.
전안지례가 끝나면 신랑이 대례청 오른편 즉 동쪽에 선다. 대례청 위에는 쌀·대추·밤·닭·송죽·쪽박·촛대 등이 놓여 있다. 이들은 모두 다산·장수·다복·건강 등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다.
신부가 흰 광목 위를 하님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온다. 대례청 서쪽에 서면 신랑 신부 따로 남과 북을 향하여 손을 씻는다.이어 마주 보고 교배지례(交拜之禮)를 한다. 신부가 2배하면 신랑이 1배하고 다시 신부 2배, 신랑 1배를 한다.
이어 합근지례라 하여 술잔을 나눈다. 첫 잔과 둘째 잔을 각자가 마시고 셋째 잔은 청홍실로 연결한 것을 바꾸어 마신다. 이로써 대례가 끝난 것이다.
이 대례에 대해 전안지례를 소례라 한다. 소례는 신랑 혼자 북두칠성에 맹세한 것이고, 대례는 신랑 신부가 예로서 첫 대면을 하고 술을 마심으로 무(無)에 상태로 들어가 화합을 함으로 부부가 된 것이며 이것을 만인 앞에서 행한 것이다.
대례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일단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다. 신부는 뒤쪽에 앉아 있고 신랑은 신부 집에서 만들어 준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것을 관디벗김이라 한다. 의례복을 벗고 평복으로 돌아올때 여자집에서 해준 옷을 입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이어 밖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신랑과 상객은 잠시 후 신부집으로부터 큰 상을 받는다. 이것을 먹는 척하고 수저를 놓으면 그대로 신랑 집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신랑 집에서는 음식 차림을 보고 그 집의 안주인 솜씨를 평하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신방을 꾸민다. 신방에는 요기상을 놓으니 신랑이 한 잔을 들고 신부 옷을 벗긴다. 신부를 뒤에서 얼싸안고 옷을 벗기되 지방에 따라 위에서부터 푸는 곳도 있고 가슴부터 푸는 곳, 또는 버선부터 벗기는 곳도 있다.
겉옷을 벗기고 안아서 자리에 뉜다.
다음날 아침에 떡국이나 죽을 들고 비로소 신랑이 신부집 장인 장모와 근친에게 인사를 한다.
낮이 되면 신랑다루기를 하니 이것을 동상례(東床禮)라고도 한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답이 시원치 않으면 신랑의 발을 묶어 치켜 올리고 발바닥을 막대기로 친다. 신랑의 고통을 빨리 덜어 주기 위해 신부 집에서 푸짐한 주안상을 낸다.
둘째 날 밤을 신랑이 신부 마을 밖에 나가서 자고 돌아오니 이것을 인재행(因再行)이라 한다. 전통적으로 신랑이 첫날밤을 자고 자기 집에 돌아와야 하고 신부 집에 재행걸음을 가야 한다. 보통 수년을 이렇게 하여 '해묵이'라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혼례식을 올리고 해를 묵혀 가지고 신행(新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 신부가 자기 집에 머물수 없어 3일만에 신행을 하고 이에 재행을 하기 위해 인재행이란 것을 하게 된 것이다.신부가 시집으로 가는 것을 신행(新行)이라 한다.
신랑이 초행걸음 하였을 때보다 사람이 더 많이 신행에 따라간다. 상객(上客)이 가고 하님이 가며 짐꾼들이 가고 신부의 가마가 가야 한다. 가마는 함을 지고 왔을때 멜빵으로 쓴 광목으로 옆을 두르고 가마 위에는 호피(虎皮) 수놓은 것을 얹고 간다.
신부 가마가 신랑 집에 가까이 오면 사람이 나와 목화씨나 콩을 뿌려 잡귀를 쫓고 문 앞에 불을 피우고 이것을 넘어오라 한다. 이것은 불로 정화를 한 것이 된다.
신부 가마를 신랑이 열어 주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신랑의 경우와 같이 큰상을 받는다. 이것도 신부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신부가 시가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구고례라 한다.
원칙으로 말하면 시조부모가 계셔도 시부모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이다. 집안에 넓은 곳에서는 신부가 큰절 하느라 힘이 들고 후에는 일어서지도 못할 때가 있다.다음 날부터 시부모가 그치라 할 때까지 아침에 문안인사를 올린다. 흔히 3일은 계속된다. 이 사이에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가까운 일가 친척의 집을 다니며 인사를 한다. 손님을 맞는 집에서는 음식을 대접한다.
신부가 시집을 와서 첫농사를 지어 가지고 떡과 술을 만들어 친정을 다녀오는 것을 근친이라 한다. 근년에는 결혼한 지 일주일 이내로 친정을 다녀온다.
근친이 끝나야 혼례가 모두 끝난 것이 된다. 따라서 의혼(議婚)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칙대로 하면 혼례 모두를 끝내는 데 몇 년이 걸린다. 해묵이를 하고 첫농사를 지어 근친하는 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두고 혼례를 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맞이한 부인이기에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 '육례를 치른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전통혼례에서 중요한 것은 소례, 대례를 올리는 엄숙하여야 할 순간들에 옆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쉬지 않고 농을 하여 신랑이나 신부를 웃게 하여 신랑 신부는 애써 참으려 한다.
무질서하게 보이고 떠들썩한 사이에 준엄한 의식이 치러지는 혼잡속의 질서가 우리 선조들의 지혜였다.
신부의 화관
혼례는 4대 가례(家禮)의 하나이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합쳐 위로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아래로는 자손을 후세에 존속시켜 조상의 대를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치르는 예로 옛사람은 '인륜도덕의 시작이며 만복의 근원'이라 할 만큼 중요한 일로 여겼다.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만나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 일부일처의 관계를 성립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단순히 남녀의 결합만을 의미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부모의 은혜를 기리며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 할 것을 맹세하고 음양의 표본이며 창조의 절대자인 하늘과 땅에 부부의 무궁하고 불변하는 사랑을 서약하고 서로가 배우자에게 서약하는 경건한 약속의 의식이기도 하다.
혼인의 혼(婚)자는 혼(昏:어두울 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혼인 예식이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려졌기 때문이다. 이는 남과 여를 음과 양의 만남으로 보았을 때 음과 양이 교차하는 시간인 해가 저무는 때가 합당하다는 취지다. 음양이 교차하는 시각이 아침과 저녁 두 번이 있지만 저녁을 택한 것은 혼인 예식이 끝나면 곧바로 첫날밤을 치르는 합궁례를 치루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의 혼인제도의 변촌을 살펴보면 부여는 일부일처제였으며 옥저에서는 매매결혼이 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서는 신부의 집 뜰에 서옥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사위가 거처하다가 자식을 낳아 큰 다음에야 비로소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유교의 가르침에 의한 혼례가 행하여 지기 시작하였고 이 당시의 혼인은 남녀 당사자의 결합이라기보다는 두 집안의 맺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후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거의 모두가 신식의식을 따르게 되었고, 요사이 전통혼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기는 하지만대체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상징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혼인(婚姻)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일을 혼인(婚姻)이라고 하는데 '혼(婚)은 장가든다는 뜻이고 '인(姻)'은 시집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혼인은 '장가들고(婚) 시집간다(姻)는 말이된다.
장가든다는 뜻의 글자가 '혼(婚)'이 된 까닭은 저녁때(昏)에 여인(女)을 만나는 것이 장가든다는 것이고 시집간다는 뜻의 글자가 '인(姻)이 된 까닭은 옛날 예법에 여자의 집에서 신랑감을 구하는 데는 반드시 중신하는 부인인 매씨(媒氏)에 의해야 했으므로 여자(女) 매씨로 인(因)해 남자를 만나는 것이 시집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혼인과 결혼(結婚)의 다른 점
요즘은 남자가 장가들고 여자가 시집가서 부부가 되는 혼인이 결혼이라는 말로 대치되어 많이 쓰여지고 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말의 의미에는 '장가든다'는 의미만 있으므로 결혼이라는 용어 사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즉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일을 '결혼'이라고 하면 남자가 장가드는데 여자가 곁붙여서 따라가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남자가 장가들고 여자도 당당히 시집가는 것의 의미가 있는 '혼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혼인예식의 경하금품의 포장에 쓰는 글도 신부의 집에 보내는 것에는 '축 결혼(祝 結婚)', '축 화혼(祝 華婚)'이라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집가는 신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경하혼인(慶賀婚姻)'이라고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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