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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흘머흘 어데론지 구름이 떠가고 있다. 구름 사이로 제비떼가 조그맣게 쏜살같이 날고 있다. 구름 한 조각이 꼭 말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면 꼭 말 같기만 했다. 저 구름을 타고 둥둥 떠봤으면 얼마나 호시가 좋을까 싶다.
– 오영수, ‘태춘기’ 中 (‘현대문학’, 1956년 6월호)
자연을 그리기에는 수채화가 좋다. 결이 드러난 종이 위에 물을 흩뿌리고, 그 위에 물감을 머금은 붓을 내려놓으면 곧 풍경을 닮은 색이 그윽이 퍼진다. 한 폭의 담채화 같은 소설을 읽었다. 연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투박한 상, 소설가 오영수의 단편이다. 작가는 만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원고지에 가득 끼얹고, 손끝으로 서걱서걱 주워 담으며 소설을 썼나 보다. 문장을 따라 목가적인 정취가 그려졌다. 원숙한 화가의 눈을 빌린 기분이다.
|언양 가는 길 풍경
오영수의 고향 언양에 가기 위하여 서울역으로 향했다. KTX에 탑승했고, 대략 두 시간 반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울산역의 자태가 꼭 배 같다. 시내버스 방향을 재차 확인하고 자리를 잡았다.
|오영수문학관은 2014년 개관한 울산의 첫 문학관이다. 작가의 친필 원고와 미술작품 등 188점의 유물 보관되어 있다.
언양은 부산과 경주 사이에 자리한 고읍이다. 넓게는 가지산, 운문산, 간월산 같은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가까이로는 키 작은 봉우리와 남천강을 낀 전형적인 촌읍이다. 오영수문학관은 화장산 기슭에 세워졌다. 버스를 탄 지 20분이 지나 언양성당 정류장에 내렸다. 이정표를 따라 나지막한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주홍의 벽을 타고 아침 햇살이 내려왔다. 마당 언저리에 퇴비를 듬뿍 받은 나무가 장차게 자랐다. 순간 두엄 냄새가 몰씬 났다. 반달음질로 문학관 입구에 다다랐다.
|문학관 전경, 글씨 ‘오영수문학관’은 작가의 친필을 집자하여 구성했다.
소설가 오영수는 1909년 경상남도 울산시 언양에서 태어났다. 장남이었던 그는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래, 진학을 포기하고 가계를 도왔다. 살림이 나아진 후에야 유학을 떠났다. 1932년 일본 오사카 나니와중학교 속성과를 수료하였고, 1939년 도쿄국민예술원을 졸업했다. 귀국 후 고향에서 청년회관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역사와 한글, 연극과 음악을 가르쳤지만,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가속화로 급히 문을 닫았다. 그는 방황 끝에 소설 ‘갯마을’의 배경이 된 어촌인 일광면 화전리로 이사했다.
|왼쪽부터) ‘머루’ (문화당, 1954) / ‘갯마을’ (중문, 1955) / ‘현대문학’(1955년 창간)_발행인 김기오, 주간 조연현, 편집장 오영수
1945년 해방이 되었다. 그해 오영수는 부산 경남여고 국어, 미술과 교사가 되었고, 이후 ‘바다’, ‘山골아가’ 등을 선보이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49년, 오영수는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소설 ‘남이와 엿장수’(후에 ‘고무신’으로 개제)를 발표했다. 이듬해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단편소설 집필을 시작하였다. 그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원하여 유치환 등과 함께 동부전선 종군 작가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제1 창작집 ‘머루’를 간행했고, ‘현대문학’을 창간했다. 그는 초대편집장으로 11년 동안 근무하였다.
| ‘갯마을’ 시나리오와 영화 포스터(김수용 감독), 영화 장면 (출처: 네이버영화)
문학관 한쪽에 닥종이 인형이 붐빈다. 오영수 작가의 대표작 ‘갯마을’을 재현한 것으로, 벽에는 1965년 영화 ‘갯마을’이 상영된다. 주인공 해순은 젊은 과부다. 그녀는 행방불명된 남편 성구를 잊지 못하다, 이내 상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산간마을로 시집간다. 지아비 상수마저 징용으로 떠나자 그녀는 자신이 살던 바다가 그리워진다. 흑백영화 속 사람들의 얼굴은 얄궂은 바다 일로 수척하다. 반면에 표정은 연신 달다. 늘 함께하는 동반자가 있기 때문일까, 그들의 웃음소리와 맞물리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상수도 징용으로 끌려가 버린 산골에는 견딜 수 없는 해순이었다. 오뉴월 콩밭에 들어서면 깝북 숨이 막혔다. 바랭이풀을 한 골 뜯고 나면 손아귀에 맥이 탁 풀렸다. 그럴 때마다 눈앞에 훤히 바다가 틔어 왔다. (중략) “수수밭에 가면 수숫대가 모두 미역밭 같고, 콩밭에 가면 콩밭이 왼통 바다만 같고∙∙∙.” “그래?” “바다가 보고파 자꾸 산으로 올라갔지 머, 그래도 바다가 안 보이데.”
– 오영수, ‘갯마을’ 중 (‘문예’, 1953년 제19호)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오영수의 메모, 붕어 탁본, 데스마스크(오윤 作, 1979), 베레모
작가는 위궤양으로 현대문학사를 떠났다. 말년의 그는 고향과 가까운 웅촌면 곡천리로 내려와 창작에 전념했고 제7 창작집 ‘잃어버린 도원’(1978)을 펴냈다. 오영수는 말년까지 낚시를 즐겼다. 낚시를 ‘막연한 기대 속에 살아가는 인생의 축소판’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이렇게 고즈넉한 삶을 영위하나 싶었다. 그러나 1979년에 발표한 ‘특질고’로 정신적인 타격을 받았다. 내용이 특정 지역 토속인들의 특성을 크게 파헤친 것으로 받아들여져 커다란 물의를 빚게 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충격과 간암이 더해져, 같은 해 7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오영수는 ‘예술품을 담는 그릇으로 장편보다 역시 단편이 더 적당하다’는 주관과 신념으로, 약 30년 동안 2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폭신한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 2층의 문학사랑방에 입장했다. 책을 몇 권 빼내 책상에 걸터앉았지만, 활자는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창 너머로 신불산이 보였다. 오래된 뭉게구름이 산등성이를 타는 중이었다. 창문으로 들기를 기다렸다. 구름이 능선을 감싼 것처럼 어깨를 덮어주기를 바랐다. 늘어지는 시간을 기어이 끊어내고 테라스로 나왔다. 거대한 상록수 그림자가 정원에 깔렸다. 그 중심에 작가가 좌정했다. 어린 학생들의 장난으로 안경이 부서진 상태다. 뜰은 초록의 이파리를 흔들며 공간을 채웠다. 중간중간 심어진 붉은 꽃이 무료함을 달랬다. 기억은 적록을 쓸어 모아 가슴속에 생생한 추억으로 새겨졌다.
|탱자나무
문학관 외벽에 붙은 안내 지도를 따라 오영수문학길을 걷기로 했다. 여유롭게 걸어도 한 시간 내외라는 해설사의 말을 듣고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푹석푹석 땅 먼지가 일어났고, 길마다 다른 바람이 불었다. 작가의 소설에 풍성한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청량한 하늘 가운데 탱자 꽃이 있다. 검정 가지 꽁무니에 달린 꽃이 유독 새하얗다. 떨어진 꽃잎을 거두어 공책 틈에 끼었다. 산야 곳곳에는 튀긴 좁쌀 같은 조팝나무가 만개하여, 잿빛 가지에 희디 흰색을 더했다. 이때까지는 좋은 소풍길이였다.
|화장산에는 도화 전설이 깃들었다
(언양의) 서북쪽으로 꼭 황소가 누워 있는 모양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화장산(花藏山)이라고 한다. 이 화장산 중턱에 반은 땅속에 묻힌 집채만 한 바위가 입을 떡 벌리고 있다. 이 벌린 바위 입속에는 백 명도 더 들어앉을 수가 있고 뒤켠으로는 약수도 솟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몇 대째 왕이 중병을 앓는데 백약이 무효라 백성들의 수심이 날로 높아가는 참에 어떤 도인(道人)이 나타나 아무 데 아무 곳에 가면 복숭아꽃이 피어 있을 터이니 즉시로 가서 꺾어오라고 했다. 때는 한겨울이었다. 그 아무 데 아무 곳이라는 데가 바로 내 고향인 화장산이었다.
– 오영수, ‘화장산에 얽힌 이야기’ 中 (‘오영수대표작선집’, 1974)
길을 잘못 들었다. 머리카락 속에 땀이 맺혔다. 어디로 난 길이었는지는 진즉 알고 있었지만, 되돌아가기 아쉬운 마음에 강행했던 탓이다. 거의 정상에 닿을 무렵 동굴이 나타났다. 해설사가 지나가는 말로 흘린 성모동굴이다. 탁 트인 곳에서 언양을 볼 수 있다는 자위로 숨을 골랐다. 예상치 못한 방면으로 흘러가는 상황도 꽤 나쁘지 않다. 성모상 앞에 마련된 통나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잽싼 그림자가 아른거려 잠시 우두망찰했다. 줄기차게 비행하는 호랑나비의 날갯짓이다. 내리막길은 한결 수월했다. 이윽고 갈림길에 들어섰고, 비로소 옳은 길을 걸었다.
|오영수 작가의 묘
한 집이 떠났다. 떠나는 사람들은 산을 보고 자꾸만 울고 갔다. 산섶을 쪼고, 산잔등을 긁어 살아온 사람들이라 산을 못 잊는 모양이었다. 내일이면 또 한 집이 떠난다. 가는 곳을 묻는 사람도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중략) 분이는 통통 부운 눈시울에 줄곧 눈물을 가두고 흰 댕기를 자근자근 씹으며 갔다. 분이의 그 숱한 말 중에 다만 석이의 기억에 남는 것은, “오께 꼭 오께. 머루철에는 꼭 오께!” 이것뿐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장끼가 울고 까투리가 숱하게 새끼를 쳤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었다. 고므재 층듬에는 올해사 말고 머루가 탐스럽게도 달렸건만 분이는 까마득 소식이 없었다.
– 오영수, ‘머루’ 중 (‘신천지’, 1949년 9월호)
간과했지만, 이곳은 영남알프스의 한줄기였다. 명성답게 등산객이 많았다. 그들의 튼튼한 등산화를 보니 신고 온 하얀 운동화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몇 번이고 가는 길을 물어 끝내 허리만 한 표지판 앞에 섰다. 오영수 작가는 화장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었다. 솟은 봉분만큼 떠난 이에 대한 존경이 부풀었다. 마침내 하행길이다. 소나무 기둥에 한입버섯이 자라 있다. 강아지가 혀를 내미는 듯한 생김새가 괜스레 얄밉다. 오른쪽으로 두릅 밭이 깔렸다. 보드레한 두릅나무에는 새싹이 삐죽했다. 마을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미나리꽝(미나리를 심는 논), 땅이 걸고 물이 많이 괴는 곳이 좋다
내 고장은 옛날부터 미나리로 이름난 곳이다. (중략) 내 고장 미나리의 그 독특한 감미와 향취는 딴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중략) 올해에는 기어코 고향을 한번 다녀와야겠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고향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고향은 멀리서 그리는 것∙∙∙. 내 고향은 타향에서 그리는 회향(懷鄕) 속에서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 오영수, ‘고향에 있을 무렵’ 중 (‘오영수대표작선집’, 1974)
몇 시간 흙길을 걸어서인지, 아스팔트
길이 유달리 단단했다. 시야에 장대한 돌담이 들어왔다. 언양읍성이다. 진흙밭 끄트머리에 있는 새뜻한 연둣빛에 홀린 양 서둘렀다. 미나리꽝이다. 향긋한 미나리 향이 코끝에 맴돌면서 덩달아 머릿속이 맑아졌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엄마의 것보다 더 긴 고무장갑을 낀 할머니가 미나리를 살폈다. 흐르는 물소리에 생기가 돈다.
|언양읍성과 영화루
사적 제153호인 언양읍성은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성이었다. 삼국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1500년(연산군 6년)에 돌로 증축했다. 언양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던 영화루에 올랐다. 문 앞에 둥글게 해자가 조성되었다.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것으로 그 위용이 대단하다. 내려다 본 언양읍성 마을은 다양한 벽화와 글 등으로 가꾸어졌다. 그에 앞서 작가 오영수가 공부했던 구 언양초등학교로 향했다.
|오영수가 다녔던 구 언양초등학교(1906년 개교)
그러나 학교에 들고부터는 한일합방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과 운명, 일제의 횡포, 조부와 일문의 경제적 몰락, 이런 것들이 어렴풋이나마 조금씩 피부로 느껴지고 더구나 생활에 무능한 선비인 부친, 비로 쓸어버리듯 가난이 나로 하여금 소극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중략) 창피해서 하기 싫은 얘기지만 하루에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학교가 바로 이웃이라 점심시간에 나와도 점심이 없어 소금물에 담근 김치무우를 하나 씹어먹고 가기도 했고 어떤 때는 찬물에 간장을 한 숟갈 타서 마시고 가기도 했다.
– 오영수, ‘고향에 있을 무렵’ 중 (‘오영수대표작선집’, 1974)
언양초등학교는 오영수의 모교로, 개교 100년을 맞이하여 현재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본래 있던 오영수문학비와 작품비도 함께 옮겨졌다. 붉은 운동장 위에 그려진 희미한 경계선을 따라 걸었다. 키 120cm를 갓 넘겼을 때였다. 처음으로 등교하던 그 두근거림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분명해졌다.
|언양읍성 마을 벽화
언양읍성 마을에 들어섰다. ‘골목길갤러리’와 ‘우리 마을 주민들’, ‘언양이 낳은 문화인사들’ 등 언양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골목이다. 언양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작은 그림에서 머흘머흘 흐르는 울산의 구름을 발견했다. 짧은 골목 중간에 반구대 암각화를 소재로 한 경로당이 있다. 마지막 행선지는 반구대 암각화였다. 약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암각화는 정거장에서 1.5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산세와 계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산책이 이어졌다.
|반구대: 마치 거북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반구대(盤龜臺)라 불린다
동욱은 산이 좋았다.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은 깊을수록 좋고 나무가 많을수록 좋다. (중략) 간간 산이 쩡- 하고 울 때가 있다. 하루에 한 번쯤, 어쩌면 한 달에 몇 번쯤- 산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은 자주 운다. 먼 지축에서나 울려 나오듯 은은하면서도 맑고 중후한 그런 울림이다. 동욱은 산이 울 때마다 산의 생명감 같은 것을 느끼고 마음이 경건해진다.
– 오영수, ‘메아리’ 중 (‘현대문학’, 1959년 4월호)
눈길을 사로잡은 건 초록이었다. 볕뉘에 그늘진 곳 녹색이 번뜩였다. 엎드린 거북의 이마는 바닥에 닿아 있다. 소망을 품은 산세에서 쩡- 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거북의 머리가 지면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소리인가 싶다. 초입에 난 앞선 발자국을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중심 암면은 너비 10m, 높이 3m 정도다. 좌우 10여 곳의 바위에서도 그림이 확인된다. 여름에는 물에 잠기며, 갈수기(11월-5월) 때만 볼 수 있다.
오래 전, 선사인들이 차가운 바위에 그림을 새겼다. 선사인들이 떠나고 남겨진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 해양 어로 문화를 담고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고래, 거북, 물개 같은 바다 동물과 호랑이, 표범, 멧돼지, 사슴 등의 육지 동물이 묘사되어 있다. 사람의 모습이나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까지 모두 300여 점의 그림이 있다. 암각화 건너편에 총 세 대의 망원경이 설치되었다. 가장 뚜렷이 보인다는 낮은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대려면 자연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절로 겸손해지는 모양새다. 여름에는 해가 어느 정도 떨어져야 그 면모를 샅샅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자세히 보기 위해 울산 암각화박물관으로 내려갔다.
|울산 암각화박물관 전경 (출처: 울산 암각화박물관 홈페이지)
울산 암각화박물관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각석(국보 제147호)을 소개하기 위해 2008년 개관했다. 고래를 형상화한 외관이 독특하다. 내부에는 복제 모형물, 선사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민들레, 이진이, 2016
다음날도 좋은 날씨였다. 먼 산은 선잠 깬 여인의 눈시울처럼 자꾸만 선이 희미해 오고 수양버들은 아지랑이가 간지러운 듯 한들거렸다. 보리싹은 제법 파릇하고 남향 담 밑에는 민들레가 놀란 듯 활짝 피었다. 오늘따라 엿장수는 일찍 왔다. / (중략) / 날씨는 한결같이 좋았다. 산기슭 잔디 언덕에는 쑥 싹을 캐는 소녀들의 색 낡은 분홍치마가 애틋하게 정다워 보이고 개울가에는 냉이랑 독새랑 여뀌랑 미나리랑 싹이 뾰족뾰족 돋아났다.
– 오영수, ‘고무신’ 중 (‘머루’, 문화당, 1954)
해동갑해서 버스에 올랐다.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 줄이 느슨해졌다. 인도 가장자리까지 줄기를 뻗은 민들레가 있었다. 해의 보살핌을 갈구하는 몸부림이다. 발길에 밟힐까 섣부르게 걷지 못했다. 나뭇가지를 쳐내는 정원사가 있기를 바랐다. 어려운 시대 상황 속 서정의 정원을 경작한 오영수처럼 말이다. 언양행은 색과 소리의 향연이었다. 잔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서울에 안착하니 해가 졌다. 섭섭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모질지는 않았다. 모처럼 둥근 달이 밤하늘에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