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치유자(요21:15-18)-2021.7.25
우리는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말합니다(사53:5).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가학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가 맞을 매를 대신 맞아주시고, 내가 당할 진노를 대신 감당해주심입니다. 주님은 어떤 인간도 가질 수 없는 아픈 상처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요즘 치유목회와 내적치유를 자주 말합니다. 그만큼 상처를 잘 받는다는 말입니다. 상처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잘 받습니다.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쉽게 분노하지요. 결국 그만큼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상처도 외적인 상처가 있고, 내적인 상처가 있지요. 하지만 내적 상처는 잘 보이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아 치유하는 시간이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됩니다.
문제는 내적상처는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주로 가정이나 교회나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받는 속도보다, 치유하는 속도가 빨라야 합니다. 그래야 영육간의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1) 최고의 상처를 입은 주님과 최고의 상처를 입힌 베드로의 만남
본문은 최고의 상처를 입은 예수님과 최고의 상처를 입힌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최고의 치유를 받은 베드로 이야기이지요. 베드로의 배신으로 예수님과의 관계가 최고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이 먼저 찾아가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최고의 아픈 상처를 입힌 사람이지요.
베드로의 호기를 아십니까? 마26장33절을 보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입니다. 35절을 보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큰 소리를 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났다고 배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주님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까지 합니다(마26:74). 그런데 상처는 받은 사람도 아프지만 입힌 사람도 아픕니다(예: 불효자).
어쩌면 상처를 받은 사람보다 상처를 입힌 사람의 고통이 더 큰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상처가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을 책망하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통곡하는 베드로/마26:75). 베드로의 상처는 스스로 입은 상처이기에 더 아팠을 것입니다. 모든 상처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입은 상처도 많지요. 그런 상처는 치유도 힘듭니다.
베드로의 상처는 스스로 입은 상처이기에 변명이나, 원망도 할 수 없는 상처(예; 방울뱀은 화나면 자기 몸을 물어뜯는다). 인간도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극단의 선택까지). 베드로는 스스로 낸 상처로 인해 양심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몇 사람의 동료들을 선동하여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떠났던 것이지요(요21:3).
(2) 상처 입은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의 배신은 주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유대인들보다,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보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직접 못 박은 로마 군인들보다 더 아팠을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훨씬 더 아프거든요(로마황제 시저를 죽인 심복, 브루투스를 향해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외쳤던 1년짜리 황제 시저를 보라).
어쩌면 주님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베드로 너마저도”. 주님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혹시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본 적 있으신가요? 그 상처가 얼마나 아프던가요? 그 상처가 얼마나 오래가던가요? 평생 한을 품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치유입니다. 병든 영혼을 치유하고, 병든 땅, 병든 세상을 치유하시러 오신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이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어요(요1:11). 그만큼 예수님의 상처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 아물기 어려운 상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상처는 오직 하나님만 치유하실 수 있는 거지요.
주님은 친히 죽음의 독침을 맞으셨지만 스스로 제거하셨습니다. 주안에 독침을 제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15장26절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 이름은 ‘여호와 라파’입니다. 주님은 치유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단순한 치유자가 아니십니다. 당신이 죽음의 상처까지 경험하신 분이시지요. 그래서 그분의 치유는 가장 안전하고 정확하십니다.
건강도 잃어본 사람이 소중함을 알지요. 그래도 주님은 배신자 베드로에게 집중하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다를 찾아갔을 때 베드로 주변에는 제자들이 더 있었습니다(요21:2). 그러나 주님은 누구와도 개인적인 대화를 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제자들을(5,6절) 대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오직 베드로와 말씀하십니다(15-18절). 지친 베드로의 마음을 달래주고, 무너진 자존감을 높여주며, 체면을 세워주고 싶었던 주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베드로의 사도직 복귀를 위한 주님의 신호탄이었던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베드로는 비록 주님을 부인했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신뢰하고 계셨던 거지요. 베드로를 끝까지 믿어주신 거예요.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마음에 걸린 사람이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믿음과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고통 중에 있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를 찾아가 치유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상처 입은 주님이 상처를 입힌 베드로에게 먼저 다가가신 것이지요.
사실 요한복음은 20장31절에 기록한 목적이 나옵니다. 그래서 20장으로 마무리 되어도 어색하지 않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21장이 나옵니다. 별책부록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21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베드로를 치유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볼 수 있음).
(3) 베드로를 전인적으로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만큼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용납해주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는 베드로를 통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계획에 변함이 없으셨던 거예요.
베드로의 회복으로 사도행전의 문이 열렸음을 기억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치유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친히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화해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주님처럼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상처의 근본적인 치유는 자기 안에 있는 상한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상한 감정(상처)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치유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안에 담아둔 감정을 토해내고 후련함을 느낍니다. 내안에 있는 못된 감정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입니다. 홧병은 한국인의 병입니다(브리테니카사전등재). 그런데 의외로 홧병은 치유가 간단합니다.
그냥 누구에게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발설하면 시원함을 느낍니다. 누군가에게 분풀이라도 하면서 울어버리면 후련함을 느낍니다. 때로는 웃으면 치유가 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나쁜 감정들을 밖으로 뽑아내면 치유가 되는 거예요. 독소가 찰 때마다 뽑아내야 해요.
그래서 상처를 치유하려면 출구가 필요한 거예요. 그것이 취미생활이든지, 혹은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독서 그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믿음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풀어야 해요(예배, 말씀, 기도, 찬송 등). 그래야 부작용 없어요.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세 번씩이나 비슷하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오십니다. 물론 비슷한 질문 같지만 주님의 의도는 전혀 달랐지요. 그러면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질문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회복할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주셨다라고 말하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때 베드로의 감정의 온도가 전혀 달랐거든요. 첫 번째는 그 분위기가 너무 무서워서 엉겁결에 대답한 것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베드로의 감정이 고조되어 대답한 것입니다. 물론 세 번째는 작심하고 부인을 했을 테지요. 다시 보지 않을 생각으로 안면 몰수한 것이지요. 자기감정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당시 베드로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과 주님을 비교해서 물으십니다. 솔직히 주님과 이 사람들이 비교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버릇을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회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의 믿음이 좋고, 자기가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줄 착각했었지요. 때문에 주님은 어린아이 같은 베드로의 성품을먼저 치유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른바 상한 감정부터 치유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존감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낮아진 베드로의 자존감을 끌어올려 줄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치유는 상한 감정으로부터 시작하여 베드로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자존감의 치유는 주님의 사랑을 회복해주는 것이지요. 사랑이 회복되면 자존감이 회복되고, 자존감이 회복되면 사명이 회복되지요. 한마디로 사명은 사랑이 회복되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치유는 관계회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치유가 불가능해요. 관계회복이 되어야 사명도 회복되고, 치유도 일어나는 거예요.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의 어린아이같이 상처 잘 받는 감정, 즉 무너진 마음을 먼저 치유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15절). 그리고 잃어버린 사명을 치유하시기 원하셨으며(16절), 마지막 순교를 통한 생명의 치유까지 원하셨던 것입니다(18-19절). 이른바 전인적인 치유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혼이 치유 받기 원합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영적 질병에서 고침 받고 나음 받아 온전함을 입을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질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모든 상처, 모든 질병으로부터 치유를 받아 주안에서 자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