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朝鮮時代 君王의 該當 星座
■ 태조
1335년 10월 11일
+ 11월 4일 -▲전갈자리 : 깊이
부인 : 2명 / 자녀 : 4남 1녀
항상 균형을 맞추려고 함.
통찰력이 있다.
■ 정종
1357년 7월 1일
+ 7월 26일 - △사자자리 : 권위
부인 10명 / 자녀 : 17남 8녀
즉위한 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추대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수없는 조치였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사냥과 격구, 연회,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냄.
■ 태종
1367년 5월 16일
+ 6월 21일 - △쌍둥이자리 : 마법
부인 : 10명 / 자녀 : 12남 17녀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진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 세종
1397년 4월 10일
+ 5월 15일 - △황소자리 : 자연스러움
부인 : 6명 / 자녀 : 18남 4녀
태종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 문종
1414년 10월 3일
+ 11월 24일 - △사수자리 : 개혁
부인 : 세명 / 자녀 : 1남 2녀
유학 및 천문 · 역법(曆法) · 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이 관후하였으며 20년 간 세자로 있으면서 문무관리를 고르게 등용하도록 하고 언로(言路)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썼다.
■ 단종
1441년 7월 23일
+ 8월 18일 - △사자자리 : 리더쉽
부인 : 1명 / 자녀 : 없슴
권좌다툼의 희생타로 어린나이에 선친의 형제, 숙부(삼촌)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비운의 군왕.
■ 세조(수양대군)
1417년 9월 29일
+ 11월 16일 - ▲전갈자리 : 매력
부인 : 두명 / 자녀 : 4남 1녀
사람을 끌어 들이는 리더적인 자질을 갖추었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본인)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함.
김종서를 살해, 단종살해.
■ 예종
1450년 1월 1일
+ 1월 23일 - △물병자리 : 천재
부인 : 2명 / 자녀 : 2남 1녀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였다.
예종은 19세에 즉위했으나 세조 비 윤씨가 수렴청정하고 신숙주ㆍ구치관(具致寬) 등이 원상으로서 서정을 의결하여 왕권은 약화된 시기였다.
■ 성종
1457년 7월 30일
+ 8월 28일 - △처녀자리 : 시스템
부인 : 12명 / 자녀 : 16남 12녀
학문을 좋아하였고 인재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문인들로 하여금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경국대전 편찬.
■ 연산군
1476년 11월 7일
+ 12월 2일 - △사수자리 : 독립
부인 : 4명 / 자녀 : 4남 2녀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던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도 있슴.
■ 중종
1488년 3월 5일
+ 3월 26일 - △양자리 : 어린이
부인 : 12명 / 자녀 : 9남 11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치세 초기에는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과거제도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백성들의 상조(相助)정신을 고취시켰다.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 인종
1515년 2월 25일
+ 3월 20일 - △물고기자리 : 부활
부인 : 1명 / 자녀 : 없슴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병약하여 포부를 펴지 못한 채 30세에 죽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할 때는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고 손수 잠자리를 살폈다.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경복궁 정침(正寢)에서 31세로 죽었다.
■ 명종
1534년 5월 22일
+ 7월 13일 - △게자리 : 설득
부인 : 7명 / 자녀 : 1남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 선조
1552년 11월 11일
+ 12월 6일 - △사수자리 : 창시자
부인 : 8명 / 자녀 : 14남 11녀
재 등용에 과거 성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중용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어 국정을 쇄신하였고, 유학의 장려에 필요한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책들도 편찬하였다. 평상시의 생활이 다른 왕들과는 달리 매우 검소하였으며 학문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의 재능도 뛰어났다.
■ 광해군
1575년 4월 26일
+ 6월 14일 - △쌍둥이자리 : 탐구
부인 : 10명 / 자녀 : 1남 1녀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 안위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후 대북파의 지지를 얻어 왕이 되었다. 즉위 후 당쟁의 폐해를 억제하려 하였으나 대북파에게 책동되었으며 인조반정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서적 편찬, 사고 정비,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명, 후금과 양면외교정책을 행했다. 서인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오늘날 광해군의 공과(功過)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붕당(朋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측면이 있다.
■ 인조
1595년 11월 7일
+ 12월 7일 - △사수자리 : 독립
부인 : 5명 / 자녀 : 6남 1녀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 《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등의 대학자 · 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 효종
1619년 5월 22일
+ 7월 3일 - △게자리 : 개성
부인 : 4명 / 자녀 : 1남 7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전념해 군비 확충에 몰두한 군주였다.
■ 현종
1641년 2월 4일
+ 3월 14일 - △물고기자리 : 춤과 몽상
재위 중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졌다. 정보가 별로 없네요.
■ 숙종
1661년 8월 15일
+ 9월 8일 - △처녀자리 : 수수께끼
부인 : 9명 / 자녀 : 6남 2녀
현종의 아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왕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黨弊)가 심화되고 붕당 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현종 때의 예송 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왕의 치세 기간 신료 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 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경종
1688년 10월 28일
+ 11월 20일 - ▲전갈자리 : 개혁
부인 : 2명 / 자녀 : 없슴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이다.
세자 때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었으며 재위 4년 동안 당쟁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신병과 당쟁의 혼란속에 불운한 일생을 마쳤다.
■ 영조
1694년 9월 13일
+ 10월 31일 - ▲전갈자리 : 강렬함
부인 : 6명 / 자녀 : 2남 7녀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 정조
1752년 9월 22일
+ 10월 28일 - ▲전갈자리 : 강렬함
부인 : 5명 / 자녀 : 2남 2녀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 순조
1790년 6월 18일
+ 7월 29일 - △사자자리 : 권위
부인 : 2명 / 자녀 : 1남 5녀
김조순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 헌종
1827년 7월 18일
+ 9월 8일 - △처녀자리 : 수수께끼
부인 : 4명 / 자녀 : 1녀
8세에 즉위하여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며 많은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고, 천주교인의 적발 방법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적용하였다. 친정(親政) 이후에도 삼정(三政)의 문란과 국정의 혼란으로 민생고가 가중되었다. 후사는 없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 철종(강화도령)
1831년 6월 17일
+ 7월 25일 - △사자자리 : 진동
부인 : 8명 / 자녀 : 5남 1녀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 고종
1852년 7월 25일
+ 9월 8일 - △처녀자리 : 수수께끼
부인 : 7명 / 자녀 : 6남 1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 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 순종
1874년 2월 8일
+ 3월 25일 - △양자리 : 어린이
부인 : 2명 / 자녀 : 없슴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 한일신협약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 관리(官吏)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경제권, 경찰권, 군사권 등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의 종말을 맞았다.
첫댓글 이거 궁금했었어요! 잘 봤습니다~~^^
세종대왕 정조대왕 좋아요ㅎ
전갈이 눈에 많이 띄어용! 천칭은 없네요 흑
아마, 거의 비슷한 이유가, 옛날에 왕과 왕비가 합궁하려면, 기일이라하여서, 그날에 이루어지지, 매년 거의 비슷한 날짜일수밖에 없을듯~ㅎ
저도 그생각 22 합궁날도 그렇고, 뭔진 몰라도 가을쯤 애기낳는거 선호하신듯?ㅋㅋㅋㅋ처녀 전갈 많네요 ㅋㅋㅋ
좋은정보 감사해요^^
코코코볼님 말처럼 천칭자리는 없네요 ㅠㅠㅠ
천칭이 하나도 없네요..ㅎㅎㅎ
문종이랑 음 양력 생일이 정확히 일치해요. 감히 비교하긴 그렇지만 업적이 제 성향하고도 비슷하고 ㅎㅎㅎ 기분 좋다 ㅎㅎㅎㅎ
연산군이랑 엄마생일이같네요ㅠㅠ
숙종, 헌종, 고종 군왕들과 생일이 같군요. 자신이 비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설명이 가능한 듯. ㅋㅋ
참......그저 강한 자신이 좋을 뿐. bbb
뜬금포지만...왜 왕들은 마누라들이 이렇에 많죠?카사노바 저리가라네요..아무리 왕실에 자손을 많이 낳아서 종묘사직에 힘쓰고 왕권강화한다지만..왕이 되지못하는 왕자(대군)들과 서자(군?)들은 목숨을 부지하는것도 벅차고 형제간에 피튀기는 칼부림이나 하고 정실이든 측실이든 아주 기싸움하는데...투기?질투?가 칠거지악인가 뭐신가 암튼 7가지 죄악중에 제일 큰 죄라며..숨막히고 불쌍하다 조선시대 여자들은..지금 이시대에 태어난것을 감사합니다ㅠㅠ
아...내시들과 궁녀들도 진짜 불쌍하다..졸지에 강제로 청상과부,노총각,홀아비로 살아야했으니;;한두명도 아니고;;
잘 봤습니다~ 황소자리 왕도 한명 보이네요~
와, 멋진 자료네요. 언제라도 궁금하면 다시 이 방에 들어와 찾아보게 될 것 같아요.
연산군이랑 저랑 생일이 하루 차이나네요..우와..
전갈자리의 대활약 ㄷㄷㄷㄷㄷ
2222ㄷㄷㄷ ㅋㅋㅋㅋㅋ
세종이 황소3이라니 영광이네요
강렬함의 주간 영조 정조 자랑스럽네요 ^*^
전갈자리는 매력있고.카리스마있는데~왜 항상 안좋게?~
저래.....하고있었는데~내려갈수록 좋은업적 왕들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