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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詩
임 병 호
1. 바다 신화와 전설
문학 특히 시 속에서 바다는 관망의 대상을 넘어 상상을 펼치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아름다운 모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바다의 시’를 감상하기 전에 먼저 문학작품의 소재, 무대가 되는 바다에 관한 신화, 전설, 의식 등을 간략히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신화에는 바다가 처음 어떻게 생성되었는가에 관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인들이 생활의식이나 교양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삼황기(三皇紀)’나 ‘열어구(列禦寇)’,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유안(劉安)의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합니다.
- 복희(伏羲)의 누이인 ‘여와’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동남풍의 천신(天神)인 공공(共工)이 황제의 손자인 전욱(顓頊)과 제왕의 자리를 다투게 되다가 지게 되자 화를 내고 서북방에 있는 불주산(不周山)을 머리로 받아 무너뜨렸습니다. 하늘을 괴고 있던 하늘기둥(天柱)이 부러지고, 땅을 잡아매었던 땅줄기(地維)가 끊어져 하늘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해와 달과 별들도 서북쪽으로 옮아갔고, 땅은 동남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갈갈이 갈라져 하늘에서 계속 쏟아지는 빗물도 동남쪽으로 흘러들어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여와가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고 검은 다섯 가지 빛을 띤 돌을 다듬어 갈대를 태운 재를 이겨 구멍 난 하늘을 메우고, 큰 자라의 네 발을 가지고 땅의 네 기둥을 세워 기울어진 땅도 평평하게 보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하늘과 갈라진 땅과 흘러내려 한곳에 모인 물들은 복구하지 못하여 이 물들이 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인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처음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3일째 작업으로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물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바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노르웨이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바닷물은 왜 짠가?’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도 거의 같은 양상으로 전해 옵니다.
화수분 맷돌을 가진 소금장수가 자기의 소금배에 그 맷돌을 실어놓고 소금을 나오게 한 뒤 바다를 건너다가 소금이 더럭더럭 나와서 금세 배에 가득 찼으나 멈추게 하는 법을 미처 익히지 못하여 마침내 배가 전복되어 바다에 침몰해버렸습니다. 이때부터 맷돌은 바다 속에서도 계속 소금을 생산해내어 바닷물이 짜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 전해집니다. 소금을 낼 수 있는 맷돌을 훔쳐가 멈추게 하지 못해서 바닷물이 짜졌다는 설화입니다. 유래담 혹은 기원담(起源談)에 속합니다.
- 옛날 한 임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어놓는 신기한 맷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탐낸 도둑이 훔쳐가지고 바다로 도망쳤습니다. 배가 바다 멀리 나왔을 때 , 안심한 도둑은 맷돌을 빨리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당시는 소금이 아주 귀했으므로 “소금 나와라” 하자 과연 소금이 한없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소금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으나 도둑은 맷돌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몰라 배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바다 속에 가라앉은 맷돌에서 그 뒤에도 계속 소금이 나와 지금까지도 바다가 짜다는 이야기입니다.-
외국의 유화(類話)들과 비교해보면 종결부는 비슷하지만 내용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노르웨이의 이야기는 아우가 못된 형의 말을 따라 지옥으로 가서 ‘매통’을 얻습니다. 매통은 벼를 넣고 갈아서 겉겨를 벗기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하나입니다.
핀란드 이야기에서는 매통을 ‘삼포(sampo)'라 하고, 날을 달리하여 옥수수, 소금, 금이 나온다고 하였으며, 독일의 이야기에선 소년 선원이 할머니로부터 노름 밑천으로 얻은 매통을 선장이 훔쳐 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맷돌 대신 망 또는 방망이가 나타나기도 하며, 선행의 대가로 보물을 얻은 사람을 본뜨려다 실패하고, 그 보물을 훔친다는 식으로 된 변이형도 있습니다. 이 설화는 보물을 얻은 사람을 착하고 성실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보물을 부당한 방법으로 얻으려 하면 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2. 바다에서의 금기와 신앙
우리니라 남해안 일대에서는 공통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금기(禁忌)가 있습니다.
① 낚싯배이건 그물배이건 제사 때는 물론 여느 때에도 여자를 배에 태우면 재수가 없다. ② 어장사업이나 배사업을 하는 집에서는 개를 기르지 않는다. ③ 배 사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④ 출항하기 전의 선원은 여색을 금해야 한다. ⑤ 바다에 일하러 나가는 어부에게는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면 오히려 해롭다. ⑥ 그물을 머리에 쓰면 고기를 잡지 못한다.
또한 우리 선인들은 해신(海神)의 존재를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사행(使行)들이 부산에서 배를 타기 전에 반드시 상하 · 노소 · 귀천 없이 해신제를 지낸 것을 비롯하여 전남지방 해안이나 제주도 해안 도처에 해신을 모신 신당이 있다는 사실로 증명됩니다.
자연신앙을 몇 가지 예로 들겠습니다.
① 정초에 남쪽 바다 갯벌에 파래가 새파랗게 많이 생기면 그해에는 바다에 바람이 세다. ② 정월 첫 무쉬(조수가 조금 붇기 시작하는 물때)에 바람이 불면 그해에 바람이 세다. ③ 노을새가 섬에 자주 앉았다 날아갔다 되풀이하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분다. ④ 바다에서 꿈에 여자가 보이면 길하다. ⑤ 섬이 움직여 보이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다. ⑥ 바다에서 월식을 당하면 놋그릇을 두드리며 굿을 해야 한다.
3. 바다 의식과 놀이
지방에 따라 약간 다름이 있기는 하지만, 전남지방 해안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바다생활의식을 행하였습니다.
① 배내리기(進水式) : 배를 만든 바닷가에서 새로 만든 배의 중앙에 자리를 펴고, 선주가 준비하고 도목수가 주관하되, 뱃머리를 산을 향해 놓고 그곳을 향해 고사(告祀)를 한다. 배가 완성된 뒤 밀물 때를 맞추어 날을 잡아 친지들이 보내온 술과 ‘축대어(祝大漁) ·진수축대어(進水祝大漁)·대풍어(大豊漁)’등의 글귀를 한자로 쓴 울긋불긋한 관기(또는 봉기) 20 ~ 30개를 받아 배에 꽂고, 물이 들기 전에 상을 차려 도목수가 먼저 산을 향하여 재배하고 선주가 되풀이 한 뒤 목수들과 노소인들이 같이 술을 마시고, 힘을 모아 배 밑에 둥근 나무를 갈고 배를 끌어 물에 띄운다. ② 선왕(船王) 모시기 : 2톤 이상의 배면 낚싯배라도 다 모시는데 배내리기 의식 뒤에 이어서 선주가 모시며 반드시 조수가 들 때 모신다. 선왕은 ‘서낭’ 또는 ‘선령(船靈)’이라고 하는데 5 ~ 7가지 색옷을 만들어 여자 인형에 입혀 앞돛 ·중돛 밑의 선실 한쪽 벽에 상자를 짜서 모신다. 지방에 따라서는 여자 인형 대신 삼색 옷감이나 실, 바늘, 여자 의복, 한지를 접어서 모시기도 한다. 이렇게 선왕을 모신 뒤에는 설날 ·상원 ·추석 등 큰 명절에서는 꼭 상을 차려 바치고 그밖에 개인의 성의에 따라 돼지머리, 밥, 술, 해물 등을 차려 바친다. ③ 배굿(배고사) : 고기잡이를 나가기 전이나 고기잡이가 잘 안 되거나 액운이 있을 때에 액막이로 굿을 하거나 고사를 지낸다. 메짓기 화장(火匠)만 그날 목욕하고 음식을 차리며, 미리 당골이라는 무녀에게 부탁하여 당골이 혼자서 한 시간쯤 징을 치며 빈다. 선주의 선산이나 해변에 배를 대고 그 위 선왕이 모셔진 곳에서 시작하여 중앙을 거쳐 배끝쪽으로 지내는데 대체로 선왕이 주신(主神)이 되지만 때로는 당골이 점쳐 고기잡이가 안 되는 원인처를 찾아 지내기도 한다.
이 같은 배굿이나 고사는 용왕제 ·수신제 ·어신제 ·기어제(祈漁祭) ·낙망(落網)이라고도 하는 집단의식과도 별 차가 없습니다. 우리 선인들은 전통적으로 바다에서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거나, 혹은 용왕제 같은 집단적 풍어제를 마친 뒤 용왕, 선왕, 잡귀들을 풀어먹이며 북 ·장구 ·꽹과리 ·징 등 사물(四物)을 사용하여 의식을 진행하는데 이를 외부인들이 흉내내어 놀 때 놀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4. 옛 문학작품에 나타난 바다
현재 전하고 있는, 우리 선인들이 바다를 주제 또는 소재로 하여 남긴 문학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시(漢詩)로 가장 오래된 것은 최치원(崔致遠)의 「범해(泛海)」입니다.
돛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오랜 바람 만 리에 통하네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애들도 생각나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중에 있네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는 또 신선을 찾겠네.
(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蓬萊看咫尺 吾旦訪仙翁)
한문 표해(漂海) 기록물로는 조선 성종 때의 최보(崔潽)가 제주에서 나주로 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 영파부(寧波府)에 표착하여 북경을 거쳐 의주 · 서울로 6개월 만에 돌아와 성종에게 지어 바친 「표해록(漂海錄)」이 현전 5편 중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현전 표해기 중에는 1757년 4월에 부산을 떠나 동해안을 끼고 강릉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북해도에 표착하여 에도(江戶) · 대판(大阪)을 거쳐 부산으로 귀국한 이지항(李志恒)의 「표주록(漂舟錄)」이 있고, 지은이의 해박한 지리상식과 재치있는 남녀 애정 경험을 잘 묘사하고 있는 장한철(張漢喆)의 「표해록」은 1771년 서울의 과거에 응시하고자 제주도를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류큐도(琉球島)에 표착하였다가 지나가는 중국인과 월남인 상선에 구조되어 돌아온 기록입니다.
1801년 12월에 소흑산도를 출발하였다가 폭풍을 만나 류큐도를 거쳐 필리핀을 지나 중국을 거쳐 의주 · 서울을 통하여 1805년 1월에 귀환한 어부 문순득(文淳得)은 정약전(丁若銓)과 유암(柳菴)에게 구술해주어 10여년의 간격을 두고 2편의 「표해록」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최두찬(崔斗燦)은 제주에서 나주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영파부에 표착하여 뛰어난 글재주로 중국인들에게 우대받으며 북경 · 의주를 거쳐 귀국한 뒤 「승사록(乘槎錄)」을 썼습니다.
가사(歌辭) 작품으로는 이방익(李邦益)의 「표해가(漂海歌)」가 유명합니다. 현대문학작품으로는, 김윤식(金允植)의 「바다로 가자」가 대표적인 자유시이고, 최남선(崔南善)의 「남해유초(南海遊草)」는 유명한 연시조입니다. 또 소설로는 정한숙(鄭漢淑)의 「이어도(IYEU島)」와 천금성(千金城)의 「은빛갈매기」가 유명합니다.
아직도 해안 어촌에서 불리는 민요로는 인천지방의 경우, 운반선의 무사안일을 비는 「배의 축원노래」와 「불사(不死) 굿노래」, 배를 새로 만들어 진수하며 부르는 「배치기노래」, 선왕을 모시며 부르는 「선왕굿노래」, 배가 출항하며 부르면서 부르는 「닻감기노래」 · 「노잣기노래」, 고기잡이하며 부르는 「그물내리는 소리」 · 「그물감기 소리」가 있습니다.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鳥島面)인 조도 군도(群島)에는 고기잡이 출항을 하면서 그물을 싣는 노래인 「술비소리」와 그물을 싣고 ‘행선고사(行船告祀)’를 모신 뒤 떠나며 부르는 노래, 만선으로 포구에 돌아와 돈을 벌어가지고 집에 돌아와 기쁨을 노래하는 「풍장소리」도 있습니다. 풍장소리 일부입니다.
얼시구 좋다, 절시구 좋와, 얼시구나 좋네
헤헤 허아허아 허어 허어허어 좋아요
칠산바다에 들어온 조구
우리배 망자(網子)로 다 들어왔다
에헤 좋네.
(중략)
들물에 천냥, 썰물에 천냥
안안팟 네물에 사오천냥 실었다.
에헤 허아허아 허아 허아허아 좋아요.
(하략)
바다를 죽음을 약속하는 곳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컨대 「배따라기」에서는 “선인(船人)되어 타고 다니는 것은 칠성판이요, 먹고 다니는 것은 사자밥이라, 입고 다니는 것은 매장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생명의 보고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남해안 어부들이 부르는 「만선가」에서는 “올라온다 올라온다 / 우리 밥이 올라온다 / 이 고기가 무슨 고기냐? / 처자식과 우리 부모 맛줄 / 고기가 올라온다 올라온다”고 노래하여 바다를 ‘화수분’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표해기」를 지은 이방익은 “지낸 사실 글 만들어 호장한 표해 광경 후진에게 이르과저, 천하의 우험한 일 지내놓으니 쾌하도다” 라고 노래하여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무서운 일이기도 하지만, 지내놓고 보니 호쾌한 남아의 일이라는 기쁨과 만족감을 솔직히 진술하여 바다를 찬미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애창되고 있는 가곡 중에서 현제명 작사 · 작곡의 「희망의 나라로」, 석호 작사, 조두남 작곡의 「뱃노래」, 함호영 작사, 홍난파 작곡의 「사공의 노래」, 문병호 작사, 권길상 작곡의 「바다」 등이 유명합니다.
5. 바다를 노래한 名詩들
바다의 신화와 전설, 바다에서의 금기와 신앙, 바다 의식(儀式)과 놀이 등은 문학작품 특히 詩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시인들은 바다를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한 사람의 시인이 보통 바다를 노래한 시는 아무리 안 썼어도 10편은 발표했을 것입니다. 바다를 그리움의 고향으로, 사랑의 진원지로, 이상(理想)과 환상(幻想), 과거와 미래의 세계로 여겼습니다.
이제 널리 애송되는 바다를 소재로 한 시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시인들의 시상 전개와 시어 표현은 각자 다르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의 성격, 사고(思考)가 다르듯 시인들의 ‘시에 관한 생각’도 그러합니다. 궁평리 바닷가, 해송 그늘에서 파도소리 들으며 여러 시인들의 詩心에 잠겨 봅시다.
Ⅰ
임 실은 배 아니언만
하늘가에 돌아가는 흰 돛을 보면
까닭 없이 이 마음 그립습니다.
호올로 바닷가에 가서
장산에 지는 해 바라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밀물이 발을 적시옵내다.
Ⅱ
아침이면 해 뜨자
바위 위에 굴 캐러 가고요
저녁이면 옅은 물에서 소라도 줍고요.
물결 없는 밤에는
고기잡이 배 타고 달래섬 갔다가
안 물리면 달만 싣고 돌아오지요.
Ⅲ
그대여
시를 쓰랴거든 바다로 오시오.
바다 같은 숨을 쉬랴거든.
임이여
사랑을 하랴거든 바다로 오시오.
바다 같은 정열에 잠기랴거든.
- 양주동, 「해곡(海曲 三章) * <조선문 단>(1925. 10)에 수록.
쟁반에 담긴 쪽빛, 뉘가 여길 바다랬나!
멀리 구름 밖에 겹겹이 포개진 것,
그린 듯 고운 이마에 졸음마저 오누나.
이제 막 솟아오른 반만 핀 꽃봉오리
잠길 듯 둥근 연잎, 떠 있사 물굽이로
잔잔히 흐르는 돛대 나비 되어 숨는다.
어미소 곁에 노는 귀여운 망아지 떼
송아지 뒤따르다 돌아보는 얼룩말들
점점이 꿈을 먹이는 푸른 벌판이구료.
- 김상옥, 「다도해」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속을 그린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도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 조병화, 「소라」*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에 수록.
바다는 하루에 한 번씩
허물을 벗는다
밤새 뒤척이며 울던
방황의 잠
흔들어 깨우던 해풍 속에서
때 절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아침마다 섬들이 돌아눕는다
수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선 파도의 나무들
수평선 한 줄기 휘어져오고
꿈틀대는 핏줄
등 푸른 힘살들이
섬을 밀어낸다
바다는 종일
울음 운다 울음에 젖는
바다의 허물.
- 金龍吉, 「바다의 울음」
살 속에 저며 오는 바람이어도
새벽의 강물 흔들어 깨우는
조잘조잘 청아한 새들의 音調
새날의 태양은 두둥실 눈부신데
산 빛은 푸르러 아름다워라
아직은 인적 끊겨 황량한
물빛 고운 江門의 해변
풀꽃 내음 그 유년의 꿈은
가슴 시리도록 항상 자리해 있다.
무딪기는 세월의 격랑에
잊었던 기억 흔적 말끔 씻겨
비밀스런 사랑의 상흔도
방울방울 투명한 눈빛에 젖고
충일한 생명감을 위해
오늘도 가슴을 앓는 동해는
날 푸른 파도로 살아나
잠든 영혼 하얗게 눈 뜨게 한다
- 엄창섭, 「동해, 그 아침에」
처음에
그것은 갈매빛 부피로 달려와서
쓰러졌다.
물은 千의 몸부림으로 부서지면서
일어서려 했으나
다시 쓰러졌다.
스스로의 절망으로 쓰러지고 있는
자기(自棄)의 바다.
수없는 죽음을 몸부림치면서
수없는 부활을 몸부림치면서
일어서려 했으나
냉혹한 낙차(落差)처럼 쓰러지는 물
물은 스스로의 허무로
다시 일어서지만
일어서기 위하여 쓰러지지만
물은 목마름처럼
다시 쓰러지고 있다.
안드로메다 星雲의 블랙 홀 저켠에서
밤도 낮도 없는 그 절대 공간에서
물은 온몸으로 일어서려고
다시 쓰러지고 있다.
- 허만하, 「바다의 理由」
비가 생선 비늘처럼 얼룩진다
벌거숭이 바다.
괴로운 이의 어둠 극약(劇藥)의 구름
물결을 밀어 보내는 침묵의 배
슬픔을 생각키 위해 닫힌 눈 하늘 속에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바다, 불운으로 쉴 새 없이 설레는 힘센 바다
거역하면서 싸우는 이와 더불어 팔을 낀다.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말없는 입을 숱한 눈들이 에워싼다.
술에 흐리멍텅한 안개와 같은 물방울 사이
죽은 이의 기(旗) 언저리 산 사람의 뉘우침 한 복판에 서
뒤안 깊이 메아리치는 노래 아름다운 렌즈
흰 옷을 벗어버린 벌거숭이 바다.
- 구자운, 「벌거숭이 바다」
많은
태양이
쬐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 오른다
일제히 쏘아올린 총알이다.
짐승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는
몰려간다.
능금처럼 익은 바다가
부글부글 끓는다.
일제 사격
벌집처럼 총총히 뚫린 구멍 속으로
태양이 하나하나 박힌다.
바다는 보석 상자다.
- 문덕수, 「새벽 바다」
낡은 아코디온은 대화를 관두었습니다
---------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
------- 왜 그러십니까?
모래 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록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조향, 「바다의 층계」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알려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
나 죽으면 바다로 가리
내 조상 아메바가 숨 쉬는 또 하나의 하늘로
그냥 맨발로 떠나리
내 일찍이 파도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닟선 객지를 돌고 돌아 그곳에 닿으면
눈먼 내 알몸을 감쌌던 양수의 물결
아직도 태초의 비린내를 풍기고
배꼽 위에 매달렸던 긴 탯줄
겨울 달빛에 젖은 채 창백하게 떠 있으리
어릴 적에 불렀던 내 노래의 한 소절이
이제는 모두 떠나간 작은 섬 갈대밭에서
홀로 뒤척이고
내가 짝사랑했던 열다섯 살짜리 소녀가 등대 곁에서
과거도 없이 날 기다리고 있으리
무죄로 죽기 전의 내 누이동생과 남동생 헌수
치아가 예쁜 어머니와 함께
고단한 호롱불 아래 졸면서 깨면서
술 취한 아버지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키가 아주 나지막한 바다로, 그 그림자 속으로
나 이제 돌아가리, 다시는 떠나지 않으리
죽음도 잊은 듯이
눈부신 세상의 한쪽을 오래오래 내다보는
저 한 떨기 시퍼런 파도가 되어 출렁이리.
- 丁成秀, 「나 죽으면 바다로」
파도를 보면
내 안에 불이 붙는다
내 쓸쓸함에 기대어
알몸으로 부딪히며 으깨지며
망망대해
하이얗게 눈물꽃 이워내는
파도를 보면
아, 우리네 삶이란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
- 허형만, 「파도」
(어느 날 나는 남태평양의 매우 작은 섬에 표류하는 꿈을 꾸었다 섬에서는 코코넛나무들이 또 다른 잠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에서 깬 섬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나는 갑자기 사랑이 마려웠다)
섬에는 언제나 끼처럼 불어대는 바람이 있다
바람기를 먹고 자란 나무들이 있다
나목이고 싶어지는 끼가 있다
성숙한 나무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한 점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섬의 열기는 바람이 스쳐간 뒤 더욱 심하다
만약 내 안의 열기도 이 섬의 정열처럼 열렬하다면
입 안 가득 상큼한 코코넛 맛과 같은 것이라면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고
그러면서 당당하고
넉넉하지 못한 것들도 때로는 넉넉해 보이는 섬 물살 같은 것이라면
나도 코코넛 나무숲에 숨어 내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홀로 떠다니는 코코넛 씨 같은 섬이 되고 싶다
- 강중훈, 「남태평양, 그 작디작은 섬에서의 몽상 하나」
바다는 너그럽다
무수한 생명들을 품에 안고 먹이고 키운다
생명이 비롯된 것도 바다가 있음으로서였다
바다는 무섭다
한 번 노하면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자신이 만들었던 생명들도 거두어간다
한없이 너그럽던 공자님도 예수님도 때로는 무섭게 화를 내셨다
- 유자효, 「바다」
하루도 바다를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웁다 하네.
검게 탄 어깨를 뒤척이는 욕망의 바다
푸른 눈의 고래 떼들이 회항하는 정오에
사랑의 몸살을 앓고 누운 수평선 너머
날마다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는 사람들은 그리웁다 하네.
소금을 뿌려 소금을 뿌려 눈물을 닦는 갈매기
서성대던 자리에 찍어 놓은 발자국으로
흰 연기를 풀풀 날리며 달아나는 기차
파도의 이불자락을 끌어다 덮는 사람들은 그리웁다 하네.
- 金晳圭, 「임랑 해변」
해질녘 서쪽 바다언덕에서
찬란한 빛깔로 번뜩이는 바다의 꽃비늘을 보면
언젠가는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내 울음이었다가,
언젠가는 욕망의 찌꺼기를 홀가분하게 비워 낸
내 환희였다가,
시간의 눈시울을 지그시 감으면
시나브로 낙엽이 떨어지는 빛바랜 벤치의
가슴 울렁이는 그리움이네.
사랑의 덫을 하염없이 빠져나가는
그리움이네.
- 정순영, 「바다의 꽃비늘」
그대 넓은 가슴 속엔
깰 수 없는 파란 꿈이 있었네
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는
우리들 사랑만 담뿍 안고 있었네
그러나 그대 가슴 속엔
아직 삭지 못한 그리움 하나
그대는 밤마다 눈물로 노래하였네
탐조등 불빛 멀리 지우면서
뭍으로 가리라
뭍으로 가리라
한 점 바람 따라 무겁게 뭍을 향한
그대의 그리움, 아아
그대의 꿈은 모래톱에서 부서지는데
진한 눈물 한 웅큼 뿌리면서
그대여, 어쩌면 예비된 분노를 마시느냐
바다에도 뭍에도 이 세상 어디에도
잔잔한 남청빛 사랑은 없었나니
그래, 오늘은 이 바다에서
무망의 고통을 밀어내는 그대
사랑의 진통을 주워담는 그대
뭍을 향한 나의 작은 그리움뿐이었네.
- 김송배, 「사랑의 노래 . 바다」
생이 쓸쓸할 땐
바다에 간다
푸른 바다 물결을 차고 오르는
바닷새의 분홍가슴 같이
하루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 본다
썩지 않기 위해
출렁이는 바다처럼
나의 하루는
생선을 소금으로 절이듯
그렇게 짭조름히
간을 맞추며 살아간다
- 오순택, 「바다 연가」
Ⅰ
파도소리 떠난
바닷가 마을
궁평리
갈매기 한 마리
외로이 날고
나도 외롭다.
그리운 사람아
오늘
궁평리
해변에서
청솔로 기다리느니
밀물처럼
오시라
그리운 사람아.
Ⅱ
그대
목소리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파도소리 바라보는
푸른
그대의 눈빛
해송들이
명상에 잠긴
궁평리
겨울 바닷가에
그대 목소리만
가득하고
외로움이
썰물처럼
내 가슴 속을 떠나갔다
- 임병호, 「궁평리」
너 거기 있거라,
내가 간다.
거대한 술잔에 담겨
독한 술로 익어가는 바다.
뼈저린 그리움 어쩌지 못해
온몸 뒤채며 출렁거리는
독한 술
너 거기 있거라.
지옥같이 멀고도 뜨거운 길
숨차게 달려와 엉겨 붙지만
물은 언제나 싸늘한 허상.
너는 언제나
뭍의 창백한 발끝에 무참히 차여
산산이 부서지며 울부짖나니
작은 육신 속에서도 끓고 있는 술
나 네게 가서 쏟아 부으리.
너 거기 있거라
왼종일 울어쌓는 바다.
- 문효치, 「바다의 문 · 9」
바다를 곁에 두고 살아본 사람들은
수평선이 발행한 주식을 할당받아
이따금 어시장에서 시세를 가늠한다
주가가 낮으면 낮은 대로 견디어 온
흉어의 자맥질에 불안한 물새들이
섬 하나 젖은 꿈자리 미리 찍어 두었다
성산포 해가 뜨면 이어도에 달이 뜨고
한림항에 바람 일면 이어도는 출어하네
누구나 시장 개입해 상한가를 들먹이는
매각한 이 없어라 반딧불만한 생각 하나
시원의 물결 따라 떠 흐르는 섬이여
까치놀 낮은 불빛이 난바다에 가득하다
- 홍성운, 「이어도, 낮은 불빛은 타오르고」
태어나
딱 닷새만 다니고는
바위에 딱 붙어
일생을 보낸다네
고착된 일생이라고
비웃지 말일
그게 세상 파도에
맞서는 그의 법이니.
- 박두순, 「따개비」
어쩜 이리도 빛나는 파문
은빛 물결에 떨어지는
깃털을 바라보며
갈매기 울음조차도
닦아주시는 나의 하느님
바다 깊숙이 끓어오르는
불길로 솟아
가뭇한 수평선 위에다
선적하는 이별의 손
밤마다 잘려나가고 있다
갈매기 깃털로 남은
마지막 손짓 하나
빈 가슴에 담으며
격랑에 무너지는 목선도
일으켜 세우며
세계는 조용히 밀물로 남는다.
- 김종섭, 「일으키는 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그리움」
아직
바다는 조업 중이다
늦은 고깃배가
몇 상자의 바람을 내려놓고
어두운 밤바다로
다시 흔들려 간다
사월의 海霧가
낡은 선박처럼 정박해 있는 왕포리
이 작은 포구
어디쯤 고여 있을까
그 빛나던 언어들은
청보리밭 둔덕 따라
스러진 계절, 그 행간마다
세상의 빛들은
낯선 시간을 깨우고
뿌리를 갖지 못한 것들은
늘
어딘가로 흘러다녔다
조금씩
기울어지는 달을 일으켜 세우며
기다림으로
나날이 푸르러지는
바다의 속살
모든 길들이 끊어져 버린
포구의 안개 속에서도
끝나지 않는
내 삶의 긴 유배여
차오르는 밀물 속에서
이제 나는 그리움의 닻을 내린다
혹은,
또 다른 출항을 꿈꾼다
- 임애월, 「정박 혹은 출항」
그렇습니다.
바다, 바닷가에선 그리움이 닻을 올리고 내립니다.
밀물처럼, 썰물처럼, 떠나가고 다시 옵니다. 수평선이 됩니다.
저 파도처럼, 저 해송처럼 청청하게 삶을 사랑합시다.
詩를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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