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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후 한동안, 앙겔라 메르켈은 동독 출신 여성이라는 신분 덕에 엄청난 혜택을 받음. 당시 헬무트 콜총리가 새로 탄생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지도층에 두 부류의 사람들을 편입시켜야 하는 시기. 동독 정치인 중에서 여성. 그의 정치적 출세의 원동력은 자제력과 전략적 사고,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보여주는 수동 공격성. 앙겔라는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달리 언론을 상대로 과학적인 느낌을 풍기는, 정밀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구사함. 그가 브리핑을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담아낸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팩트에 굶주린 동독 시민 입장에서 더욱 그러함.
동독의 개혁 세력에서 유명한 인물인 데메지에르는 당시 총리 8년째이던 콜총리가 동독 출신의 여성을 내각에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메르켈을 추천함. 그러나 그가 슈타지 정보원이라는 루머가 돌자 메르켈은 그에게서 야멸차게 돌아섬.
1991년 1월 콜은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임명함. 콜의 내각에서 제일 어린데다 경험이 제일 적은 멤버인 메르켈은 내각을 그럴듯하게 치장하기 위한 정치적인 동기 때문이란걸 잘 알고 있었음. “내가 동일한 능력을 갖고 서독에서 자랐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메르켈의 팬인 키신저의 유대인 가족은 나치스에 의해 망명 길에 올라야 했고 슈타지 체제에서 청춘을 보낸 메르켈과는 두사람 다 낯선 새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야하는 공감대가 있었다. 키신저는 “메르켈은 술수를 부리면서 서로를 향해 떠들어대기만 하는 대부분의 독일 정치인들이 빠지는 함정에 결코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키신저은 메르켈을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자청해서 행함.
서른여섯 살 나이에 독일의 최연소 장관이 된 메르켈은 자신에 대해 여자고 카리스마가 없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하지 못한다고 자평하며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에 특히 충격을 받음. 그럼에도 그녀는 “메어자인 알스 샤인 Mehr sein als Schein” 겉모습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루터교 교리 중 하나를 신봉함. 자세에 대한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메르켈 마름모’에 정착함. 양 손가락의 끝을 맞대는 이 자세는 이후로 메르켈의 시그니처가 됨.
선거운동에 나설 때 그녀는 유권자들을 하대하거나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다 갖고 있는 척하지 않았다. 대체로 경청하고 공감하고 특유의 소박한 스타일로 자신을 드러내며 지역민들에게 자신도 그들의 일원이라는 점을 납득시켰다. 지역민들은 1990년 이후 연방선거가 열릴 때마다 메르켈을 자신들의 대표로 재당선시켰다.
메르켈은 콜이 그를 ‘자신의 매첸(아가씨)’이라고 부르고 특별 대우하는 식으로 자신에게 굴레를 씌운다고 분개함에도 1991년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면서 세계 무대에 세운 사람이 바로 콜이었다는 건 인정함.
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자국을 미국과 엮어주는, 그리고 1993년 창립된 유럽연합과 엮어주는 전후 조직들의 일부가 됨으로써 안전을 추구함. 헬무트 콜과 빌 클린턴의 돈독한 우정은 그 전성기를 체현한 상징. 콜의 목표는 동독과 서독을 명목상의 차원을 넘어선 진정한 한 나라로 통합하는 것이었고 메르켈은 두 나라를 한 나라로 통합하기 위해 총리가 세운 계획의 일부였음.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서 메르켈은 논란 많은 사안들에 대해 타협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연한,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입증함. 예로서 낙태 문제에서 그는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은 반대했지만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찬성함. 1994년 콜은 더 명망 있는 자리인 환경부 장관 자리를 제안함.
메르켈은 페미니스트다. 그럼에도 그는 여성 발전에 충분히 헌신하지 않다거나 여성 권익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너무 작다고 비판받음. 어떤 쟁점에 대해 대중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권한에 무턱대고 의지하지 않는 것이 리더십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
앙겔라는 환경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4년 동안 향후 총리로서 보여주게될 장점들에 속한 자질도 처음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경이로운 체력임. 기후변화회의는 베를린 위임사항이라는 합의를 탄생시켰는데 이 합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구체적 목표와 시간표를 확립할 것을 각국 정부에 요구했고 2년후 이 합의는 기념비적인 교토의정서로 이어짐. 베를린 기후변화회의는 ‘내가 이룬 제일 큰 성취중 하나’였다고 여김.
콜과 그의 후임자 쇼이블레가 선거자금 스캔들에 연류되어 물러나고 메르켈은 2000년 초 CDU 대표직에 출마해 반대 없이 당선됨. 2005년 콜은 메르켈을 총리 후보로 지지
6장. 드리어 총리실로
독일인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를 살펴보는 사람을 원했다. 메르켈은 자신에게 초점이 집중되지 않는 정치 스타일을 완벽하게 가다듬었다.
독일인들은 메르켈의 겸손을, 꾸밈없고 직설적인 스타일을, 과장된 언사를 동원하지 않는 태도를 좋아했다.
독일은 의원내각제 국가다. 시민들은 베를린에서 자신들을 대표할 국회의원에게 투표하고 국회의원들은 총리를 선택한다. 최다 득표를 한 정당은 득표 2위를 차지한 정당 또는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2005년 선거일, 온건한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의 슈뢰더와 메르켈이 소속된 정당들의 승부는 사실상 무승부. 두달 후에 메르켈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취임 선서를 함. 놀랍게도 메르켈의 남편인 자우어는 평소처럼 실험실에서 양자화학을 연구하느라 이 역사적인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음.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가 아님. 연방공화국의 권한, 특히 국내 문제에 대한 권한은 철저히 16개 주와 막강한 헌법재판소에 분산되어 있음. 총리는 대체로 합의와 설득을 바탕으로 통치하는데 국내 정책보다는 국제적인 사안에 훨씬 더 큰 재량권을 갖고 있다. 메르켈은 집무실로 향할 때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구체적인 정책이 아니라 핵심적인 가치를 품고 갔다.
그가 개인적으로 마음 깊이 간직한 신앙, 의무와 봉사라는 확고부동한 신조, 그가 항상 ‘쇼아’라고 일컫는 사건(홀로코스트) 때문에 독일은 유대인에게 영원한 빚을 졌다는 믿음, 과학자 출신답게 증거를 기초로 정확하게 의사를 결정하는 성향, 자국민을 감금하는 독재자들을 향한 본능적인 혐오, 표현과 이동의 자유는 이것들이 결여된 상태로 인생의 초년 35년을 보낸 정치인에게 결코 진부하지 않은 가치임.
메르켈 집무실 책상 위에는 독일에서 태어나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가 있는데 여제가 이룬 대담한 업적 중에는 오스만제국에게서 우크라이나를 빼앗은 것이 있음. 머지않아 메르켈도 훗날의 러시아의 황제 푸틴에게서 그 지역을 되찾으려고 분투하게 됨.
25년간 공생 관계인 메르켈보다 열살 어린,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미혼의 수석보좌관인 바우만은 메르켈의 정치적 신념, 그리고 미국을 향한 숭배에 가까운 믿음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함.
히틀러의 격렬한 수사법을 생각할 때 메르켈에게 언어는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다. 말은 조심스럽게 활용해야 하는 무기다. 메르켈은 화염 같은 선동으로 대중을 갖고 노는 것 보다는 서방국가와 지루하지만 현명한 관리인이 되는 쪽을 선호한다.
독일 경제는 그가 열정을 품은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메르켈 치하에서 계속 번창했고 유럽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서 프랑스의 자리를 대체함. 그 공로의 대부분은 전임자인 슈뢰더가 일으킨 변화의 몫이다.
2008년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는 동안 살해당한 어린이 150만 명에게 바치는 홀로코스트박물관을 방문한 이후에 이스라엘 입법부에서 연설하는 최초의 독일 총리는 ‘살인자들의 언어’로 연설을 시작하지 않았다. 자국의 존재 이유를 다른 나라의 존재 이유와 공개적으로 연계하는, 대담하면서도 유례없는 연설을 함.
2011년 3월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이후 총리는 “핵에너지에 내재한 위험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핵에너지의 위험은 인간이 결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존재라는 걸 전제로 할 때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핵에너지의 위험이 현실에서 벌어지면 그 결과는 너무나 처참하고 영구적이라서 다른 모든 형태의 에너지를 합쳤을 때 따르는 위험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오랫동안 강력한 반핵운동을 반대하는 재계 지도자들의 편에 섰던 메르켈은 이 사건 이후 별다른 논쟁없이 여러 정부 부처에서 평소에 하던 연구들을 물리치고 독일 핵 발전의 즉각적인 단계적 중단을 요구함.
7장. 그가 맞은 첫 번째 미국 대통령
메르켈이 첫 임기 동안 맺은 가장 중요한 인연은 성격이 극도로 판이한 블라디미르 푸틴과 조지 부시였다. 앙겔라는 미국과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숭배했고 독일과 자신이 얻은 제2의 기회는 상당 부분 미국이 관여했던 덕이라고 여김. 메르켈은 총리로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준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을 스타일을 조지 부시에게 시험해 봄. 라포를 먼저 형성한 다음, 상대 지도자의 마음을 바꿔놓으려고 노력하기 위해 상호간의 호감을, 아니면 적어도 신뢰를 활용한다.
그럼에도 2006년 1월 부시를 만나러 가기 직전 쿠바에 있는 미국의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설치된 임시 수용소를 폐쇄할 것을 요구함. 곧 방문할 나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불편해 할 수 있지만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그는 늘 대화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불쑥 내뱉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부시가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려고 기를 쓰지 않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함. 부시는 자신이 모르는 사안에 대해 잘 아는 체하거나 우기는 법이 없었다. 메르켈처럼 신심 깊은 신앙인이라는 사실도 두 사람이 유대를 맺는데 도움이 됨.
절제된 스타일,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과하게 연출하지 않는 것, 근면한 태도, 대중의 점수를 따는 데 급급하기보다 결과물을 얻는데 집중하는 성향. 이것들은 독일 국민들과 다른 국가 정상들이 메르켈을 높이 평가하는 자질들임.
취임 후 100일, 독일 여론조사에 지지도는 89퍼센트에 달함. 대통령 취임 첫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버락 오바마가 그랬던 것처럼 메르켈이 들은 칭찬은 알맹이보다는 이미지에 근거한 부분이 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알맹이도 따라올 터였다.
메르켈이 부시와 형성한 개인적인 라포도 영향을 미쳐 2007년 6월 G8 정상회의에서 부시 대통령은 기후변화는 현실이라는 점을 처음 공개적으로 인정함.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마땅하다고 인정함. 메르켈은 처음에는 기후변화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미국 대통령을 자기편에 세우는 데 성공함. 또한 러시아 정서를 잘아는 메르켈은 우크라아나와 조지아공화국에 나토 회원국 지위를 제의하려는 부시의 계획에 반대하면서 주장을 관철시킴.
8장. 독재자들
러시아든 중국이든 메르켈은 독재 정권에 접근할 때 실용적인 방식을 택함. 그는 과장된 언사를 동원해 독재자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방식은 역효과만 낳을 뿐이라며 경멸한다.(“네 적들을 절대로 증오하지 마라. 그 증오심이 네 판단력에 영향을 주니까”) 라이벌에게 다가가는 그의 접근 방식은 두사람 사이의 공통점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그런 공통점을 끈기 있고 고집스레 찾아내는 것이다.
2007년2월 뮌엔 연단에 선 푸틴은 민주주의를, 서구를, 그리고 메르켈이 대표하는 모든 것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함. 그는 필요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강한 세계적인 강국으로서 러시아의 자리를 되찾는다는 목표를 표명함.
두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푸틴과 메르켈은 동일한 배경에서 탄생한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음. 푸틴의 관점에서 냉전은 1989년 끝난게 아니었음. 푸틴은 덜 비핵적인, 눈에 덜 띄는, 그렇지만 결국에는 활용성이 뛰어나고 효과적인 무기들을 채택함. 허위 정보와 사이버 전쟁을 통해 서구에 불화를 퍼뜨리는 식으로 전술을 바꿈.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럽연합과 동맹국인 미국을 약화시키는 것. “우리의 주적은 NATO”
메르켈은 총리로 재임하는 내내 푸틴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함. 메르켈은 푸틴이 실제로 존중하는 유일한 국가 정상. 그러나 호감은 오래 가지 않음. 푸틴은 메르켈이 어젠다 상단에 인권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는 호감을 거둠. 푸틴은 메르켈의 자세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행함. 언론의 자유를 향한 메르켈의 지지는 푸틴의 심기를 계속 자극함.
2020년 6월 푸틴은 자신의 통치를 2036년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함. 푸틴은 부정선거와 공포, 강압, 정적 살해를 통해 스스로 종신 독재자의 자리에 오름. 그의 목표는 스탈린의 집권 기간인 33년 기록을 깨는 것.
메르켈은 노르트 스트림2*의 추진을 허용하면서 자신이 쫓는 많은 원칙적인 입장과 일치되기 어려운 사각지대를 노출하게 됨. 그는 통일된 외교정책을 지닌 성숙한 국가연합으로서 유럽을 천명했지만 독일의 이 일방적인 결정은 유럽의 기반을 약화시킴. 더군다나 제일 큰 충격을 받게 될 나라는 메르켈이 엄청난 시간과 노고를 쏟아부은 나라, 즉 우크라이나. 파이브라인이 발트해 해저에 완공되면 키예프는 1년에 10억 달러가 넘는 통행료를 잃게 되는 것. (노르트 스트림 :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천연가스 수송 파이프로 2011년 9월 노르트스트림1이 개통됐다. 2021년 9월에는 노르트스트림2가 완공돼 천연가스가 주입됐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인해 승인 절차가 중단됐으며 사업 주관사인 노르트스트림2 AG가 미국의 제재로 인해 지불불능 상태가 되면서 파산했다.)
메르켈은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진핑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2005년 중국은 떠오르는 별이며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 그러나 2007년 메르켈이 베를린에서 달라이 라마을 접견하고 북경에 머무는 동안 비정부 단체와 반체제 인사, 독립 언론인들과 대화를 가지며 중국 인권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양국간 싸늘한 냉기가 덮침. 중국은 메르켈이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용납하지 못한 내정간섭으로 여김.
메르켈은 중국의 숨 막히는 발전 사례를 직접적인 위협으로 보기보다는 유럽을 자극하는 자극제로 보면서 미국과 중국 양쪽을 대체하는 대안으로서 글로벌 디지털 기준을 설정하는데 유럽이 중심이 되어 규칙 제정자가 돼야한다고 주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