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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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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미문(Ⅳ)
사도행전 3장1-10절 / 이재철 목사
➤“1. 한편 아홉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으로 올라갈 때에 2.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 태에서부터 걷지 못하는 어떤 사람을 들고 왔는데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구제물을 요청하게 하려고 그들이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 하는 성전 문에 두는 자더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 구제물을 요청하므로 4.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그를 눈여겨보며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받으려고 기대하며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므로 6. 그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그의 오른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매 즉시 그의 발과 발목뼈가 힘을 받아서 8. 그가 껑충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9. 온 백성이 그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제물을 바라던 자인 줄 알았으므로 그에게 일어난 그 일로 인해 그들이 심히 이상하게 여기며 놀라더라.”(행3:1-10 KJV)
지난 주간 구역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서 말씀 묵상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인간의 인식과 관련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물 사건 혹은 현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가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든 어른이 그가 인식하는 세계란 지극히 피상적인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일희일비하는 경박하고 사려 깊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첫 번째 단계보다 성숙한 단계로서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훨씬 사려 깊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람은 언제든지 보이지 않는 본질을 먼저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도에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나 얻은 것을 자기 삶속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단계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이상적인 단계로서 이 단계의 사람은 날로 그 삶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개선되고 변화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신문이나 TV 통해서 각종 부패 혹은 비리 사건 보도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보도들을 접하면서 사건에 연류 된 사람들의 기사를 보고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친다면 그 사람은 첫 번째 단계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평생 그와 유사한 기사를 매일 보며 산다 할지라도 그 기사들이 그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력도 미칠 수 없게 됩니다. 똑같은 기사의 내용을 보면서도 왜 이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혹 거기에는 피치 못할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사람이 모함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이 사람의 가족들은 얼마나 고통 가운데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 사건이 어떤 경우에 속하든 그 사건의 본성임을 보고 듣는다면 그는 두 번째 단계의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남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거울삼아 다른 사람이 나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지 내 삶을 바르게 추슬러 간다면 그는 바로 세 번째 단계의 사람으로 그의 삶은 날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고 개선되고 성숙되어 갈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신앙생활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묵상할 때 자신이 묵상하는 해당 본문을 들여다보는 것은 첫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단계는 중요하고 만약 그리스도인이 세월이 흘러가도 그 단계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칫 자신이 묵상하는 말씀들을 성경에서 토막 내 성경 전체와의 연관성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없는 말씀 조각들의 모음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의 일관된 통일성 속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묵상할 때 묵상하는 말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틀 속에서 그 말씀과 관련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 까지 보게 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운 깨달음을 자기 삶 속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이 마지막 단계가 됩니다.
이 마지막 단계의 사람은 성경 속에서 단 한 구절을 읽는다 할지라도 그 한 구절을 통해 성경 전체의 정신이 그의 삶 속에서 인카네이션 육화 됩니다. 우리의 목표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5주째 살펴보고 있는 오늘의 본문은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날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 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미문을 막 통과하려고 했습니다. 마침 그 순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거지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제물를 요청했습니다. 그 앉은뱅이 거지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시야에 그들의 모습이 들어왔기에 아무 의미도 없이 평의 습관대로도 은 눈으로 건성으로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 거리의 적선 요청에 그 앞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건성으로 보는 그 거지를 아테니조(ατενίζω) 바라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거지를 향해서 자신들을 블레포(βλέπω, blepo)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앉은뱅이 거지가 자세를 가면서 에코(ἔχω) 그의 온 시선을 베드로에게 집중했습니다. 앉은뱅이 거지를 응시하는 베드로의 시선과 베드로에게 앉은뱅이와 시선이 서로 부딪쳤습니다. 그 순간에 베드로가 앉은뱅이 거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했습니다. ➤“6. 그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밀어 안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앉은뱅이 거지는 자기 오른손을 붙잡아 일으키는 베드로의 손을 의지해서 아니 베드로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뒤틀려 있던 그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쁨에 겨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위해 먼저 미문을 통과했습니다. 평생 그 미문 앞에 앉아서 구제만 하던 그 앉은뱅이 거지는 살아생전에 자기발로 일어나서 발로 그 미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날 거지였던 그 사람이 미문 통과한 것은 단순히 미문이라는 이름의 건축물을 통과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앉은뱅이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남으로 인해 그의 앞에 전혀 새로운 인생의 아름다운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뜻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었던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졌을 그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지 그이 걸인이었던 그 사람이 미문 통과하는 순간에 미문 통과한 사람은 그 사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베드로와 요한 역시 그와 함께 미문을 통과했습니다.
이스라엘 변방 갈릴리의 보잘 것 없는 어부에 지나지 않았던 베드로와 요한의 인생 앞에도 역시 앉은뱅이 진으로 인도해드릴 수 있는 새로운 사도로서의 인생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이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다. 라고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 역시도 이 시대의 베드로 우리 시대의 사도들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지만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이 시대의 앉은뱅이들 생명과 진리의 미문 인도해 드리는 이 시대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이상이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본 것으로 서두의 말씀드린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보이는 이 본문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는 두 번째 단계로 진입할 차례입니다. 마태복음 8장 14-15절이 이런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4. ¶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그의 아내의 어머니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15. 그녀의 손에 손을 대시니 열병이 그녀에게서 떠나고 그녀가 일어나 그들을 섬기더라.”
베드로 아내의 고백
베드로의 집을 찾아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마침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시켜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시점은 예수님의 공생에 초기시절입니다 그때 베드로에게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즉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초기부터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오늘 본문의 시점은 3년이 지난 이후의 시점입니다. 당시 유태인들은 남자 나이 20세 여자 나이 15세를 전후해서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20대 중반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오늘 본문의 시점 즉 30세의 육박해 베드로에게 반드시 자식도 있었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부양해야 할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었고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가족 부양의 책임은 철저하게 가장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보이는 본문 속에서 보이지 않는 베드로의 아내를 보고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 아내의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깊은 믿음에 우리 모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남편 베드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은과 금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다닙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3년 동안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베드로 아내의 동의 없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은과 금을 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남편을 대신해서 자신이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대신지는 베드로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 없이 베드로가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베드로의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세상의 은금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였다면 그녀는 반드시 베드로의 발목을 잡았을 것입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은금을 구해오라고 말입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이 은금을 쫓기 위해서 베드로 아내의 자리를 떠나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약 10여년 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9장5절에 의하면 베드로 안에는 나이든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데 아예 만사를 제쳐두고 남편을 쫓아다니면서 베드로를 적극적으로 뒤에서 헌신했음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의 아내 역시 세상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세상의 은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생의 목적으로 삼은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그 여인의 적극적인 믿음의 내조 속에서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갈릴리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 거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고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사도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으면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세상의 모든 여인을 향해서 그가 나이 들어 기록한 베드로전서 3장 3-4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 너희는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거나 옷을 차려입는 그런 외적 단장으로 단장하지 말고 4. 오히려 마음의 감추어진 사람으로 단장하라.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니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이니라.” 육체를 위해 은과 금을 섬기는 그릇된 삶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진리로 각자의 속사람을 치장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약 베드로가 그녀의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은과 금을 더 좋아하는 여자였다면 그 온 세상 여인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라고 자신 있게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베드로 아내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앉은뱅이 거지에게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면서 그의 손을 내밀어 앉은뱅이 오른손을 잡아 일으킬 때 그 현장에는 베드로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의 부부인 이브를 만드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24절 “24.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남편과 아내를 한 몸 한 지체로 보십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앉은뱅이 거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손을 내밀고 그의 손을 일으켜 세울 때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베드로의 아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 거지에게 손을 내밀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확고하게 믿음 위에서 있는 베드로 아내로 인해서 베드로가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음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7절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그들과 동거하고 아내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래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자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연약하지만 진리 안에서 생명과 믿음의 삶에 관한한 여자의 도움 없이는 결코 자신의 삶이 완성될 수 없었던 베드로 자신의 체험적인 고백인 것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 거지를 일으켜 세운 베드로가 그와 함께 미분을 통과할 때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그의 아내 역시 베드로와 함께 사도로서의 새로운 인생의 미분을 통과했습니다. 이 땅에서 사도로서의 사역을 마친 베드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얻었다면 그것은 결코 베드로 개인을 위한 상급이 아닙니다. 그 상급은 베드로 아내를 위한 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 몸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두에 말씀드린 두 번째 단계라 말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적용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남자를 먼저 창조하신 뒤에 그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실 때부터 남자가 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완성할 수 있는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창조하시기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남자도 아내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여기에서 간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를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으로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믿음 안에서 진리로 남편을 돕는 것은 남편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
(רזֶע)르제에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돕는 상대방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돕는 상대방이랑 예하고 도와야 할 때 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베드로처럼 세상의 은금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려 할 때 아내는 예하고 도와야 합니다. 남편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보다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보다 더 작은 집 더 작은 자동차로 만족하며 살아가려 할 때 여자는 예하고 도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할 때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할 때 예하는 것이 남편을 지키는 길이요, 자기 인생을 지키는 길이 됩니다.
두 번째 의미는 돕는 반대자 입니다. 여러분 상대를 돕는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예만의 말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 상대를 도우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할 때 주저 없이 지혜롭게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세상의 은금을 더 소중히 여기고 불리와 타협하려 할 때 아내는 아니요. 라고 해야 합니다. 남편이 세상의 은금 눈이 어두어서 진리를 등한시하고 거짓된 길을 서슴없이 나아가려 할 때 아내는 아니오. 라고 그 앞을 가로 막아야 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를지도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남편과 자신과 자식의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 앞에서 망쳐버리는 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남편과 아내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셨음 만하면 이것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해서 예해야 될 때 예하고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요. 라고 구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참으로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형제가 형제에게 아래 사람이 상사에게 상사가 아래 사람에게 목회자가 교인에게 교인이 목회자에게 공직자가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국민에게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요. 라고 말하지 않고 예라고 말해 할때 예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후 2세기에 이미 위경 즉 거짓 문서로 판명되었다 소위 유다 복음서의 곱트어 번역판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연일 언론이 떠들썩합니다. 그 핵심은 카리윳 유다의 배신이 없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한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카리윳 유다는 배신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가능케 한 1등 공신이라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리윳 유다가 아니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차질 없이 반드시 성취되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카리윳 유다가 아니라면 누구를 유혹해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카리윳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가능케 해 준 일등 공신이 아니라. 유혹 앞에 노해야 할 때 노하지 못하고 예함으로 스스로 자멸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은30에 눈이 멀어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요. 라고 말하지 못한 그 카리윳 유다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은금을 더 섬기는 우리 자신들의 실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죄가 대체 어디에서 유래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번째 인간이 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니요. 라고 하고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할 사탄의 유혹 앞에 예라고 대답한 데서 기인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주님의 고난을 진정 우리가 믿고 그 고난을 기리려 한다면 그 믿음과 기름은 해야 할 때 아니요. 하고 아니요. 해야 할 때 했던 은금에 눈이 어두웠던 우리의 옛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24절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24.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로부터 새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보다 세상의 은금을 더 섬기느라 예해야 할 때 아니요. 라고 말하고 아니요. 라고 해야 할 때 예라고 말했던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해야 할 때 예하고 아니요. 해야 할 아니요. 라고 말할 줄 아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부활의 미문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축복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