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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10대뉴스 1963년 국내 10대 뉴스
겨울비(오덕희) 추천 0 조회 29 14.08.13 10: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63년 국내 10대 뉴스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된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한 제5차 개헌안에 따라 혁명정부가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투표율은 72.1%였다. 선거결과 민주공화당은 33.5%의 득표율에 그쳤으나 헌정 사상 최초의 전국구제(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전체의석 175석의 62.8%에 해당하는 110석(전국구 22석)을 획득했다. 민주공화당 외 정당별로는 민정당 41석(전국구 14석) 민주당 13석(전국구 5석) 자유민주당 9석(전국구 3석) 국민의당이 2석을 각각 차지했다.

정치활동 금지 해제

5·16군사정부가 들어선 이래 군정이 금지한 정치활동이 1963년 1월 1일을 기해 재개됐다. 최고회의는 12월 31일 일체의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군사혁명위원회 포고제4호를 폐기하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새 정당법을 제정함으로써 1961년 5·16군사혁명이래 만1년7개월반 만에 정식으로 정치활동 재개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에 따라 5·16 주체세력이 중심이 된 민주공화당은 재야정치인이 새 정당을 창당하기 전인 1월 18일 발기인 78명의 명의로 발기선언문을 내놓고, 당총재에 박정희, 당의장에 김종필, 사무총장에 김동환씨 등을 내정했다. 한편 윤보선 전 대통령은 범야당 형성을 제창한 이래 김도연 신민당위원장과 범야당 결성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최고회의는 정치활동 재개와 더불어 그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못한 곽상훈 전 민의원의장 등 1백71명에게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거제 장승포 압사

1963년 6월 25일 아침 8시쯤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장승포리 3구 거제 중학교 앞 왼편에 있던 높이 70미터쯤되는 산이 무너져 언덕 뒤편의 학교운동장과 앞쪽의 가옥 6체를 완전히 뒤덮어 경찰관 9명과 주민 60명 등 모두 69명이 묻혀 숨졌다. 숨진 경찰관은 마을 주민들에게 대피를 독려하기 위해 사고 현장에 출동했다가 주민들과 함께 변을 당했다. 이날 사고가 난 산은 며칠전 남해안을 강타한 태풍 셀리호의 영향으로 금이 간데다 24일 밤부터 내린 비로 붕괴될 염려가 있어서, 경찰이 이 마을 9가구 주민들에게 대피를 독려했으나 이를 무시해 일어났다. 이번 사태로 너비 약50m, 길이 20m쯤 되는 흙더미가 쏟아져 1천여평이 매몰됐다. 사고 목격자에 따르면 사고난 때가 아침식사 시간이라 대부분 가족이 아침을 먹던 중 우뢰같은 소리와 함께 높이 2m 폭1m 가량의 바위가 집 앞마당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산이 무너졌다.

여주 나룻배 참사. 국교생 49명 익사

1963년 10월 23일 오후 2시 40분 경기도 여주군 신륵사로 소풍갔다 돌아오던 안양 홍안초등학교 5,6학년 3학급 어린이 1백25명과 전교직원 11명, 학부형 22명 등 모두 1백58명이 조포나루터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가 배가 가라앉아 어린이와 학부형 등 49명이 목슴을 잃었다. 조포나루터 남쪽 5m지점에서 일어난 이 참사는 정원 70명보다 훨씬 많은 1백58명을 태운 나룻배를 끌고 가던 모터보트 밧줄이 끊어지면서 충격을 받아 어린 학생들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선체가 물에 잠겨, 순식간에 침몰했다. 사고가 난 이날은 평소보다 나룻배 이용객이 적어서 임검 경찰관이 현장에 근무하지 않아 정원초과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공화당 창당

민주공화당이 1963년 2월 26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당총재에 정구영씨, 당의장에 김창열씨를 각각 선출했다. "두차례의 혁명을 이어 받아 새 노력의 양심과 협동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사회의식을 지닌 민주주의적 지도세력을 이룩하겠다"며 정치활동 개시후 57일만에 가장먼저 창당을 선언했다. 박정희 의장의 민정 불참과 김종필씨의 사퇴로 불안정한 당내사정을 그대로 안은 채 열린 이날 대회는 1,896명의 대의원 중 1,319명의 참석으로 개회했다. 김동성, 김용우, 김성진씨 등 임시의장단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는 창당선언문을 채택한 다음 당체제를 2원제로 하고 사무국 권한이 강력한 전문 62조의 당헌을 약간의 혼란 끝에 통과시키고 또 6개항의 총령과 7개항의 기본정책을 각각 채택했다. 8월 31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입당하여 총재직을 맡아 권위주의적 지도체제아래 계파갈등을 억누르고 조직, 선전 등을 전문화, 당료화시켜 강력한 대중정당체제를 지향해 나갔다. 이후 민주공화당은 경제개발과 안보이데올로기를 내세워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콜레라 유행

1963년 9월 17일 부산에서 첫 콜레라 환자가 발생한 이래 10월 25일까지 전국에서 1천여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 이중 70여명이 사망했다. 이 콜레라는 날이 갈수록 더욱 번성, 9월 하순에는 서울과 경기도 부평, 경북 포항, 경남 양산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때문에 전국 초중고교는 학교장 재량으로 휴교 조치했다. 정부는 9월 23일 긴급임시각의를 소집, 보사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콜레라 방역 중앙대책위원회를 구성, 이에 대비토록 하는 한편 국고예비비에서 1천3백50만원을 지급, 7백35만5천5백명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또 외국에서 4백20만cc의 예방약을 긴급히 얻어왔다. 이와 함께 방역대책본부는 이번 국내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오가와 형중 '엘톨'형에 속하며 1946년 중국 상해에서 귀환한 교포가 퍼뜨린 클라시칼 콜레라와는 다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여객선 연호 침몰. 138명 사망

1963년 1월 18일 오전11시쯤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면 가지도와 허사도 사이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2.5마일되는 해상에서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를 떠나 목포로 가던 해남-목포간 정기여객선 연호가 심한 파도에 휩쓸려 침몰됐다. 이사고로 승객132명과 승무원 7명 등 139명 중 승객 서종수씨를 제외한 1백38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원래 이 여객선의 정원은 78명, 승무원은 8명이었으나 이날은 정원을 훨씬 초과한데다 벼를 5백10가마나 실었다. 사고는 선체가 21년이나 돼 낡았고 사고 당시 썰물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서북풍이 강하게 분다는 폭풍주의보를 외면하고 무리하게 항해하다가 일어났다. 해경은 경비정 한산호와 민간선박 15척을 동원, 선체인양작업에 나섰으나 심한 폭풍우로 구조작업이 부진, 겨우 시체 10구를 인양했으며 선체는 해군의 도움으로 사고가 난지 7일만인 25일 인양했다.

남·북한 올림픽 단일팀 출전협상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동경올핌픽에 대비해 1962년 9월 1일까지 남북단일팀을 구성하라는 요구를 해옴에 따라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8월 14일 단일팀 구성을 위한 모든 통신연락을 IOC를 통해 한다는 조건으로 남북한단일팀 구성에 동의, IOC에 통고했다. 남·북한은 이에 따라 1963년 1월 24일 IOC주재로 IOC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회담을 개최, 올림픽에 사용할 국가(國歌)를 8·15이전의 '아리랑'으로 할 것과 임원과 선수 선발을 동·서독단일팀구성원칙에 따른다는데 합의했다. 뒤이어 4월 19일 한국은 올림픽대회장에 게양할 국기(國旗)를 오륜마크 밑에 KOREA로 표시하는데 합의했다. KOC는 선수단의 호칭문제를 비롯, 선수선발을 위한 예선장소와 일시 등 더 구체적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63년 7월 26일 홍콩에서 제2차회담을 열기로 했으나 북한측이 정치적인 발언을 계속해 회담자체가 결렬됐다.

살인마 고재봉 사건 발생

1963년 10월 19일 아침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이득주 중령집에서 이 중령과 부인 그리고 두자녀와 가정부 등 5명이 도끼에 찍혀 숨져있는 것을 이 중령의 운전병 홍춘길 일병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이 중령의 장남은 인제읍내 큰아버지댁에서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했다. 처음 현장을 목격한 홍 일변에 따르면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방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이 중령과 부인은 큰방에서 나란히 엎어져 있었고 아이들과 가정부는 옆방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군과 경찰은 즉각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과거 이 중령 집에서 구두를 훔쳐 복역한 사람이 있고 이 중령집에서 잃어버린 다이아몬드가 홍천읍내 한 보석상에서 발견된 점을 근거로 추적에 들어가 범인이 고재봉인 것을 확인해 수사망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범인 고재봉은 수사망을 피해 서울로 달아났으나 1963년 11월12일 범행 24일만에 한 땅콩장수의 신고로 서울 청계천5가에서 검거됐다. 고재봉은 12월 12일 사형을 구형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정희 대통령 당선, 제3공화국 발족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어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로써 1961년 5월 16일 이래 2년7개월 동안 계속해 온 군사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에는 미국을 비롯, 자유우방국가에서 온 경축사절 84명과 신·구 정부수뇌와 학생대표들이 참석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면, 허정, 송요찬씨 등 전 정부수뇌와 대통령 취임선서에 입회할 국회의원과 대법원 판사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국민 앞에 군림하지 않고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할 것"을 다짐하고 "국민이 자립, 자조하는 정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해 단합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대통령은 취임식이 끝난 후 최두선 국무총리와 전국무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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