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글과 인연. 215
[문단 20년, 문인협회]
그렇게 등단을 하고 처음 인사를 나누던 자리. 함께 한 여류 작가가 내게 “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가요?” 묻는데 나는 “일용직 노동을 합니다.” 라고 답을 했더니 놀란다. 나중에 그녀가
내게 한 말은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을 한다거나 자유업이라고 하는데 시인님은 쉽게
직업을 말씀하시네요.”하는데, 나는 직업을 소개하는 것도 체면이 있는 것인가? 를 생각해야
했다. 물론 그 여류 시인과는 그 이후로 한동안 글벗으로 지냈는데, 원치 않는 질병이 그녀의
생을 마감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문단의 프로필에 사회적 경력이거나 학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언젠가 어느
문단에서 학력을 묻기에 최종 학력을 말하고는 다시 말했다. 나는 문단에서 그런 경력을 사용
하지 않으니 그저 알고만 계시라, 나는 문단에서는 문단의 경력만 쓰고 싶다. 고 했고 고맙게도
그 분은 내 말에 동의해 주었다.(이 부분은 나중의 글에 왜 그러는지를 알 수 있는 약간의 정보
를 소개해 드릴 생각이다.)
그렇게 태백의 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어가는 때, 두 아들이 영국에서 돌아왔고, 작은 아들이
태백으로 내려와 함께 올라가기를 권했다. 나는 그저 못이기는 척 아들을 따라 의정부로 올라왔
는데,
두 아들(큰 아들은 박사 과정을 마쳤고, 논문만 쓰면 되는데, 그리고 모교에서 학교로 오라는 권
유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일이다.)은 부모의 생활을 보면서 생활 전선으로 뛰어 들은
것이 학원 강사 일이었다. 수원에서 시작한 두 아들은 얼마 후 당시 신도시로 뜨고 있던 오산의
세교지구에 작은 학원을 빚을 내서 시작하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 부부도 오산의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두 아들은 열심히 노력했고, 얼마 후 학원은 그 평수를 넓히더니 더 넓은 건물로 이사를 하고, 교
사의 수를 늘리고 차량의 수가 늘어난다. 나도 그 중 한 대를 책임지는 운전기사가 되었고, 더불어
한국문인협회 오산 지부 회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는데, 나는 내 문학의 고향은 오산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문단의 활동에 관한 여러 부분을 배우게 된 것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몇 곳의 문학지를 발간하는 단체에도 가입을 해서 활동을 했고, 그곳에서 작가 회장, 고문
등을 역임하기도 했고, 심사위원이라는 명예도 받았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지만, 오산문인협회
에서 사무차장, 사무국장, 부회장 등을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하기는 젊은 청년
시절 어느 도시의 한 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지만 말이다.(웃자는 말이지만 그 때
그 도시에서 그 활동을 꾸준히 했다면 지금쯤 어느 정당에서 어떤 직함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산문인협회에서 활동하며 2년의 부회장직을 끝낼 때, 회장 문제가 내게 나타났다. 곧 오산
문인협회 회장이 되려면 한국문인협회 회원이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문인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고, 지금도 비회원이다. 또 펜클럽에도 가입을 권유받았지만(그것도 당시의 펜
클럽 회장에게서) 사양을 했는데, 그 조항 때문에 몇몇 가까운 지인들이 가입하라고 강권했지만 나는
오산문협회장직을 포기하면서도 한국문인협회의 가입을 거절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