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橫財)란 ‘노력하지 않고 뜻밖에 재물을 얻는 것, 또는 그 재물’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권을 사서 1등에 당첨돼 돈벼락을 맞았다 해도 횡재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복권을 사는 노력을 기울인 데다, 살 때부터 당첨되기를 바랐을 테니 ‘노력 없이, 뜻밖에’ 재물을 얻었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느닷없이 돈다발이라도 떨어진다면 모를까, 전혀 생각도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재물을 얻는다는 게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중국집서 짬뽕 먹다 흑진주 발견한 공군 병장
중국집 음식 속에 흑진주
1964. 1. 6 [경향신문] 7면
그 어려운 횡재를, 조금 과장하자면 온 국민이 고대하면서 ‘해물 음식점’에 몰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갑자기 웬 해물음식? 사실 정확히는 ‘조개류 음식’이었다. 조갯살을 씹다 그 속에 든 진주를 찾아낸 경우가 몇 차례 생기고, 그 진주 값이 10만원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열풍처럼 ‘진주 횡재바람’이 분 것이었다. 조개와 전복 등 해산물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중국음식점에 사람들 발걸음이 잦아지고 음식을 천천히 씹으면서 음미하듯 이와 혀로 식재료를 분리해보곤 하는 현상도 생겨났다.
1964년 정초의 일이다. 서울 대방동 “공군 항공의료원에서 근무하던 한 병장이 중국음식점에서 ‘초마면’(짬뽕)을 먹다 콩알만 한 흑진주를 발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흑진주의 시가는 자그마치 10만 원대. 짜장면 한 그릇 값이라야 30원이고 쌀 한 가마에 3천원이 조금 넘었을 때다. 10만원이라니, 쌀 30가마 값이 아닌가. “처음엔 돌을 씹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새까만 진주였다는”, 병장의 만화 같은 횡재 얘기에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군병장이 짬뽕 속 진주를 발견한 경위는 이렇다. 부대근처 상도동 중국집 ‘평창원’에 자주 갔던 병장은 그날 외상값을 다 갚았다. 그러자 중국집 주인은 사례로 우동이나 짜장면보다 비싼, 조개 전복이 많이 든 ‘초마면’을 대접했다. 맛있게 음식을 먹던 병장은 갑자기 딱딱한 돌 같은 걸 씹고 뱉어 보니 윤이 나는 까만 돌이었다. 깨물어도 부서지지 않고 닦아보니 더 반짝거리고… 혹시 하는 생각에 보석상에 가져갔더니 “천연 흑진주!”라는 것이었다.
군인의 횡재 소식에 ‘호기심 충만’한 사람들
신문은 이 기사를 쓰며 사람들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내가 그 집 초마면을 먹었더라면…” 하는 바람은 물론 “혹시 그 병장, 너무 놀라 심장마비라도 오지 않았을까”하는 얘기가 시중에 돈다고 썼다. 또 “중국집 조리사가 전복이나 조개를 깨끗이 씻고 헹궈 재료로 썼던들 음식 속에 들어갔겠느냐”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에 “앞으로 음식점 조리사들은 음식을 더 깨끗이 만든다는 각오를 다져야 진주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충고까지 했다.
실제 기사를 읽은 사람들 중 많은 이가 “얼마 전 중국집에서 음식을 먹다 돌을 씹었는데 그게 혹시?”라며 아쉬워했다. 따지기 좋아하는 어떤 이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손님이 음식 속 진주를 찾았다 해도 소유주는 당연히 음식점 주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다른 이는 “그렇게 따지면 어부, 도매상, 소매상 소유지 어떻게 음식점주인 거냐?”고 괜스레 흥분하기도 했다. 흉년이 든 데다 물가마저 치솟아 서민 살림이 팍팍하던 판에 ‘진주 횡재’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뜨거운 화제와 희망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또! 꼬막조개에서 백진주 발견한 주부
진주 횡재 또 하나
1964. 2. 21 [경향신문] 3면
이처럼 화제가 분분하던 2월말, 이번엔 광주에서 또 진주 횡재 뉴스가 나왔다. 가정주부가 산 꼬막조개에서 백 진주가 나온 것. 주부는 “광주 금은방에선 감정이 안 돼 서울로 가져가 감정 받겠다.”고 했는데 이것도 10만원은 넘을 거라는 얘기였다. 마침 광주서는 “가보로 내려오던 첩화 속 물고기 눈깔을 감정한 결과 모두 42개의 천연진주로 판명 났고 그 시가는 대략 50만원”이라는 한 청년의 주장과 “첩화는 원래 내 것으로 서울 가서 감정을 받아오라고 청년에게 맡긴 것”이라는 주부의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진주 이야기에 또 살이 붙었다. “진주는 가난하고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거나 “진주 욕심을 부리다 진주 모양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 정초에 상도동 중국집에서 흑진주를 씹었던 병장이 “불로소득으로 얻은 귀한 물건을 그냥 갖고 있으려니 너무나 죄스러워 대통령 부인께 드리고 싶다 ”는 편지와 함께 곱게 싼 진주를 청와대에 보낸 사실이 알려졌다. 대통령에게 오는 선물에는 합당한 보답을 해오던 청와대 측은 흑진주 감정 결과 2만원~3천5백 원으로 다양한 감정가가 나와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한다는 얘기였다.
세간에 꽃피운 진주에 관한 이야기
진주의 진가 ‘조개’ 속에 묻힌 이야기들
1964. 2. 24 [경향신문] 5면
시중에서는 이제 온통 진주 얘기로 꽃을 피웠다. 2월24일자 경향신문은 5면 머리에 ‘진주의 진가, 조개 속에 묻힌 이야기’라는 기사를 올렸다. “곳곳에서 진주가 나와 화제다. 우연히 발견된 진주는 보석상에 의해 몇 십만 원으로 호가된다. 신기한 횡재가 꿈처럼 굴러오는…”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돋웠다. ‘큰 천연진주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설명에 사람들은 가급적 식사를 중국집에 가서 했고 주문을 할 때도 “짬뽕, 조개 많이 든 걸로”나 “요리는 전가복, 전복은 곱빼기로!”라고 외치기도 했다.
횡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부산에서였다. 3월초 동래구 한 식당에서 통국수를 먹던 40대가 홍합 속에 있던 돌을 씹어 뱉어보니 묘한 빛이 나는 것 아닌가. “진주구나” 싶어 바로 금은방에 감정을 맡겨보니 2만 원쯤 되는 진주라는 거였다. 서울 광주에 이어 부산서도 진주가 나오자 언론은 정말로 흥분했다. 통국수 진주가 발견된 다음날 신문에서 한 칼럼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조개에서 진주나와…어물상인 큰 횡재
1967. 2. 6 [매일경제] 4면
“옛날에는 음식을 먹다가 돌을 씹으면 치과로 갔다. 혹시라도 상하지 않았나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엔 음식을 먹다가 무엇이든 깨물게 되면 치과가 아니라 무조건 보석상으로 달려간다. 혹시 그 돌이 진주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다가 진주를 씹었다는 사람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올해 들어 기억하는 것만도 10건 가까이 된다.…앞으로 음식을 사먹을 때는 이왕이면 조개가 들어있는 것을 택하는 게 좋을 듯싶다. 복권 뽑는 기분으로 말이다…”
진주 횡재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0년대 초중반엔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진주발견 소식이 실렸다. 부산 동광동 대중식당의 매운탕 홍합에서 직경 5mm, 시가 3만원 진주가 발견됐고 청량리시장 어물전 피조개에서 찾아낸 진주는 채취 후에도 2mm 가량 더 자라 화제가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숱하게 진주가 나왔지만 진짜 부자가 그걸 발견했다는 뉴스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는 것이다. 부자들이 조개류를 직접 만지고 손질할 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고 그들의 조리사도 구석구석 샅샅이 씻은 식재료를 쓰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니 “착한 사람에게 진주가 나타난다.”는 말도 생겼을 것이다.
진주 발견도 유행 탄다? 서서히 자취를 감춘 소식
4컷만화 – 고바우 영감
1964. 2. 27 [동아일보] 7면
묘한 점은 하나 더 있다. 진주 발견도 유행을 타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한 신문은 60년대 사회상을 회고하며 ‘유행을 탄 횡재’ 얘기를 다뤘다. 고바우영감이 진주목걸이 감정을 받으러가던 유한마담을 만나 한 사람을 소개했다. 그는 다짜고짜 진주목걸이를 씹어 마담을 놀라게 한다. 64년 신문만화다. 기자는 그 만화를 보며 “그때는 그렇게 큼지막한 진주 얘기가 많았는데 몇 해가 지난 오늘에 와선 왜 진주 얘기가 들리지 않을까”고 묻는다. 그러면서 “횡재조차 정녕 하나의 유행이었던가?”자문하는 것이다.
사실 음식 속 진주 얘기는 꼭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78년 AFP통신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레스토랑 굴 요리에서 직경 1.5cm, 시가 2400달러 진주가 발견된 후 행운을 잡으려는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는 기사를 실었다. ‘다 브루노’라는 그 식당에서는 벌써 세 번째 진주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66년 “영국 런던에서 2년 전 진주를 씹었던 한 신사가 또 진주를 씹어 화제가 됐다”며 한 사람이 두 번 진주를 씹을 확률은 50억분의 1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그나마 70년대까지는 간간이 보도되던 천연진주 발견기사는 80년대 들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86년부터 한국산 양식진주가 양산되기 시작해 값도 떨어지고 음식 속에서 진주가 나왔다 한들 ‘횡재’라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해진 때문이다. 꾸며낸 얘기지만 전혀 듣기에 거북하지 않았던 “착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만 진주가 나타난다.”는 얘기도 이젠 아득한 추억에 묻혔다.
- 글
-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 <민초통신 3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