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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記-25
택당선생집 제9권 / 이식(李植)
기(記)
1동관에 신축한 대청의 기문[潼關新搆大廳記]
2김제군 칩구정기[金堤郡縶駒亭記]
3두실기(斗室記)
4울암사기(鬱巖寺記)
5독서당 남루의 기문[讀書堂南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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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관에 신축한 대청의 기문[潼關新搆大廳記]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 38) 봄에 홀자온(忽刺溫)의 오랑캐 부족이 동관(潼關)에 쳐들어 와 함락시키고는 진장(鎭將 첨사(僉使) 김백옥(金伯玉)임)을 죽이고 불을 지르며 약탈을 하고 사로잡아 가는 등 성을 텅 비게 해 놓고 떠나갔다.
이에 조정에서 곧장 전(前) 만호(萬戶) 원모(元某)를 첨사(僉使)로 삼아 복구하게 하자, 원후(元侯)가 성곽을 보수하고 양식을 비축하는 등 대략적으로 일을 마치고는, 청사(廳事)가 허물어진 곳에다 큰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기가 만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에 백(白), 송(宋), 이(李) 등 세 명의 첨사가 차례로 와서 치적을 쌓아 명성을 떨쳤으나, 청사를 세우는 일만은 계속해서 추진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인년(1614, 광해군 6)에 유후 지경(柳侯持敬)이 처음 부임해 와서, 근실하게 경영에 착수했으면서도 아직껏 예전의 누관(樓觀)을 회복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고는, 군정(軍政)의 틈이 나는 대로 봉록(俸祿)을 털고 자재(資材)를 모아 밤낮으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현량(見糧 현재 비축 중인 군량(軍糧)을 말함)을 축내지 않으면서 공사 비용을 마련하고, 흙 벽돌을 쌓는 일에 사종(私從)까지 모두 동원하여, 한 계절을 넘기지도 않은 기간에 지붕을 덮고 수선하는 공사를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 규모를 보건대, 대청(大廳)이 모두 네 칸이요, 그 밖에도 앞에 행랑채가 있고 동쪽과 서쪽으로 집이 또 들어 섰는데 방은 대청의 넓이만 하였으며, 창문과 섬돌에 이르기까지 정치(精緻)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빈료(賓僚)가 머물 곳이 있게 되고 부곡(部曲 부대의 병사)들도 쳐다 볼 곳이 있게 되었으므로, 기로(耆老)들과 부녀자들 모두가 입이 닳도록 찬탄하면서 ‘우리 진보(鎭堡)가 이제야 비로소 크게 완비되었다.’고 하였다.
아, 동관이 사진(四鎭)의 요충지(要衝地)에 자리하여 백 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막힌 재화(災禍)를 당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다시 떨치지 못하게 될 뻔하였는데, 다행히도 제사(諸使)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성지(城池)와 병계(兵械)가 옛날보다 더 완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사(堂舍) 역시 예전의 누관(樓觀)에 비해 훨씬 더 으리으리해졌으니, 이것이야말로 한 지방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이에 유후(柳侯)가 또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편액(扁額)으로 내걸어서 후세에 보여 줄 목적으로 나에게 와서 그 기문(記文)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런데 내가 듣건대, 유후가 이 공사를 마친 뒤에, 절도공(節度公)이 군진(軍鎭)의 대비 태세를 점검해 보고는 그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상소를 올린 결과, 상으로부터 발탁되는 은상(恩賞)을 허락받았는데, 유사(有司)가 그 일을 다시 아뢰어 중지시켜 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후가 그 일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서, 오히려 정성스럽게 문자로 기술하여 남기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옛날에 공명(功名)을 이루려는 인사들을 보면, 비록 신분이 편비(褊裨)에 속해 있고 항오(行伍) 사이에서 활동하는 몸이라 할지라도, 충성심을 분발하고 의리에 입각해 떨쳐 일어남으로써, 그 명성과 공적이 죽백(竹帛)에 빛나고 그 사업이 춘추(春秋)에 드리워지게 되곤 하였다. 그러니 우청타자(紆靑拖紫)하기만 할 뿐 아무런 능력도 없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자들과 비교해 본다면, 모르겠다만 과연 누가 낫다고 하겠는가.
지금 유후가 한때 과시할 만한 일을 가지고 귀하게 여기지를 않고, 불후(不朽)하게 되려고 도모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으니, 유후의 그 뜻이 정말 원대하다고 하겠다. 뒷날 유후가 큰 화란(禍亂)을 막고 크나큰 공훈을 세워, 기린각(麒麟閣)에 초상화가 내걸리고 연연산(燕然山)에 비석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 진정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할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하나의 진보(鎭堡)와 하나의 건물을 완비하는 정도로 그칠 일이겠는가.
돌아 보건대, 나는 문장 실력이 졸렬하기 때문에 이 일을 영원히 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유후의 지개(志槩)를 나름대로 흠모한 나머지 한번 글로 표현해 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북쪽 변방의 장사(將士)들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어, 예로부터 공명(功名)을 세웠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실체를 알게 함으로써, 어디까지나 이쪽 방향으로 노력해야지 다른 방향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바이다.
병진년 모월 모일 병마평사(兵馬評事) 이식은 쓰다.
[주-D001] 동관 :
함경북도 종성(鍾城)에 있는 진(鎭) 이름으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군영이 있었다.
[주-D002] 우청타자(紆靑拖紫) :
청색과 보라색 인끈을 늘어뜨린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공후(公侯)는 보라색 인끈을 차고, 구경(九卿)은 청색 인끈을 찼다.
[주-D003] 기린각(麒麟閣) :
한 선제(漢宣帝) 때 곽광(霍光) 등 11인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던 공신각(功臣閣)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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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제군 칩구정기[金堤郡縶駒亭記]
3.두실기(斗室記)
나의 사제(舍弟)인 재(材)가 상산현(常山縣) 두곡(斗谷)에 우거(寓居)하면서, 그 집의 서북쪽으로 매우 비좁은 공간이나마 맑은 정취가 우러나는 그윽한 곳을 택하여, 세 칸의 방을 만들고 띠풀로 지붕을 덮는 등 간소하게 집을 짓고는, 연거(宴居)하며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기에, 내가 그 집의 이름을 두실(斗室)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렇게 이름을 지은 까닭은, 대개 민간에서 모난 형태의 협소한 집을 두실(斗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있고, 우리나라에서 발음할 때 곡(谷)을 ‘실’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가 사는 곡(谷)의 지명에 착안하여 실(室)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니, 이 또한 간단한 방식을 채택하여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하겠다.
세상을 떠난 나의 벗 임무숙(任茂叔 무숙은 임숙영(任叔英)의 자(字)임)이 일찍이 어떤 이를 위해 두정기(斗亭記) 수천 언(言)을 지어 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정자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치 말[斗]로 물건을 되듯 하면서, 세간의 인물들을 수십 종으로 분류하여 차례로 서술해 나간 것이었는데, 그 글이 포박자(抱朴子)의 인품론(人品論)과 비슷하면서도 그 표현이 특히나 기발하였기 때문에, 학자들이 많이들 전송(傳誦)하였다.
하지만 지금 재(材)가 우거하는 곳은 궁벽진 산골이라서 왕래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을 뿐만이 아니요, 또 이곳을 단지 독서하는 공간으로만 삼고 있을 따름이니, 임자(任子)의 설을 다시 취해서 덧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되지 못하겠기에, 그저 나 자신이 젊어서부터 행해 온 나름대로의 독서법이나 은밀히 전해 줘 볼까 한다.
나는 성품이 무척이나 노둔한 데다 습관 또한 게으르기 짝이 없는데, 젊어서부터 또 병치레를 많이 하는 바람에 제대로 독서에 공력을 들이지 못하였다. 그리고 병이 좀 뜸해질 때면 문득 간책(簡冊)을 가까이 해 보기도 하였지만, 서너 번 읽어 보는 것에 불과하였고 심할 경우에는 눈가림용으로 한번 스쳐 지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바야흐로 열독(閱讀)할 때에 이르러서는, 경(經)의 경우는 대략 그 의리를 탐구한 다음에 내 몸에 적용을 해 보고, 사(史)일 경우에는 그 득실(得失) 관계를 대략 따져 본 다음에 오늘날의 세상에 비추어 보곤 하였으며, 운문이나 산문의 경우에는 대략 그 의의(意義)를 본따서 나의 입으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곤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읽다 보면 재미도 있을 뿐 더러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도 간혹 기억이 나곤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나와 함께 글을 읽은 사람들을 보면, 상당히 총명하고 민첩할 뿐만 아니라 독서에 쏟는 공력도 나의 몇 배는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어버린다고 늘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면, 그들이 대답하기를,
“나는 경(經)을 읽을 적에는 강석(講席)에서 합격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사(史)를 읽거나 시문(詩文)을 대할 때에는 과장(科場)에서 채택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고 한다.
아, 경을 읽는 목적은 도를 밝히기 위함이요, 사(史)는 옛날 일을 상고하기 위함이요, 시문은 나의 글을 짓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가 성현의 덕을 쌓고 수업해 나가는 바탕이 되는 것들이지, 과시(科試)를 잘 치르기 위해서 마련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이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읽어 나간다면, 참으로 옛 성현들의 본지(本旨)와는 어긋난다 할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져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 나는 그동안 글을 읽을 때 과시(科試)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대충 보고 넘어갈 뿐 정밀하게 연구하지 못한 병통이 있었다. 그래서 경(經)을 내 몸에 적용해 보았어도 그 뜻을 충만하게 채울 수가 없었고, 사(史)를 오늘날에 견주어 보았어도 조치해서 시행할 수가 없었으며, 시문을 보고 나의 목소리로 표현해 보려고 생각했어도 글 지을 때 윤색(潤色)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두커니 서서 범속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글을 읽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낀 나머지 시간이 오래 지나도 간혹 기억해 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거꾸로 과시(科試)에 도움이 되어 급제할 수 있었으니, 이는 장경(匠慶)이 상 받을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 가운데 우(虞) 제사를 제대로 지내게 하였던 일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지금 재(材)가 빈한한 살림에 해야 할 일은 많아 근실하게 송습(誦習)하지 못하는 것을 늘 고민하고 있는데, 행여 나의 독서법을 가지고 시험해 본다면 도움이 되는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령 옛날 성현들의 독서법을 다시금 찾아 보려 한다면, 나의 방법과는 같지 않은 점이 있으니, 단계를 밟아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숙독(熟讀)을 하면서 정밀하게 사색하는 것이 바로 그 대요(大要)라 할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 방법대로 행해 본 적이 없으니 감히 재(材)에게 꼭 그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데, 재가 만약 그런 의향을 갖고 있다면 나의 조악(粗惡)한 독서법은 내던져 버려도 좋을 것이다.
[주-D001] 우리 …… 때문에 :
예컨대 대곡(大谷)을 ‘한실’이라 하고, 수곡(水谷)을 ‘무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한다.
[주-D002] 포박자(抱朴子)의 인품론(人品論) :
포박자는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호인 동시에 그가 지은 책 이름이다. 그 책은 내편(內篇) 20편과 외편(外篇) 52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외편 중에 행품편(行品篇)이 들어 있다.
[주-D003] 장경(匠慶)이 …… 일 :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소군(小君) 정사(定姒)가 죽었을 때, 당시 실력자인 계문자(季文子)가 장례에 대한 일을 소홀히 하며 우제(虞祭)도 지내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도목수인 장경(匠慶)이 계문자의 관재용(棺材用) 나무를 베어 관곽(棺槨)으로 쓰고 원만하게 우 제사를 지내게 했던 고사가 있다. 《春秋左傳 襄公 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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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울암사기(鬱巖寺記)
5.독서당 남루의 기문[讀書堂南樓記]
호당(湖堂)이 왜란(倭亂)으로 불타 없어지면서 호당 인원의 선발도 따라서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 41)부터 다시 임시로나마 한강(漢江)의 옛 군영(軍營)을 활용해서 독서당을 개설케 되었다. 그런데 군영이 원래 병풍처럼 둘러 쳐진 산천(山川)의 요지(要地)에 자리하고 있었던 만큼 그 형승(形勝)이 옛날 독서당보다 뒤지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남루(南樓)로 말하면 본래 목적이 망루용(望樓用)이었기 때문에 원근의 경치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더더욱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번름(番廩)이 정지되면서부터 우리들은 한갓 헛된 명호(名號)만 지니고 있을 따름이었는데, 독서당이 다시 개설되었다고는 해도 관료(官僚)가 1년에 2, 3명에 불과하였고, 심지어는 수직(守直)하는 일조차도 소홀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몰아치는 비바람에 담이 무너지고 기와가 떨어지는가 하면 남루 역시 금방이라도 무너질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난해인 신미년(1631, 인조 9) 연간에 동료(同僚)인 만사(晚沙) 이군 경의(李君景義)가 남루의 모습을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개연(慨然)한 생각을 품고는, 약간의 재력(材力)을 조달하여 수치(修治)한 결과, 썩은 기둥이 바뀌어지고 기울어진 누대가 바로 세워지면서 단청(丹靑)이 화려하게 빛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선생(先生)들이 언젠가 한가한 날을 택해 여기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한바탕 심회를 푼 뒤에 모두 말하기를,
“이 공역(工役)이야말로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때에 이루어진 일인 만큼, 비록 소가(小架) 서루(書樓)라 하더라도, 그 연혁(沿革)을 알아보게끔 기록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나에게 한번 붓을 잡아 보라고 권유하였다.
나는 이 독서당의 흥망(興亡)과 관련하여, 이는 문운(文運)의 성쇠(盛衰)와 직결되는 일이라고 일찍이 감회에 젖은 적이 있었다. 국초(國初)에 여씨(麗氏 고려(高麗))의 폐습(弊習)을 이어받았을 때에는 승방(僧房)과 이원(尼院)이 성곽 밖에 즐비하다가 그 뒤로 차례차례 허물어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위치가 바뀐 독서당 자리를 말하더라도, 모두 범패(梵唄 여래의 공덕을 찬미하는 불교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던 곳이었으니, 당시에 얼마나 사문(斯文)을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격했는지를 지금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니 가령 중흥(中興)을 이룬 수십 년 동안, 내지(內地)에 병란(兵亂)의 걱정이 실로 없어져서, 그야말로 군부(軍府)를 혁파하고 그곳을 등영(登瀛)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었더라면, 전쟁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이 문교(文敎)를 떨칠 계기가 점진적으로 마련되어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만 서융(西戎)이 다시금 으르렁대고 있어 날마다 병량(兵糧)을 일삼는 형편이 되고 말았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이 독서당도 전대(前代)의 융성한 모습을 다시 보여 주지 못한 채, 이군(李君)이 일시적으로 수선한 것을 크게 다행으로 여기고만 있으니, 이 또한 비통하기 그지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가파른 비탈길도 언젠가는 평탄한 길로 바뀌고 괴란(壞亂)의 상태가 한계점에 이르면 새로운 운세(運勢)가 열려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바야흐로 문사(文事)가 전폐(全廢)되는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극에 이르면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 또한 당연하다.
그리고 성상께서도 이를 진작(振作)시키려고 관심을 두고 계시는데, 다만 시대 상황이 험난해서 그렇게 할 겨를이 없으실 따름이니, 장차 어두운 재앙의 그림자를 깨끗이 몰아내고 규벽(奎壁)이 찬란하게 빛나게 할 그날이 기필코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런데 사문(斯文)이 흥기(興起)하는 것이 바로 이 독서당에서부터 시작될 것이 확실하고 보면, 이군의 이번 공역(工役)이야말로 장차 옛 문물을 회복시키는 선구자 역할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에 이렇게 기록하는 바이다.
[주-D001] 호당(湖堂) :
독서당의 별칭이다. 조선조 때 문학에 뛰어난 문관을 선발하여 오로지 학업만 닦게 하던 서재 이름이다.
[주-D002] 번름(番廩) :
독서당의 학사(學士)들에게 지급하는 녹봉(祿俸)을 말한다.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개설하고,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의 학사를 뽑은 뒤, 3번(番)으로 나누어 직숙(直宿)케 하면서 5품(品)의 진선(珍膳)을 지급케 했던 고사가 있다. 《翰林志》
[주-D003] 등영(登瀛)의 장소 :
독서당을 가리킨다. 등영은 등영주(登瀛洲)의 준말로, 당 태종(唐太宗)이 개설한 문학관(文學館)에 들어가는 학사들을 당시에 영주(瀛洲) 즉 선계(仙界)에 올라 갔다고 부러워했던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개설하고,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의 학사를 뽑은 뒤, 3번(番)으로 나누어 직숙(直宿)케 하면서 5품(品)의 진선(珍膳)을 지급케 했던 고사가 있다. 《翰林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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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당선생 별집 제5권 / 이식(李植)
기(記)
1수심정기(水心亭記)
2화순동헌기(和順東軒記)
3연초재기(宴超齋記)
4영언당기(永言堂記) 신사년
5무우정기(舞雩亭記)
6독서당(讀書堂)의 옛 터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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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심정기(水心亭記)
내가 해서(海西) 지방을 차례로 돌아다닐 적에, 서악(西岳)에 올라가 굽어 보기도 하고 백사장(白沙場)도 거닐어 보며 용소(龍沼)도 기웃거리다가, 백령도(白翎島)에 들어와 열두 개의 기이한 봉우리를 쳐다보고 서쪽으로 망망한 대해(大海)를 멀리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위연(喟然)히 탄식하기를 “너무도 장엄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마는, 이 황량한 벽지(僻地)에 인적(人跡)이 모두 끊어진 채 사람 하나 머물 만한 집이나 누대(樓臺)가 전혀 보이지를 않으니, 이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서 돌아온 뒤에 바닷길을 따라 수양(首陽) 남강(南江)에 이르러 이른바 수심정(水心亭)이란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이곳은 대개 윤 사문 동로(尹斯文東老)가 건축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명소(名所)였다.
정자는 해안선이 안으로 쏙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남강에 밀물과 썰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아득히 출렁거리는 물결이 그 앞과 왼쪽을 감싸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로 연결된 산줄기며 홀로 떨어진 모래톱, 굽이진 강 언덕과 끊긴 절벽들이 거의 십여 개나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며, 정자 주위에는 새로 가꾼 소나무 수천 그루가 마치 구름이 하늘을 덮듯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이에 내가 또 탄식을 발하기를 “아름답도다. 경관(景觀)도 기막히고 정자도 멋지기만 한데, 이렇듯 얻기 어려운 두 가지 아름다움을 한데 합쳐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으뜸의 명소로 꼽는 이유가 될 법하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열흘쯤 지난 뒤에 윤장(尹丈)이 정자를 소재로 그동안 지은 시첩(詩帖)을 가지고 역려(逆旅)로 나를 찾아와 보여 주며 소회(所懷)를 토로하기를,
“아, 이곳은 우리 율곡 선생(栗谷先生)께서 즐기셨던 곳이다. 선생께서 석담(石潭)에 터를 잡으시기 전에 남강(南江)에 거주해 보려고 하셨던 것이 몇 차례나 되었는데, 그때마다 전토(田土)가 없어서 그만두곤 하셨다. 그래서 일찍이 자그마한 정자 하나를 짓고서 호연(浩然)이라고 편액(扁額)을 붙인 다음, 이따금씩 소년들을 이끌고 바람을 쏘이며 시가(詩歌)를 읊고 돌아오시곤 하였는데,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로 이 정자 역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백발의 늙은 문생(門生)으로서, 세상에서 외톨이로 따돌림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또 난리를 겪은 이후로는 더더욱 벼슬살이가 싫어지기만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선생께서 나에게 남겨 주신 일이 있기에, 한적한 곳을 찾아 옛날 선생께서 노니시던 유허(遺墟)를 우러러 바라보며 스승을 모시는 것처럼 살아 보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년(某年)에 이곳으로 옮겨 와 살면서, 호연정이 있던 터 남쪽에다 정자를 세우고, 종신토록 산앙(山仰)하는 나의 뜻을 붙여 보려고 한 것이니, 당초 좋은 경치를 관람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었다.
정자 이름을 수심(水心)이라고 한 것은 대개 추월 한수(秋月寒水)의 뜻을 취하여 자신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듣건대 그대가 나의 정자에 대해서 극찬(極讚)을 하였다 하니, 어찌 이 뜻을 드날리는 한마디 말을 안 해 주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내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찬양하기를,
“지극하기도 하여라. 누구라서 이 정자와 감히 어깨를 겨루리요. 사람은 땅의 주인이요, 성현은 사람 가운데에서 빼어난 분이시다. 땅이 좋아도 사람이 없으면 아직 완전치 못하고, 사람은 있어도 성현이 없다면 지극하다고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공은 산과 바다의 승경(勝景)을 독차지하면서 노선생께서 남겨 주신 은택(恩澤)까지도 아울러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바다 구경을 한 사람에게는 물에 대해서 말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에서 노닐어 본 자에게는 그럴 듯한 말을 하기가 어렵다.’라고. 그러니 광망(狂妄)하고 경솔하기만 한 소자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드날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만력(萬曆) 정사년 동짓달 하순에 덕수 후생 이식은 쓰다.
[주-D001] 수양(首陽) :
해주(海州)의 옛 이름이다.
[주-D002] 산앙(山仰) :
고산앙지(高山仰止)의 준말로, 그지없이 존경하며 우러러 사모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거할(車舝)의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 길을 가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3] 추월 한수(秋月寒水) :
가을 달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맑기만 하고, 차가운 강물처럼 투철하고 명징(明澄)한 철인의 경지를 뜻하는 말인데, 아마도 율곡의 시문에 이 구절이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인 듯하다. 참고로 주자(朱子)의 ‘재거감흥(齋居感興) 이십수(二十首)’에 “삼가 천 년의 마음을 살피건대, 가을 달이 찬 강물을 비추는 듯하도다. 노수의 스승 어찌 한 사람만 있으리요, 성현께서 전해 주신 법도가 모두 스승일세.[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 魯叟何常師 刪述存聖軌]”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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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순동헌기(和順東軒記)
3.연초재기(宴超齋記)
대체로 보통 인간의 마음이란, 현재 처한 곳에 안주(安住)하면 뜻이 응체(凝滯)되면서 성정(性情) 또한 덩달아 거기에 빠져 버리게 되는 법이다. 비록 그 처한 곳이 번잡하거나 간소한 차이가 있고 고요하거나 시끄러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책을 읽다가 양(羊)을 잃어버리든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리든 그 결과는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산림(山林)에 숨어 사는 인사들의 경우, 한가한 곳에 처하여 소박한 생활을 즐기면서 스스로 뜻에 흡족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일단 그곳에 응체되고 나면 결국은 거기에 빠져 버리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천석고황(泉石膏肓)이니 연하고질(煙霞痼疾)이니 하는 비유가 나오게 된 것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부귀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이보다 정도가 훨씬 더 심할 것이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겠다.
부마도위(駙馬都尉) 현강공(玄江公)은 빛나는 훈업(勳業)을 세운 경상(卿相)의 가문 출신으로, 제왕의 외척(外戚)이 되는 신분에다 지위 또한 삼공(三公)의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현재 귀하게 영달한 인신(人臣)으로서 공보다 윗자리에 거하고 있는 이는 아주 드물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그런 것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소싯적부터 유자(儒者)의 법도를 몸에 익히고 문예(文藝)를 전공하며 오직 사한(詞翰)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삼아 왔다.
공의 저택은 목멱산(木覓山) 기슭 가까이에 있는데, 일찍이 그 정당(正堂)의 문 옆에다 서재(書齋)를 만들고 세 개의 서가(書架)를 올린 뒤, 서책을 시렁에 올려놓고 도화(圖畫) 두루마리를 걸어 놓는가 하면 필연(筆硯) 등 제구(諸具)를 좌우에 비치해 두었다. 그리고는 이곳에 물러나 말 없이 앉아 있곤 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도 현귀(顯貴)한 작록(爵祿)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멀리 속세 밖으로 초월한 것같이 느껴졌다.
어느 날 내가 공을 찾아가 뵙고서는, 일찍부터 귀한 신분이 되어 화려한 생활을 하시던 분이 어떻게 이렇듯 그 뜻이 이런 분위기 속에 응체(凝滯)되지 않았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는데, 이와 함께 《도덕경(道德經)》의 이른바 “아무리 굉장한 구경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동요되지 않고 편안히 거하면서 외물(外物)을 초월한다.[雖有榮觀 宴坐超然]”라는 말이 기억나기에, 이것을 편액(扁額)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공이 반색을 하며 허락하고는 나에게 그 뜻을 해설하는 기문(記文)을 지어 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평소에 노씨(老氏)의 글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이 뜻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부끄럽기만 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현강공은 본래 고아(高雅)한 지취(志趣)를 지니신 분이다. 그러니 비록 도성 궁궐에 있다 하더라도 공의 뜻은 항상 고산(高山) 유수(流水) 등 마음이 맑게 툭 터지는 그런 곳에 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것이 이른바 초연(超然)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대답하기를,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정씨(程氏)가 경계한 좌치(坐馳)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 처한 곳에 응체되지 않으려고 하다가 거꾸로 달리 좋아하는 곳에 이끌림을 당하다니, 그런 것을 어찌 공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그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어떤 것을 초연(超然)이라고 한단 말인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초연의 진정한 뜻은, 오직 현재 처한 곳에 응체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또 달리 좋아하는 곳에 이끌림을 당하지 않는 그런 경지의 소유자만이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강공의 경지 안에 들어 있는 일이니,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상의 설을 가지고 기문에 가름하기로 하였다.
숭정(崇禎) 임신년 겨울에 덕수 이식은 이 원고를 현강 태좌(台座) 아래에 바치다.
[주-D001] 책을 …… 것 :
《장자(莊子)》 변무(騈拇)에, “노비인 장(臧)과 곡(穀)이 양을 치다가 양을 잃어버렸는데, 장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책을 끼고 글을 읽다가 그랬다고 하고, 곡에게 물어 보니 노름에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됐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한 일은 서로 다르나, 양을 잃어버린 것은 결과적으로 똑같다.” 하였다.
[주-D002] 천석고황 …… 비유 :
마치 병마(病魔)가 고황에 들어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되듯 그렇게 산수(山水)에 대해서 애착심(愛着心)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당 고종(唐高宗)이 숭산(嵩山)에서 전유암(田游巖)을 만나 그의 근황을 묻자, 유암이 “천석이 고황에 들고 연하가 고질화된 몸이 다행히 태평성대를 만나 소요하고 있다.”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舊唐書 隱逸傳 田游巖》
[주-D003] 아무리 …… 초월한다 :
노자(老子)의 《도덕경》 26장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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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언당기(永言堂記) 신사년
5.무우정기(舞雩亭記)
채 별제 영이(蔡別提詠而)가 낙강(洛江)의 우담(雩潭)에 새로 살 집을 마련하고는, 천신 선생(薦紳先生)의 글을 구하여 그 빼어난 경치를 묘사하게 하고, 스스로 가사(歌詞)를 지어 그 그윽한 운치를 서술한 다음, 나의 변변찮은 글솜씨로 정기(亭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살펴보건대, 우담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실려 있는 바, 상산(商山) 중심지에서 2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맥에서 뻗어 나온 능선 한 줄기가 강물에 가로막혀 멈추면서 움푹 패여 골짜기가 된 곳이 바로 군의 집터였다.
위아래가 모두 바위로 뒤덮인 묏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 있으니 그 이름이 옥주봉(玉柱峯)이요, 마치 흙을 쌓아 놓은 듯 위가 평평하여 앉아서 노닐 수 있는 높다란 대(臺)가 있으니 그 이름이 자천대(自天臺)인데, 이는 모두가 그 지방 사람들이 옛날부터 불러온 이름들이다.
강의 정상적인 흐름이 산의 바위를 만나 곧장 흘러내리지 못하고 고리처럼 빙 두르면서 담수(潭水)가 형성되었는데, 하도 깊고 고요하여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 물 아래에 복룡(伏龍)이 살기 때문에 그곳의 경치가 제 아무리 기막히게 좋아도 사람이 감히 그 근처에 터를 잡고 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 언젠가 큰 물이 지고 가뭄이 들었을 때 그곳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우(雩)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나, 그 일이 어느 시대 때의 일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강 복판에 있는 커다란 바위 모양이 마치 햇볕을 쪼이는 거북이 같다 하여 귀암(龜巖)이라 부르고 있으며, 봉우리 아래에 있는 석굴(石窟)은 책을 감춰 두고 거문고를 탈 만한 장소인데도 아직 붙여진 이름이 없다. 이상이 그 지형의 대략적인 내용인데, 그 밖에 멀고 가까이 이어지는 풍경들과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경치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 실려 있는 만큼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채군(蔡君)은 박학다식한 기사(奇士)이다. 청낭(靑囊)의 비결을 탐색하여 이곳에 집터를 잡은 뒤, 곧장 신물(神物)과 이웃하여 풍월(風月)을 반절씩 나눠 갖고 맛있는 물고기들을 함께 잡아먹으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으니, 이는 속인(俗人)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못낼 일이다.
정자의 이름이 무우(舞雩)인 것은 물론 우담(雩潭)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채군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에 두루 통하면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면서도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제자리로 다시 돌아와 안식을 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무우라는 이 이름 역시 공문(孔門)의 풍영(風詠)의 낙을 뒤쫓아 올라가 그 본원(本源)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여겨지는 것이다.
내 생각에, 군의 선대부(先大夫)께서 기(沂)라는 글자를 가지고 군의 이름을 지은 것 역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점지해 준 것은 아닐까 하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산수(山水)의 멋진 경치를 군 홀로 독점하고 무우(舞雩)의 정취를 군 스스로 터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한두 마디 말이 아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느껴지는 점이 있다. 군의 고왕부(高王父)인 나재공(懶齋公)은 박학다식한 데다 굳은 절조의 소유자로, 밝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고 종정(鍾鼎)에 이름이 새겨지기까지 하였었다. 그런데 만년에 결단을 내려 함녕(咸寧)에 물러나 은거하며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살았는데, 그 정자는 바로 우담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공이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죽어 마치 매미가 껍질을 벗듯 육신을 벗었다고도 하나, 식자(識者)들은 공이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한 것을 더욱 가치있게 생각하는데, 요컨대는 공 역시 신선자(神仙子)의 유파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지금 군이 비로소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마 하나 얻어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더 높이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장차 암혈(巖穴)에 은거하여 물이나 마시면서 귀룡(龜龍)과 벗하려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선조의 뜻을 크게 이어받는 일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채군은 이제 제대로 있을 곳을 얻게 되었다. 선조의 유칙(遺則)도 있고, 선군(先君)이 미리 점지해 준 이름도 가졌거니, 어찌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집안은 채군의 선대(先代)와 세교(世交)를 맺은 사이이다. 그래서 내가 어려서 나재공의 쾌재정 시를 읽고는 마음속으로 흠모해 왔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다 늙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어렵던 시대 상황도 조금 안정을 되찾고 있으니, 수명을 약간이나마 더 연장시켜 좋은 여생을 누릴 수만 있다면 벼슬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인데, 아무리 늦더라도 이 일만은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군이 기문(記文)을 청해 왔기 때문에 애면글면 이렇게 써 보았는데, 이는 군을 권면하는 동시에 나를 채찍질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로써 기문을 가름할까 한다.
[주-D001] 채 별제 영이(蔡別提詠而) :
별제는 6품 벼슬이고, 영이는 채득기(蔡得沂)의 자(字)이다.
[주-D002] 상산(商山) :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
[주-D003] 채군(蔡君)은 …… 기사(奇士)이다 :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에 통달한 가운데,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卜筮)ㆍ음률ㆍ병법 등에도 밝았다. 인조 14년(1636)에 천문을 관측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상주(尙州) 자천대(自天臺)에 들어가 두문불출 독서에 전념했으며, 병자호란 후 심양(瀋陽)에서 봉림대군(鳳林大君) 즉 효종(孝宗)에게 태공 병법(太公兵法)을 전수하고 함께 돌아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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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독서당(讀書堂)의 옛 터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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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문집 제42권 / 이황(李滉)
기(記)
1.유람할 만한 단양(丹陽)의 산수에 대한 속기(續記)
가정 무신년(1548, 명종3) 봄 내가 처음 단양에 수령(守令)으로 나갔었는데, 마침 그해 흉년을 만나 공사 간에 곤급(困急)하고, 질병의 우환이 더하여, 흉년을 다스리는 정사 외에는 항상 마음이 우울하여 문을 닫고 날을 지낼 뿐이며, 산수(山水)에 노는 것이 여의치 못하였다. 간혹 기민(飢民)을 구제하려고 때로 시냇가나 산곡 사이를 왕래하다가 한두 군데 좋은 곳을 얻어 보았다. 급기야 편력한 곳이 더욱 많아지고, 보는 바가 더욱 기이하게 되어서는 스스로 ‘단양의 산수에는 거의 남은 유감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최후에 이른바 구담(龜潭)이란 곳을 보고는, 비로소 앞에 본 것은 기이함이 되지 못하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것과 전 사람의 기술(紀述)에 실려 있는 것이 오히려 갖추어지지 못함을 알았다. 우선 내가 다녀본 차례대로 말하려 한다.
고을의 서쪽에 단구협(丹丘峽)이 있다. 협이 끝나는 곳에서 남으로 들어가서 설마동(雪馬洞)에 당도하니, 동문(洞門)이 깊숙하고 길다. 동서의 돌벼랑에 붉고 푸른 것이 서로 마주 비치고, 맑은 샘이 솟아나고 흰 돌이 쭈뼛쭈뼛하다. 시내를 따라 몇 리가량 가는데, 그 계곡이 끝날 때까지 옥이 구르는 듯한 물소리가 사랑스럽다. 벼랑이 다해서는 넓은 골짝이 보이는데, 깊숙하고 그윽하여 살 만도 하고, 밭을 갈 만도 하니, 유유자적하며 은거해 살 만한 곳인데, 이제 백성이 수십 호만 그 가운데 살고 있으니, 애석하다. 동으로 장림역(長林驛)에 나와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시내를 따라 10리쯤 들어가면 사인암(舍人巖)이란 것이 있으며,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옛 군수 임제광(林霽光)의 기문(紀文)에 나타나 있다. 또 거기에서 남으로 8, 9리를 가는데 시내와 골짜기가 아름다워 구경할 만하다. 북으로 매포(買浦)로 건너가는 나루가 있으니, 상진(上津)이라 한다. 그 아래에 석벽이 하늘에 닿고 그림자가 푸른 못에 거꾸로 비친 곳은 탁영공(濯纓公 김일손(金馹孫))이 말한 서골암(棲鶻巖)이라는 곳이다. 나루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동으로 빙 둘러 들어가면, 큰 바위의 세 봉우리가 물 가운데 높이 솟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도담(島潭)이요, 또 서쪽 벼랑의 승경과 돌문[石門]의 기이함이 있는데, 이것이 홀로 세상에 이름 난 것으로 승람(勝覽)에 기재되어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나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남천(南川) 위에 부처바위[佛巖]란 것이 있으니, 가장 기이하나 역시 임후의 기문(紀文)에 나타나 있다. 내가 일찍이 찾아가 보았는데 빈 골짝으로 들어가 맑은 물을 건너서 높은 산에 올라 끊어진 산기슭에 다다라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아득하게 속세를 버릴 생각이 나게 하였다. 산을 내려와 구름과 나무 아래의 맑은 내와 흰 돌 사이 걷기를 또 6, 7리 만에 부처바위에 이르렀다. 바위가 양산(兩山) 곁 붉은 벼랑 아래 있는데, 시내 위에 백여 보의 바위가 깔려 있는데 흰 눈이 덮이고 흰 담요가 첩첩으로 쌓인 것 같다. 그렇게 모두 세 층계인데, 물이 그 사이로 흘러 굽이돌며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폭포가 아래층 아래로 떨어져, 합하며 하나의 깊고 넓은 웅덩이가 되니, 푸르고 맑기가 거울과 같다. 피라미 10여 마리가 뛰어 놀고 그 위에는 석대(石臺)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평탄하고 윤택하여 앉아서 고기가 노는 것을 구경할 만하다. 그 동쪽에 여러 바위가 서로 기대서 있는 것이 보기 좋게 담아 놓은 음식과 같고, 그 아래는 텅 비어 집 모양이 되었으니 비를 피할 만하다. 바위의 사면(四面)에는 봄이면 철쭉꽃[躑躅]이 타는 노을 같고 가을이면 단풍(丹楓)이 찬란한 비단 같으니, 바위는 진실로 기이한 경치 중에서 더욱 기이하다. 임후가 불(佛) 자를 고쳐 선(仙) 자로 대신한 것은 매우 좋으나, 다만 그 돌형태를 형용한 것이 너무 실상에서 벗어났으니, 아마 임후는 일찍이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남이 자랑하는 말만 듣고, 드디어 붓을 들어 쓴 까닭인가 한다. 아아, 내가 얻은 바가 이에 이르러 드디어 스스로 족한 마음이 생기는 까닭은 내가 본 것이 넓지 못함에 있으리라.
여름 5월에 내가 첩보(牒報)하는 일로 청풍(淸風)에 가려고 하진(下津)에서 배를 타서 단구협(丹丘峽)을 나가 구담(龜潭)을 경유하여 화탄(花灘)에서 내렸다. 이날은 비가 내렸다 개었다 하여 구름과 안개를 토하고 삼킴에 언덕과 골짜기가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여 잠깐 사이에 만 번이나 변하고 넘치는 물은 급하게 흐르니, 배가 너무 빨리 가므로 비록 그 거룩한 장관은 무궁하나 제대로 구경할 길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청풍군 응청각(凝淸閣)에 유숙하고 이튿날 새벽의 서늘함을 틈타서 사람을 시켜 배를 끌어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삼지탄(三智灘)을 지나 내매담(迺邁潭) 위에 이르러 지붕을 걷고 바라보니, 물이 두 골짜기 사이에서 나와 높은 데서 바로 쏟아지니, 굴러 내리는 돌이 그 아래 있는 뭇 돌을 치며 성난 기세가 분주히 달아나 구름이나 눈 같은 물결이 출렁거리고 용솟음치는 것은 화탄(花灘)이요, 산봉우리는 그림 같고 골짜기는 서로 마주 벌어져 있는데, 물은 그 가운데에 괴어서 넓고 맑고 엉키고 푸르러 거울을 새로 갈아서 공중에 걸어 놓은 것 같은 것은 구담(龜潭)이다. 화탄을 거슬러 남쪽 언덕 절벽 아래로 따라 오르면, 그 위에 여러 봉우리를 깎아 세운 것이 죽순(竹筍) 같아서 높이가 천백 장(丈)이나 되며 우뚝하게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빛은 푸르기도 하고 창백(蒼白)하기도 하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古木)이 우거져 아득하고 침침한데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오르지는 못하겠다. 내가 옥순봉(玉筍峯)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형상 때문이다. 구담의 북쪽 가는 곧 적성산(赤城山)의 한 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우뚝 끊어져 있다. 그 봉우리 중에 큰 것이 세 개 있는데 다 물에 다다라서 높이 빼어났지만,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층층으로 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나고 우뚝우뚝한 돌이 서로 끌어당겨 귀신이 새긴 것 같으며 기기(奇奇)하고 괴괴(恠恠)함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이때에 처음으로 산에 비가 개어서 골짜기의 기운은 새롭고 운물(雲物)이 맑고 고왔다. 마침 현학(玄鶴)이 가운데 봉우리에서 날아와 몇 차례 빙빙 돌다가 구름 낀 하늘로 멀리 들어가는지라, 내가 배 안에서 술을 들고 시를 읊으니 초연히 서늘한 바람을 타고 허공에 노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때문에 그 봉우리 아래에 있는 것을 채운(彩雲)이라 하고, 그 가운데 봉우리를 현학(玄鶴)이라 한 것은 그 보이는 대로 지은 것이고, 그 상봉을 오로(五老)라 한 것은 그 형상을 따른 것이다. 배를 저어 조금 올라가다가 꺾여서 북으로 가니 이미 가운데 봉우리를 지나 오로봉 아래에 배가 닿았다. 그 봉우리의 동쪽에 또 큰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단구(丹丘) 골짜기와 서로 이어졌으니, 이것은 지지(地誌)에 이른바 가은암(加隱巖) 산이며 가은성(可隱城)이 그곳에 있다. 물이 장회탄(長會灘)으로 흘러 서쪽으로 구봉(龜峯) 언덕에 부딪쳐 돌아 구담의 머리가 되고, 또 북으로 돌아서 서쪽으로 꺾여서 구담의 허리가 되고, 구담의 꼬리는 채운봉의 발치에서 다하였다. 가은봉이란 곳은 물이 북으로 돌아 서로 꺾어지는 구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오로봉과 서로 대하였고, 그 두 봉우리 사이에 골짜기가 있으니, 아연하게 남으로 향하였으며, 깊고 고요하여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고 동문(洞門) 밖에 편편한 자갈밭[磯]이 있는데, 물에 다다른 것이 마루와 뜰 같아서 낚시하며 놀 수가 있다. 오직 이 한 구비에서 모든 경치가 모여 있는 것을 감상할 수 있으니 옛사람이 가은(可隱)이라 이름 지은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내가 미투리를 신고 대지팡이를 짚고 운문(雲門)을 두드리고 고적(古跡)을 찾아 옛사람이 은거하던 곳을 찾아 은자의 약속을 맺고자 하여도 병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자미(杜子美)의, ‘어느 때나 한 띳집[茅屋]으로 흰 구름[白雲] 가에서 늘그막을 보낼꼬.’라고 한 글귀를 세 번이나 읽고 깊이 탄식하였다. 그 구봉은 동으로 못 복판을 막아주고, 북으로 못 구비를 내려다보는데 붉은 벼랑 푸른 절벽이 더욱 그 가운데에 빼어나니, 이것은 한 못으로 말미암아 이룩한 것이라 구봉(龜峯)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를 지나서 단구협(丹丘峽)으로 들어가니, 단구협의 절승함은 탁영공의 이요루(二樂樓) 기문(紀文)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 탁영공이 일을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여 다만 단구(丹丘), 골암(鶻巖)에만 관심을 쏟고 다른 데에 미치지 않음은, 진실로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공의 본 바가 지나가는 틈에 본 것이니 두루 미치지 못했던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임후는 이곳의 수령(守令)이 되어 놀 만한 산수는 마땅히 모두 얻어서 기록하였을 것인데, 선암(仙巖)은 잘못 기록하고 구담(龜潭)은 미치지 못했으니 어째서인가. 승람(勝覽)의 글을 펼쳐 보면, 조그마한 물과 조그마한 두둑이라도 다 채집하여 기록하였는데, 구담에 대해서는 겨우 그 이름만 기록하였고, 도담(島潭)에 대해서도 아예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가 한스럽게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맑고 높음을 좋아하는 것이다. 맑은 것은 스스로 맑고 높은 것은 스스로 높은지라, 사람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산과 물은 스스로 한탄하지 않는데, 나는 한탄하니, 이것은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탁영공에게 알려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탁영공의 기문에, “말을 단구에 세우고 가은(可隱)을 바라보니, 어렴풋이 신선될 난가(爛柯)의 생각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구담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구담의 절승함은 이미 홀로 가슴 가운데 얻은 것이니, 내가 또한 무슨 한탄이 있겠는가. 특히 한 읍 안의 신령스럽고 참된 경지인 적성산(赤城山) 같은 곳은 나의 발길이 아직 미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또다시 구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내가 얻을 것은 무궁(無窮)하게 될 것이다. 이해 6월 모일에 진성 이황은 쓴다.
[주-D001] 난가(爛柯) :
옛날 왕질(王質)이란 사람이 나무하러 산에 가서 신선(神仙)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가, 배가 고프매 신선이 먹을 것을 주므로 받아먹고 바둑이 파하자 일어나 보니, 처음에 옆에 두었던 도끼자루[柯]가 벌써 썩어 있고, 집에 돌아오니 벌써 수백 년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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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집 제3권 / 잡저(雜著) / 정몽주(鄭夢周)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
예전에 선왕(先王)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상주(尙州)에 머무실 때 내가 당시 한림(翰林)으로 불려 들어가서 박후 위(朴侯葳)를 여사(旅舍)에서 처음 알게 되어 서로 따르며 기뻐하였다. 이때부터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왕을 10여 년 동안 섬기며 참으로 그의 재주를 탄복하였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이듬해에 내가 죄를 지어 남쪽 지방에서 귀양살이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왜구(倭寇)가 김해를 함락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해는 왜구가 출몰하는 요충지이다. 지금 이미 함락된 데다 쇠잔해졌으니, 뒤에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 부임하더라도 아마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박후가 김해 부사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박후를 잘 아니, 그가 반드시 잘 조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侯)가 처음 부임하여 밤낮 정신을 쏟고 생각을 다하여 계책을 내고 은혜를 펴서 춥고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고 따뜻하게 하며, 신음하는 사람을 노래 부르게 하며, 불타 버린 집을 우뚝 일으켜 세우며, 허물어진 것들을 견고하게 만드니, 순월(旬月) 사이에 온갖 폐해진 것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그러나 후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고서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말하기를 “이것만으로 어찌 정치를 한다고 하겠는가. 근일에 함락당했을 때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곡하고 자식은 부모를 위하여 곡하여 그 통곡 소리가 서로 이어졌었다. 지금의 기회를 잃고 도모하지 않는다면 뒤에 또다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니, 이것을 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뭇사람에게 고하기를 “왜적의 기세가 날로 치성해져서 바다에서 백 리 떨어져 있는 곳도 그 해를 입고 있거늘, 하물며 바닷물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바다 굽이의 이 김해 고을은 바로 죽음의 땅임에 있어서이겠는가. 진실로 험준한 시설을 마련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명령을 내려 옛 산성(山城)을 수리하여 확장하되 돌을 쌓아 견고하게 하고 산을 의지하여 높게 만들었다. 공역이 끝나고 아래에서 바라보니 성벽이 천 길이나 우뚝 서 있어 한 사람이 성문을 맡게 하더라도 만 사람이 열 수 없게 되었다.
이 고을 사람 통헌대부(通憲大夫) 배공 원룡(裵公元龍)이 편지를 보내와서 청하기를 “산성이 수축된 것은 만대(萬代)의 이익입니다. 우리 후를 아는 분으로는 그대만 한 사람이 없으니, 감히 산성의 기문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도를 말하자면, 예로부터 제왕이 이에 힘입어 다스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맹자가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못하다.”라고 한 것은 대개 경중과 대소의 차이를 말한 것일 뿐이고, 그 하나만 취하고 그 둘을 폐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아아, 우리 조종(祖宗)의 법이 또한 주도면밀하였다. 내가 일찍이 북방에서 좌막(佐幕)이 되어 동북면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변경에는 산천을 가로질러 앞뒤로 천 리나 되는 옛 산성이 있고 그 사이의 요충지에는 순찰하며 주둔하는 곳이 왕왕 천백 곳이나 되었으니, 당시에 경영하여 방어한 자취를 대략 볼 수 있었다. 지난날 거란 및 금(金)나라, 원(元)나라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대적하여 여러 해 동안 맞서면서도 옛 문물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지금 나라에서 군대를 사용한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도 성채와 해자(垓子)가 곳곳이 무너져서 걱정이 없는 태평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오늘날의 모신(謀臣)과 지장(智將)이 빠뜨림 없이 계책을 잘 세우고 있으니, 어찌 유독 성채와 해자가 도적을 대비하는 방법임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내버리고 시행하지 않는 것은 그 뜻이 장차 긴 창과 굳센 쇠뇌로 적과 평원과 광야에서 전투하여 그들을 무찌르고 섬멸함으로써 마음을 시원하게 하려는 것이고, 저처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을 졸렬한 계책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왜구는 작은 도적이지만 국가의 재력이 고갈된지라 출병할 때마다 매번 패하여 지난번 긴 창과 굳센 쇠뇌로 마음을 시원스럽게 하려던 계책이 도리어 왜적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니, 아아, 애석하도다. 거란과 금나라, 원나라를 대적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 얼마나 씩씩하였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도리어 이들에게 곤액을 당한단 말인가. 박후가 산성을 수축한 일은 아마 이 점에 분개했기 때문이리라.
장차 김해의 백성들로 하여금 평상시에 일이 없을 때면 산을 내려와서 밭을 갈고 바다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다가 봉화가 타오르는 것을 보고는 처자식을 거두어 성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베개를 높이 베고서 편안히 누울 수 있을 것이니, 누가 요새를 설치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것을 졸렬한 계책이라 하겠는가. 내가 장차 가야(伽倻)의 옛터를 방문하게 되면 응당 새로 쌓은 산성 위에서 술잔을 들어 박후가 이루어 낸 정치의 공적을 축하할 것이다.
[주-D001] 박후 위(朴侯葳) :
박위(朴葳, ?~1398)로, 본관은 밀양이다. 우달치(迂達赤)로 등용되었다가 김해 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고, 1388년(우왕14) 요동 정벌에 나갔다 이성계를 따라 회군하였고, 1389년(창왕1) 경상도 도순문사로 대마도를 쳐서 크게 승리하였다. 조선조에서는 참찬문하부사, 양광도 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후(侯)는 지방관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주-D002] 금상(今上)이 …… 귀양살이하였는데 :
우왕이 즉위한 다음 해인 1375년 언양(彦陽)으로 귀양 간 것을 말한다. 〈연보고이〉 을묘년(1375, 우왕1) 조에 “명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공이 힘껏 청하여 명나라에 귀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북원(北元)이 또 사신을 보내자 권신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 하니, 공이 10여 인과 함께 소를 올려 운운하였다가 언양으로 유배되었다.”라고 하였다.
[주-D003] 요새를 …… 도 :
《주역》 〈감괘(坎卦) 단전(彖傳)〉에 “왕공이 요새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킨다.[王公設險, 以守其國.]”라고 하였다.
[주-D004] 천시(天時)가 …… 못하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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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집 제19권 / 잡저(雜著)
일신재기(日新齋記)
중훼(仲虺)가 탕왕(湯王)에게 고하기를, “덕이 날로 새로워지면 모든 나라가 사모하여 귀의할 것이요, 뜻이 자만하면 모든 집안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배반할 것이다.〔德日新 萬邦惟懷 志自滿 九族乃離〕”라고 하였고, 탕왕의 반명(盤銘)에 이르기를, “어느 날 새롭게 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을 나날이 새롭게 하여 발전시키는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일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고 하였고,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고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는 이것이 바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길이다.〔終始惟一 時乃日新〕”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성현이 자신을 닦는 공부를 하면서, 오직 새롭게 하는 것을 이처럼 귀하게 여겼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덕을 닦지 못하는 것과 학문을 강론하지 않는 것과 의를 듣고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불선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항상 걱정하는 것들이다.〔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見善不能改 是吾憂也〕”라고 하였는데, 선유(先儒)는 이 네 가지를 일신(日新)하는 요체라고 하였다. 이는 성현이 자신을 닦는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하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 네 가지가 바로 새롭게 하는 조목에 해당한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학자가 성현을 배우려 한다면 성현이 새롭게 한 것을 배워야 할 것이요, 성현이 새롭게 한 것을 배우려 한다면 이 네 가지 조목을 일삼으면서 날마다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대로 닦았는지 제대로 강론하였는지 제대로 실천하였는지 제대로 고쳤는지 날마다 성찰해야 할 것이니, 제대로 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새롭게 된 것이요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새롭게 되지 않은 것이다. 새롭게 되었다면 이것은 발전한 것이요 새롭게 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퇴보한 것인데, 발전하면 성현의 경지로 진입하는 반면에 퇴보하면 소인의 지경에 빠져 드는 것이니, 학자가 이에 대해서 어찌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예전과 다르게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해 오던 불선(不善)을 제대로 고치면 예전에 있었던 것이 없어지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선을 제대로 행하면 예전에 없었던 것이 있게 되니, 이것을 일컬어 새롭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한다면〔終始惟一〕’ 변화하는 것을 볼 수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바로 날로 새로워지는 길〔時乃日新〕’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면서 그만두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한다고 한 것 역시 그 선(善)을 오직 한결같이 한다는 뜻이다. 선이 있지 않았는데 제대로 있게 하는 것도 물론 새롭게 하는 것이지만, 일단 있게 된 것을 항상 있도록 제대로 보존하는 것 또한 새롭게 하는 공부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군자가 선을 행하는 공부를 할 때에 항상 계구(戒懼)하며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근면하며 태만히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새롭게 하는 일이니, 만약 소홀히 하거나 태만하면 이것은 새롭게 하는 것이 못 된다고 할 것이다. 오직 소홀히 하지 않고 태만히 하지 않는 까닭에 선에 대해서 노력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되어, 예전에 있지 않던 선은 노력하여 있게 하고 일단 있게 된 선은 노력하여 지키면서 혹시 잃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항상 있도록 제대로 보전하는 길이라고 하겠다. 만약 소홀히 하고 태만히 하면 해이해지고 방자해져서 자연히 옛날의 습관으로 돌아가 기욕(嗜欲)에 빠진 나머지, 억지로 애써서 간신히 있게 된 그 선도 없어지고 유실되어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선을 항상 보존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롭게 하는 공부를 하지 않고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내가 선을 행하는 유익한 방법을 고르다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나의 거처에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는 날마다 경책하며 성찰하려 한다.
을유년(1645, 인조 23) 초가을에 쓰다.
[주-D001] 덕이 …… 것이다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온다.
[주-D002] 어느 날 …… 것이다 :
《대학장구》에 나온다.
[주-D003] 처음부터 …… 길이다 :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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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집 제20권 / 잡저(雜著)
잡기(雜記)
사람은 항상 형기(形氣)의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기거(起居)하고 동작(動作)할 즈음에 그렇게 하는 것이 비례(非禮)임을 알면서도 “지금은 우선 이렇게 하고 나중에 고치자.”고 으레 말하곤 하는데, 매번 이런 식이고서야 어느 때에 고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사리상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했다면, 지금부터 당장 시작해서 속히 고쳐야 할 것이요, 예전처럼 질질 끌며 나중에 고치겠다고 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마음과 모든 생각을 서책(書冊)에만 두고 있을 뿐, 행실(行實) 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의 행실이 독실하지 못하게 된 까닭이라고 하겠다. 만약 모든 마음과 모든 생각을 행실 면에 두고서 밤낮으로 궁리하는 것이 전적으로 행실 면에 있게 한다면, 어찌 독실하게 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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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집 제27권
기(記) 7수(七首)
1구천각기(九天閣記)
2십객헌기(十客軒記)
3삼휴암기(三休庵記)
4사우이합문답기(四友離合問答記)
5양졸암기(養拙庵記)
6용졸당기(用拙堂記)
7동춘당기(同春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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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천각기(九天閣記)
성곽(城郭)에 누각(樓閣)을 설치하는 목적은 대체로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그 제도가 있게 된 것은 대개 오래 전부터의 일이니, 즉 진(秦)나라 때의 초문(譙門)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명(明)나라 때에는 또 포루(砲樓)의 제도가 있었다. 에워싼 성곽 사이에 수십백 첩(堞)마다 하나의 누각을 설치하고 그 누각 아래에 포혈(砲穴) 수십 개를 뚫은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누각이 서로 바라보이게 하면서 화포(火砲)의 화력(火力)을 서로 보강하게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서는 수어(守禦)의 대비책이 더욱 정밀해졌다고 하겠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난리를 겪은 뒤로는 중국의 제도를 상당히 모방해서 변진(邊鎭)과 요해처(要害處)에 왕왕 포루를 설치하곤 하였다.
함흥(咸興)은 순찰사(巡察使)의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요, 남과 북을 잇는 요충(要衝)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관북(關北) 지방의 하나의 큰 도회지이다. 옛날부터 성곽이 있긴 하였으나 그 높이가 낮은 데다가 허물어져 있었는데 오랫동안 보수하지 못하다가, 근래에 한두 명의 원수(元帥)가 와서 꽤나 정비하여 새롭게 단장하였지만 완전하게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금상(今上 광해군 )이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해에 서원(西原) 한공(韓公)이 전임 대사헌의 신분으로 삭방(朔方)을 안찰(按察)하러 오게 되었다. 공은 덕성이 두텁고 도량이 큰 분으로서 일찍이 외방에 나가 중병(重兵)을 거느리다가 조정에 들어와 나라의 풍헌(風憲)을 담당하는 등 명망과 실력이 평소부터 현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에 임했을 때에도 목소리나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도 위엄과 신망이 저절로 행해진 결과, 장교와 관리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고 병사와 백성들은 편안하게 여겼으며, 북쪽의 융적(戎狄) 역시 숨을 죽이고 납작 엎드려서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1000여 리에 달하는 관북 지방 일대가 수개월 사이에 모두 자연스럽게 안정을 취하게 되었다.
그 뒤 3년이 지난 어느 달에 공이 나가서 성지(城池)를 살펴보다가 “편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는 것이 옛날의 도이니, 생각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고는, 담장을 올리고 성가퀴를 보수하여 낮은 곳은 높이고 좋지 않은 곳은 개선하면서, 예전의 원수(元帥)들이 미처 하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일신(一新)하였다.
이전에 이 순찰(李巡察 이후백(李後白) )이 설치한 포루(砲樓)는 그 이름을 구천각(九天閣)이라고 하였다. 높은 산 위에 있어서 사방의 들판을 굽어보고 있었으나 그 공간이 협소해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사 계획을 세우고 자재를 조달하여 그 규모를 넓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난간을 몇 층으로 하고 마룻대를 높이 하는 한편 기둥에 채색하고 용마루를 조각하여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니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듯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북쪽으로 약 30보쯤 되는 거리에 산이 또 높이 솟아서 성안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따라서 적이 이곳을 점거하면 성이 위태로울 것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넓혀 산마루까지 확장한 뒤에 곧장 그 정상에 하나의 누각을 세웠으니, 이것이 이른바 북산루(北山樓)이다. 이쯤 되어서는 성곽이 완비되어 흠이 없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로서 만세토록 견고한 요새지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내가 지난해 겨울부터 처벌을 받고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내려가서는 일 때문에 몇 번이나 감영에 가곤 하였다. 그런데 누각이 준공되자 공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내가 사양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곳에서 북청(北靑)까지 가려면 이틀이나 걸리는데, 북청에 있는 절도사(節度使)의 군영(軍營)이 이곳 감영의 울타리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그리고 북청에서 삼수(三水)ㆍ갑산(甲山)까지는 수백 리나 떨어져 있는데, 모두 묏부리가 중첩해서 솟아 있는 산악지대로서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곳만 10여 군데나 되니 많은 병력이 이동할 수가 없으며, 육진(六鎭) 역시 먼 곳은 천리나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오랑캐가 침범하여 변경에 비상 사태가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 감영이 어찌 갑자기 적의 침입을 받기야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이 성곽을 정비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이 주도면밀하였으니, 공의 생각이 참으로 깊고 원대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일찍이 이 누각에 올라가서 굽어보니, 읍(邑)의 가옥들이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이어지면서 번화하게 밀집되어 있었고, 큰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큰 강은 둘로 나뉘어 마치 뱀처럼 꿈틀꿈틀 감싸고 돌면서 남쪽을 향해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푸른빛이 하늘까지 잇닿아 한없이 펼쳐지고, 강 너머로는 들판이 수십백 리에 걸쳐 한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사방을 돌아보면 뭇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서 모두 눈 아래에 엎드리고 있었으니, 참으로 천하의 절경(絶景)이 따로 없었다.
공이 이 누각을 지은 것은 물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지 경치를 감상하며 노닐려고 함이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아래를 굽어보노라면 그 경치가 그야말로 이처럼 워낙 뛰어나기만 하였다. 대저 등왕각(滕王閣)과 악양루(岳陽樓)가 양자강(揚子江) 남쪽에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지금껏 천하에서 승지(勝地)를 일컬을 때면 반드시 등왕각과 악양루를 들먹이곤 한다. 지금 이 누각이 비록 관북 지방에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형승(形勝)을 논한다면 실로 나라 안에서 견줄 곳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장차 나라 안에 그 이름이 퍼지면서 백대 뒤에도 일컬어질 것이 분명하니, 그러고 보면 이곳은 또 단지 험고(險固)한 성지(城池)가 될 뿐만이 아니라고 하겠다.
대저 이곳에 감영이 설치된 지 200년이 넘었으니, 그동안 거쳐간 원수(元帥)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인데, 이 누각이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지려(智慮)라는 것이 이처럼 뚜렷이 차이가 난다고 할 것인데, 어느 지역이 세상에 드러나고 묻히는 것 역시 시운(時運)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이 모두를 기록해서 후세에 보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는 또 이와 관련하여 걱정되는 점이 있다. 성곽과 누각이 참으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보다 못하다.”라고 하였고, “험고(險固)한 지세(地勢)는 인덕(人德)보다 못하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뒤에 계속해서 이곳을 담당하는 자들을 모두 적임자를 얻어서, 그 은혜가 한 지방을 보살피기에 충분하고 그 위엄이 융적을 진압하기에 충분한 것이 모두 우리 공처럼 될 수만 있게 한다면 자연히 장성(長城)의 형세를 은연중에 갖게 될 것이니, 그때에는 비록 이 성곽이 없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하겠지만, 불행히도 임명된 사람이 적임자가 못 되어서 그저 누각에 올라 경치나 구경하고 주연을 베풀며 즐길 줄이나 알 뿐, 사졸(士卒)을 보살필 줄을 몰라서 기보(祈父)의 원망을 초래하기라도 한다면, 성안에 융적이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것이며, 이 승경을 또 어떻게 혼자서 즐길 수가 있겠는가. 또 혹시라도 융적을 막을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우레가 치고 폭풍이 몰려오듯 융적이 침입했을 경우에, 당황한 나머지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견고하다 한들 어떻게 성곽만으로 오랑캐를 막아 낼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천하의 일은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는 법인데, 무너지는데도 이를 보수하지 않으면 폐기(廢棄)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천하의 걱정거리는 처음 시작하는 자가 완전하게 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언제나 그 뒤에 이어서 행하는 자가 게을러서 폐기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성곽과 이 누각이 비록 견고하고 완전하다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는데도 보수하지 않는다면, 건물이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을 할 것이며, 성곽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을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또 영원히 견고한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되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만드는 자들은 모두 우리 공의 죄인이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내가 두려워하는 점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 점을 함께 기록해서 뒤에 오는 자들이 경계하도록 하는 바이다.
만력(萬曆)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 4) 납월(臘月) 모일에 짓다.
[주-D001] 초문(譙門) :
망루(望樓)를 세운 성문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31 진승전(陳勝傳)에 초문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진승은 진(秦)나라 말기 2세 황제 때 농민들을 규합하여 최초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의거(義擧)를 일으킨 사람이다.
[주-D002] 서원(西原) 한공(韓公) :
한준겸(韓浚謙 : 1557 ~ 1627)을 가리킨다. 호는 유천(柳川), 자는 익지(益之),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
[주-D003] 편안할 …… 도이니 :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이 때문에 군자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고, 보존될 때에도 망하는 일을 잊지 않고, 잘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워지는 일을 잊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몸이 안전해지고 국가가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是故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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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십객헌기(十客軒記)
3.삼휴암기(三休庵記)
나의 벗인 임군 자정(任君子靜 임광(任絖) )이 자기가 거처하는 방의 이름을 삼휴암(三休庵)이라고 짓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였다. 내가 그렇게 이름 지은 이유를 물었더니, “말하는 일을 쉬고, 술 마시는 일을 쉬고, 교제하는 일을 쉬려고 해서이다.〔休于言 休于酒 休于交〕”라고 하였다.
내가 왜 쉬려 하느냐고 묻자, 그가 말하기를,
“나는 소싯적부터 말로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시비를 쟁론(爭論)하거나 농담을 하고 익살을 부릴 때면 사람들이 바람처럼 몰아붙이고 벌떼처럼 일어날 적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기발한 발언을 함으로써 항상 좌중의 사람들을 압도하곤 하였다. 나는 또 소싯적부터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동네에서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과 떼를 지어 주흥(酒興)에 젖은 채 술타령만 하면서 한 달이 다 되도록 멈추지 않은 때도 있었는데, 지금 나이가 벌써 쇠해 가건만 아직도 술 마시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나는 또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소싯적부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약관(弱冠)의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선발되어 들어간 뒤로는, 사방에서 매년 수백 명씩 태학으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골육이나 형제처럼 지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것이 소싯적에 좋아했던 일이고 또 내가 잘하는 일이기도 하였지만, 나를 병들게 만든 것 역시 꼭 여기에 연유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지금 내 나이가 마흔 하고도 한 살이다. 그동안 세상일을 많이 겪으면서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해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이제는 갈수록 싫어지기만 한다. 그런데 나의 오두막이 마침 또 이루어졌으니, 내가 앞으로는 이러한 습기(習氣)를 깨끗이 씻어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말도 내버리고 술맛도 잊어버리고 왕래하는 일도 사절하고서 여기에서 한가로이 노닐고 여기에서 휴식을 취하며 나의 참된 성품을 온전히 간수해 볼까 한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저 사람이란 피곤해진 뒤에 쉬는 일을 생각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대는 이 세 가지 일을 괴롭게 여긴단 말인가. 말을 잘하는 것과 술을 잘 마시는 것과 사람들과 많이 교제하며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이야말로 어찌 세상에서 부럽게 여기는 일이 아니겠으며, 사람들이 사모하면서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그대는 이런 것들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도 오히려 병폐로 생각하고는 그만 깨끗이 씻어 버리고서 담연히 하나의 거실 속에 자신을 앉혀 놓으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편안히 거하기만 하면 혼자서 즐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월등하다고 하겠다. 나는 이를 통해서도 그대의 뜻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것은 바로 옛날에 은거(隱居)하던 사람들을 본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약간 다른 점이 있기도 하다. 말을 하는 것이나 교제를 하는 것은 물론 은자(隱者)들이 기피했던 일이었으니, 개지추(介之推)도 ‘말이란 몸을 꾸미는 것이다. 장차 몸을 숨기려 하는데 꾸미는 일을 어디에다 쓰겠는가.〔言 身之文也 身將隱 焉用文之〕’라고 하였고, 도연명(陶淵明)도 ‘교제하는 일을 그만두고 노니는 일도 이제 끊으려 한다.〔請息交而絶遊〕’라고 밝힌 바가 있다. 하지만 술로 말하면, 은자들이 싫어했다는 말을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 없다. 옛날에 취향(醉鄕)을 기록한 사람이나 주덕(酒德)을 칭송한 사람을 보아도 모두 당시에 세상을 피해 숨은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대가 은거하려고 하는 것은 옛사람들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있다고도 하겠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그대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권하고자 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세 가지 일을 쉬는 것보다는 마음을 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전(傳)에 이르기를 ‘그의 마음이 널찍하게 크다.〔其心休休焉〕’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그 마음을 쉰 것을 의미한다. 대개 마음을 쉬면 마음이 텅 비게 되고, 텅 비게 되면 외물(外物)이 누를 끼칠 수가 없게 되는 법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천하의 어떤 물건도 그대를 해칠 수가 없을 것이니, 어찌 유독 이 세 가지에 국한될 뿐이겠는가.
옛날에 야인(野人)이 해구(海鷗)를 상대로 장난을 쳤는데도 해구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또 빈 배가 다가와서 부딪치면 마음이 좁은 사람도 화를 내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모두 텅 비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효과라고 할 것이다. 그대가 마음을 텅 비워 투명하고 널찍하게 해서, 외물과 자아의 분별을 잊고 영광과 치욕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면, 장차 그대가 종일토록 말을 해도 사람들이 떠든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요, 종일토록 술을 마셔도 사람들이 술독에 빠졌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요, 종일토록 교제를 해도 사람들이 번거로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맹자(孟子)가 송구천(宋句踐)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유세하기를 좋아하는가? 내가 그대에게 유세하는 법을 말해 주겠다. 사람이 알아주어도 효효하고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효효하는 것이다.〔子好遊乎 吾語子遊 人知之 囂囂 人不知 囂囂〕’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그 마음을 텅 비우고서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음 하나만 쉬면 충분할 것이니, 어찌 꼭 세 가지를 모두 쉬어야 하겠는가.”
나의 말을 듣고는 자정(子靜)이 희색(喜色)을 띠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좋긴 하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우선은 이 세 가지 일만 쉬더라도, 그런대로 해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 내용을 기록해서 기문으로 삼았다.
[주-D001] 말이란 …… 쓰겠는가 :
《사기(史記)》 권39 진세가(晉世家)에 나온다. 개지추(介之推)는 춘추 시대 진 문공(晉文公)이 공자(公子) 시절에 19년 동안이나 국외로 망명했을 당시에 온갖 고난을 겪으며 줄곧 수행하다가, 문공이 귀국하여 즉위하자 자기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몸을 숨겼는데, 위의 말은 은거하려 할 적에 자신의 뜻을 모친에게 토로한 말이다.
[주-D002] 교제하는 …… 한다 :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 취향(醉鄕)을 …… 사람들이었다 :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유령(劉伶)이 음주 도취(飮酒陶醉)의 생활을 찬미하는 주덕송(酒德頌)을 지었고, 당(唐)나라의 은자인 왕적(王績)이 이 주덕송을 본떠서 취향기(醉鄕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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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우이합문답기(四友離合問答記)
5.양졸암기(養拙庵記)
동지(同知) 유공(柳公)의 오래된 별장이 아산(牙山) 석교촌(石橋村)에 있는데, 공이 관직을 잃은 뒤로는 여기에 와서 거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별장에 가서 공을 뵌 적이 있는데, 그때 공이 자신의 서실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 방을 양졸(養拙)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어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공이 이렇게 이름을 짓다니 기이하기도 하다. 졸(拙)은 교(巧)와 반대되는 말로서, 교와 졸이야말로 영욕(榮辱)과 득실(得失)이 나뉘는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교자(巧者)는 항상 얻고 졸자(拙者)는 항상 얻지 못하며, 교자는 항상 막히는 일이 없이 영광스럽고 통달하게 되는 반면에, 졸자는 항상 낭패를 당하며 빈궁과 치욕 속에 살게 마련인데, 이는 사리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다.
대저 선비가 처음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는 동렬(同列) 중의 현달(顯達)한 자를 받들고, 일단 현달하고 나서는 재상 등의 중신(重臣)을 받들고, 일단 중신이 된 다음에는 임금의 뜻을 살피곤 한다. 그리하여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치욕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구차하게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하여 상대방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고,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를 하며 자기에 대한 신임을 굳히기도 한다. 그리고는 시비(是非)를 가릴 때에도 상대방이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보고서 추종하고, 훼예(毁譽)를 할 때에도 상대방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의중을 살펴서 결정하니, 그가 마음을 기울이고 줄곧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에게 영합(迎合)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눈을 즐겁게 하고, 그의 말은 귀에 순하기 때문에, 동렬 중의 현달한 자도 그를 친근하게 여기고, 재상 등의 중신도 그를 신임하고, 임금도 그를 가까이하면서, 각자 자기에게 참으로 충성한다고 여기고는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취하는 것이 땅에 버려진 물건을 줍는 것과 같이 쉽고, 그가 승진하는 것이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용이해서, 추구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욕심을 내면 얻지 못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아가서는 임금의 총애를 독점하고 조정의 권한을 전횡한 나머지, 승진시키고 내쫓는 일이 그의 손에서 좌우되고, 은혜를 갚고 원수를 갚는 일이 그의 마음대로 통쾌하게 이루어지곤 한다. 그래서 그가 사는 곳을 보면 누대(樓臺)와 원유(苑囿)의 즐거움이 가득하고 그가 노니는 곳을 보면 기라(綺羅)와 가관(歌管)의 유희가 질탕하게 펼쳐지곤 하니, 이와 같은 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어찌 교(巧)한 자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반대로 자기 몸을 욕되게 하는 일을 혹 부끄럽게 여기거나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일을 괴롭게 여기면서, 누가 요구하지 않으면 먼저 나서려 하지 않고 불가하다고 생각되면 함께 어울리려 하지 않은 채, 자기의 감정대로 행동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발언할 경우에는, 동렬에서도 그를 소외시키고, 재상도 그를 그르게 여기고, 임금도 그를 싫어하면서, 그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아니면 망녕된 사람으로 간주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가볍게는 그의 진로를 막아 통하지 않게 하고, 무겁게는 그를 배척하여 용납되지 못하게 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이 괴로워도 뜻은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어 늙어 갈수록 신념을 지키는 것이 더욱 단단해져서, 빈궁하여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니, 이런 사람을 이른바 졸자(拙者)라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교(巧)와 졸(拙)의 차이가 또한 현격하다고 할 것이니, 하나는 소위 청운(靑雲)의 위에 스스로 오른 자라고 할 것이요, 하나는 욕되게도 진흙탕 속에 몸을 담근 자라고나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공으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일찍이 언로(言路)에 발탁되어 시종(侍從)의 반열에 끼었고 그 뒤에는 지관(地官)의 아경(亞卿)에까지 이르렀으며, 외방으로 나가서는 대부(大府)를 역임하고 양도(兩道)의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하였으니, 또한 현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재질을 가지고 말한다면, 세속의 풍조를 조금만 따랐어도 국정에 참여하여 크게 쓰임이 되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공의 종족(宗族)이나 교유(交遊)하는 인사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서 서로 결탁하며 자리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모두들 의기양양하며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는 것을 즐기고 있었는데, 공은 초연히 여기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면서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히게 될 것처럼 여겼다.
그러다가 조정이 바뀌어지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공은 자기의 분수를 편히 여기고 자연에 몸을 내맡긴 채 대중을 따라 조정에 진출하려는 마음을 두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서로 관계가 어색해져서 합치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과 세상 양쪽에서 서로 버리는 가운데 농촌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벼슬을 한번 잃은 뒤로는 또 빨리도 가난해져서, 엉성한 울타리와 무너진 집 속에서 마치 빈한한 선비처럼 쓸쓸히 지내게 되었으니, 또한 곤궁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이 졸(拙)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지은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졸한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여기에 또 이것을 ‘기른다〔養〕’라고 했고 보면, 이것은 졸에 대해서 스스로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힘쓰겠다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몸이 괴로워도 뜻은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어 늙어 갈수록 신념을 지키는 것이 더욱 단단해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유자후(柳子厚)가 걸교문(乞巧文)을 지었는데, 이것은 자기의 졸을 없애 주기를 기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공은 이것을 더욱 힘쓰고 있으니, 아, 그렇다면 공은 이 점에서 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의복(倚伏)은 서로 잇따르는 법이다. 따라서 처음이 좋은 자가 끝에도 꼭 좋으라는 법이 없고 보면, 교자(巧者)와 졸자(拙者)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때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서 눈부시게 위세를 부리는 자들을 보면 그 당시에는 참으로 기분 좋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하루아침에 시대가 바뀌고 사정이 변하면 자기 몸을 둘 곳이 없음은 물론이요 처자들까지도 멸망을 당하는 경우를 고금의 역사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지금 공은 연세가 70여 세나 되지만 기력이 강건해서 젊은 사람과 다름이 없다. 그리하여 날마다 향인(鄕人)의 자제들과 어울려 동산 숲에서 소요(逍遙)하고 술과 시로 스스로 즐기면서 안락한 복을 누리고 있으며, 시골의 어린이나 노인들도 모두 공을 경애(敬愛)할 줄을 알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스스로 교(巧)하다고 생각하며 뻐기던 자들이야말로 어찌 크게 졸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공의 졸이야말로 처음부터 교(巧)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또한 노자(老子)가 말한 대로 “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大巧若拙〕”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공은 이 졸에 대해서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행운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니, 이것을 더욱 힘쓰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 역시 천하의 졸자(拙者)이다. 공이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명한 것도 내가 졸의 맛을 알고 있을 테니, 필시 졸에 대해서 제대로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서 이렇게 기문을 짓게 되었다.
[주-D001] 청운(靑雲)의 …… 자 :
전국 시대 진(秦)나라 재상이 된 범수(范睢)에게 수가(須賈)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면서 “당신이 청운의 위에 스스로 오를 수 있을 줄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賈不意君能自致于靑雲之上〕”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주-D002] 욕되게도 …… 자 :
춘추 시대에 기(杞)나라의 성을 쌓을 적에 강현(絳縣)에서 동원되어 공사에 참여한 73세 된 노인에게 조무(趙武) 즉 조맹(趙孟)이 “당신을 욕되게도 진흙탕 속에 오래도록 몸을 담그게 한 것은 나의 죄이다.〔使吾子辱在泥塗久矣 武之罪也〕”라면서 사과했던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襄公30年》
[주-D003] 지관(地官)의 아경(亞卿) :
지관은 호조(戶曹)를, 아경은 참판(參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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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용졸당기(用拙堂記)
7.동춘당기(同春堂記)
진선(進善) 송군(宋君)이 회덕(懷德)에서 수백 리 떨어진 나에게 글을 보내 이른바 동춘당(同春堂)이라고 하는 곳의 기문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대개 송씨(宋氏)가 회덕에 터를 잡고 산 것이 200여 년쯤 된다. 송군의 7세조인 쌍청공(雙淸公)이 태종(太宗) 때에 관직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처음으로 회덕에서 은거하며 거기에서 생을 마쳤다. 이때 집 한 채를 지어 쌍청당(雙淸堂)이라고 이름하고는 자신의 호로 삼았는데, 교리(校理)인 박공 팽년(朴公彭年)이 그 기문을 지었다. 그 뒤로 자손이 많아지면서 한 마을이 모두 송씨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곳을 이름하여 송촌(宋村)이라고 하였다.
송군의 집은 마을의 상류(上流) 지역에 있다. 그의 선인(先人) 역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난간에 올라서면 앞이 툭 터져서 사방이 모두 보이고, 방도 그윽하고 따스해서 겨울이나 여름이나 모두 지내기에 좋았으니, 이른바 ‘군자가 편히 쉴 만한 곳〔君子攸寧〕’이라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 그 집이 난리를 겪은 뒤로 퇴락해졌으므로 송군이 다시 세워서 새롭게 단장하였는데, 그 제도는 모두 한결같이 예전대로 하면서 집터만 약간 동쪽으로 옮겨 시내와 가깝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계룡(鷄龍)의 동쪽과 봉무(鳳舞)의 북쪽에 위치하여 명산이 한눈에 들어왔으며 냇물이 바로 집 아래에서 흐르고 있었으므로, 사계절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천변만화하는 산의 기상(氣象)과 마을을 감싸며 휘돌아가는 맑은 시냇물의 정취를 모두 즐기며 음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의 이름을 동춘(同春)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하겠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내가 생각건대, 회덕의 송씨는 동방의 명족(名族)으로서 옛날 중국의 범양 노씨(范陽盧氏)라든가 청하 정씨(淸河鄭氏)와 같다고 여겨지니, 이는 그 종족들이 번창한 가운데 현사(賢士)들이 또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선조인 쌍청공은 은둔하며 평생을 보냈으니 덕이 높은 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박공(朴公)이 그 집의 기문을 지었고 보면 서로 교유한 사실이 있었을 것이 또 분명하다. 박공의 충렬(忠烈)이야말로 우주 사이에 늠름하여 일월과 빛을 다투고 있으니, 박공과 함께 노닌 사람도 현인(賢人)일 것이 분명하다. 현인이 아니었다면 박공이 필시 기문을 써 주지도 않았을 것이니, 이를 통해서도 그가 현인이었다는 것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자손들이 번창하는 가운데 현사가 많이 배출된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려 주는 것이야말로 이치상 필연적인 일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또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송군이 현인의 후예로 태어나 현사의 마을에서 생장하면서, 멀리로는 선조의 업적을 추모하고 가까이로는 송족(宋族)의 가풍을 이어받았으니, 그의 정성(情性)과 하는 일 모두가 자연히 범인과 다르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옛사람의 학문에 뜻을 두고 옛사람이 행했던 일을 스스로 힘쓸 수 있었고 보면, 이것은 또 종당(宗黨)의 여러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지금 집을 다시 새로 지으면서 선인(先人)의 옛 제도를 폐하지 않았으니 효성스럽다고 할 만하고, 그 집의 이름을 지은 의미를 살펴보면 그 뜻이 원대하다는 것을 또 알 수가 있다.
대저 하늘의 덕(德)에 네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원(元)이 으뜸이 되고, 그 기운이 유행함에 따라 또 사계절이 전개되는데 그중에서 춘(春)이 으뜸이 되니, 그러고 보면 춘이라는 것은 원의 덕이 계절에 적용되어 행해진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사람의 인(仁)이라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고 보면, 원(元)과 춘(春)과 인(仁)은 하나라고 할 것이다.그래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이 조용해진 뒤에 만물을 보면 모두 봄의 뜻을 지니고 있다.〔靜後觀萬物 皆有春意〕”라고 한 것이고, 또 말하기를 “만물을 내는 하늘의 그 뜻이 가장 볼 만하다. 이 원이라는 것은 뭇 선의 으뜸이 되니,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이 되는 것이다.〔萬物之生意最可觀 此元者 善之長也 斯所謂仁也〕”라고 한 것이다.
대저 천지(天地)는 만물을 생(生)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데, 원이라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생하는 그 마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요, 춘이라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생하는 그 기운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만물은 모두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나오기 때문에 만물 모두에 생의(生意)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춘의(春意)라는 것은 바로 생의인 것이다. 그런데 인이라는 것은 바로 만물을 생(生)하는 사람의 마음인데, 송군이 동춘(同春)으로 자기 집의 이름을 지었고 보면, 그의 뜻이 인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저 인은 천지의 공평무사한 마음이요, 모든 선(善)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송군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고 보면, 그 뜻이 어찌 크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인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들이 인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유독 안자(顔子)만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안자가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된 소이(所以)라고 하겠다. 그런데 정자(程子)가 또 그를 춘생(春生)이라고 하였고 보면, 이를 통해서도 인이 춘과 같다는 것을 더욱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이치는 사람마다 균등하게 품부받은 것이다. 그런데 군자(君子)는 다른 사람과 자기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일단 그러한 경지를 얻고 난 뒤에는 또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공유(共有)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치를 균등하게 품부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빠짐없이 그러한 경지를 얻게 하려고 하니, 이것이 바로 군자가 낙으로 삼는 것이다. 송군이 자기의 집을 이렇게 이름 지은 그 뜻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내가 생각건대, 군자라면 물론 사람들마다 모두 이 도를 얻게 하려는 데에 뜻을 두어야 하겠지만, 반드시 자기부터 이루고 난 뒤에야 남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법이니, 그렇다면 군자의 급선무는 바로 자기를 완성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리고 자기를 이루어 나가는 방도와 같은 것은 성인이 제자(諸子)에게 일러 준 말씀 속에 갖추어져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송군이 익히 강구하면서 공부하고 있을 테니, 내가 더 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그동안 송군 선조의 높은 덕의(德義)를 흠모해 오던 차에, 집의 이름을 지은 뜻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을 또 기뻐한 나머지, 사양을 하지 않고 이렇게 기문을 지어서 답하게 되었다.
계사년((1653, 효종 4) 늦은 봄에 조익은 쓰다.
[주-D001] 진선(進善) 송군(宋君) :
진선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 4 품 관직이고, 송군은 송준길(宋浚吉)이다. 포저보다 27년 연하로,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주-D002] 쌍청공(雙淸公) :
송유(宋愉)를 말하는데, 유일(遺逸)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주-D003] 군자가 …… 곳 :
궁실을 지어 완성한 것을 노래한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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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집(霞谷集)
시서류(詩書類)
기(記) 습유(拾遺)
1.탕춘대기(蕩春臺記)
왕성(王城) 서북쪽, 백악산(白嶽山)의 오른쪽 산기슭에 문이 있으니 장의문(莊義文 창의문(彰義門)인 듯)이라 한다. 문 오른쪽에 큰 산이 있어 우뚝히 길게 둘러싸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왔으니 곧 삼각산(三角山)으로 내려온 백악의 줄기이다. 문 왼쪽에는 산이 갈라졌으니 북으로 내려와서는 산세가 오른쪽 산과 서로 비등하며 암석은 더욱 기괴하였다.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높이 솟아 하나는 남쪽으로 달렸고 하나는 북쪽으로 달렸으며 그사이에는 내를 이루었다. 위는 넓어서 구렁을 이루었고 아래는 점점 좁아져서 골짝이 되었다. 이렇게 5리쯤 지나면 들판이 생기었으니 이것은 오른쪽 산의 남쪽이 되었다. 한 가닥은 갈리어서 왼쪽으로 달렸고, 두 산 사이는 우뚝하게 언덕이 되었다. 위는 넓고 평평하니 탕춘대(蕩春臺)라 하였다.
오른쪽 산 밑이 안대(案臺)이며 공청[廨]이 있으니 조지서(造紙署)라 하였다. 조지서 위에는 폭포수가 있어서 거꾸로 내려오니 곧 냇물의 근원이었다. 물은 바로 탕춘대를 싸고 왼쪽으로 두 골짜기를 끼고 흐른다. 대체로 그 구렁은 모두 돌이며 반석이요 지면은 모두 모래인데 희였다. 돌인 때문에 물은 골골히 울며 흐르고 모래인 까닭에 물은 맑고 깨끗하며 비록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으니 모래와 돌은 또한 물과도 서로 잘 만났다. 그런 까닭에 모두 매끈하여 갈아 놓은 것 같으며 밝고 빛나서 햇빛과 모래 빛이 환히 서로 비치었다. 맑은 바람과 소나무는 운치를 이루었으니 참말로 산간의 절승(絶勝)이었다. 오직 한도(漢都)는 기송(箕松 기(箕)는 기자(箕子)의 도읍인 평양(平壤)이요 송(松)은 왕건(王建)의 도읍인 개성(開城), 일명 송도(松都)이다) 이래로 산수의 수려한 것이 제일이었고 천석(泉石)의 절승은 이곳을 으뜸으로 삼았으니 노는 사람들이 일찍이 그치지 않았으며 여기서 즐거움을 가지는 까닭도 사람마다 달랐다.
경술년 중춘(仲春) 윤달에 친구 다섯이 술을 들고 이곳에서 놀 때 나도 또한 따라갔었다. 그윽한 정을 펴며 번거러운 흉금을 씻었으나 오직 한가한 것을 즐기는 것뿐은 아니었다. 드디어 물줄기를 따라서 술잔을 띄우고, 물줄기를 끼고서 차례로 마시며 취하자 서로 손을 잡고 물을 따라 오르내릴 때 초동(樵童)ㆍ목수(牧叟)들이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길게 노래하고 짧게 읊으며 뒤를 돌아보고 주고받으니 또한 놀고 구경하는 즐거움이 지극하였다. 여기서 서로 말하기를,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이런 놀이를 즐길 수 없었을 것이며, 이런 놀이가 아니었다면 이 좋은 날을 보낼 수도 없었을 것이니 오늘의 놀이가 또한 좋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옛사람의 곡수(曲水)의 놀이와 난정(蘭亭)의 놀이가 오늘에 비해 보면 어떠하겠는가. 오호라! 무릇 하는 일에 옛일을 끌어서 스스로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사람의 상정인 것이다. 그러나 옛날이란 것이 어찌 난정만이겠는가. 바라건대 우리들은 힘쓸지어다.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을 쏘이는 것은 성인이 허여한 일이요,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함은 염락(濂洛)의 즐거움이었다. 지금 우리들의 힘쓸 바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있지 않는가. 저 청허(淸虛)한 것을 어찌 숭상할 것인가. 오호라! 난정도 또한 숭상할 만하지 못하거늘 무릇 이보다 떨어지는 것에는 더더욱 힘쓸 바가 아님을 알 수 있으리라.
[주-D001] 탕춘대기(蕩春臺記) :
탕춘대기는 영조 6년(1730) 경술년 봄 하곡이 82세 때에 쓴 것이다.
[주-D002] 곡수(曲水)의 놀이 :
곡수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 강이며 왕희지(王羲之)가 명사 43인과 더불어 이 강에서 술잔을 띄우고 놀던 곳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는 3월 3일에 곡수의 연(宴)을 가지는 풍습이며 하곡이 탕춘대에서 놀던 것도 이러한 봄이었다.
[주-D003] 난정(蘭亭)의 놀이 :
난정은 위의 곡수가 회계산음(會稽山陰)에 있는 정자이며 여기에서의 놀이를 왕희지는 난정기서(蘭亭記序)로 남겼다. 원명은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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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속집 제5권
기(記)
1.유적벽기(遊赤壁記) 병술년(1586, 선조 19)
동복(同福)은 호남(湖南)에서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데, 기이하면서도 아주 뛰어나 온 경내에서 으뜸 가는 명승지로는 적벽(赤壁)이 있을 뿐이다.
내가 계미년(1583, 선조 16) 가을에 부절(符節)을 차고 금성(錦城)에서 목사(牧使)로 있었는데, 일찍이 동복현의 객관에서 나그네를 전송하였으며, 계속해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치르는 일로 그곳에 갔었다. 그러나 그 경치 좋은 곳을 지척에 두고 바라보기만 한 채 한 차례 유람하지도 못하였다. 금성으로 돌아와서 공문서에 파묻힌 채 지내노라니 마치 북산이문(北山移文)을 받은 것만 같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서성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술년(1586, 선조 19) 가을에 동복 현감으로 있던 돈서(惇敍) 김부륜(金富倫)이 편지를 보내 오기를, “가을이고 또 기망(旣望)인데, 바람과 달빛이 둘 다 맑으며, 강과 산은 예전과 같다. 만약 옛날의 고사(故事)를 이룰 수만 있다면 바로 소선(蘇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유람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내가 자리에 누워 그곳의 경치를 상상해 온 지 오래였다.
15일에 말을 타고 남평(南平)으로 가서 경연(景淵) 이길(李洁)을 방문하고자 남계정사(南溪精舍)로 찾아가니, 시내와 산은 소슬하면서도 깨끗하였고, 달빛은 낮과 같았다. 이에 거문고를 뜯으면서 술을 마시니 이미 티끌 세상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경연을 데리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길을 떠났는데, 금사(琴師)인 황복(黃福)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시냇가를 따라 산을 끼고 돌면서 수십 리를 가니 드넓은 평지가 나타났는데, 바로 화순현(和順縣)의 치소(治所)가 있는 곳이었다. 강학루(降鶴樓)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서성이노라니 어느 새 날이 저물었다. 이 고을 사람인 저작(著作) 조화우(曺和宇)와 정자(正字) 이응약(李應籲)이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을 불러서 함께 길을 떠났다. 동복현의 경내에 들어서기도 전에 구름 낀 길이 깜깜해졌다. 이에 촌 백성이 짚을 묶어서 불을 밝히고 앞에서 인도해 갔는데, 불빛은 희미하고 길은 험하여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좋은 흥취가 표연히 일어 힘든 줄도 몰랐다.
선경(仙境)을 10여 리 정도 남겨 두고 산 달이 비로소 얼굴을 내밀었는데, 홀연히 동쪽편에서 맑은 기운이 자욱하게 끼인 가운데 마치 여름날에 뭉게구름이 피어나 기이한 산봉우리 모양새가 된 것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러자 촌 백성이 말하기를 “여기가 적벽이다.” 하였다. 이에 말을 채찍질해 앞으로 나아가 두 개의 시냇물을 건너 그곳에 도착하니, 주인(主人)은 거창 군수(居昌郡守)를 지낸 중명(仲明) 양자징(梁子澂)과 그 고을 선비인 하대붕(河大鵬), 정암수(丁巖壽), 정형운(丁亨運) 등 몇 사람을 데리고 와 물가에다 자리를 펴 놓고서 기다리고 있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때 가을 바람이 살짝 불어 오고 흰 이슬은 막 떨어졌으며,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없고 땅에는 티끌 하나 없었다. 만 겹으로 층진 옥 절벽은 밤이라 빛이 푸르스름하여 비록 높고 낮음을 헤아릴 수 없었으나, 고개를 돌려 산 바깥을 바라보니 달은 이미 허공중에 솟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광(瑞光)이 바위 뒷쪽에서 솟아 나와 만 길이나 되는 은교(銀橋)가 곧장 은하수를 향해 뻗쳤다. 얼마 뒤에 천 개의 단애는 빛을 발하고 백 이랑의 물은 맑고 맑은데 숨어 있던 바위와 깊은 골짜기가 한꺼번에 모두 밝아지니, 가까운 곳에 있는 의관을 쓴 사람은 인간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며, 마부와 종들 역시 유안(劉安)의 닭과 개로 화하였다.
주인이 이때 노래 부르는 아이에게 명하여 채릉가(采菱歌)와 백빈가(白蘋歌)를 노래하게 하니, 뭇 소리가 교대로 일어났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만 부르라. 오늘 같은 이런 밤에는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가(赤壁歌)가 아니면 귀만 시끄러울 뿐이다.” 하니, 좌중에 있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노래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읊어서 노래하는 것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다. 어찌 아녀자들의 재잘대는 입을 빌려 맑은 노래를 더럽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조화우가 드디어 전적벽부(前赤壁賦) 한 장(章)을 노래하자 종자(從者)로 하여금 퉁소를 불어 화답하게 하였다. 금사(琴師)가 또 그에 따라서 아양곡(峨洋曲)으로 되받았다. 노랫가락이 시원시원하여 메아리 소리가 바위 골짜기 사이로 퍼져 나가니 항아(姮娥)가 하늘 위에서 배회하고 어룡(魚龍)이 물 아래에서 춤을 추었으며, 좌중은 적막하고 강과 하늘은 아득하였다. 그리하여 마치 자진(子晉)이 부는 구산(緱山)의 퉁소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아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하였다.
주인이 또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시 두 편을 내놓았는데, 그 시는 대개 임술년(1562, 명종 17) 가을에 내가 돈서(惇敍)와 계문(溪門)에 있을 적에, 선생님께서 그날 달빛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려던 차에 마침 비바람이 불어 왔으므로 서글픈 마음에서 읊은 시였다. 그로부터 어느 사이에 수십 년이나 지나 선생님께서는 이미 후학들을 버리고 떠나갔고, 머리가 하얗게 센 문생(門生)들이 천 리 밖에서 모여 오늘의 이 유람을 하게 되었다. 맑고도 깨끗했던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뵐 수가 없어, 선생님께서 남긴 시편을 거듭해서 읊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에 드디어 좌우 사람들에게 권하여 모두 그 시의 운(韻)을 따라서 시를 읊었다.
처음에는 차가운 산 기운과 물 기운 속에서 노숙(露宿)할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각자 촌 마을의 객점을 찾아가 잠시 눈을 붙일 계획이었는데, 얼마 있다가는 술잔을 서로 돌리면서 웃고 떠드는 사이에 술이 깬 사람은 돌아가기를 잊었고, 술에 취한 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참 뒤에 술잔 위가 홀연히 어둠침침해지더니 땅 위에 사람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술에 취한 눈으로 바라보니 보이는 건 오직 피어 오르는 물안개와 흐릿한 달빛뿐, 사람들의 모습은 안개에 싸여 있었으며, 상하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등불을 켜서 달빛을 이으려고 하기에, 내가 “촛불을 켜지 마라. 이는 새벽이 오려는 것으로, 하늘이 장차 밝아질 것이다.” 하였다.
잠시 뒤에 동방이 훤해지면서 해가 하늘 위로 솟아오르자 맑은 바람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니 싸였던 안개가 모두 걷혔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객들이 모두 놀라 일어났다. 경연은 그의 형 경함(景涵) 이발(李潑)의 별서(別墅)로 들어가고, 중명 양자징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대개 술 마시기가 싫어서 도망친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밤놀이가 비록 즐겁기는 하지만 강산(江山)의 진면목은 흐릿하여서 마치 꿈속에서 본 듯하다. 만약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진다면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였다.
주인이 미리 시냇물 가운데에 임시로 배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상을 하나 놓아 두었는데, 두세 명이 둘러앉을 만하였다. 내가 주인과 조화우, 이응약과 더불어 먼저 차지하고 앉자, 나머지 사람들이 앞다투어 올라오다가는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모두 허둥지둥 물러났다. 이에 시내 한 가운데에서 닻줄을 풀고 물가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마음내키는 대로 떠다녔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은 물속에 뒤섞여 있고 금빛 모래와 하얀 자갈은 물속까지 하나하나 셀 수 있었으며, 하늘에 뜬 흰 구름은 그림자가 교차하고 나는 물새는 기심(機心)을 잊었는바, 한 구역의 기이한 볼거리가 모두 시를 읊는 중에 들어왔다. 지난밤의 일을 돌이켜서 생각하니 이미 요대(瑤臺)의 꿈이 되었는데, 잠시 동안의 놀이는 또다시 창주(滄洲)가 끝이 없는 흥취가 있었다. 이 두 가지는 그 아름다움이 서로 엇비슷해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냇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는데, 하나는 광산(光山)의 서석산(瑞石山)에서 흘러 나오고, 하나는 옥산(玉山)의 경내에서 흘러 나온다. 두 물이 합류하여 북쪽으로 꺾어졌다가 동쪽으로 흐르고, 또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며, 또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는데, 서쪽에서부터 남쪽까지 빙 돌아 흘러 현치(縣治)의 금대(襟帶)가 되었다. 적벽은 북쪽으로 꺾어졌다가 동쪽으로 흐르는 곳에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제2곡(曲)이다. 푸른 산은 북쪽으로부터 내려와 빙 둘러싸고 있는데, 거의 수십 리나 되며, 시냇물이 둥그렇게 굽이져 흐르는 곳은 모두 산이 감도는 곳이다.
북쪽과 서쪽, 남쪽에 있는 산은 모두 윗부분에 흙을 이고 있고 시냇물에 임하여 기슭이 끊어졌는데, 꾸불꾸불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비록 좋기는 하나 몹시 기이하지는 않다. 오직 적벽만이 가운데 봉우리가 우뚝 솟아나 마치 중국의 천주산(天柱山)이나 석름산(石廩山)과 같으며, 그 아래로는 좌우로 날개를 펴고 있는데, 산 뿌리는 물속 깊이 박혀 있고, 윗 부분은 구름 위로 솟아나 있다. 이에 옥병풍이 하늘에 펼쳐지고 적성(赤城)의 노을이 피어 올라서 좌우로 돌아보면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떨리는바, 아무리 여산(廬山)의 구첩(九疊)이나 무이(武夷)의 구곡(九曲)일지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단애(丹崖)는 서쪽으로 빙 둘러 있으면서 동부(洞府)를 이루고 있는데, 시골 마을이 멀리 보이고 솔과 대가 푸르게 우거져 있으며, 논에는 벼가 가득 자라나 있고 나무꾼과 어부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이에 배회하면서 바라보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을 끼고 달빛을 안은 채 영원토록 즐겁게 놀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흥이 절정에 달하여 시냇가의 언덕에 올라가 술에 취한 채 숲 속에 누워 있다가 깨어나 보니 어느 새 해가 이미 서산으로 기울었다. 주인이 나와 조화우, 이응약을 초청해 가마를 나란히 하여 고을 안으로 돌아갔다. 고을에는 협선루(挾仙樓)가 있는데, 바로 주인이 새로 지은 것이며, 협선루의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기슭에는 포월대(抱月臺)가 있었다. 이는 모두 적벽을 인하여 이곳에 그 경치를 갖다가 붙인 것이다. 주인이 또 협선루 위에 술상을 차렸는데, 나는 병을 핑계로 술을 사양하였다. 경연이 또 별서에서 이곳으로 왔다. 날이 밝자 시내에 있는 다리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전송하고 돌아갔다.
아아, 땅이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음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이 때를 만나고 못 만나는 것과 같다. 오림(烏林)의 적벽(赤壁)은 대개 사방으로 몇 개의 주(州)와 통할 수 있는 들판에 있었으니, 실로 동남쪽의 한 도회지(都會地)였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이후부터 한(漢) 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소문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오(吳) 나라와 위(魏) 나라가 분쟁하는 즈음에 이르러서야 드러났는데, 절승(絶勝)으로는 일컬어지지 않았다. 그 뒤 수백 년이 지나 소선(蘇仙)을 만난 다음에야 비로소 천하에 이름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하물며 이곳의 적벽이겠는가.
이 적벽은 우리나라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서 잡초와 골짜기 사이에 파묻혀 있으니, 수백 년이 지나도록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최 사인(崔舍人)이 이곳으로 유배와서 산 이후로 적벽의 이름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 중국의 적벽이 소선을 만나서 이름이 드러난 것과 같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 또 주인이 꾸며서 장식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곳 적벽이 다시 사람을 만났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소선이 죽은 뒤에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사람이 부지기수이지만 후세에 전해지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최 사인 이후에 이곳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자가 부지기수이나 후세에 전해지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아아, 땅은 스스로 기이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하는 것은 형승(形勝)이다. 그리고 사람은 스스로 귀한 것이 아니라, 귀해지게 하는 것은 재덕(才德)이다. 설령 소선이 문장과 절의가 뛰어나지 못하였고 최 사인이 일대의 기절(氣節)이 없었다면 장차 초목과 함께 썩어 갔을 것이니, 어찌 능히 영원히 후세에 이름을 드리울 수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들의 오늘 이 유람은 즐겁기는 즐겁지만, 참으로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는 자취가 없다면, 참으로 소선이 이른 바 ‘천지간의 하루살이요, 푸른 바다에 빠진 좁쌀 한 알’일 것이니,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장차 이들 두 사람처럼 문장을 짓는 데 힘을 써서 영원토록 전해지기를 도모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내가 말하기를, “아니다. 문장은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마땅히 배울 것도 아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가는 것이 저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 하였으니, 소동파가 이른바 변하지 않고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것에서 본 것이 있는 것이리라. 우리들이 이에 대해 과연 말없는 가운데에서 마음속으로 터득하여 쉼없는 공부를 한다면,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는 것을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끄덕끄덕하였다.
이로 인해서 글로 써서 나 자신을 경계하고, 또 함께 유람한 여러 군자들에게 충고하는 바이다. 이에 기(記)를 짓는다.
[주-D001] 북산이문(北山移文) :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지은 글이다. 공치규가 자신과 함께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벼슬길에 나선 주옹(周顒)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 글을 지어서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주-D002] 옛날의 고사(故事) :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가을철에 성 밖에 있는 적벽(赤壁)에서 두 차례 뱃놀이를 하고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고사를 말한다.
[주-D003] 은교(銀橋) :
신선의 지팡이가 화하여 된, 월궁(月宮)으로 통할 수 있는 다리를 말한다.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달을 바라보면서 감상하고 있을 적에 공원(公遠)이 공중을 향하여 지팡이를 던지자, 그 지팡이가 은빛이 나는 큰 다리로 변하였으므로, 공원과 함께 다리를 건너가 월궁에 이르렀다고 한다. 《神仙感遇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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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집 부록 제4권
[기(記)]
1.석문정사(石門精舍) 중수기(重修記)
동복(同福)은 호남(湖南)에서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데, 기이하면서도 아주 뛰어나 온 경내에서 으뜸 가는 명승지로는 적벽(赤壁)이 있을 뿐이다.
내가 계미년(1583, 선조 16) 가을에 부절(符節)을 차고 금성(錦城)에서 목사(牧使)로 있었는데, 일찍이 동복현의 객관에서 나그네를 전송하였으며, 계속해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치르는 일로 그곳에 갔었다. 그러나 그 경치 좋은 곳을 지척에 두고 바라보기만 한 채 한 차례 유람하지도 못하였다. 금성으로 돌아와서 공문서에 파묻힌 채 지내노라니 마치 북산이문(北山移文)을 받은 것만 같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서성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술년(1586, 선조 19) 가을에 동복 현감으로 있던 돈서(惇敍) 김부륜(金富倫)이 편지를 보내 오기를, “가을이고 또 기망(旣望)인데, 바람과 달빛이 둘 다 맑으며, 강과 산은 예전과 같다. 만약 옛날의 고사(故事)를 이룰 수만 있다면 바로 소선(蘇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유람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내가 자리에 누워 그곳의 경치를 상상해 온 지 오래였다.
15일에 말을 타고 남평(南平)으로 가서 경연(景淵) 이길(李洁)을 방문하고자 남계정사(南溪精舍)로 찾아가니, 시내와 산은 소슬하면서도 깨끗하였고, 달빛은 낮과 같았다. 이에 거문고를 뜯으면서 술을 마시니 이미 티끌 세상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경연을 데리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길을 떠났는데, 금사(琴師)인 황복(黃福)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시냇가를 따라 산을 끼고 돌면서 수십 리를 가니 드넓은 평지가 나타났는데, 바로 화순현(和順縣)의 치소(治所)가 있는 곳이었다. 강학루(降鶴樓)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서성이노라니 어느 새 날이 저물었다. 이 고을 사람인 저작(著作) 조화우(曺和宇)와 정자(正字) 이응약(李應籲)이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을 불러서 함께 길을 떠났다. 동복현의 경내에 들어서기도 전에 구름 낀 길이 깜깜해졌다. 이에 촌 백성이 짚을 묶어서 불을 밝히고 앞에서 인도해 갔는데, 불빛은 희미하고 길은 험하여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좋은 흥취가 표연히 일어 힘든 줄도 몰랐다.
선경(仙境)을 10여 리 정도 남겨 두고 산 달이 비로소 얼굴을 내밀었는데, 홀연히 동쪽편에서 맑은 기운이 자욱하게 끼인 가운데 마치 여름날에 뭉게구름이 피어나 기이한 산봉우리 모양새가 된 것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러자 촌 백성이 말하기를 “여기가 적벽이다.” 하였다. 이에 말을 채찍질해 앞으로 나아가 두 개의 시냇물을 건너 그곳에 도착하니, 주인(主人)은 거창 군수(居昌郡守)를 지낸 중명(仲明) 양자징(梁子澂)과 그 고을 선비인 하대붕(河大鵬), 정암수(丁巖壽), 정형운(丁亨運) 등 몇 사람을 데리고 와 물가에다 자리를 펴 놓고서 기다리고 있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때 가을 바람이 살짝 불어 오고 흰 이슬은 막 떨어졌으며,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없고 땅에는 티끌 하나 없었다. 만 겹으로 층진 옥 절벽은 밤이라 빛이 푸르스름하여 비록 높고 낮음을 헤아릴 수 없었으나, 고개를 돌려 산 바깥을 바라보니 달은 이미 허공중에 솟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광(瑞光)이 바위 뒷쪽에서 솟아 나와 만 길이나 되는 은교(銀橋)가 곧장 은하수를 향해 뻗쳤다. 얼마 뒤에 천 개의 단애는 빛을 발하고 백 이랑의 물은 맑고 맑은데 숨어 있던 바위와 깊은 골짜기가 한꺼번에 모두 밝아지니, 가까운 곳에 있는 의관을 쓴 사람은 인간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며, 마부와 종들 역시 유안(劉安)의 닭과 개로 화하였다.
주인이 이때 노래 부르는 아이에게 명하여 채릉가(采菱歌)와 백빈가(白蘋歌)를 노래하게 하니, 뭇 소리가 교대로 일어났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만 부르라. 오늘 같은 이런 밤에는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가(赤壁歌)가 아니면 귀만 시끄러울 뿐이다.” 하니, 좌중에 있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노래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읊어서 노래하는 것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다. 어찌 아녀자들의 재잘대는 입을 빌려 맑은 노래를 더럽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조화우가 드디어 전적벽부(前赤壁賦) 한 장(章)을 노래하자 종자(從者)로 하여금 퉁소를 불어 화답하게 하였다. 금사(琴師)가 또 그에 따라서 아양곡(峨洋曲)으로 되받았다. 노랫가락이 시원시원하여 메아리 소리가 바위 골짜기 사이로 퍼져 나가니 항아(姮娥)가 하늘 위에서 배회하고 어룡(魚龍)이 물 아래에서 춤을 추었으며, 좌중은 적막하고 강과 하늘은 아득하였다. 그리하여 마치 자진(子晉)이 부는 구산(緱山)의 퉁소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아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하였다.
주인이 또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시 두 편을 내놓았는데, 그 시는 대개 임술년(1562, 명종 17) 가을에 내가 돈서(惇敍)와 계문(溪門)에 있을 적에, 선생님께서 그날 달빛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려던 차에 마침 비바람이 불어 왔으므로 서글픈 마음에서 읊은 시였다. 그로부터 어느 사이에 수십 년이나 지나 선생님께서는 이미 후학들을 버리고 떠나갔고, 머리가 하얗게 센 문생(門生)들이 천 리 밖에서 모여 오늘의 이 유람을 하게 되었다. 맑고도 깨끗했던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뵐 수가 없어, 선생님께서 남긴 시편을 거듭해서 읊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에 드디어 좌우 사람들에게 권하여 모두 그 시의 운(韻)을 따라서 시를 읊었다.
처음에는 차가운 산 기운과 물 기운 속에서 노숙(露宿)할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각자 촌 마을의 객점을 찾아가 잠시 눈을 붙일 계획이었는데, 얼마 있다가는 술잔을 서로 돌리면서 웃고 떠드는 사이에 술이 깬 사람은 돌아가기를 잊었고, 술에 취한 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참 뒤에 술잔 위가 홀연히 어둠침침해지더니 땅 위에 사람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술에 취한 눈으로 바라보니 보이는 건 오직 피어 오르는 물안개와 흐릿한 달빛뿐, 사람들의 모습은 안개에 싸여 있었으며, 상하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등불을 켜서 달빛을 이으려고 하기에, 내가 “촛불을 켜지 마라. 이는 새벽이 오려는 것으로, 하늘이 장차 밝아질 것이다.” 하였다.
잠시 뒤에 동방이 훤해지면서 해가 하늘 위로 솟아오르자 맑은 바람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니 싸였던 안개가 모두 걷혔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객들이 모두 놀라 일어났다. 경연은 그의 형 경함(景涵) 이발(李潑)의 별서(別墅)로 들어가고, 중명 양자징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대개 술 마시기가 싫어서 도망친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밤놀이가 비록 즐겁기는 하지만 강산(江山)의 진면목은 흐릿하여서 마치 꿈속에서 본 듯하다. 만약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진다면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였다.
주인이 미리 시냇물 가운데에 임시로 배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상을 하나 놓아 두었는데, 두세 명이 둘러앉을 만하였다. 내가 주인과 조화우, 이응약과 더불어 먼저 차지하고 앉자, 나머지 사람들이 앞다투어 올라오다가는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모두 허둥지둥 물러났다. 이에 시내 한 가운데에서 닻줄을 풀고 물가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마음내키는 대로 떠다녔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은 물속에 뒤섞여 있고 금빛 모래와 하얀 자갈은 물속까지 하나하나 셀 수 있었으며, 하늘에 뜬 흰 구름은 그림자가 교차하고 나는 물새는 기심(機心)을 잊었는바, 한 구역의 기이한 볼거리가 모두 시를 읊는 중에 들어왔다. 지난밤의 일을 돌이켜서 생각하니 이미 요대(瑤臺)의 꿈이 되었는데, 잠시 동안의 놀이는 또다시 창주(滄洲)가 끝이 없는 흥취가 있었다. 이 두 가지는 그 아름다움이 서로 엇비슷해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냇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는데, 하나는 광산(光山)의 서석산(瑞石山)에서 흘러 나오고, 하나는 옥산(玉山)의 경내에서 흘러 나온다. 두 물이 합류하여 북쪽으로 꺾어졌다가 동쪽으로 흐르고, 또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며, 또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는데, 서쪽에서부터 남쪽까지 빙 돌아 흘러 현치(縣治)의 금대(襟帶)가 되었다. 적벽은 북쪽으로 꺾어졌다가 동쪽으로 흐르는 곳에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제2곡(曲)이다. 푸른 산은 북쪽으로부터 내려와 빙 둘러싸고 있는데, 거의 수십 리나 되며, 시냇물이 둥그렇게 굽이져 흐르는 곳은 모두 산이 감도는 곳이다.
북쪽과 서쪽, 남쪽에 있는 산은 모두 윗부분에 흙을 이고 있고 시냇물에 임하여 기슭이 끊어졌는데, 꾸불꾸불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비록 좋기는 하나 몹시 기이하지는 않다. 오직 적벽만이 가운데 봉우리가 우뚝 솟아나 마치 중국의 천주산(天柱山)이나 석름산(石廩山)과 같으며, 그 아래로는 좌우로 날개를 펴고 있는데, 산 뿌리는 물속 깊이 박혀 있고, 윗 부분은 구름 위로 솟아나 있다. 이에 옥병풍이 하늘에 펼쳐지고 적성(赤城)의 노을이 피어 올라서 좌우로 돌아보면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떨리는바, 아무리 여산(廬山)의 구첩(九疊)이나 무이(武夷)의 구곡(九曲)일지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단애(丹崖)는 서쪽으로 빙 둘러 있으면서 동부(洞府)를 이루고 있는데, 시골 마을이 멀리 보이고 솔과 대가 푸르게 우거져 있으며, 논에는 벼가 가득 자라나 있고 나무꾼과 어부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이에 배회하면서 바라보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을 끼고 달빛을 안은 채 영원토록 즐겁게 놀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흥이 절정에 달하여 시냇가의 언덕에 올라가 술에 취한 채 숲 속에 누워 있다가 깨어나 보니 어느 새 해가 이미 서산으로 기울었다. 주인이 나와 조화우, 이응약을 초청해 가마를 나란히 하여 고을 안으로 돌아갔다. 고을에는 협선루(挾仙樓)가 있는데, 바로 주인이 새로 지은 것이며, 협선루의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기슭에는 포월대(抱月臺)가 있었다. 이는 모두 적벽을 인하여 이곳에 그 경치를 갖다가 붙인 것이다. 주인이 또 협선루 위에 술상을 차렸는데, 나는 병을 핑계로 술을 사양하였다. 경연이 또 별서에서 이곳으로 왔다. 날이 밝자 시내에 있는 다리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전송하고 돌아갔다.
아아, 땅이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음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이 때를 만나고 못 만나는 것과 같다. 오림(烏林)의 적벽(赤壁)은 대개 사방으로 몇 개의 주(州)와 통할 수 있는 들판에 있었으니, 실로 동남쪽의 한 도회지(都會地)였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이후부터 한(漢) 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소문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오(吳) 나라와 위(魏) 나라가 분쟁하는 즈음에 이르러서야 드러났는데, 절승(絶勝)으로는 일컬어지지 않았다. 그 뒤 수백 년이 지나 소선(蘇仙)을 만난 다음에야 비로소 천하에 이름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하물며 이곳의 적벽이겠는가.
이 적벽은 우리나라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서 잡초와 골짜기 사이에 파묻혀 있으니, 수백 년이 지나도록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최 사인(崔舍人)이 이곳으로 유배와서 산 이후로 적벽의 이름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 중국의 적벽이 소선을 만나서 이름이 드러난 것과 같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 또 주인이 꾸며서 장식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곳 적벽이 다시 사람을 만났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소선이 죽은 뒤에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사람이 부지기수이지만 후세에 전해지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최 사인 이후에 이곳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자가 부지기수이나 후세에 전해지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아아, 땅은 스스로 기이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하는 것은 형승(形勝)이다. 그리고 사람은 스스로 귀한 것이 아니라, 귀해지게 하는 것은 재덕(才德)이다. 설령 소선이 문장과 절의가 뛰어나지 못하였고 최 사인이 일대의 기절(氣節)이 없었다면 장차 초목과 함께 썩어 갔을 것이니, 어찌 능히 영원히 후세에 이름을 드리울 수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들의 오늘 이 유람은 즐겁기는 즐겁지만, 참으로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는 자취가 없다면, 참으로 소선이 이른 바 ‘천지간의 하루살이요, 푸른 바다에 빠진 좁쌀 한 알’일 것이니,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장차 이들 두 사람처럼 문장을 짓는 데 힘을 써서 영원토록 전해지기를 도모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내가 말하기를, “아니다. 문장은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마땅히 배울 것도 아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가는 것이 저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 하였으니, 소동파가 이른바 변하지 않고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것에서 본 것이 있는 것이리라. 우리들이 이에 대해 과연 말없는 가운데에서 마음속으로 터득하여 쉼없는 공부를 한다면,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는 것을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끄덕끄덕하였다.
이로 인해서 글로 써서 나 자신을 경계하고, 또 함께 유람한 여러 군자들에게 충고하는 바이다. 이에 기(記)를 짓는다.
[주-D001] 북산이문(北山移文) :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지은 글이다. 공치규가 자신과 함께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벼슬길에 나선 주옹(周顒)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 글을 지어서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주-D002] 옛날의 고사(故事) :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가을철에 성 밖에 있는 적벽(赤壁)에서 두 차례 뱃놀이를 하고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고사를 말한다.
[주-D003] 은교(銀橋) :
신선의 지팡이가 화하여 된, 월궁(月宮)으로 통할 수 있는 다리를 말한다.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달을 바라보면서 감상하고 있을 적에 공원(公遠)이 공중을 향하여 지팡이를 던지자, 그 지팡이가 은빛이 나는 큰 다리로 변하였으므로, 공원과 함께 다리를 건너가 월궁에 이르렀다고 한다. 《神仙感遇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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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제10권 / 정구(鄭逑)
기(記)
1함안(咸安) 사직단기(社稷壇記) 정해년(1587, 선조20)
2함주임관제명기(咸州任官題名記)
3강선루기(降仙樓記)
4육일헌기(六一軒記)
5화연기(畫硯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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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함안(咸安) 사직단기(社稷壇記) 정해년(1587, 선조20)
만력 병술년(1586, 선조19) 겨울에 서원(西原) 정구는 조정으로부터 본군의 군수로 제수한다는 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10월 계미일에 임지에 당도하여 그 이튿날 목욕재계하고 3일째 되는 을유일에 사직(社稷)의 신에게 참배하였다. 의식을 마친 뒤 삼가 제단과 토담을 둘러보니 저절로 한탄이 터져 나오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 제도가 어긋나고 고루하여 법도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이 기울고 섬돌은 무너졌으며 문과 담은 부서지고 재계하는 집이나 부엌 등이 다 없어져 구차하고 허술하여 모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방 고을을 지키는 신하가 나라의 공식적인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곳이 어찌 이래서야 되겠는가. 홍수와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나도는 재앙이나 선한 인심과 아름다운 풍속이 무너지는 제반의 일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나는 진정 어리석고 부족하지만 이미 이곳에 수령으로 부임한 이상 감히 이대로 놓아둘 수 없어 허물어진 곳을 수리하고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 고장 노인들과 상의한 뒤에 이희성(李喜成)과 오진(吳溍)을 만나 이들에게 그 공사를 맡게 하였다. 이씨는 정밀하고 민첩하며 오씨는 삼가고 분명한 사람으로 모두 일찍이 학문에 종사하여 사리를 알았으므로 서로 마음을 합쳐 있는 힘을 다하였다. 나의 지시가 혹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다각도로 설계하여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옛터를 그대로 사용하되 새로운 제도를 구현하였으니, 그 중앙을 넓히고 사방 모서리를 늘렸으며 안쪽에는 단을 쌓고 바깥쪽에는 낮은 토담을 쌓았다. 섬돌을 높이고 담장을 둘러쳤는데 섬돌을 석 자 높이로 쌓아 단을 만들고 담장은 섬돌 높이의 갑절로 쌓아 낮은 토담을 에워쌌다. 단의 지름은 25자이고 낮은 토담은 사방 둘레가 75자로 이루어졌다. 단의 서남쪽에는 토실(土室) 한 칸을 지어 신의 위판(位版)을 안치하고, 낮은 토담의 사방에는 각각 두 기둥을 세워 문을 만들고 붉은 격자창으로 가렸다. 담장 밖의 서북쪽 귀퉁이에는 재사(齋舍)와 신주(神廚)를 각 세 칸으로 세우고 다시 작은 담으로 둘러쳤는데, 재사에는 마루와 방이 있고 신주에는 제물을 살펴보는 장소가 있다. 북문 안쪽에는 폐백과 축문을 보관하는 감실(龕室)이 있고 서문 밖에는 희생을 매어 두는 말뚝이 있으며, 단의 사방 벽면에는 각각 그 방위의 색깔에 해당하는 흙을 바르고 위에는 천막이며 왕골자리를 갖추었는데 모두 새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사방으로 각각 30보씩 한계를 정해 나무꾼과 소를 먹이는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정해년 중춘(仲春) 상무(上戊 매월 상순에 든 무일(戊日))에 제사를 잡아 공사를 착수하겠다는 뜻을 신에게 고하고 일을 시작하였는데, 일을 감히 서둘러 진행하지 않고 백성의 힘을 감히 빼앗지 않았다. 백성들이 한가로운 때를 엿보아 조금씩 이루어 나가 7월 무신일에 축문을 다듬고 공사를 마쳤다.
이리하여 빗장이 단단히 잠기고 뜨락이며 행랑채가 정갈한 가운데 제단을 지키는 자는 감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섯 방위의 신을 봉안하고 언덕과 습지의 신을 받들어 모시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제기를 갖추어 보관해 두는 한편, 제사 지내는 의식을 써서 익히도록 하여 제단에 오르내리며 앞으로 나오고 뒤로 물러나는 등의 의식을 수행하는 제관들이 이것을 상고함으로써 감히 헤매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 뒤에 또 나중에 본군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자나 본 고을의 사류와 백성들이 혹시 오늘날 이처럼 정성을 쏟은 뜻을 깊이 알지 못한 나머지 제물을 올리는 예와 제단과 건물을 수축하는 일에 행여 소홀히 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고, 아울러 이씨와 오씨의 애쓴 공로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처럼 삼가 그 전말을 갖추어 모두 기록하는 바이다.
정해년 7월 일에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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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함주임관제명기(咸州任官題名記)
3.강선루기(降仙樓記)
성주(成州 성천(成川)의 옛 이름)는 곧 송양(松壤)의 옛 나라로서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이 고장은 옛 사적과 기이한 유적이 많은 데다가 토양이 비옥하고 산천이 험난한데, 이는 역사서에 실려 후세에 전해 오고 있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마땅히 관서(關西) 지역의 으뜸으로서 흔히 볼 수 없는 고장이 되어야 할 것인데, 오직 이곳에 강선루(降仙樓)가 이름났으므로 기타의 특색들은 아예 거론되지 않는다. 이는 무슨 이유인가?
이 누각은 동명관(東明館)의 서쪽이자 비류강(沸流江)의 북쪽에 있으니 흘골성(屹骨城)의 동남쪽이다.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세워졌는지 알 수 없고, 또 무슨 뜻을 취하여 그와 같은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주변에 산봉우리 열두 개가 있다 하여 중국 무산(巫山)의 초 양왕(楚襄王)과 신녀(神女)의 전설을 끌어다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내가 살펴보니, 이 누각은 앞산과 멀리 떨어져 있고 백 보 이내에는 기암괴석이 말끔하고 아름답다. 강물이 그 중간에서 넘실넘실 물결치며 흐르는데 맑은 빛이 드넓게 깔렸고 물줄기가 이리저리 감고 돌아 산 뒤쪽으로 흘러나가며, 간혹 강으로 새어 들어가는 도랑물 소리가 물이 끓듯이 보글보글 들려왔다. 이러한 곳에 누각이 하늘을 날듯이 높이 서 있는데 사방이 툭 트이고 기이한 모습이 마치 산봉우리와 높이를 겨루고 강물과 아름다움을 다투는 것 같았다. 손에 닿을 듯 펼쳐진 그 경관을 접하노라면 정신이 황홀한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온갖 형태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훨훨 자신도 모르게 시원한 바람을 타고 낭풍(閬風 신선이 산다는 곤륜산(崑崙山) 위의 산봉우리)을 지나가며 잡다한 인간 세상을 벗어나 천상에 노니는 것만 같았다. 세상 밖의 기이한 경관에 관해서는 나의 재주로는 더 이상 무어라고 논의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인간 속의 뛰어난 경관을 논평하고 맑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한다면 위와 같은 경우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한 지역을 압도하는 형세라는 것이 사실 지나친 평이 아닐 것이다.
신선이 있는지는 허황하여 알 수 없다. 그러나 옛사람들이 그에 관한 말을 많이 하였으니, 내가 어찌 또 반드시 없다고 장담하겠는가. 악양(岳陽)에 세 번 들어가고 화표(華表)에서 한 번 놀았던 일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누각에 신선이 또 어찌 한 번쯤 내려오지 않았겠는가. 세상에 황학(黃鶴)을 탄 신선이 내려와 쉬었다는 누각이 있고 적송자(赤松子)가 놀았다는 정자가 있는 것으로 보면, 이 누각에 강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학을 탄 신선이 훨훨 날아 내려올 것을 기대한 일은 실로 그만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서 지나치지 않다. 더구나 그 자리 잡은 모양이 높고 밝으며 구조가 정밀하여 훌륭한 누각이라고 평하기에 충분한 데에 있어서랴.
신선이 일단 내려와 이곳을 좋다고 여긴다면, 반드시 계속 머무를 자가 있을 것이고 또 반드시 그와 어울리는 자가 있을 것이며, 신선술을 배우는 자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도를 통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누각의 동쪽에 있는 누각들로서 수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다투는 것은 그 이름이 제각기 그만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봉래(蓬萊)란 신선이 자리 잡고 사는 곳이 아니겠으며, 현허(玄虛)니 영롱(玲瓏)이니 하는 것은 신선의 취향에 걸맞은 용어가 아니겠는가.
나는 또 누각의 안쪽 기둥을 집선(集仙)이라 이름하였다. 《논어(論語)》에 “덕이 있는 이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는 법이다.” 하고, 《역경(易經)》에 “서로 의심하지 않으면 벗이 모여들 것이다.” 하였으며, 《시경(詩經)》에 “나무를 쩡쩡 베어 내니, 산새들이 화답하네.”라고 하여 벗이 찾아오는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그러니 어찌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벗들이 찾아와 모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하면, 이곳에 내려오고 또 한자리에 모여 머물러 있는 신선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함께 《참동계(參同契)》와 《황정경(黃庭經)》의 심오한 뜻을 강론하고 아울러 신선술을 배워 그들과 벗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때가 돌아오기를 내 한번 기다려 보겠다.
그러나 이곳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만일 있다면 내가 이곳에서 지낸 지 3년이 지나도록 어찌 한 번도 만나지 못했겠는가. 혹시 신선이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했다면 나는 그가 신선이라고 믿을 수 없다. 신선이 어찌 모습이 특별한 별종일 리가 있는가. 정신이 맑고 도를 통하여 가슴속이 깨끗해 물욕에 얽매인 것이 없으면 내가 곧 신선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놓아두고 따로 이른바 신선이라는 것을 찾는다면 나는 그가 진짜 신선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어 이곳에 올라와 둘러보고 이곳을 배회하노라니 이곳은 정말 강선루임이 분명하였다. 나중에 이 누각에 올라온 사람이 허황한 신선의 그 신선을 찾지 말고 자기 본심의 신선을 찾는다면 좋을 것이다.
만력 기원 27년 기해년(1599, 선조32) 12월 12일에 청주(淸州) 양진도인(養眞道人)은 쓰다.
[주-D001] 송양(松壤) :
평안남도 성천(成川)의 옛 이름으로 송양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그곳에 송양국이 있었다 하여 불려진 것이다. 기원전 37년에 그 나라의 왕이 주몽(朱蒙 동명왕)과 활쏘기로 승부를 겨루어 지고서 이듬해 2월에 동명왕에게 항복하고 그의 딸을 유리왕(琉璃王)의 비(妃)로 바쳤다 한다. 송양은 국명인 동시에 왕의 이름이다. 《三國史記 卷13 高句麗本紀第一 東明聖王》
[주-D002] 악양(岳陽)에 …… 들어가고 :
악양은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한 고을 이름이다. 중국의 여덟 신선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는 당나라 때의 여동빈(呂洞賓)의 고사이다. 그는 송나라 때까지 살며 악양루(岳陽樓)에 올라가 시를 지어 벽에 붙여 두었는데, 그 시에 “악양 땅 세 번 들어와도 사람들이 몰라보니, 노래하며 동정호를 날아서 지나가네.〔三入岳陽人不識 朗吟飛過洞庭湖〕”라고 하였다는 데서 신선이 불로장생한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蒙齋筆談》
[주-D003] 화표(華表)에서 …… 일 :
화표는 화표주(華表柱)로 궁전이나 성곽, 무덤 등에 장식용으로 세우는 돌기둥의 일종이다. 한(漢)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인 정영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술을 배워 학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는데, 뒤에 요동으로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 위에 앉아 놀았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搜神後記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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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육일헌기(六一軒記)
5.화연기(畫硯記)
나는 평소에 그림을 모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데 이는 맛이 없는 속에 맛이 있다는 것을 알고 취미 아닌 취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찍이 그림이 조각된 벼루 한 개를 얻어 이것도 좋아하여 잘 간수하였다. 그러나 그 화법(畫法)이나 의미는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또 이것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심사일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이따금 한 번씩 매만지며 감상하다 보니 자연 손에서 놓아 버릴 수 없었다.
요즘 수재(秀才) 이의윤(李宜潤)이 나를 찾아와 어울리며 글을 배우는 중인데, 내가 또 이것을 꺼내어 구경하고 있노라니 이생(李生)이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해 주었다. 우거진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은 소나무이고 길고 가냘픈 것들이 빽빽하게 어우러진 것은 대나무이며, 점점이 외롭게 날고 있는 것은 구름인데 둥근 달이 그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결이 잔잔하게 일렁이며 무늬를 이룬 것은 물이고 그 위에 울퉁불퉁한 것은 바위였다. 거기에 또 두세 줄기의 산포도가 한쪽 귀퉁이에서 덩굴져 뻗어 나가 소나무 뿌리를 휘감았고, 그 아래쪽에는 혼자 바위틈에서 비탈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 그를 마주보고 서서 고개를 들어 포도를 잡아 따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다 초산(楚山)의 정신나간 도사들로 아직 신선이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풀잎 사이에서 뛰거나 달리는 것들도 있는데 이들은 풀벌레 따위로서 이름이 각기 다른 것들이었고, 윗몸을 일으켜 다리를 반쯤 구부린 채 벌레를 노려보고 있는 것은 작은 종자의 청개구리였다.
바위 위에 작은 탁자를 놓고 술 한 동이를 열어두었는데, 그 앞에서 술잔을 들고 달과 서로 문답하고 있는 자는 그가 진짜 적선(謫仙 이백(李白))인지 알 수 없으나 긴 수염에 고고한 모습으로 홀로 산중에 앉아 있으므로 속세를 훌훌 벗어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풍겼다. 물가의 높은 바위에 걸터앉아 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나 고기를 잡으려는 마음은 없고 속세를 벗어나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도 위수(渭水) 가 강태공(姜太公)의 기풍이 어렴풋이 깃든 것을 느꼈다.
나의 이 벼루가 길이는 한 자가 채 되지 않고 폭은 겨우 그 절반 정도이지만, 사람과 사물을 대강 갖추었으며 한적하고 말끔한 풍경이 둥근 벼루 바닥을 에워싸고서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었다. 도화원(桃花源) 외에도 과연 이와 같은 세계가 있으며 무릉(武陵) 어부(漁夫)의 발길도 이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다. 과거에는 무슨 그림인지 모르면서도 오히려 좋아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이미 그 설명을 들어 하나하나 다 알게 되매 또 고상한 흥취가 서로 부합되는 데이겠는가.
또 상상하건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칼을 잡고 생각을 구사할 적에 정신은 흥취와 서로 어우러지고 손은 마음과 서로 호응한 상태에서 온종일 똑바로 앉아 작업을 하면서도 수고스럽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니, 과연 양숙(養叔)의 활솜씨와 포정(庖丁)의 소 잡는 기술과 같은 기예가 어찌 겉으로 좋아하는 정도만으로 습득할 일이겠는가. 그런 다음에야 이처럼 정밀하고 능숙해질 수 있으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경지를 이룩할 것이다. 그 남달리 고충을 겪었을 속마음에 내가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 벼루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구름과 산, 물과 바위 사이에서 옛사람을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 또한 인정상 누구나 원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일이며, 나도 이 점에 대해 감히 소홀히 생각하지 못한다. 마을 앞 시내에서 낚시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소나무 위에 걸린 달이 밝은 빛을 뿌릴 때나 어울리는 사람 없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데 찌르륵찌르륵 풀벌레가 울어 댈 때 이 벼루를 열고 마주 대하면 반드시 세속의 잡념이 말끔히 사라져 외물과 내 자신의 존재를 다 잊는 경지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문방(文房)의 벗으로 삼는 이유가 어찌 먹을 가는 벼루의 용도로 쓰는 데에만 있겠는가. 이생은 과연 이런 의미를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이생은 회재(晦齋) 선생의 적통을 이은 맏손자이다. 부디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가정의 학문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기축년(1589, 선조22) 6월 일에 연상옹(淵上翁)은 쓰다.
[주-D001] 초산(楚山) :
중국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에 있는 상산(商山)의 다른 이름이다. 진(秦)나라 때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산 곳으로, 은사가 은둔한 산을 뜻한다.
[주-D002] 양숙(養叔) :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이름난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양유기(養由基)를 가리킨다. 백 보 거리에 있는 버들잎을 백발백중했다고 한다.
[주-D003] 포정(庖丁) :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인물로, 푸줏간에서 소를 잡는 백정이다. 소뼈의 생김새와 힘줄이며 살의 결을 환히 알아서 칼 한 자루로 19년 동안 수천 마리를 잡았는데도 칼날이 무뎌지지 않고 숫돌에 금방 간 것처럼 예리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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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재선생문집 제22권
기(記)
1이직암기(以直菴記)
2주촌사당기(舟村祠堂記)
3운한대기(雲漢臺記)
4북계 별서기(北溪別墅記)
5집성사기(集成祠記)
6소광정기(昭曠亭記)
7애일당기(愛日堂記)
8송석재기(松石齋記)
9삼환재기(三患齋記)
10양졸당기(養拙堂記)
11암서재 중수기(巖棲齋重修記)
12송군적(宋君積) 기덕(基德) 이 어찰(御札)을 받은 사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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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직암기(以直菴記)
학자가 한 글자를 가지고 종신토록 행할 수 있는 것은 직(直) 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때문에 선사(先師)께서 임종일(臨終日)에 이 한 글자를 표출하여 이 소자(小子)에게 고해 주셨는데, 이 소자가 우둔하여 비록 그것을 체받아 실천하지는 못하나, 그 말씀은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 바이다.
그런데 하루는 오천(烏川) 정생 성측(鄭生聖則)이 나에게 말하기를 “제가 누암(樓巖) 위에 조그마한 암자를 새로 지어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았는데, 힘쓰는 방도를 모르겠으니, 선생께서 긴요한 말로 제 암자에 이름을 붙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마침내 우리 선사에게서 받은 말씀을 들어 보이며 이직(以直)으로 명명하였다.
그러자 성측이 말하기를 “삼가 명령을 들었습니다마는, 노선생께서 꼭 이 한 글자를 선생께 고해 주신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막을 듣고 싶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주 선생의 뜻일세. 주 선생이 작고하기 수일 전에 제생(諸生)에게 이르기를 ‘학문하는 요점은 오직 일마다 옳은 도리를 살펴 구하고 그른 것은 결단코 버려서, 이것을 오래오래 쌓아가면 마음과 이치가 서로 하나가 되어 몸에서 발현되는 것이 자연히 모두 사곡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과 천지가 만물을 생하는 것이 직(直)일 뿐이다.’ 하였는데, 대체로 우리 선사의 학문은 일체 주 선생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 말씀이 이와 같았던 것이네. 또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이르기를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겉을 바르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 하였고, 《논어》에는 ‘사람이 사는 이치는 곧은 것이니, 곧지 않고도 사는 것은 요행으로 면한 것일 뿐이다.’ 하였으며, 또 《맹자》에는 ‘그 기(氣)가 지극히 크고 굳세니, 직(直)으로 이것을 길러 해치지 않는다면 천지 사이에 가득찰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스스로 반성해 보아서 자신이 곧았으면 비록 천만인이 앞에 있어도 내가 가서 대항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 여러 설들을 의거한다면 이른바 직(直) 자는 실로 공맹(孔孟) 이후 서로 전해 온 지결(旨訣)로서 사람으로서는 하루도 이것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선생께서 정성스럽게 후인을 교훈하신 것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세도가 쇠미하여 사설(邪說)이 방자하게 행해지고,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은 사람들이 말하기조차 꺼리는 지경이니, 이 직(直) 자의 뜻을 알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아, 노선생은 이제 다시 뵐 수 없으나 유언(遺言)은 귀에 쟁쟁하여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역력하니, 내 몸으로는 끝내 그 만분의 일도 행하지 못할지라도 차마 그 말씀조차 묻혀서 전해지지 않게 할 수야 있겠는가. 성측이여, 여러 친구들과 서로 면려하기 바라네.” 하니, 성측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불민하나 이 말씀을 일삼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에 그와 문답한 것을 써서 주노라.
성측의 이름은 귀하(龜河)인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나와 서로 좋게 지내는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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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촌사당기(舟村祠堂記)
3.운한대기(雲漢臺記)
우리나라가 당한 병자ㆍ정축년의 화를 차마 말하겠는가. 수천 리 산하(山河)가 이미 오랑캐의 종속(從屬)이 되는 수치를 입었고, 갑신년 3월 이후에 이르러서는 사해(四海) 안의 모든 혈기(血氣) 있는 생물(生物)들이 다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받들게 되었다.
그런데 아,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는 《춘추》의 대의를 깊이 생각하시고 비색(否塞)한 국운을 만회할 뜻을 두시어, 이에 두세 동덕(同德)의 신하와 함께 신기로운 꾀를 은밀히 궁구하여 이리저리 구획하는 것을 대략 정하니, 적음(積陰)의 아래에 급진적으로 양(陽)이 회복되어가는 형세가 있었다. 이때 영상(領相) 신 이경여(李敬輿)가 으뜸으로 등용되어 큰 모책을 협찬하였는데, 하루는 소장을 올려 일을 말하면서 상의 집념이 너무 강예(剛銳)하여 지레 먼저 화를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경계하였으니, 대체로 그 뜻은 아주 안전하게 하여 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던 것이다. 그러자 상이 답하기를 “과인이 기욕(嗜慾)을 단절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노심초사하는 것은, 공리(功利)가 말단적인 것임을 몰라서가 아니라, 진실로 지극히 분통함이 마음속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하였다. 아, 이때에 뭇 어진 이가 조정에 가득하였지만, 유독 상국(相國)에게 마음을 저렇듯 쏟았으니, 군신(君臣)간의 정분을 또한 상상할 수 있겠다.
그런데 뜻밖에 성조(聖祖)께서 승하하시어 큰 계책이 여지없이 깨져버렸고, 시사(時事)는 자주 변천하여 그 당시 유악(帷幄)에 출입하던 신하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며, 오직 문정공(文正公) 신 송시열(宋時烈)만이 있었으나 그 또한 남쪽 변경에 위리안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영안(永安)의 애통함을 길이 품고, 하천(下泉)의 생각을 더욱 간절히 하여 마침내 효종대왕의 비답(批答) 속에 있는 지통(至痛) 이하 여덟 글자를 대서(大書)해서 상국의 막내아들인 태재(太宰) 민서(敏敍)에게 주어 강개(慷慨)와 충간(忠懇)의 정성을 부쳤다.
그리하여 그후 24년이 지난 경진년에 상국의 손자인 대종백(大宗伯) 이명(頤命)이 부여(扶餘)에 있는 상국의 옛집 청은당(淸隱堂) 앞 기슭에 가서 애석(崖石)을 반드럽게 갈고 여기에 이 여덟 글자를 깊이 새기어 오래 전하도록 하고, 그 아래 석대(石臺)를 운한(雲漢)이라 이름하였으니, 대체로 《시경(詩經)》의 ‘은하수가 문채를 이루었다.[雲漢爲章]’는 말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팔분서(八分書)로 대(臺)의 이름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이것은 참판(參判) 신 김수증(金壽增)의 글씨이다.
아, 하늘이 기수(氣數)의 굴신(屈伸)에 몰리어 큰 난리를 일으킬 적에는 반드시 난리를 그치게 할 사람을 내어서 그 뒤에 있게 하는 것이니, 이는 고금의 사변이 다 같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이 이미 성왕(聖王)을 내리시고 또 대인(大人) 신하를 내었으니, 이는 그 뜻이 마치 큰일을 할 수 있게 하려는 듯했는데, 공연히 형호(荊湖)의 뭇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안고 울게 한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천지의 영원불변한 법칙과 인간의 떳떳한 윤리는 이를 힘입어 실추되지 않아서, 우주(宇宙)를 기둥처럼 떠받쳤고 일월(日月)보다 밝았으니, 이것을 비록 한번 다스려진 시기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유민(遺民)들의 무궁한 애통심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성상께서 이미 승하하셨으나 그 성덕(聖德)과 지선(至善)을 사람들이 사모하여 세월이 오래갈수록 잊지 않으니, 그 평소에 하시던 말씀 한마디라도 모두 소중히 여겨 높이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성상께서 말씀하신 이 여덟 글자는 그 몹시 비통하고 간절한 뜻이 충분히 금석을 꿰뚫고 귀신을 울릴 수 있으니, 의당 저 전모(典謨)ㆍ아송(雅頌)과 함께 무궁한 후세에까지 전해져야 할 것이다. 또 지금 존주(尊周)의 의리가 날로 점점 어두워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대서(大書)하여 천양한 것은 대체로 쇠미한 세상을 염려한 뜻에서 나온 것이거니와, 이것을 암벽(巖壁)에 새기어 영원히 전해지기를 도모한 것 또한 어찌 심원한 생각이 아니겠는가. 아, 후일 이 대(臺)에 오르는 자들 중에 그 옛일을 더듬어 보고 시속을 걱정하면서 머뭇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강가의 한 조그만 구역이 유독 대명(大明)의 해와 달을 떠받들고 있으니, 우리 동방 사람들은 장차 이를 빙자하여 영원히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을런가. 아, 슬프다. 초야의 신하 권상하(權尙夏)는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쓰노라.
때는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74년(1717, 숙종43) 중춘(仲春)이다.
[주-D001] 영안(永安)의 애통함 :
임금의 죽음을 애통해함을 뜻한다. 영안은 바로 촉한(蜀漢)의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죽었던 영안궁(永安宮)을 말한 것으로, 즉 효종(孝宗)의 죽음을 촉한 선주의 죽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2] 하천(下泉)의 생각 :
이미 죽은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곧 죽은 효종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천은 《시경(詩經)》 조풍(曹風)의 편명인데, 이 시는 조(曹) 나라 사람이 포악무도한 임금을 미워하면서 옛날 주(周) 나라의 명왕(明王)들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주-D003] 은하수가 …… 이루었다 :
이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역복(棫樸)의 “저 높은 은하수가 하늘에 문채를 이루었네.[倬彼雲漢爲章于天]” 한 것을 줄인 말인데, 이 시는 곧 주 문왕(周文王)의 성덕(聖德)을 찬양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역시 효종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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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북계 별서기(北溪別墅記)
5.집성사기(集成祠記)
회옹 부자(晦翁夫子)가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장자(張子)의 뒤에 태어나서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하여 경전(經傳)을 발휘해서 만세의 법칙으로 전하였으니, 이른바 군현(羣賢)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주 부자가 작고하신 뒤로는 성학(聖學)이 전하지 못하고 이단(異端)의 말이 시끄럽게 떠듦으로써 사도(斯道)가 어두워져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보우하사 참다운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학문의 정수를 뚫고 들어가 아주 세밀히 이치를 분석함으로써, 이치를 밝힌 공이 그 성대했던 염락(濂洛) 시대로 급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리 우암(尤菴) 송 문정 선생(宋文正先生)에 이르러서는 그 이학(理學)을 확대하고 천명하여, 멀리는 고정(考亭 주희를 가리킴)의 도통을 접속하고 가까이는 제유(諸儒)가 각각 조금씩 이룬 것들을 집대성함으로써 성대히 백세의 사종(師宗)이 되었으니, 그 공은 진정 크다고 이를 만하다.
그리하여 근래 학문을 많이 하여 문질(文質)이 겸비해진 호중(湖中)의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회옹은 공자 이후 일인자이고 우암은 회옹 이후 일인자이니, 후학들로서 존숭하여 모범으로 삼을 분은 의당 이 두 선생만한 이가 없다.” 하고, 마침내 예산(禮山)의 비곤리(飛鵾里)에 사당을 세워 진상(眞像)을 봉안하되 주 부자는 북벽(北壁) 아래 봉안하고 선생은 그 왼쪽에 배향시켜, 여기에 집성(集成)이란 편액을 걸어서 우러러 의지하고 본받을 곳으로 삼았다. 그런데 뜻밖에 변괴가 생기자, 모두 ‘그대로 봉안하기가 미안하고 또 사당이 너무 구석진 곳에 있어 실로 학자들이 와서 유식(游息)하기에 불편하다.’고 하여, 계사년 모월 모일에 관봉(冠峯)아래 검계(黔溪) 가에다 사당을 옮겨 세우니, 산수가 맑고 고우며 골짜기가 환하게 탁 트여 학자들이 학문을 닦기에 꼭 알맞았다. 그 아래로 몇 걸음을 내려가면 옛날 현상벽 언명(玄尙璧彦明)의 서재가 있어 또 백록동(白鹿洞)의 숙(塾)이 상(庠)으로 변화한 것과 비슷하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언명(彦明 현상벽(玄尙璧))이 그 시종을 주관하였고, 태수(太守) 이욱 첨백(李澳瞻伯)이 이 일에 매우 힘썼으며, 최징후 성중(崔徵厚成仲)ㆍ윤혼 회보(尹焜晦甫)ㆍ이간 공거(李柬公擧)는 모두 문자(文字)로 도와주었으니, 모두 이름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아, 학궁(學宮)이 어찌 제수(祭需)나 차려 놓고 참배나 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겠는가. 이 마당에 들어와 이 재(齋)에 거처하는 자는 반드시 선사(先師)를 깊이 사모하는 생각을 가지고서, 그 글을 읽고 그 교훈을 음미하면서 용맹하게 분발하여 말 한마디, 행동 한 가지라도 모두 주 부자와 우암 선생을 본받은 다음에야 거의 선철(先哲)들이 후진을 계도시킨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숭정 갑신년 후 71년인 갑오년(1714, 숙종40) 4월 16일에 안동(安東) 권상하(權尙夏)는 삼가 기록한다.
[주-D001] 백록동(白鹿洞)의 …… 변화한 것 :
백록동은 중국 여산(廬山)에 있는 동명(洞名)이며, 숙(塾)은 사숙(私塾)을 말하고 상(庠)은 공학(公學)을 말한 것으로, 즉 당 덕종(唐德宗) 때에 이발(李渤) 형제가 이 백록동에서 글을 읽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남당(南唐) 때에는 여기에 학교를 세워 여산 국학(廬山國學)이라 칭하여 선비들을 가르쳤고, 송 나라 초기에는 이곳을 더욱 부흥시켜 백록 국학이라 칭하였으며, 그후 조금 침체했다가 주희 때에 와서는 주희가 다시 이곳을 수복(修復)함으로써 천하 제일의 학교로 변신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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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소광정기(昭曠亭記)
7.애일당기(愛日堂記).
여흥(驪興) 민군 사정(閔君士正 민진강(閔鎭綱))이 하루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소자(小子)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 기박하고도 죄가 많아 어렸을 적에 고아가 되어 오직 홀어머니만 계시는데, 조석으로 뜻을 받들어 모시고는 있으나 질병이 끊이지 않고 지금은 또 연세가 이미 많아지셨습니다. 그래서 소자는 참으로 기쁘고도 두려움을 감당치 못합니다. 이에 제가 거처하는 당(堂)을 애일(愛日)이라 이름하여 이것을 스스로 경계하는 자료로 삼고, 또한 일찍이 이것을 노선생(송시열을 가리킴)께 우러러 말씀드리면서 편액(扁額)을 써 주시기를 청하고 또 말씀 한마디 기록하여 소자의 뜻을 발명해 주시기를 청하였던바, 노선생께서 소자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기꺼이 승낙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노선생께서 해외(海外)로 유배되는 일이 생기어 이 일을 미처 착수하지 못하시고 이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소자는 항상 그 통한스러움을 마음에 잊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오년 7월 23일 밤 꿈에 소자가 갑자기 노선생을 여정(旅亭)에서 배알하였는데, 그때 노선생께서는 방 안에 계시었고 선생은 문밖에 있었는바, 두 분 모두 여전히 남쪽으로 가시는 차림이었습니다. 이때 노선생께서 소자에게 하교하시기를 ‘네가 청한 당기(堂記)를 내가 아직껏 써 주지 못했던가. 치도(致道 권상하(權尙夏))에게 써달라고 하여라.’ 하셨는데, 말씀이 다 끝나기도 전에 깜짝 놀라 깨어 보니 한바탕 꿈이었습니다. 아, 오늘날에 비록 옛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그 스승을 다시 직접 뵐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이 기문(記文)을 짓는 일을 선생 말고 누가 하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이 편지를 손에 들고 탄식하기를 “글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사정(士正)의 꿈은 기이하다. 이것이 마치 노선생이 지하에서 명령을 하신 듯하여 내 마음이 몹시 슬프니, 어찌 차마 끝까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와 같이 회답한다.
‘효자가 날을 아낀다.[孝子愛日]’는 것은 실로 양자운(揚子雲)의 말인데, 주 부자가 이것을 《소학(小學)》에 편입(編入)하여 후세에 남의 자식된 사람들을 면려하였다. 아, 오래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 섬기는 것을 이름이니, 오늘이 쉽게 지나가는 것을 애석히 여기고 후일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보면 효자의 정리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지금 사정(士正)은 이미 어버이 뜻 받드는 절차에 힘을 다하고도 오히려 마음에 부족한 것이 있어 또 회옹(晦翁)의 글에서 이 두 글자를 얻어 이것을 종신토록 일삼으려고 하니, 사정이야말로 자식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유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나 같은 사람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부터 풍수(風樹)의 비통함을 안고 살아왔으므로, 지금 붓을 잡고 이 글을 쓰려 하니 줄줄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
사정의 이름은 진강(鎭綱)인데 집안이 대대로 선비의 조행이 있어 행의(行誼)로 향당에 일컬어졌고, 소년 시절부터 선생의 문하에 종유했는데 선생께서도 그를 매우 사랑하시었다.
[주-D001] 효자가 …… 편입(編入)하여 :
양자운(揚子雲)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을 말한다. 자운은 그의 자. 양웅이 말하기를 “부모를 섬기면서 스스로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안 사람은 순(舜)이었다. 오래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 섬기는 일이니, 그러므로 효자는 날을 아끼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지금 《소학(小學)》 계고(稽古)에 편입되었다.
[주-D002] 풍수(風樹)의 비통함 :
이미 돌아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슬픔을 말한다. 주(周) 나라 때의 효자 고어(皋魚)의 말에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은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한 데서 온 말이다. 《韓詩外傳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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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송석재기(松石齋記)
9.삼환재기(三患齋記)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군자가 세 가지 근심이 있으니, 듣기 전에는 듣기 위해서 근심하고, 들은 뒤에는 배우기 위해서 근심하고, 배운 뒤에는 행하기 위해서 근심한다.” 하였는데, 나의 친구 채군범(蔡君範 채지홍(蔡之洪))이 조그마한 재(齋)를 짓고 그 안에서 글을 읽으면서 이를 삼환(三患)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명(明)ㆍ성(誠) 두 가지가 다 이르게 하는 꾀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힘쓴다면 어찌 성현의 지위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하겠는가. 내가 그 사실을 듣고 감탄하여 마침내 이렇게 써서 문지방에 걸도록 하는 바이다.
신묘년 여름 황강거사(黃江居士)는 쓴다. - 채군범의 이름은 지홍(之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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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양졸당기(養拙堂記)
11.암서재 중수기(巖棲齋重修記)
화양동(華陽洞) 수석(水石)의 훌륭한 경치가 호남ㆍ영남 가운데 으뜸인데, 우암 선생이 병오년에 정사(精舍)를 그 시내 남쪽에 지으니, 참으로 세속 밖의 그윽한 지경이다. 정사의 동쪽으로 한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가파른 석대(石臺)가 있는데, 그 높이가 수십 척(尺)이 되고,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니, 이 또한 천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여기에 3칸 소재(小齋)를 짓고 수시로 여기에서 유식(遊息)하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회덕(懷德)으로부터 이 골짜기를 들어오면 심신이 상쾌하여 마치 선경(仙境)에 있는 것 같아 여기서 회덕을 돌아보면 회덕은 참으로 진세(塵世)이더니, 정사로부터 다시 북재(北齋)로 옮긴 뒤에는 북재는 더 좋은 선경이라서 정사가 도리어 진세처럼 보인다. 이곳은 십분 맑고 신기하다 이를 만하니, 어찌 다시 무릉도원(武陵桃源) 길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 대(臺) 아래는 깊은 못이 있어 충분히 뗏목도 배도 띄울 만하였으므로, 가끔 일엽편주를 띄우고 물결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물이 밑바닥까지 환히 보이도록 맑아서 물고기를 하나하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밤에 헌창(軒窓)을 기대고 있노라면 마치 낮과 같이 환한 달빛이 영롱하게 서로 비추어 수정세계(水晶世界)를 방불케 하였다. 선생이 여기에서 지팡이를 끌고 시문을 읊으면 소리가 금석(金石) 같았고, 언뜻 세속 밖에 우뚝 서 있는 듯한 생각이 있었으니, 무이정사(武夷精舍) 띳집의 맑은 흥취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우세했을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기사년의 참화를 당한 뒤로 재사(齋舍)가 무너지고 산 어귀가 적막해져 버리니, 지나는 이들이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러다가 을미년에 김후 백온(金侯伯溫 김진옥(金鎭玉))이 재력(財力)을 내서 재사를 중건(重建)하였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아서 의연히 옛날의 모양을 갖추었다. 이렇게 되자 후생 소자(後生小子)들이 모두 그곳에 올라가 선생을 상상하매 마치 춘풍(春風) 속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또 김후의 정성을 칭송하는 것도 자자하였다.
금년 봄에 김후가 화산백(花山伯)이 되어 부임하는 길에 황강(黃江) 가로 나를 찾아와서 나로 하여금 암서재(巖棲齋) 세 글자를 쓰게 하여 이를 목판에 새겨서 문 위에 걸고 또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당시에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던 소생이었기에 감히 글을 못한다 해서 사양하지 못하고 내가 보고 기억나는 것들을 이상과 같이 대략 기록한다.
옛날에 반도(蟠桃) 한 그루가 바위틈에 나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노승(老僧)이 일찍이 암자 뜰에서 종자를 취해 두었는데, 가을이 되면 예전과 같이 많이 심을 것이라고 한다.
숭정 후 신축년 5월 일에 문인 권상하는 삼가 기록한다.
주-D001] 시문을 …… 같았고 :
시문을 지은 것이 매우 훌륭함을 뜻한다. 진(晉) 나라 때 손작(孫綽)이 일찍이 천태부(天台賦)를 지었는데 문사가 매우 훌륭하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범영기(范榮期)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시험 삼아 이 작품을 땅에 던져보아라. 의당 금석(金石) 소리가 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 기사년의 참화 :
기사년, 즉 1689년에 송시열(宋時烈)이 사사(賜死)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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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송군적(宋君積) 기덕(基德) 이 어찰(御札)을 받은 사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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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포재집 제9권 / 이건명(李健命)
기(記)
1온성 진변루 중수기〔穩城鎭邊樓重修記〕
2삼유정기〔三有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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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온성 진변루 중수기〔穩城鎭邊樓重修記〕
을해년(1695, 숙종21) 여름에 내가 북막(北幕)을 도와 수주(愁州 종성(鍾城)의 옛 이름)의 시험을 관장하고, 이어서 강변의 열진(列鎭)으로 가는데 길이 전성(氊城 온성(穩城)의 이칭)을 경유하였다. 전성 태수 최후(崔侯)가 군복을 갖추어 입고 부(府) 경계인 영달보(永達堡)로 마중을 나왔기에 함께 부의 치소(治所)로 들어가 객관(客館)의 문루(門樓)에 앉았다. 건물이 높고 훤하며 단청이 산뜻하였고, 누각은 날개를 편 듯 남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정면으로 성의 문루와 마주하였고 중간에 과녁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큰길이 평탄하게 나 있고 민가가 좌우로 나무를 심어 놓은 것마냥 늘어서 있어 지세가 탁 트여 있었다.
내가 이에 말 타고 온 피로를 풀고 산천의 아름다움을 조망하면서 돌아보며 즐거워하니, 최후가 말하기를 “이 누각은 옛 이름이 무호루(撫胡樓)인데 작년에 제가 중수하였습니다. 중수하던 날에 비로소 들보 위에 쓰인 기록을 살펴보니 곧 홍치(弘治) 6년 계축(1493, 성종24)에 부사 전림(田霖)이 세운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2년 전에 세워진 것을 비로소 중수하게 되었고, 누각 이름을 고친 것은 시대의 형세가 그때와 같지 않아서였으니, 그대는 어찌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주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전림은 국조(國朝)의 맹장으로, 용력으로 이름이 나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한다고 하니, 내가 본디 엉성하여 그의 사적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한 시대의 명신(名臣)임을 알 수 있다. 무릇 사람들이 토목공사를 벌일 적에 크고 견고하며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는 데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몇십 년 되지 않아 왕왕 기울거나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누각은 2백 년이 지나고 지금에서야 보수했으니, 그 사람이 공사를 할 적에 실제에 힘을 썼지 그저 눈앞의 구차한 아름다움만 추구한 것이 아님을 대략 알 수 있다.
또 시기로 살펴보면 홍치 계축년은 우리 성묘(成廟 성종(成宗)) 말기로, 나라의 화락하고 태평한 정치가 이때보다 융성한 적이 없었지만, 북쪽 오랑캐가 준동할 근심 또한 이때보다 많았던 적이 없었다. 전공(田公)은 무력을 쓰는 때를 당해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임무를 받았으니, 생각건대 반드시 무기를 정비하고 몸소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아침저녁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하면서도, 이내 여가를 이용해 관우(館宇)를 단장해서 빈개(賓价 접반사(接伴使))를 응접하였을 것인데, 그 창건한 건물이 오래되어도 무너지지 않았으니 그가 공무 수행에 부지런하고 정사에 훌륭하였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아, 전공 이후로 세월이 얼마나 흘렀던가. 이 직임을 거친 자가 또 몇 사람이던가. 그런데 지금 최후가 부임하고서야 새로워졌으니 어찌 기다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공사에 대해 다시 감회가 있다.
전공이 이 누각을 창건한 것은 비록 변경이 소란한 때였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병란이 있을 때에는 힘을 쏟다가도 일이 없어지면 안일함에 젖게 된다. 근세 이후로 변방에 경보가 없어 나라 안이 평안하니, 고을의 부절을 쥐고 외직을 맡은 신하가 지혜로우면 이 때문에 소홀하고 어리석으면 이 때문에 혼미하여, 아침이건 낮이건 꾀하는 바는 일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계책에 지나지 않고, 백성의 근심과 나랏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뜻을 기울인 적이 없어서 마치 남의 일 보듯 할 뿐만이 아니니, 하물며 관우를 단장해서 빈개를 응접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그저 안일하게 세월이나 보내며 구습(舊習)을 답습하는 것이 중앙이나 지방이나 똑같이 그러한데, 조정에서도 이런 문제로 여러 신하들을 칙려하지 않으니 온갖 법도가 모두 해이해지고 습속이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지금 최후가 홀로 개연히 직무 수행에 부지런하여 부임한 지 3년 만에 잘 다스려 공적을 올렸고, 또 절약하여 재용을 모아 이 누각을 보수하였으며 객관의 동서쪽 낭무(廊廡)는 옛 제도를 바탕으로 새롭게 하였으니, 공사가 시일을 넘기지 않아 백성들이 고통을 하소연하지 않았고, 백 년의 누추함을 씻어내어 온 고을에서 가장 볼만한 곳으로 만들었다. 이는 옛 명신과 짝할 만하고 안일에 물든 근세의 세속적인 관리에 비할 바가 아니니, 찬미할 만하다.
최후의 이름은 혁(槅)으로, 무공(武功)으로 벼슬에 진출하였다. 내가 일찍이 시종(侍從) 반열에 끼어 있다가 지금 융막(戎幕)으로 와서 군읍(郡邑)의 성적을 고과(考課)하여 논하는 것은 또한 그 직무일 뿐이니, 드디어 즐거이 기문을 쓰노라.
[주-D001] 을해년 …… 도와 :
이건명은 1694년(숙종20) 12월 27일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에 임명되었다.
[주-D002] 전성 태수 최후(崔侯) :
최혁(崔槅, ?~?)으로, 1693년 6월 23일에 온성 부사(穩城府使)에 제수되어 8월 19일에 하직하였다. 《承政院日記 肅宗 19年 6月 23日, 8月 19日》
[주-D003] 전림(田霖) :
?~1509.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482년(성종13) 전주 판관이 되고, 그 뒤 계속하여 훈련원 판관ㆍ첨지중추부사ㆍ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다. 1500년 해랑도 초무사(海浪島招撫使), 1504년 좌상대장(左廂大將)을 거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그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청백리로 학문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위절(威節)이다. 온성 부사에 제수된 것은 1492년의 일이다. 《국역 성종실록 23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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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삼유정기〔三有亭記〕
한강이 노량(鷺梁)에서 나뉘어 둘이 되었다가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는데, 바위 봉우리가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으니 이름이 선유(仙遊)이다. 황조(皇朝) 만력(萬曆) 연간에 중국 사신 이종성(李宗誠)이 북쪽 벼랑에 “지주(砥柱)”라는 두 글자를 썼는데, 아마 황하(黃河)의 지주를 닮은 데다가 이 산의 돌이 모두 숫돌로 쓸 수 있어서인 듯한데, 황하의 기둥도 모두 숫돌로 쓸 수 있어서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글자의 획이 백 년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고, 지주의 남쪽에는 어가(漁家) 수십 가구가 벼랑을 깎아내서 살고 있다.
내 선인(先人)의 옛 정자가 그 가운데에 자리 잡았으니 산의 중턱에 해당한다. 정자 앞에 작은 물줄기가 있는데 동쪽으로부터 흘러와 굽이돌아서 서쪽으로 흘러 철진(鐵津)에 모였다가, 또 서북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간다. 큰 들판이 아득하게 수십 리 펼쳐 있고 관악산(冠嶽山)과 소래산(蘇來山) 등 여러 산들이 머리 숙여 인사하듯 열 지어 있어서 올라가 둘러보면 마음과 눈이 매우 상쾌하다.
나는 지난가을에 많은 사람들의 비방에 시달려 몇 개월 동안 나가서 옛 정자에서 지냈다. 정자는 기둥이 모두 여섯 개인데 남은 땅이 없기에 정자의 동쪽 빈터를 이웃 사람에게 사들였다가, 이번 가을에 사헌부 벼슬을 사직하고 다시 돌아와 다섯 개의 기둥을 새로 지었다. 아, 당구(堂構)의 오랜 뜻과 강호(江湖)에서 지내려는 만년의 계획을 지금 다 이루었구나.
정자를 다 짓고 나서 이름을 “삼유(三有)”라고 지었더니 간혹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정자를 지을 때에는 혹은 산에 혹은 물가에 혹은 들판에 지으니, 그 가운데 하나를 갖더라도 이름으로 삼을 만한데, 지금 내 정자는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 정자는 선인께서 지었고 이 땅은 할아버지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輿))께서 터를 잡은 곳인데 지금 나에게 전해져 3대에 걸쳐 소유하였으니, 또 ‘삼유’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산은 비록 작지만 중류에 우뚝 서 있어 꿋꿋하게 뽑히지 않는 기세가 있다. 한강〔大江〕의 북쪽 물줄기는 비록 등지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남쪽 물줄기가 구부러져 들어오는 모습은 몇 리 떨어진 곳에서도 아득하게 보인다. 앞쪽 물굽이에서는 씻을 수도 있고 수영을 할 수도 있다. 들판은 비록 높고 소금기가 있지만 지세가 넓게 뻗어 있어 청색과 황색이 뒤섞여 수놓아진 비단을 펼친 듯하니, 또 심고 거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아름다움을 우리 3대의 소유로 삼아 처소에서 휘파람 불며 읊조리니, 어찌 세상 근심 잊고 내 삶을 보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또 듣자니, 맹자(孟子)가 ‘천하에 달존(達尊)이 세 가지가 있다’고 논했는데, 연치(年齒)와 관작(官爵)은 요행히 이룬 자도 있으나 덕(德)의 경우는 자기 스스로 얻은 바가 아니면 힘써도 구할 수 없다. 지금 내 관작이 이미 분수를 넘었고 연치 또한 요절을 면했으나, 스스로 부끄러운 점은 엉성하고 배움을 잃어 늙도록 무지하여 말할 만한 덕이 없는 것이다.
만약 지금 이후로 명도(名塗)를 피하여 만년을 유유자적하고 젊은 날의 허황된 계책을 슬퍼하며 경전에서 구업(舊業)을 찾아 혹 만에 하나라도 얻어서 끝내 소인으로 돌아가게 됨을 면한다면, 이른바 삼달존(三達尊)을 소유한 것에 견주기를 바랄 수는 없더라도 조용히 스스로 수양하는 방도에 또 어찌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경치 좋은 풍광과 청전(靑氊)의 유물은 내가 이미 소유했으니, 성현의 말씀을 종신토록 스스로 힘써야 더욱 마땅하리라. 우선 아울러 써서 아침저녁으로 보고 반성할 자료로 삼노라.
[주-D001] 황하(黃河)의 지주 :
황하가 급류로 흐르는 곳인 맹진(孟津)의 강 복판에 우뚝 서 있는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산 이름으로, 격류 속에 서 있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고 한다.
[주-D002] 지난가을에 …… 시달려 :
1712년(숙종38) 2월에 시행된 정시(庭試)로 인해 야기된 이른바 임진과옥(壬辰科獄)을 가리킨다. 동년 6월 7일에 지평 권익관(權益寬)이 상소를 올려, 이번 정시에 답안지를 시험 장소 밖에서 제술한 응시생이 있었는데 행부제학 이건명이 그 사실을 알고도 아뢰지 않았다고 하여 이건명의 추고를 요청하였다. 이 상소가 사건 확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소론 측에서 이건명을 압박하였고, 정시 의혹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차미희, 조선후기 숙종대 壬辰科獄 연구, 민족문화연구 제42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5》
[주-D003] 사헌부 벼슬을 사직하고 :
1713년 윤5월 12일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7월에 사직상소를 올림으로써 체차되었다. 《承政院日記 肅宗 39年 閏5月 12日, 7月 22日ㆍ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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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0권
기(記)
1급재에 대한 기문〔岌齋記〕
2수석정을 중수하고 쓴 기문〔漱石亭重修記〕
3사금재사를 중수하고 쓴 기문〔沙禽齋舍重修記〕
4백동서당을 중건하고 쓴 기문〔柏洞書堂重建記〕
5용계서당에 대한 기문〔龍溪書堂記〕
6근리재를 중수하고 쓴 기문〔近裏齋重修記〕
7한천정에 대한 기문〔寒泉亭記〕
8침락정을 중수하고 쓴 기문〔枕洛亭重修記〕
9구사재를 이건하고 쓴 기문〔九思齋移建記〕
10처호정을 중수하고 쓴 기문〔處湖亭重修記〕
11사계당에 대한 기문〔四桂堂記〕
12열부 허씨에게 내린 정려에 대한 기문〔烈婦許氏旌閭記〕
13열효각에 대한 기문〔烈孝閣記〕
14백원당에 대한 기문〔百源堂記〕
15봉강서당에 대한 기문〔鳳岡書堂記〕
16활천정에 대한 기문〔活川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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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재에 대한 기문〔岌齋記〕
급재(岌齋)는 나의 벗 서여형(徐汝衡)의 호이고, 그 호를 지어 준 사람은 바로 나이다. 나는 순흥(順興) 사람이라서 매양 순흥을 낙토(樂土)라고 생각한다. 만약 소백산(小白山)의 삼동(三洞) 아래에 다시 산재(山齋)를 지을 곳을 찾는다면 마땅히 급산(岌山)으로 정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명리만을 좇다가 구지(仇池)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자호로 삼고자 한 것을 들어서 여형에게 양여(讓與)하였으니, 백학(白鶴)과 탁석(卓錫)의 다툼에 비겨 보건대 어떠한가?- 백학은 이백(李白)의 시 〈황산 호공에게 주어 백학을 구하다[贈黃山胡公求白鷴]〉에 “그대에게 한 쌍의 흰 벽옥을 드려, 그대가 기르는 한 쌍의 백학을 사고 싶군요.[請以雙白璧 買君雙白鷴]”라고 노래한 것에 전거를 둔 말이다. 탁석은 장백순(張伯淳)의 시 〈능가사의 고목[楞伽古木]〉에 “도림 선사가 그 옛날 이곳에 석장을 꽂은 후, 오늘까지 팔백 년 동안 그 모습 그대로일세.[道林卓錫舊種此 仿佛于今八百年]”라고 노래한 것에 전거를 둔 말이다. -
급산은 순흥의 옛 이름이다. 순흥이 소백산을 등지고 있으니, 급산은 혹시 소백산의 별칭이 아닐까? 글자의 의미로 보자면 작은 산[小山]이 큰 산[大山]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급(岌)이라고 한다. 소백산이 참으로 높기는 하지만 태백산에는 미치지 못하니 소백산을 ‘급산’이라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이것을 인간에게 견준다면 태백산은 성인(聖人)이고 소백산은 현인(賢人)이라 할 수 있다. 나와 여형은 보통 사람이니 조막만 한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이다. 그런데 감히 스스로 소백산에 갖다 대려고 하니 참으로 어리석다.
그러나 여형이 서울에 왔을 때 그가 번잡한 명리(名利)의 장에서 부화뇌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관원을 피해 은거한 적막한 골짝에서 나를 따라 문장을 토론하는 데 힘썼으니 이것만으로도 매우 기특하다. 그런 데다 하루아침에 맹문(孟門)의 험준함을 벗어나 채미(采薇)의 옛 노래를 본받아 계승하였으니, 그의 용감한 뜻은 내가 또 따라가려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얼굴에는 급산의 기상이 우뚝이 드러나 있고 가슴에는 급산의 기상이 심원하게 갈무리되어 있으니 내가 여형에게 급재라는 호를 양여하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닐 것이다.
《서경(書經)》에 “아홉 길의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 그 공이 수포로 돌아가는 법이다.[爲山九仞 功虧一簣]” 하였다. 이 구절을 두고 주자(朱子)는 집주에서 “산을 만들기 위해 평지에 한 삼태기의 흙을 막 부었다 하더라도 그때 시작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다.[平地而方覆一簣 其進吾往也]”라고 하였다. 여형은 더욱 힘쓸지어다.
[주-D001] 서여형(徐汝衡) :
서상수(徐相銖)로, 여형은 그의 자(字)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호는 급재(岌齋)이다. 순흥(順興)에 살았으며, 눌헌(訥軒) 서성구(徐聖耉)의 후손이다. 철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지조가 청아하기로 이름났다. 《嶠南誌 卷33 順興郡》
[주-D002] 삼동(三洞) :
당동(棠洞), 정안동(定安洞), 비로동(毘盧洞)을 가리킨다.
[주-D003] 산재(山齋)를 …… 찾는다면 :
산재는 전사(田舍)와 같은 의미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진등(陳登)에게 허사(許汜)가 찾아왔으나 진등이 그를 무시하고 대우하지 않았다. 화가 난 허사가 불만을 품고는 유비(劉備)에게 가서 “원룡에게는 아직도 호기(豪氣)가 남아 있다.”라고 헐뜯었다. 이 말을 들은 유비가 “그대는 국사(國士)라는 명성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구할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그저 밭이나 구하고 집 지을 곳이나 찾으려고만 하여 취할 말이라곤 없다. 이것이 원룡이 그대를 외면한 이유이다.”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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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석정을 중수하고 쓴 기문〔漱石亭重修記〕
3.사금재사를 중수하고 쓴 기문〔沙禽齋舍重修記〕
영천군(榮川郡) 동쪽 말암리(末巖里) 석봉(石峯) 아래 문창계(文滄溪) 선생의 묘가 있다. 선생의 묘소 뒤편으로 예닐곱 걸음을 올라가면 우리 퇴계 선조의 비위(妣位)이신 정경부인(貞敬夫人) 허씨(許氏)가 선생의 외손녀로서 종장(從葬)되어 있다. 전말은 선조 퇴계께서 지으신 창계 선생의 묘갈문에 실려 있다.
사금재사(沙禽齋舍)는 옛날에는 왼편 기슭의 터에 있었고,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선생의 전지와 소작농들이 옛날에 이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미리 이곳을 수장(壽藏)으로 잡아 놓으신 것이다.”라고 하니, 아마 당시에 별장 같은 것이 있어 그 때문에 이곳을 제향을 올릴 장소로 여겼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과재(果齋) 장공(張公)이 택상(宅相) 노릇을 근실히 하여 우리 동암 부군(東巖府君)이 본 군에 부임하였을 때 서둘러 송덕비를 세운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혹 두 분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지난 순조(純祖) 연간에 우리 종숙(宗叔) 총부공(摠府公)이 동암 부군의 뒤를 이어 영천군에 부임해 왔을 때 봉록을 출연하여 제전(祭田)을 설립하고, 또 재각이 허물어진 것을 걱정하여 오늘날의 형태로 옮겨 세웠다. 당시에 우리 수영(垂穎) 종부(從父)가 주관하였다. 이후로 60년 동안 산은 깎이고 냇물의 바닥은 높아졌으며, 토사는 붕괴되고 들판은 푹 꺼졌다. 그래서 풍우에 무너지지 않으면 반쯤 진펄이 되어 오늘내일을 장담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종질 전(前) 침랑(寢郞) 이중경(李中慶)이 문족(門族)의 사람들과 도모하여 이휘봉(李彙鳯), 이만도(李晩燾), 이중운(李中運)에게 중수(重修)의 책임을 맡겼다. 이에 이해 2월 척족 장진상(張鎭常), 장진항(張鎭恒), 장진방(張鎭邦)과 본 재사에서 만나 사업 계획을 논의하고, 3월 9일에 착수하여 5월 초하루에 역사(役事)를 마쳤다.
정청(正廳) 4칸은 기존 체제를 바꾸지 않고 유지하되, 양쪽 처마에 1가(架)씩 덧붙여 모두 6칸이 되었다. 전랑(前廊) 4칸은 처마 위로 솟구쳐 나오게 했으니, 물길의 형세를 따른 것이다. 모두 합하여 14칸인데, 그중 10칸이 새로 초석을 놓아 세운 것이다. 모두 정청 4칸의 높이를 기준으로 세웠으니, 저습한 것을 피한 것이다.
이에 상청(上廳)과 하청(下廳)이 마련되었으니, 노소의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갖가지 제기를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수를 정갈하게 마련할 장소가 있게 되었으며, 희생에 쓸 가축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감히 긍구긍당(肯構肯堂)이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구완(苟完)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은 실로 있다.
아! 이 역사를 추진할 때에 기와를 가진 자는 기와의 값을 덜어 주어 정성을 표하기도 하고, 곡식을 가진 자는 곡식을 내어 놓아 의리를 보이기도 하였다. 공사는 물극(勿亟)의 마음에서 흥기하여 잠깐 사이에 완성되었다. 이 어찌 선생의 청수한 문채가 사람들을 감격시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산(伊山)에는 선생이 남긴 예교의 감화가 아직 있고, 초곡(草谷)에는 선생의 처가인 허씨 집안이 아직 건재하니, 우리 퇴계 선조의 유훈(遺訓)과 여택(餘澤)이 사람들의 골수에 깊이 스며들어서,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하였고, 또 〈소완(小宛)〉에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너를 낳아 주신 분들을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夙夜匪懈 無忝爾所生]”라고 하였다. 퇴계 선조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수곡암(樹谷菴)에 부치는 경계 말씀을 지으셨다. 불초 역시 사금재사가 중건되던 날 감히 이 시를 거듭 외워 절기자수(切己自修)의 방도로 삼는다.
병술년(1886, 고종23) 천중일(天中日 단오)에 11대손 만도는 삼가 기록한다.
[주-D001] 문창계(文滄溪) :
문경동(文敬仝, 1457~1521)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흠지(欽之)이고, 창계는 호이다.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으며, 1510년(중종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유담년(柳聃年)과 함께 왜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진급하였다. 1512년 예천 군수가 되어 임기를 마친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1521년 청풍 군수에 제수되어 임지에서 졸하였다. 저서로 《창계집》이 있다.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이다.
[주-D002] 정경부인(貞敬夫人) 허씨(許氏) :
이황의 첫 번째 부인이다. 영주 초곡(草谷), 곧 지금의 조암동(槽巖洞) 사일 마을에 살던 진사 허찬(許瓚)의 맏딸이다. 허찬은 관향이 김해(金海)로 본래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가례면(嘉禮面)에 살았었는데, 문경동의 사위가 되면서 처향(妻鄕)으로 옮겨 와 영주에 살았다. 허씨 부인은 이황의 장남인 이준(李寯)과 차남인 이채(李寀)를 낳고, 27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주-D003] 창계 선생의 묘갈문 :
이황이 지은 문경동의 묘갈명은 《퇴계집》 권46에 〈통훈대부행성균관사성문공묘갈명(通訓大夫行成均館司成文公墓碣銘)〉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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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동서당을 중건하고 쓴 기문〔柏洞書堂重建記〕
5.용계서당에 대한 기문〔龍溪書堂記〕
영양(永陽 영천의 고호)의 용계서당(龍溪書堂)은 곧 예전의 용계서원(龍溪書院)이 일변한 것이다. 옛날 단종께서 손위(遜位)하실 때에 경은(耕隱) 이 선생(李先生)께서 관직을 버리고 일선(一善)의 망장촌(網障村)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귀머거리와 장님으로 자처하여 외부인들을 일절 만나지 않고 “나는 수양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매월 초하루가 되면 해를 향해 두 번 절을 올리고 “나는 기도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은 은미하고 그 자취는 은밀하였다. 어계(漁溪) 조려(趙旅), 관란(觀瀾) 원호(元昊),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문두(文斗) 성담수(成聃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세상에서 생육신으로 일컬어졌다.
선산(善山)의 월암서원(月巖書院),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은 모두 사전(祀典)에 등재되었다. 영양의 용계서원은 경은 선생의 자손들이 사는 고장으로, 처음에는 선생을 모시는 별묘(別廟)만을 세웠다가 뒤에 다섯 선생을 함께 봉안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는 영조의 태평성세였으니, 비록 사액의 영광을 입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조정에 청을 올려 성상의 교화를 받들고 인재를 육성하는 역할만은 앞에 말한 두 서원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3, 4십 년이나 방치되어 풀이 무성하게 우거졌다.
후손 이광(李光), 이노원(李魯源), 이승원(李承源) 등 여러 사람이 용계서원 옛터의 서쪽 냇가에서 몇 리 떨어진 자양산(紫陽山) 아래 학면정(鶴眠亭)이 있던 자리에 다시 이 서당을 건립하였다. 학면정은 곧 선생의 현손 아무개가 오래전부터 가꾸어 오던 곳이었으니, 지금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서당이 낙성되고 난 뒤 이태일(李泰一)을 보내어, 멀리 나에게 와서 기문을 청하였다. 그 정성이 근실하고 그 뜻이 간절하니 하늘이 다시 서원으로 복원해 주실 것인가, 아니면 복원해 주시지 않을 것인가? 지난 역사의 자취를 가지고 한번 말해 보자면 바야흐로 경은 선생이 빈궁한 여항에서 30년 동안 은거하실 때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를 제외하고는 비록 처자식이라 할지라도 선생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30년이 지나 점필재가 알아주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광묘(光廟 세조) 이후 200년 세월 동안 관련 사실을 일체 엄히 숨겨 왔으니, 우리 명릉(明陵 숙종)의 어짊과 성명(聖明)함이 아니었다면 무왕(武王)에게 직언을 올린 백이(伯夷)의 마음을 누가 알아주어서 유감이 없도록 표창해 주었겠는가. 200년이 지나 명릉의 시대에 알아주었으니 이 역시 하늘의 뜻이다.
지난 역사가 이미 이러하고, 더구나 앞서 한번 내린 조령(朝令 서원철폐령)은 곧 교화의 억제와 부양에 관계된 바이다. 가령 이 서당에서 지내는 자가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 실질적인 사업을 하여 감히 한만하게 놀지 않는다면 축적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킬 것이니, 그리된다면 서당이 승격되어 서원이 되는 것이 지난날의 성대함만 못하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 실용 공부의 방도는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선생의 시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유정(惟精) 유미(惟微) 십육 자가 / 精微十六字
또렷이 가슴에 새겨져 있거니와 / 的的在胸憶
다섯 수레 서책으로 보완하였고 / 輔以五車書
박약으로 하늘의 법칙 보았노라 / 博約見天則
16자(字)는 곧 요와 순과 우가 서로 전수해 주고 전수받은 심법(心法)이다. 박문약례(博文約禮)는 또 공자와 맹자 이후로 우리 유가에서 전수해 온 지결(旨訣)이다. 선생이 이미 이것을 가지고 교훈을 삼았고 보면 그 충의(忠義)와 대절(大節)이 모두 학문 가운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디 여러 공께서는 이 시에서 노래한 가르침을 받들어 자신이 공부하는 본령으로 삼아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하라. 그렇게 한다면 경은 선생의 영령이 서당에 오르내리며 반드시 “나에게 훌륭한 자손이 있구나!” 할 것이다. 더구나 하늘이 밝디밝아서 날마다 이 세상을 살펴봄에랴.
아! 용계서당이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을 모신 임고서원(臨皐書院)과의 거리가 그 얼마나 되는가. 우뚝하게 천지에 드높은 충의가 아래위로 마주하여 함께 서 있다. 그리고 우리 선조 문순공 퇴계께서 임고서원에 보내 주신 《성리군서구해(性理群書句解)》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지? 유정 유미와 박문약례의 의미가 또 《성리군서구해》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여러 공께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주-D001] 용계서원(龍溪書院) :
1782년(정조6) 왕명으로 토곡동(土谷洞)에 지었다.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노항동(魯巷洞)으로 옮겨져 용계서당이 되었다가, 1976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로 이건되었다.
[주-D002] 옛날 …… 은거하였다 :
경은(耕隱)은 생육신인 이맹전(李孟專, 1392~1480)의 호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이다. 1427년(세종9)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간원 정언, 거창 현감 등을 지냈다. 1453년 세조가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하자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일선(一善)으로 돌아갔다. 일선은 경상북도 선산의 고호이다. 그 뒤 30여 년을 은둔하며 지내다 죽었다.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경상남도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김주(金澍),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산1번지에 있다. 망장촌(網障村)은 지금의 고아읍(高牙邑) 오로리(吾老里)이다. 대황당산(大皇堂山)에 깃든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물을 쳐 둔다는 의미로 망장촌이라고 하였다.
[주-D003] 선산(善山)의 …… 서산서원(西山書院) :
선산의 월암서원은 1694년(숙종20)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 훼철되었다. 현재 구미시 도개면 월림1리에 지역 유림들이 복원해 놓았다. 함안의 서산서원은 1703년에 창건되어 1713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역시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 훼철되었으나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1984년에 복원해 놓았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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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근리재를 중수하고 쓴 기문〔近裏齋重修記〕
7.한천정에 대한 기문〔寒泉亭記〕
남명(南冥) 조 문정공(曺文貞公 조식(曺植))의 문하에 도구(陶丘) 이 선생이 있다. 진주의 인사들이 그들의 고장에서 제향을 올리니, 정강서원(鼎岡書院)이라고 한다. 선생의 선영이 의춘(宜春 의령(宜寧)의 고호) 자굴산(闍崛山)에 있다. 의령에 사는 문족(門族) 및 외손인 전씨(田氏)와 이곳저곳 흩어져 사는 유손(遺孫)들이 숭봉하여 400년이 지나도록 폐지되지 않았으니, 선생의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절개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계절이 쉼 없이 바뀌어 수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지금까지 첨의(瞻依)하는 장소에 다만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언덕만 있을 뿐 늘 정갈한 제수(祭需)를 마련할 재실을 건립하지 못해 그것이 근심이었다.
금년에 자굴산 아래 집 하나를 경영하여 지역 사림들과 낙성을 하고 한천정(寒泉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태식(李泰植) 군이 멀리서 내가 사는 산재까지 찾아와 만도에게 그 전말을 기록해 달라고 청하였다. 아! 만도가 어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는 제신(濟臣)이고, 자는 언우(彥遇)이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 중종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뛰어났으며, 향시에서 〈소식론(蘇軾論)〉을 지어 합격하여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배낙천(裵洛川)과 함께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명륜당(明倫堂)에서는 서치(序齒)의 예에 따라야 한다는 일을 청하였다. 건의가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식견 있는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잠시 뒤 시국이 어지러워질 조짐이 보이자 명예와 자취를 지우고자 청하 교수(淸河敎授)를 자청하였으며, 이윽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인종이 승하하자 삼년상을 입었다. 지리산에서 남명 선생을 종유하였으며, 맑고 그윽한 천석(泉石)을 만나면 번번이 그리로 옮겨 가 일정하게 거처하는 장소가 없었다. “바둑을 구경하노라니 입에는 사람들 평판하는 말이 끊어졌고, 활을 쏘노라니 마음엔 반성의 사유가 보존되네.[看碁口絶論人語 射革心存反己思]”라는 시구를 뽑자 남명이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으나 모두 친척에게 나누어 주며, “변란이 곧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73세 되던 해에 자신이 죽을 날을 스스로 예언하였다. 예언한 날이 되자 태연히 시를 읊조리다가 마침내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예컨대 저 관주(官廚)에서 생선을 요리할 때 솥뚜껑이 하늘을 날아다닌 일과 같은 것은 돌아가실 조짐이었던 것이고, 노복이 애시(哀匙)를 훔쳐 밥을 먹을 때 고기를 씹다가 목이 막혀 죽은 일과 같은 것은 그 효감(孝感)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 신기하여 믿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하각재(河覺齋)가 만시를 짓기를 “이인이요 신인이요 자유인이었으니, 세 가지 성격의 사람이 화하여 한 사람의 몸이 된 것일세.[異人神人不羈人 三人化作一人身]”라고 하였다. 이 시는 또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주역》 〈명이괘(明夷卦) 초구(初九)〉의 효사에 “혼암(昏暗)한 시대에 새가 날 때 날개를 늘어뜨린 격이다. 군자가 어지러운 나라를 떠나감에 사흘 동안 먹지 못하니, 떠나가는 것에 대해 주인이 나무라는 말을 하도다.[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하였다. 대개 현인과 군자가 도와 덕을 내면에 품고서 진퇴와 존망의 까닭을 살펴 바야흐로 기미를 알아차리고 멀리 떠나려고 할 때, 그 자취가 느닷없는 듯도 하고 지나치게 구애되는 듯도 하며 혹 상식 밖의 행동에서 나온 듯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의리는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말하기가 편치 않다. 선생은 재야의 인사로서 홀로 강개한 마음을 품고서 물외(物外)에 마음을 두어 미치광이처럼 방자하게 굴었으니, 하서(河西)와 후조당(後彫堂)이 산에 들어가 통곡한 것에 비겨 보건대 더욱 통렬하고 더욱 괴롭다. 이런 까닭에 당시 사람들이 선생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행실에 대해서는 빠뜨리고 전하지 않았으며, 머물지 않고 거처를 옮겨 다니는 모습에 대해서는 마치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인 양 전하였으니, 군자의 지미(知微), 지창(知彰), 지유(知柔), 지강(知剛)은 본디 평상한 도(道)가 되기에 해롭지 않다는 것을 전혀 모른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을 본받으려 하는 자는 어디에서 법을 취해야 하는가? 돌아가실 때 지은 시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들녘을 바라보니 누르고 푸르며 / 望野黃兼綠
구름을 바라보니 희고 또 검네 / 看雲白又玄
도옹은 머무를 곳 알았으니 / 陶翁知止處
바로 한천이었지 / 只是爲寒泉
이 시를 범범하게 보면 고반(考槃)과 형문(衡門)에서 은거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깊이 음미해 본다면 머무를 곳을 안다는 것은 곧 《대학》의 지선(至善)의 소재이니, 예컨대 자식이 되어서는 반드시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반드시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한천(寒泉)은 《주역》에서 또한 ‘정도(井道)의 지극히 선한 것’이라 한 것이요 천리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선한 의리가 선생께서 역책(易簀)하실 때에 시로 읊어져 나온 것은 또한 증자가 역책하실 때 “나의 몸을 바르게 하면 그만이다.”라고 한 의미와 같다.
그러나 밤과 낮이 번갈아 바뀌는 것이 그 이치는 하나이니, 우리들이 학문할 때에 또한 지선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겠는가. 물어보자. 자굴산이 방장산에 비해 그 높이가 어떠한가? 산 아래의 샘이 또 덕천(德川)과 견주어 보건대 어느 것이 깊고 어느 것이 얕은가? 어느 곳이라도 물이 없는 땅이 없다는 것에 이미 감화를 받았고, 또 만 줄기의 강물에 모두 둥근 달이 비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나는 물이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것과 웅덩이를 채우고 반드시 바다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여기에서 침잠하여 원류의 근원을 탐색하고 여기에서 노닐고 강마하여 명의(名義)의 소재를 생각하면 이 정자를 세운 의미를 잘 아는 것이 된다.
정자는 모두 여섯 칸이다. 헌함(軒檻)은 지지헌(知止軒)이고, 누대는 함월루(涵月樓)이다. 이를 합쳐서 한천정(寒泉亭)이라고 하였다. 한천정 일대의 산수(山水)와 천석(泉石), 연림(煙林)과 화조(花鳥) 등의 승경으로 말하면 영남의 기숙(耆宿)들께서 이미 시편에 잘 묘사해 놓았다.
[주-D001] 도구(陶丘) 이 선생 :
이제신(李濟臣, 1510~1582)이다. 본관은 철성(鐵城), 자는 언우(彦遇), 도구는 호이다. 의령에 거주하였다. 저서로 《도구실기(陶丘實記)》가 있다.
[주-D002] 첨의(瞻依) :
항상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뜻으로, 부모나 존장(尊長)에 대한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기서는 조상 이제신에 대한 존숭하고 추모하는 정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시경》 〈소반(小弁)〉에 “눈에 뜨이나니 아버님이요, 마음에 그리나니 어머님일세.[靡瞻匪父 靡依匪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 배낙천(裵洛川) :
조식의 제자 배신(裵紳, 1520~1573)이다.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경여(景余), 낙천은 호이다. 고령에 살았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문하를 모두 출입하였으며,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뒤에 월천 조목과 교유하였다. 현풍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낙천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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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침락정을 중수하고 쓴 기문〔枕洛亭重修記〕
9.구사재를 이건하고 쓴 기문〔九思齋移建記〕
옛날 청향당(淸香堂) 이 선생께서 자신이 살던 단성(丹城)의 배양리(培養里)에 독서당을 짓고 구사재(九思齋)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우리 퇴계 선조께 기문을 청하였는데, 퇴계 선조께서는 감기에 시달리고 계셨기에 문장을 지을 겨를이 없어 사양하셨다. 그 뒤에 선생의 후손들은 함양의 해평촌(海坪村)으로 옮겨 가 살았고, 구사재는 무너진 지 매우 오래되었다.
올봄, 이만화(李晩華) 씨가 문족 사람들에게 의논하여 해평에 구사재를 추건(追建)하기로 하였으니, 그 취지는 횡거(橫渠 장재(張載))와 자양(紫陽 주희(朱熹))을 삼가 본받으려 한 것이다. 구사재가 낙성되자 이병헌(李炳憲) 씨를 보내어 만도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퇴계가의 후손이니 모름지기 우리 선조의 독서당에 퇴계가 기문을 써 주려 하였던 뜻을 매듭지어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만도는 당시 아무 암곡과 산에서 지내던 중이라 문장을 지어 달라는 모든 부탁에 대해 병을 핑계로 일절 사절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부탁은 책임이 더욱 무거우니, 불초 후생이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공손하게 인사하고 보내었다. 그런데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이병헌 씨가 또 편지를 보내어 한사코 간청하여 “우리 청향 선생은 그대의 선부군이신 퇴계 선생 및 남명 선생과 신유년(1501, 연산군7)에 함께 태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선부군의 시에 ‘세 사람이 태어난 해를 누가 알겠나. 갑자년보다 3년 앞선 신유년이라네.[三人初度有誰知 先甲三年酉是期]’라고 하였고, 남명 선생의 시에 ‘네 가지가 같아 새로 사귄 사람과는 다르니, 나를 일찍이 종자기에 비겼지.[四同元不在新知 擬我曾於鍾子期]’라고 하였습니다. 세 분 선생이 서로 허여한 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향당 선생이 또 뇌룡정(雷龍亭)에서 이기(理氣)를 토론할 때 우리 선부군 퇴계 선생의 사칠설(四七說)을 근거로 삼으니, 남명 선생이 누차 칭탄(稱歎)하였다. 또 〈언행록〉에 실린 기록을 보건대 계구근독(戒懼謹獨), 미발이발(未發已發), 물망물조(勿忘勿助) 등의 설을 논한 것이 모두 우리 선부군의 말씀과 부합하니, 평소 구사(九思)의 조목에 공부를 쏟아 몸소 실천하여 마음으로 체득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인으로서 선생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또 장차 어디에서 법을 취해야 할 것인가? 옛사람들이 가르침을 베풀 때 동처(動處)의 공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예컨대 구사의 조목과 같은 것은 모두 동처에서 그 당연한 이치를 생각해 터득한 것이다. 만약 구사 가운데 나아가 그 요령을 제시한다면 ‘일할 때에는 경(敬)을 생각한다.[事思敬]’라고 할 때의 경(敬)은 곧 동(動)과 정(靜)을 관통하고 나머지 팔사(八思)의 조목을 꿰뚫는 것이다. 선생께서 “경은 곧 유학의 처음과 끝을 관철하는 시종(始終)의 일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에 곧 선생의 말로 선생의 독서당 이름을 반증하여 우리 당의 후생들과 함께 노력하기를 바랄 뿐이니, 감히 우리 선군께서 남긴 뜻을 우러러 체인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D001] 청향당(淸香堂) 이 선생 :
이황과 조식의 동갑내기 벗이었던 이원(李源, 1501~1569)이다.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군호(君浩), 청향당은 호이다. 참봉 이승문(李承文)의 아들로 산청군 단성에 살았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를 계기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강론 등에 전념하였다. 효행으로 조정에서 포상을 받았으며, 1546년(명종1) 학행으로 천거되어 곤양 훈도(昆陽訓導),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주-D002] 이만화(李晩華) :
본관은 합천, 자는 성구(聖九)이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이원의 후손으로 짐작되나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다.
[주-D003] 세 사람이 …… 신유년이라네 :
이 시는 《퇴계집》 속집 권2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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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처호정을 중수하고 쓴 기문〔處湖亭重修記〕
11.사계당에 대한 기문〔四桂堂記〕
내가 일찍이 월주(越州 영월)로 유람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순흥의 화천(花川 지금의 봉화읍 곶내)에 가서 사계당(四桂堂)으로 생질 박규종(朴奎鍾)을 방문하였다. 사계당이 당시에 막 중건된 터라 박규종이 기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로부터 7년 뒤 생질이 그 아들을 보내와 앞의 부탁을 다시 하였다.
살펴보건대 사계당은 박규종의 10대조 예조 좌랑 박안복(朴安復)의 호이다. 예조 좌랑의 선친은 회이당공(悔易堂公) 박한(朴𤥚)이니, 문과에 급제하였고 판교(判校)이다. 조부는 수서공(水西公) 박선장(朴善長)이니, 문과에 급제하였고 도사(都事)이다. 증조부 송파공(松坡公)은 박전(朴全)이니, 문과에 급제하였고 호조 정랑이다. 예조 좌랑에 이르기까지 4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계수나무를 꺾었기 때문에 갈암(葛庵) 이 선생이 박안복의 초당에 ‘사계당’이라고 이름을 지어 자랑스럽고 아름답게 의미를 드러내 주었다.
박씨는 선계가 계림(鷄林)에서 나와 무안(務安)으로 분관(分貫)하였다. 조선이 건국할 때 판서 박의룡(朴義龍)이 개국 공신이 되었고, 그의 지손들이 대대로 영해에 살았다.
송파공이 벼슬살이 도중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부인 주씨(朱氏)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선사(仙槎 울진의 고호)의 친정에 의지하였다. 꿈에 송파공이 나와 “강주(剛州 영주의 고호)의 남 상사(南上舍)가 아이들의 스승이 될 만하다. 또 마을 뒤에 산단화(橵丹花)가 피어 있는 곳이 또한 살기에 좋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기이하게 생각하여 수백 리 먼 길을 이사하여 화천에 당도하니 꿈속에서 말한 정경과 꼭 그대로인지라 마침내 그곳에 살았다. 남 상사는 바로 퇴계의 문인 삼송(三松) 선생 남몽오(南夢鰲)이다.
아들을 보내어 남 선생께 배우게 하였고, 자라서는 사위가 되게 하였으니, 곧 수서공(水西公)이다. 주씨는 101세를 누리셨고, 자손들이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렇다면 산단화 꿈이 박씨 집안 흥성의 바탕이 되었으며, 몽화각(夢花閣)이 이 때문에 지어졌고 보면, 몽화각 아래 사계당은 감응하여 동류(同類)로서 연결된 뜻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기해년(1899, 광무3) 봄, 10칸의 중옥(重屋)을 화천의 동쪽 귀대(龜臺)의 북쪽에 세웠다. 방실(房室)이 그윽하고 깊으며 마루가 높고 시원하여 원림의 경광이 잠깐 사이에 찬연히 면모를 바꾸었다. 《시경》 〈방락(訪落)〉에서 “뜨락에 오르내리며, 집안에 오르내림을 계승하는도다. 훌륭하신 황고여! 그를 본받아 나의 몸을 보전할지어다.[紹庭上下 陟降厥家 休矣皇考 以保明其身]”라고 한 것이 바로 박규종의 마음과 사업이 아니겠는가.
아, 나는 대대로 고관대작을 배출한 교목세가(喬木世家)를 정말 많이 보았다. 가문의 세력에 의지하고 조상의 음덕에 도움을 받아 영리를 좇아 얻은 자는 본디 말할 것도 못 된다. 하지만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초야에서 떨쳐 일어나 능히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기를 마치 턱수염을 뽑듯이 쉽게 하는 자는 모두 산천의 정기를 받아 규장(圭璋)의 자질을 타고난 데다 경술(經術)을 궁구하고 문장(文章)을 학습하여 진실한 공부와 축적된 정성이 마치 ‘호랑이인 줄 알고 활을 쏘자 바위가 쪼개지고[虎發石開] 물이 불어나면 배가 절로 뜨는 것[水到船浮]’과 같음이 있기 때문이니, 어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 한 가지 일을 마치고 난 뒤에도 실천의 공부에 마음을 오롯이 쏟았고 권세 가도로 달려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직으로는 낭관의 직위 이상 오르지 못하고 외직으로는 현감을 역임하는 데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마음엔 애당초 피차를 비교하는 것에 초연하였다. 그 자득의 즐거움 때문에 낭관과 현감의 직임까지 일체 잊어버렸으니 일반 사람들보다 참으로 훌륭하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넉넉한 복을 드리웠으니 틀림없이 대대로 두터이 이어질 것이다.
혹자는 “강산현(江山縣)의 삼현당(三賢堂)에 소후(邵侯)가 두 분의 현철을 추가하여 모시고 경행당(景行堂)으로 개칭하였다. 주자가 기문을 지어 ‘경행당에 모시는 분의 인원수 제한을 철폐하여 뒷날에 나올 현철을 기다린다.’라고 한 것은 그 공을 소후에게 돌린 것이다. 이런 전례로 미루어 볼 때 이 당의 이름에 ‘사(四)’라고 명시한 것은 혹 인원수 제한이라는 점에서 흠결이 있지 않을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경행당의 의미에 대해서는 실로 주자가 일찍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건양(建陽)의 사현당(四賢堂)과 숭안(崇安)의 이공사(二公祠)에 대해서도 주자가 모두 기문을 지었다. 하지만 주자가 일찍이 수를 명시하여 제한하는 것을 흠결로 여긴 적은 없으니, 이것은 일괄적으로 논할 수 없다.
또 천지의 기운은 쉬지 않고 유행하고,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만물은 생장(生長)과 수장(收藏)이 모두 다르다. 박씨의 네 분 선조가 만난 때는 계수나무가 붉은 꽃을 활짝 피우던 시기였고, 후손들이 만난 때는 계수나무가 뿌리에 진기를 갈무리하는 가을이었다. 뿌리에 진기를 갈무리한 세월이 오래되어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펼쳐지면 뒷날 수백 수천 송이 꽃이 흐드러지게 피지 않으리라고 또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렇다면 사계당이라고 명명한 것이 어찌 꼭 인원수를 한정한 것이 되겠는가.
바라건대 우리 생질은 나의 말을 치레라고 여기지 말고, 부디 선조의 공렬을 명심하여 후학을 배양할지어다. 본받으려 노력할지어다.
[주-D001] 박안복(朴安復) :
1601~1652.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중뢰(仲雷), 호는 사계당이다. 1639년(인조17)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주-D002] 박한(朴𤥚) :
1576~1652. 자는 윤보(潤甫), 호는 회이당(悔易堂)이다. 1603년(선조36) 문과에 급제하여 예안 현감, 선산 부사 등을 지냈고 호조 좌랑을 거쳐 승문원 판교에 올랐다. 추원사(追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회이당집》이 있다.
[주-D003] 박선장(朴善長) :
1555~1616.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이다. 10세 때 남몽오(南夢鰲)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1605년 51세로 증광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1608년 예안 현감이 되었고, 1614년(광해군6) 경상 도사에 올랐다. 저서로 《수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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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열부 허씨에게 내린 정려에 대한 기문〔烈婦許氏旌閭記〕
13.열효각에 대한 기문〔烈孝閣記〕
성상 42년 을사년(1905, 광무9) 6월 아무 날에 고(故) 학생(學生) 허묵(許默)의 처 권씨 및 그의 현손 부호군 허경문(許慶文)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라는 명이 내렸다. 하나는 열부에게 내리는 정문이고 하나는 효자에게 내리는 정문이다. 두 개의 정문이 하나의 가문에 함께 솟아 은혜로운 영광이 쇠퇴한 풍속을 일신하도록 고무하니, 그 얼마나 성대한가.
삼가 살펴보건대 권씨는 본관이 안동으로, 화원군(花原君) 권중달(權仲逹)의 후손이다. 증조부 권세인(權世仁)은 무과에 급제하여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고, 조부 권집(權潗)은 문과에 급제하여 보덕을 지냈다. 허씨의 선계는 가야에서 나왔다. 정절공(貞節公) 호은(湖隱) 선생 허기(許麒)의 후손이요, 참봉 천산재(天山齋) 허천수(許千壽)의 5세손이다. 두 가문은 서로 대등한 벌열로 철성(鐵城 고성의 고호)의 명망 받는 가문이 되었다.
권씨는 숙종 경진년(1700, 숙종26)에 태어났다. 자랄 때는 현숙하다 일컬어졌고, 시집가서는 시부모의 마음을 매우 잘 받들어 모셨다. 얼마 되지 않아 지아비가 희귀한 질병에 걸리자, 약을 먹이고 죽을 떠 넣으며 밤낮없이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지아비가 세상을 떠나자 “나의 뜻은 정해졌다. 그러나 임신한 몸으로 차마 남의 집안의 후사를 끊을 수는 없다.” 하고는 이윽고 칼과 자를 잡고서 오직 근실히 부신물(附身物)을 만들었고, 빈렴(殯殮)을 하고 난 뒤에도 오히려 곡읍(哭泣)을 절제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지아비의 장례를 치르려 하자 “조금 기다려 주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더니, 잠시 뒤에 과연 아들을 낳았다. 유모에게 “잘 길러 주시오.”라고 명하고, 말을 마치자 눈을 감았다. 영조 경술년(1730, 영조6) 7월 16일이었다. 마침내 같은 날 같은 무덤에 안장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열부이다.
부호군의 자는 사진(士進)이니, 순조 임술년(1802, 순조2)에 태어났다. 10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마치 성인처럼 치렀으며, 몸소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갑술년(1814), 큰 흉년을 만나 쌀을 지고 밤에 돌아올 때였다. 큰 호랑이가 고갯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부호군이 “너는 효성스러운 짐승이라지. 나는 멀리 나가서 장사하는 효자가 아니니, 잡아먹으려거든 잡아먹거라.”라고 타일렀다.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 듣고 있더니, 곧이어 마치 호위하듯이 뒤를 따랐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명당을 일러 주었는데, 곧 집의 뒤편이었으므로 날마다 어김없이 전성(展省)하였다. 늙어서 승자(陞資)한 뒤로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전성을 폐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효자이다.
아, 인륜 중에 큰 것이 삼강(三綱)인데, 그 이치는 똑같아 열부의 가문에 또 효자가 났다. 이는 곧 기맥(氣脈)이 연원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날 정려의 표창을 받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두 가지 아름다운 일이요 전에 없는 은혜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또 위로 고려 말의 충신 정절(貞節) 선생이 계셔서 실로 열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이 정렬과 효성은 멀리 100년 또는 200년 전의 일이라 거의 묻혀 사라질 지경이 되었거늘, 어떻게 온 세상에 아는 이가 없는 지금에 와서 하루아침에 천양될 수 있었던가? 나는 효자의 가문에 또 반드시 효손이 나리라는 것을 안다. 승선 재찬(在瓚) 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은 뒤를 이어 효손이 될 수 있겠는가?
못난 나는 병이 들어 산속에 숨어 지내며 문장 부탁을 일절 사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절공의 고풍(高風)을 우러러보매 실로 동조(同祖)의 세의(世誼)를 느껴, 천 리 길을 건너와 청하는 부탁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하여 위와 같이 간략하게 전말을 적는다.
[주-D001] 권집(權潗) :
1569~? 본관은 안동, 자는 달보(達甫), 산청군 단성면(丹城面) 출신이다. 1612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다. 상암(霜巖) 권준(權濬)의 형이다.
[주-D002] 허천수(許千壽) :
1509~1577. 본관은 김해, 자는 기경(耆卿), 호는 천산재(天山齋)이며, 이황의 제자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사후에 형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저서로 《천산재선생유집(天山齋先生遺集)》이 있다.
[주-D003] 부신물(附身物) :
자신이 죽고 난 뒤 빈(殯)이나 염(殮)을 할 때 소용될 물건을 가리킨다. 《예기》 〈단궁(檀弓)〉에 “자사가 말하기를 ‘상을 당하면 3일 만에 빈(殯)을 한다. 무릇 시신에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정성을 다해 만들어 뒷날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子思曰 喪三日而殯 凡附於身者 必誠必信 勿之有悔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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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백원당에 대한 기문〔百源堂記〕
15.봉강서당에 대한 기문〔鳳岡書堂記〕
저 무진년(1868, 고종5) 서원철폐령이 내린 이래 조선의 서원 가운데 철폐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고, 철폐되고 나면 모두 황폐해졌다. 그 가운데 혹 황폐함을 불식하고 학사를 뒤이어 건립하여 서당이라고 이름을 붙인 경우가 종종 있다. 성주(星州)의 봉강서당(鳳岡書堂)도 그중 하나이다. 봉강은 고(故) 충숙공(忠肅公) 야계(倻溪) 선생 송희규(宋希奎)의 영령을 모신 서원이다.
아! 선생은 세칭 을사명현(乙巳名賢)으로, 학문이 굉박(宏博)하고 도의(道義)가 숭심(崇深)하였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잇자 권신과 간신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주물렀는데 선생은 당시 대관(臺官)을 맡고 있었다. 사헌부의 장관이 된 이가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어 선량한 선비들을 해치려 하자 선생이 백휴암(白休庵), 김병산(金甁山) 등 여러 현신과 불가함을 말하고, 권신과 간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지적하여 이 때문에 탄핵을 받았다.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터지자 마침내 유배되어 쫓겨나 다시는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선생과 같은 분은 참으로 어린 임금을 맡길 수 있으며 큰 절개에 임해 지조를 빼앗을 수 없는 분이라 할 수 있다.
효종 을미년(1655, 효종6), 명곡(椧谷 홈실)에 봉강서원을 세웠다. 헌종 무술년(1838, 헌종4)에 지도(地道)가 무너져서 손곡(遜谷)에 있는 선생의 분암(墳庵)에 나아가 서원으로 삼았다. 이는 명곡과 손곡이 똑같이 용봉산(龍鳳山)에 있는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선생의 분영(墳塋)은 손곡의 서쪽 자락에 있다. 본래 선생의 손자 성암(省庵) 송유경(宋惟敬)이 분암을 세우고 승도(僧徒)들에게 지키게 하였으나 임진왜란에 불탔다. 만력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성암의 손자 송시영(宋時詠)이 15칸을 중건하였다. 영조 을사년(1725, 영조1)에 또 문루 5칸을 지었다.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 공이 이름을 흥사재(興思齋)라고 붙였다. 그러다가 서원으로 승격될 때 정사(正祠)와 전사청(典祀廳)을 새로 세우고, 나머지는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매년 봄가을로 사림 및 자손들이 서원과 분묘에 각각 정성을 다하였으니, 사액(賜額)의 간청을 올릴 겨를도 없이 요려(腰膂)의 화를 입으리라고 어찌 생각했겠는가. 오직 이 서원에 관계된 것으로는 옛 분암만 남았을 뿐이다.
이듬해 기사년(1869, 고종6)에 훼철한 서원의 목재를 가지고 서당 한 채를 짓고서 흥학당(興學堂)이라고 이름 붙이고, 동서의 재실은 각각 돈륜재(敦倫齋)와 시습재(時習齋)라고 명명하였다. 통틀어 봉강서당이라고 하여, 글을 읽으며 존모의 정을 붙이는 장소로 삼았다. 올해 봄에 또 휘어진 대들보를 수리하고, 후손 송준필(宋浚弼) 씨가 문족 사람 송인기(宋寅驥)를 보내어 만도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못난 나는 바야흐로 병을 앓고 있던 중이라 감히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매번 선부군 퇴계의 문집을 읽다가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의 일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떨리고 두려워 크게 탄식하였으니, 지금 이 중수의 역사에 차마 끝내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이에 봉강서원이 영봉서원(迎鳳書院)과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데다 본디 함께 훼철의 환란을 당했으니, 우리 선부군께서 쓴 기문을 거두어 잘 간직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선부군의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 가운데 “충의와 도덕은 본래 두 가지가 아니다.”라는 논의는 실로 이 봉강서당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니,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도 충의와 도덕이고, 뒷날의 인재들을 깨우치는 것도 충의와 도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륜재와 시습재라고 편액을 붙인 것은 곧 충의와 도덕의 행정(行程)이요 기반(基盤)이다. 가령 돈독함이 반듯하고 익힘이 항구하여, 잠시도 중단됨 없이 참된 노력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나의 마음이 사기(私己)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천지의 기운이 또한 장차 화순하게 반응할 것이다. 시험 삼아 지난날 훼철되었다가 복원되고 경복되었다가 개수된 사례를 가지고 오늘날의 서당에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봉강서당이 뒷날에 다시 서원이 되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여러 군자께서는 힘쓸지어다.
[주-D001] 송희규(宋希奎) :
1494~1558.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산옹(倻溪散翁)이다. 1519년(중종14)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장령, 상주 목사, 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하였고,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윤임(尹任)을 옹호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547년(명종2) 장령으로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와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와 충청남도 논산 사이에 있던 고산(高山)에 집을 짓고 스스로 ‘야계산옹’이라 이름하였다. 뒤에 고향인 성주로 돌아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주-D002] 사헌부의 …… 이 :
민제인(閔齊仁, 1493~1549)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이다.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할 때 대사헌으로서 언로를 장악하여 여론 형성을 주도하고, 윤원형(尹元衡)을 도와 윤임(尹任) 세력 숙청에 관여하였다. 즉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체이다.
[주-D003] 백휴암(白休庵) :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휴암은 호이다. 서울에 살았다. 조광조(趙光祖)와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송인수(宋麟壽), 유희춘 등과 두루 교유하였다. 을사사화 당시 사간원 헌납으로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다. 양재역 벽서 사건 이후 안변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왔다. 을사사화로 하옥되었을 당시 정렴(鄭𥖝)이 부친 정순붕(鄭順朋)에게 간하기를 “백인걸을 죽이면 아버지는 만세에 죄를 얻을 것입니다.” 하여, 그 때문에 정순붕이 그를 구제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燃藜室記述 卷10 明宗朝古事本末 乙巳黨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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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활천정에 대한 기문〔活川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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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記-25.끝.

첫댓글 오늘도 좋은 자료 잘 가져 가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