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행 白彛行 (1845~1935)】 "평북 정주 오산학교 초대 교장"
오산학교 교장은 초대 백이행(白彛行·1845~1935) 교장으로부터 여준-조만식-류영모로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주의 선비로 이름 있었던 백이행은 본명이 백기행이었던 백석과도 먼 혈족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백이행의 딸(백숙량)은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현상윤(1893~ 미상)에게 시집을 갔다. 정주 사람인 현상윤은 3·1운동 당시 체포된 48인 중의 한명이었다. 초기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돌아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을 알지 못한다. 그는 '조선유학사'라는 책을 냈고 이 방면의 선구자로 꼽힌다.
또 백이행의 친척(종조카) 중에 백인제(1898~납북 미상, 백인제의 부친은 백희행)도 있다.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나온 그는 일제강점기의 최고 외과의사로 마취기술을 처음으로 습득했으며, 도쿄대학에서 구루병 연구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1928년 오산학교 때의 스승이었던 이광수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백인제는 이광수의 왼쪽 신장 결핵을 진단하고, 국내 처음으로 적출(摘出) 수술에 성공했다. 제자 백인제가 스승 이광수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다. 1941년 경의전에 '백인제 외과의원'을 열었고 이 병원은 날마다 문전성시였다. 해방 이후엔 서울대 의대 창설을 주도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서울 북촌(종로구 가회동)에는 백인제 가옥이 서울시 민속문화재 22호로 보존되어 있다.
류영모는 1910년 10월 1일 오산학교 과학교사로 갔을 때 백이행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를 오산학교 초대교장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학생 7명으로 개교한 학교였는지라, 딱히 교장이란 직책을 부여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설립자 이승훈으로서는 정주의 유지였던 백이행을 학교에 직접 가담케 하여 지역 양반 자제들을 오산학교로 입학하게 할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이행은 또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기에 이후에 오산학교의 종교적 입지를 넓히는 데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 백이행은 종제인 백희행과는 종교가 달라 서로 소원했던 사이였지만, 백인제 등 아이들을 오산학교에 보내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백이행의 역할이 척박한 환경에서 오산학교를 제대로 출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백이행을 교사 류영모가 직접 찾아갔다. 이틀간을 함께하며 유학을 담론했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세의 청년이 당시로선 명망가 노인인 65세의 백이행과 마주 앉아 공맹을 논한 사건은 학자 류영모의 패기를 말해준다. 23세의 율곡이 58세의 퇴계를 찾아가 학문을 논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류영모는 뜻밖에도 평생의 보물이 될 '건강체조' 하나를 배운다.
"제가 몇년 전, 그러니까 환갑이 지나서 폐결핵에 걸려 다 죽게 되었지요. 식구가 정주 덕다리에 있는 조한의원에 약을 지으러 갔는데 의원이 체조를 가르쳐 주고 그대로 하라고 일렀습니다. 날마다 빠짐 없이 운동하면 꼭 효험을 볼 것이라고 말했지요. 긴가민가했는데, 그걸 실천해보니 정말 건강이 회복되더군요. 그런데 얼마 뒤 다시 재발해서 한의원에 다시 갔습니다. 조의원은 그 운동을 계속하느냐고 묻더군요. 병이 나아서 그만뒀다 했더니 혀를 차면서 그래서 재발한 것이라고 말을 합디다. 다 나아도 계속 그 운동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하게 됐고, 건강을 찾았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서 상업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907년 7월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민족을 위한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신민회(新民會)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북 지방 최초의 사립 중학교였던 오산 학교는 창립 당시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학생들에게 수신, 역사, 지리, 수학, 물리, 법학통론, 헌법대의,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초대 교장은 유림 대표인 백이행(白彛行)이 맡았다. 오산 학교의 역대 교사로는 여준(呂準), 윤기섭(尹琦燮), 이광수(李光洙), 엄상섭(嚴祥燮), 김억(金億), 박기선(朴基璿) 등이 재직하였다.
이승훈이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체포되자 오산 학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헌병들이 오산 학교에 들어와서 건물에 방화를 하였으며, 당시 교장이던 조만식(曺晩植)은 평양에서 구금되기까지 하였다. 어려움 속에서 운영되던 오산 학교는 1922년 이승훈이 출옥한 이후 오산 학교의 발전에 힘을 기울이면서 다시 안정을 찾았다. 오산 학교는 1926년 오산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오산 학교는 광복 이후 남하하여 1953년 4월 부산에 재건하였다가, 같은 해에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하였다. 1956년 4월 다시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에 신교사를 건설하고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산학교(五山學校)는 1907년 12월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운동의 인재와 국민교육의 사표(師表)를 양성할 목적으로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학교이다.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운 것은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민족 운동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관찰사 박성봉은 재원을 지원하여 학교 설립을 도왔다. 초대 교장은 백이행(白彛行)이었으나, 1910년 나부열(羅富悅) 목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추대하여 기독교주의 학교로 만들었다.
초대 교장 백이행의 뒤를 이어 이종성(李鍾聲)·박기선(朴基璿)·조만식(曺晩植)·류영모(柳永模)·홍명희(洪命熹)·김성환(金星煥)·주기용(朱基瑢) 같은 이들이 남강의 지도정신 아래 학교를 이끌어 갔다. 교사로는 3·1운동 전엔 여준(呂準)·서진순(徐進淳)·류영모(柳永模)·이택호(李宅鎬)·염상섭(廉尙燮)·김억(金億)·이상정(李相定)·진연근(陳演根)·이윤재 (李允宰) 등이 있었다. 오산학교는 사관학교·훈련원·정치학교·인문중학교 및 특수모범자 양성소 등을 겸한 학교였다. 소정의 교과과정 외에 남강의 훈화와 직접적 훈도를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와 민족성 개조에 치중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 공산 학정을 피해 교장 주기용을 비롯한 교사와 학생 대다수 월남하여 1953년 4월 피난지 부산에서 학교를 재건하였으며 1954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2가 92번지로 이전하고 부산 교정은 분교로 운영하였다. 1956년 부산 교정은 폐쇄하고 원효로 2가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하였으며 오산중학교와 오산고등학교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조형균(趙衡均)은 이승훈(李昇薰)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