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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신학, 성공주의 신앙에는 구원이 없다
(기도응답이 다 좋은 게 아니다!)
<가엾은 C 집사/김달성 목사>
신도시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C집사(39세)가 상담전화를 걸어왔다. 인터넷 나의 블로그에서 글을 보고 연락한 것이다. 몇 년 전 자궁암 진단을 받고 대학병원서 수술을 했는데 재발했다며 그녀는 훌쩍거렸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찾듯, 살 길이 없느냐고 물었다.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었다.
C집사는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 처음 나갔다. 크리스마스 때 동네 친구 따라 처음 나간 것이다. 친구는 교회에서 재미난 이야기도 들려주고 맛있는 것도 준다며 인도했었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언니와 외롭게 살던 그녀는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열심으로 본다면 학교보다 교회를 더 열심히 다녔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교회학생회 부회장도 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그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했다. 서울 을지로에 있는 직장서 경리 일을 했다. 다니는 사업체의 규모에 비해 경리 직원은 하나뿐이라서 늘 격무에 시달렸지만, 그는 교회 예배와 봉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일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회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새벽기도회도 나갔다.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시작해 이제까지 놓지 않는 직분이다. 또한 신앙생활하면서 그녀가 엄격하게 지켜온 것 중의 하나는 헌금이다. 십일조와 감사헌금, 절기헌금, 선교헌금은 반드시 하는 것이고 각종 특별헌금도 솔선수범하여 드린다. 특히 그는 건축헌금에 신경을 쓴다. 교회건물건축은 하나님의 성전건축으로서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가 몇 년 전 신도시로 이사 오기 전까지 오랫동안 다닌 교회는 서울에 있다. 소수의 교인이 지금의 담임목사와 개척하여 급성장한 교회로 지금은 3천여 명이 모인다. 그 교회는 소위 '정통, 보수' 진영에서 '둘째가라' 하면 서러워할 교회다.
C집사는 직장 일을 내 일처럼 성실하게 했다. 특히 돈 만지는 경리 업무를 정직하게 함으로써 사장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다. 사장은 월급에다가 보너스를 후하게 얹어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24살 때 어머니가 뇌졸 증으로 그만 쓰러졌다. 수술을 위해 목돈이 필요했다. 수술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다니는 직장의 사장이 선뜻 치료비를 대신 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장에게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윽고 이성적인 감정도 갖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 사장의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계략도 작용했다.
그녀는 결국 유부남 사장의 내연녀가 되었다. 그리 되자 월급은 곱으로 올랐다. 처음에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나 죄의 줄을 끊지는 못했다. 육적, 물질적 유혹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출석하던 교회의 설교는 그녀의 죄를 끊는데 힘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설교의 주제가 항상 소위 '번영의 신학'(?) <물음표를 단 이유는 신학이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신학이란 표현을 쓴다.> 에 근거한 '성공 신화'였기 때문이다. 번영의 신학은 기복주의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복음의 알맹이인 '십자가의 도'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 십자가의 도란 타락한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번영의 신학은 그 도를 외면한 채 하나님을 이용하여 영광이나 받으려고 한다.
내세의 영광도 받고 이 땅의 육신적인 영광도 받고. 예수가 인간 대신 저주를 다 받았으니 이제 너희는 영광이나 받으라, 그것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받아 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이다. 그것은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마귀의 속삭임이다.
그 교회는 동시에 '기도만능주의'를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무엇이든지 기도 열심히 많이 하면 좋으신 하나님은 다 들어주시어 만사형통한다는 게 기도만능주의다. 매사에 큰 소원을 갖고 구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넘치게 채우시는 분이라는 내용의 설교를 그녀는 시간마다 들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부르짖었다.
성경을 단순히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같지만 야훼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서 당신의 영광, 뜻, 의도, 필요를 따라 활동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된다. 이는 실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아니면 우상숭배자(종교인)로 전락하느냐의 분기점이 된다. 다시 말해, 이는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사느냐, 혹은 신(우상)을 만드는 자로 사느냐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나의 필요를 따라 활동하는 신은 내가 만든 우상이다. 시편 106편 15절을 주목하자!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무슨 의미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따라 많은 것을 구했다. 가령, 고기 같은 것이다. 만나를 날마다 주님이 알아서 내려주시거늘 그들은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며 고기 달라고 떼를 썼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메추라기로 응답하셨다. 고기가 나중엔 물리도록 주셨다. 하지만 그 다음을 주시해야한다. 그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 자연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육적 필요를 따라 주시기는 했지만 그게 사실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난 응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먼저 사랑과 거룩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추구하며 그의 뜻을 먼저 행하며 살면 육적, 물적 필요는 주님이 알아서 적절히 채워주실 텐데 그들은 반대로 행하다가 실족했던 것이다.
먼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해 혹시 응답 받았다 할지라도, 그 영혼은 저주받을 수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똑바로 알아야한다. 기도응답이 다 좋은 게 아니다! 하나님에게 떼를 써 육적인 것을 받아냈지만 영혼은 오히려 메말라 죽는 꼴을 당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육은 살찌는데 영생은 잃어버리면 무엇 하나? 그러나 오늘날 많은 경우 영생은 잃어버리더라도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해주는 신을 갈구한다.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달라, 달라!‘이다. 외국인의 귀에는 아마도 Dollar!로 들릴 것 같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가볍게 들으면 안 된다.
오병이어 사건을 또 보자. 육신의 필요를 따라 배불리 먹은 군중들이 나중에 어찌 되었는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무리로 돌변하지 않았는가? 왜 그랬나? 주님으로 인하여 배는 불렀지만 영혼은 파리하게 방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부른 뒤 예수를 세상적 임금으로 삼으려 한 속셈은 육신적 필요를 죽을 때까지 추구하려는 데 있었다. 하나님을 이용한 육신적 번영이 그들의 속셈이었다. 이 속셈은 자기 무덤을 파는 지름길이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방인들처럼 왕을 구한 적이 있다. 그 때 하나님은 심히 못 마땅했다. 왕이신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는 은혜를 추구하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어 살아야할 사람들이 그 통치를 외면한 채 인간 왕을 구했으니 얼마나 어이없는 짓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하지만 떼를 쓰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한 번 해보라고 인간 왕을 허락하셨다. 육신적 요구를 들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역시 그들의 영혼도 파리해지지 않았는가? 그 이후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거 한다. 하나님과 멀어진 비극을! 하지만 그 비극 속에서도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욥은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다. 육신적인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영혼을 윤택하게 하는 좁은 길을 끝까지 갔다.
번영의 신학, 성공주의 신앙에는 구원이 없다.
아니 그것은 저주의 무덤을 파는 짓이다. 교인들의 영혼은 그 속에 쌓아 놓은 죄로 시들어 가는데 육신적, 탐욕적인 만족을 부추기는 설교만이 넘치는 상황은 분명 비극이다. 예수는 무엇보다 생명의 떡을 먹이시려고 피를 흘리셨다. 무엇보다 먼저 인간은 예수의 피를 마시고 예수의 살을 먹어야 생명을 얻는다(요 6장). 날마다 죄의 씻음을 받으며 사랑과 거룩이신 예수와 연합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죄 문제 해결 없이 인간 구원은 없다. 영혼이 살찌면 육도 평안해진다.
성경은 편의상 영과 육이란 개념을 구분해 사용할 뿐 결코 이원론적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영, 육의 전인적 구원, 통전적인 구원을 이루려고 십자가 지셨다. 그런데 날마다 죄의 회개를 통한 십자가에서의 죽음 없이는 인간의 전인적 구원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던 것이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탐욕적 인간을 죽이는데 있지, 탐욕적 소원을 성취시켜주는데 있지 않다. 예수를 믿되 그 믿음의 초점을 제대로 맞추어야한다. 이 초점을 잘 못 맞추면 예수와 함께 평생 동거를 해도 지옥 갈 수 있다! 유다처럼...하지만 내일 지옥 갈지언정 오늘 돼지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도 그런 유혹을 받을 때가 많았다.
물론 그 교회에서 성경이나 기도를 가르칠 때 죄의 회개를 언급한다. 하지만 그 회개는 심령 깊숙이 찌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요식절차처럼 넘어가고 말뿐이다.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회개, 개략적인, 말로만 하는 회개 그리고 인간적 규칙, 전통, 유전을 어긴 행위에 대한 회개를 이야기 할뿐 마음속 깊이 숨겨둔 구체적인 죄, 하나님의 법(아버지의 마음)과 어긋난 죄를 통회하고 끊는 회개는 가르치지 않는다. 어쩌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까지 맺는 본격적인 회개는 피한다고 해야 솔직한 것일 게다. 그런 회개를 추구하면 교인의 숫자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회개의 은총을 경험함으로써 영혼이 소생하는 축복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회개의 깊은 은총을 목회자 자신이 아예 체험하지 못했다는 데 있을 수도 있다. 신학교에서부터 '예수에 대해서' 혹은 교리를 배우기는 해도 '예수를' 배우고 아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예수를 안다'함은 성령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
회개의 은총을 교회에서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소위 '구원파'(이단으로 정죄된 종파)적인 왜곡된 칭의론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인간의 죄를 다 청산했기 때문에 믿는 자는 더 이상 죄의 회개가 필요 없다는 가짜 '기쁜 소식'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세례 받은 뒤 교회생활만 열심히 하면 천국행 티켓은 이미 받아 놓은 것으로 알고, 이제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몰두하는 사람들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결국 무 율법주의에 빠지고 만다. 믿음에 대한 크나 큰 오해가 여기 있다.
타락한 인간이 자력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율법주의나 칭의에 대한 오해로 생긴 무 율법주의는 모두 십자가를 지신 예수와는 상극이다. 율법은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알게 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그 죄인을 산 채로 죽여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나라로 이끄신다.
성공주의 신화에 빠진 그 교회는 또한 특히 헌금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기에 헌금을 많이 심으라고 늘 직,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속에 쌓인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높은 담이 되어 있는데 헌금이 과연 하늘로 상달될까? 죄를 품고 있는 자의 기도를 주님은 듣지 아니 하신다고 했는데 그런 자의 헌금을 받으실까? 아무튼 이런 생리를 가진 교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을 받아 후회, 반성은 혹 해도 그 죄를 마음에서 밀어내거나 끊는 영적 힘은 불행히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내연녀 생활을 32살에 결혼과 동시에 청산하려고 작심했다. 나이로 보더라도, 미뤄 오던 결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연녀 생활이 주는 심적 괴로움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륜을 사랑, 애정으로 포장하며 사는 일로 탈진된 것이다. 또한 1년 전 받은 낙태수술로 말미암은 미움의 상처가 그런 결심을 하도록 했다.
그녀는 평소 교회에서 가까이 지내는 권사가 소개한 사람과 결혼했다. 남편은 모태신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불신자 가정 출신이라서 모태 신자를 평소 부러워했었다. 결혼할 때 사장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사줬다. 당시엔 신도시를 건설하며 한꺼번에 물량이 쏟아져 싸게 산 집이지만 지금은 5배 이상 가격이 올랐다. 물론 남편은 지금도 아내가 결혼 전 알뜰히 모은 돈으로 그 집을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녀는 결혼하면서 내연녀로서의 생활을 정리하고자 결심했지만 안타깝게도 실행하지 못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심을 해도 실천하지 못했다. 성가대 활동을 같이 하는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고 볼 낯이 없어, 남편 몰래 금식도 여러 번 했지만 죄의 달콤한 유혹을 밀어낼 영적 능력이 없었다.
죄는 문어만큼이나 집착력이 큰 놈이다. 인간은 어느 면에서 보면 죄악을 즐기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을 즐기는 이유는 죄악을 저지를 때 느끼는 쾌감, 스릴, 짜릿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악은 중독성도 있다고 한다. 더구나 죄악으로 얻어지는 수확물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죄악을 즐긴다. 수확물로는,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얘기했듯이 세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 등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다. 그녀는 직장을 그만 두고도 싶었지만 많은 월급을 받는 자리를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결혼 뒤에도 내연녀 생활은 지속되었다.
죄의 줄을 끊는 힘은 위로부터 와야 한다.
죄의 줄을 끊지 못하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영적 책임은 교회에 있다. 죄를 끊는 영적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공급해 주어야할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외면하기 때문이다. 특히 철저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죽은 목회자(혹은 교회 리더)를 통하여 거룩성은 흐르는 것인데 자아가 깨진 목회자가 희귀한 것이다.
회개를 통하여 인간이 행위 죄(actual sin) 만이 아니라 자기주장의지(self assertive will)까지 십자가로 처리하여 그리스도로 사는 은총이 흘러야하는 곳이 교회인데 교회가 그 일을 기피하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 뿐만 아니라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비극에 빠지고 만다. 교회는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공동체지만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받아 그 빛을 발해야하는 공동체인데, 교회가 이 정체성을 포기하면 세상의 사교 모임만도 못하게 된다.
초대교회 이래 기독교회가 사교 모임만도 못하게 되어 세상에 오히려 해악을 끼친 역사를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유럽 천주교회가 남미를 침략하여 원주민 1억 이상을 죽였고, 개신교회는 북미를 침략해 역시 1억 이상을 죽이고 아프리카 흑인들 일천만 이상을 끌어다 노예로 부렸다. 그러면서 그들이 손에 쥔 것은 황금, 섹스, 권력 등이다. 죄인의 공동체가 빛의 공동체가 되려면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한다. 오직 믿음을 갖고 하는 회개를 통하여!
그녀가 교회 예배에 가면 간증 자가 많다. 교회생활 열심히 해서 이렇게 성공했다, 기도 이렇게 했더니 병이 나았다, 헌금 이렇게 드렸더니 문제가 해결됐다는 등의 간증만 수북하다. 그러나 그의 심령엔 울림이 없었다. 가슴엔 먹장구름 같은 것이 항상 끼어 있는데 그것을 제거하는 능력은 교회에서 공급해 주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자신의 교회에서 벗어나 다른 곳(신령하다는 곳)에 가면 자신의 깊은 문제, 은밀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기도원엘 갔다. 특히 이때는 불임의 문제가 더욱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시기였다. 그만이 아니라 그녀 마음을 더욱 짓누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의 외도문제였다. 남편이 불임을 핑계로 외도한 사실을 최근에 안 것이다.
벙어리 냉가슴 알듯하며 찾아간 곳은 널리 알려진 큰 기도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는 영적 만족, 죄의 문제 해결을 얻을 수 없었다. 하루에 4번 모이는 예배시간마다 헌금이야기가 주요 메뉴였다. 설교의 초점이 돈에 있었다. 헌금 많이 바칠수록 물질 축복 크게 받고 자식이 잘 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선 또 복채를 받듯 봉투를 받으며 예언기도를 해주었다. 돈 봉투에 기도제목을 적어 낸 사람들은 번호표를 받아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예언기도를 받고 싶은 유혹을 받았으나 신뢰감이 생기질 않아 씁쓸한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결국 허탈감만 더 안고, 짐을 싸고 말았다.
제 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예언이라고 떠드는 기독교 무당, 점쟁이(겔 13장)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그들은 지금도 포도밭의 여우처럼 뭇사람들의 영혼을 파먹고 산다. 그녀는 귀신 쫓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교회에도 간 적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축사한다면서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병원 신세만 지게 만들었다. 똥파리 쫓는 지름길은 똥을 치우는 것이거늘 그들은 똥 치우는 일보다 파리 쫓는 일에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눈을 찌르면서.
처음 암 진단을 받은 뒤 그녀는 지금 살고 있는 신도시의 교회로 교회를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도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는 '긍정의 힘'의 철학으로 무장된 목회자가 담임자이다. 서울 교회의 담임자가 국산 토종이라면 이는 미국서 신학공부하고 거기서 목회를 하다 온 사람이다. 전자가 된장 냄새가 나고 투박하다면 후자는 버터 맛을 내며 세련되다. 하지만 둘의 공통점은 십자가의 도에서 멀다는 것이다. 교회십자가 탑은 높은데 십자가의 은총은 없었다.
아무튼 담임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에게는 마음의 부담을 주는 설교, 특히 죄의 회개에 대한 설교를 하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그저 사람들을 편안하고 기쁘게, 즐겁게 해주는 목회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는 투철한 의식을 갖고 있다. 한번은 부목사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회개 설교를 했다가 쫓겨난 적이 있다고 한다. 쫓겨난 명분은 담당 구역을 배가 시키지 못하는 무능 죄였다.
여기 담임자가 강조하는 목회철학은 'Fun목회론'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담 없이 많이 모인다. 예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사람들은 신나고 경쾌한 CCM 노래를 부르며 웃음치료 받기 위해 열심히 모인다. 그 교회 예배는 마치 개그콘서트 같다. 복음의 개그 화(化)이다! 이는 사이다, 콜라 먹이는 교회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입에는 써도 속으로 들어가면 단 참 생명의 음료를 먹이고 싶어 하시는데... 여기서 육신이 웃는 동안 영혼은 슬피 운다. 그래서 일찍이 예수께서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말씀하셨는가?(눅 6:25).
배꼽 잡고 웃으며 지옥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오늘도 담임목사는 교회 성장 세미나 유명 강사로 바쁘게 뛰어 다니신다. 암이 재발되어 사색이 된 C집사는 나에게 어떻게 하면 치료받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처음에는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점점 자신의 구원문제에 대한 질문을 가졌다.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심란한 가운데 이런 질문을 번갈아 던지는 그녀에게 나는 먼저 원인을 찾는데 주목하자고 했다. 지금 당한 고통, 즉 암의 영적 원인에 나는 관심을 먼저 가졌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고통 현상, 특히 고질적으로 치유되지 않는 병의 배후에는 영적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원칙을 놓고 볼 때, 인간의 모든 고통의 뿌리는 죄에 있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의 거울이 되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백성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가나안에서 그들이 사는 동안 눈에 보이는 고난이 많이 있었다. 이방 족들의 침략, 질병, 자연재앙, 농사재앙 등등 그런 고난에는 대부분 영적 원인이 있었다.
죄! C집사에게 나는 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당한 암 고통의 영적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러자 그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간음" 하지만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간음과 암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시급한 일은 죄의 회개라고 말했다. 먼저 참회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자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회개하고 처리하면 주님의 통치가 내게 더 미칠 것이다. 그러면 주권자인 그분이 그 다음 일을 하실 줄로 믿고 기다리자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간음죄의 치명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출애굽 1세대 60만 명 중 가나안에 입성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은 이유 4가지를 성경은 분명히 밝힌다. 그 중에 하나는 간음, 음행이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 10:5-8)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은 오늘날로 말하면 세상에서 나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성(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바실레이아,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상태)를 온전히 받는 영원한 삶을 지향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 중에 음행, 간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약속을 중도에,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목숨 걸고 증거 했던 바울이 이런 말을 교인들 앞에서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주목해야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한 믿음은 죽은 게 아니라 산 것으로서 지금 여기서 내가 거룩, 사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를 닮게 만드는 강력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선이나 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믿음을 원하신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 그리스도로 사는 믿음(롬 6장) 말이다.
순례의 여정과 같은 구원의 출발은 단순한 믿음으로 시작되지만 구원의 완성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으로 되는 것이다. 구원의 두 기둥 같은 칭의와 성화는 변증법적 긴장관계에 있다. 칭의가 구원이라는 집의 문(door)이라면 성화는 그 집에서 사는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칭의가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 집에서 다시 살 수 있는 법적 자격을 주는 것이라면 성화는 아버지와 더불어 그 자식답게 살도록 하는 은혜이다. 그런데 칭의, 성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은총이다.
나는 그녀에게 회개를 조용히 권면했다. 통회를 권했다. 주님 앞에 마음을 토하라고 했다.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드러내놓고 다만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라 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 체휼하시는 분임을 상기시켰다. 주님은 지금 C집사가 아파하는 것보다 더 아파하고 있다는 말도 해 주었다.
체휼은 남의 아픔, 연약함, 고통, 저주를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체휼에 힘입어 우리가 나음을 얻고 치유를 받고 생명을 얻는다. 그런데 이 체휼의 은총이 내 것이 되려면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회개의 궁극적 목적은 사랑과 거룩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주인으로 사시는 데까지 나가는 것이다(갈 2:20).구체적인 행위 죄를 회개하면서!
우리는 나 자신이 스스로는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늘 직시해야한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의 도는 그런 행위 죄를 사할 뿐 아니라, 나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믿어야한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에서 존재의 변화로 우리를 이끈다. '자기주장의지'를 갖고 죄 된 삶을 살아온 내가 이제 그리스도로 사는 자로 변화되는 은총은 날마다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 심화된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위 죄, 마음의 죄 나아가 존재 자체의 죄(원죄)까지 취급한다.
바싹 마른 낙엽 같은 C집사에게 나는 기도로 돕겠다고 했다. 나도 목사지만 음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간음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런데 빛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아니 그 눈동자를 고개를 들고 똑바로 쳐다볼 사람이 있을까? 누구라도 중보자, 예수의 십자가 은총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나는 체휼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만 답답하지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마음이 돌처럼 굳어있다고 했다. 회개가 입 안에서만 뱅뱅 돌지 터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죽고 싶다고 했다. 그녀를 보면서, 회개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할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확인했다. 또한 회개도 그 기회의 때가 있음을 느꼈다. 동시에 회개도 평소에 해 버릇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전화상담 이라는 한계 속에서 그녀를 돕기란 매우 어려움을 나는 느꼈다. 한계를 느꼈다. 답답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아팠다.
그 뒤 연락이 두절되어 궁금했는데, 반년이 지나 연락이 왔다. 동생이 단지 암으로 고통당한 줄 아는 그녀의 언니였다. 지난 주, 동생의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가을이 을씨년스럽다. 산책길에 만난 풀벌레 소리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죽음 소식을 들은 가을이 세 번이나 지났는데...님들도 죄를 돌아보아서 주님께 참회 기도를 하기를 바란다.
첫댓글 십자가 옆의 강도처럼,, 병들면, 죽기직전에 회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자기 맘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회개하는 것도 자기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시간동안,, 늘 회개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좁은 길을 걸어간 자가 마침내 천국문을 들어갈 수 있는 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