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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인류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 세상의 왕이심을 기리는 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연중 마지막 주일에 지낸다.
본래 대축일 명칭이 ‘그리스도왕 대축일’에서 라틴어 본문의 수식어를 명시한다는 이유로 2017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변경됐다.
교회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연중 마지막 주일에 지내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정이 인간 세계에서 죄악의 세력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이런 투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 각자 권리와 의무 이행, 더 나아가 그리스도왕 앞에서 받아야 할 심판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준다는 뜻을 그리스도왕 대축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교황 비오 11세가 1925년 교서 「첫째의 것」(Quas Primas)을 통해 제정, 공포했다. 그리스도왕(Christus Rex, Christ the King)의 의미를 성대히 기린다는 취지에서다.
‘그리스도’, ‘메시아’란 칭호는 예수가 지닌 왕의 직능을 뜻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족보에서 예수가 다윗의 후예로서 왕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한다.(마태 1,1-17) 또한 동방의 점성가들은 아기 예수를 유다인들의 왕으로 소개한다.(마태 2,2) 그리스도왕이란 칭호는 그리스도가 이룩한 인간 구원의 다양한 성격을 나타내는 칭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칭호들을 신약성경에서 살펴 보면 ‘하느님’, ‘주님’, ‘하느님의 아들’, ‘알파요 오메가’, ‘사람의 아들’, ‘다윗의 아들’, ‘구원자’, ‘중개자’, ‘대제관’ 등이 있다. 신학에서는 이와 같은 다양한 칭호들을 예수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이란 세 가지 범주에 포함시켜 언급한다. 그리스도는 계시하는 예언자이면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제요, 인간을 돌보고 다스리는 왕이다. 이 세 가지 직능은 상호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으로부터 나오고, 인간 구원이라는 궁극적인 점에서 서로 결합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예수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은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이 가운데 왕직을 특히 기리도록 제정된 대축일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전례적으로는 주님 성탄 대축일이나 주님 부활 대축일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인간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펼친 구세주이자, 구원을 위해 온 인류를 당신 자신에게로 부르는 왕이다. 예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부른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데에도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제정한 목적이 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보내며 신자들은 그리스도 왕정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누리고 인간 세계가 그리스도의 왕정으로 더욱 새롭게 되도록 기원하게 된다.
[미사의 모든 것] (17) 기도 동작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는 일치의 표지 ‘기도 동작’
나처음: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차별을 느껴 마음이 편치 않아요.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이 일반인이 성경을 읽을 때는 앉아 있다가 신부님이 읽을 때는 모두 일어서는 거예요. 미사에도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차별이 있다는 게 너무 한 거 아닌가요. 예비신자인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조언해: 평신도가 낭독하는 미사 독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기에 앉아서 들을 수 있으나 신부님이 선포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에 감히 앉아서 들을 수 없으므로 일어서는 게 아닐까? 맞죠! 신부님.
라파엘 신부: 말씀 전례 복음 말씀이 다른 미사 독서의 하느님 말씀보다 더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야. 미사 전례의 성경 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일관성 있게 보여주고 있단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당신 구원 계획을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때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게 하셨지. 인간의 죄를 대신하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해 주셨단다. 말씀 전례의 성경 독서는 이 구원의 역사를 하느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일관되게 전달해 주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말씀 전례 성경 독서는 모두 봉독자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고 끝맺음을 하지. 복음 봉독이 말씀 전례의 정점이나 독서와 복음 말씀의 우열을 가리거나 구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해. 늘 똑같은 권위로 하느님 말씀을 공경하고 합당한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란다.
나처음: 그런데 왜 자꾸 앉았다가 일어섰다 하나요? 조용한 분위기에서 미사에 집중하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일어섰다 앉았다 해서 분주함마저 들어요.
조언해: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취하는 통일된 자세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한다는 일치의 표지야! 내 취향대로 내 마음대로 미사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전통 관습 안에서 함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라파엘 신부: 미사 중에 신자들이 취하는 동작은 다 뜻이 있단다.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해 보마.
먼저, 기능적인 동작이야.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행동을 말해. 예를 들어 성합과 성작을 닦는 것, 사제가 손을 씻는 것, 제대를 향해 행렬을 지어 입당하는 것 등이 기능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지.
두 번째로 말과 행동을 함께함으로써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드러내는 동작이야. 입당 예식 참회 기도 때 “제 탓이오” 하면서 가슴을 치는 행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
마지막으로 상징적인 동작이 있어요. 사제가 영성체하기 전에 성체 조각을 성혈과 섞는 행위라든가, 세례식 때 영세자에게 흰옷과 초를 주는 행위 등이 그 예이지. 말씀 전례 성경 독서 때 일어서고 앉는 것 또한 상징적인 동작에 속한다고 여기면 돼.
일어서는 자세는 ‘존경과 공경’의 표시야. 모임 때 윗사람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일어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가 성당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모두 일어서서 존경을 표하는 것이지. 또 사제(또는 부제)가 복음을 읽을 때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여겨 모두 일어서서 듣는 거야. 마치 내가 응원하는 운동팀이 골을 넣거나 홈런을 칠 때 벌떡 일어나 환호하듯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알렐루야”를 힘차게 노래하면서 일어서는 것이지.
일어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태도를 가다듬음을 뜻하지. 앉아 있을 때의 편안한 자세 대신 자제하는 자세, 단정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지. 이것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야. 서 있는 자세는 그 무언가를 긴장하고 깨어 있으며 즉각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음을 표하는 것이지. 그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서슴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서 있는 것이지.
사실 서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관습이기도 해.(탈출 20,21; 33,10; 느헤 8,5; 에제 2,1; 다니 10,11)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단다. 바로 ‘일어섬’은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특히 부활 시기 삼종기도를 바칠 때는 일어서서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는 게 교회의 관습이지.
아울러 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진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마르 11,25; 루카 18,13)이며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야.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는 주일과 부활 시기에 무릎을 꿇지 말고 서서 미사를 하도록 의무화하기도 했지.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자유인,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단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지로 서서 기도하는 자세를 갖춘단다.
또 서서 기도하는 것은 사제직을 수행하는 이의 자세야.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은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들의 직분만을 뜻하지 않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물려받은 모든 신자를 말하는 것이야. 그래서 사제는 항상 서서 미사를 주례하고, 신자들도 기도하는 부분에는 모두 일어서서 주님의 사제직에 동참하는 것이지.
앉음은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듣는 자세야. 예수님께서도 어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앉아서 들으셨지.(루카 2,46) 또 라자로의 동생인 마리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 곁에 앉아서 들었으며(루카 10,39),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도 당신 주위에 모여 앉아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셨지.(마르 3,31; 마태 5,1 이하)
이렇게 앉음은 스승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자세일 뿐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경청하는 겸손의 자세이기도 해. 미사 말씀 전례 때, 독서와 강론을 들을 때 신자들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라고 할 수 있지.
기도 동작 중 ‘무릎 꿇음’의 자세도 있단다. 사람은 간절할 때 무릎을 꿇지. 아울러 무릎 꿇음은 상대를 공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지. 예수님께서도 수난 전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단다.(마태 26,39) 또 사도행전에는 베드로(9,40)와 바오로(20,36) 사도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나오지.
그래서 미사와 기도할 때, 하느님을 경배하고 주님께 간절히 청할 때 무릎을 꿇지.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때나 장엄 기도 때, 그리고 성당에 들어설 때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와 제대, 십자가 등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지. 하지만 요즘은 무릎을 꿇지 않고 허리를 굽히는 큰 절로 바꾸어 하기도 해.
무릎을 꿇는 것은 아울러 ‘뉘우침을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해요. 이런 면에서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는 서는 자세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겠지. 그래서 고해실에는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하도록 무릎틀을 마련해 놓았단다.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님의 묵상 글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마. “우리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보다도 자신을 더 작게 느낄 때가 어디 있겠는가…절로 작아진다. 어느새 키를 반으로 줄이게 된다. 인간은 무릎을 꿇게 된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허리까지 굽히게 된다. 이렇게 낮아진 모습이 아뢰는 것은 ‘당신은 지대한 하느님이시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뜻이다.”(「거룩한 표징」 중에서)
[미사의 모든 것] (16) 독서
하느님 말씀인 성경 봉독하고 깊이 이해하는 시간
나처음: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잘 읽고 잘 응답할 수 있나요.
라파엘 신부: 예비 신자인 처음이는 ‘하느님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하느님 말씀은 「성경」을 뜻해. 신ㆍ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단다. 바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고백이야. 성경의 참 저자는 바로 하느님이셔. 인간의 저자들이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이란다. 가톨릭교회는 구약 성경 46권과 신약 성경 27권을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저술된 성경이라고 받아들이고 받들고 있지. 아울러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언제나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고 있어.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양육하고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있기에 시편 저자는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라고 찬미한단다.
조언해: 말씀 전례 중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읽고, 잘 응답하기 위해선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라파엘 신부: 미사 중에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언제나 살아 있고 힘 있는 말씀이 되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요. 그래서 미사에 깊이 참여할수록 더욱더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지. 미사 중에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알아들을수록 우리는 더욱 활기차게 미사에 참여하고, 미사에서 거행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삶과 행동으로 실현하고,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게 된단다.
조언해: 말씀 전례 때 봉독되는 하느님 말씀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라파엘 신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존경심이야말로 신자들의 영성 생활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준단다.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모이고 자라고 양식을 얻는데 이 표현은 미사 거행에서 말씀 전례에 딱 들어맞는 말이란다. 하느님 말씀이 신자들 마음에 잘 받아들여지고 그들 삶에 스며들려면 살아있는 믿음이 요구되는데 이 믿음은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튼튼해진단다.
하느님 말씀을 사랑함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새로워지는 힘이야.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해요. 하느님 말씀을 충실하게 듣고 받아들이면 그 말씀은 공동체로든 개인으로든 회개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믿음으로 빛나는 삶을 살도록 재촉해. 그래서 미사에 참여하기 전에 그날 미사 말씀 전례에 봉독될 성경을 읽고 깊이 이해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라고 교회는 권고하고 있지.
나처음: 말씀 전례 때 봉독하는 하느님 말씀은 어떻게 선택하나요?
라파엘 신부: 좋은 질문이구나.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주요 부분들이 회중 앞에서 적절한 기간 동안 봉독 될 수 있도록 「미사 독서 목록」을 만들어 두었단다. 주일과 축일의 독서 목록은 3년 주기로, 평일 독서 목록은 2년 주기로 구성돼 있어. 또 성인 고유와 공통, 예식 미사, 신심 미사, 여러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드리는 기원 미사, 죽은 이를 위한 미사의 독서 체계는 고유한 방식으로 배정돼 있단다.
주일과 축일의 미사에는 세 가지 독서가 봉독돼. 첫째 독서는 구약을, 둘째 독서는 서간과 요한 묵시록을, 셋째 독서는 복음을 봉독하지. 이러한 배치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단일성을 밝히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음을 드러낸단다. 주일과 축일의 독서는 각 독서의 본문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같은 주제로 엮어 놓았어.
평일 미사 독서는 늘 2개로 구성돼 있어. 첫째 독서는 구약이나 사도서를 봉독해. 그러나 부활 시기에는 사도행전을 봉독해. 또 대림 시기에는 구세주 탄생을 예고하는 이사야 예언서가, 성탄 시기에는 요한의 첫째 서간이 봉독돼. 둘째 독서는 복음이야. 또 사순 시기에는 세례와 회개를 표현하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해. 성인 축일 미사에는 순교자, 목자, 동정녀 등 해당 성인의 범주에 따라 어울리는 독서를 봉독하지.
나처음: 전례력에 따라 주제별로 독서 내용이 달라진다는 게 무척 흥미롭네요. 신부님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라파엘 신부: 미사의 독서는 복음 말씀이 중심이야. 그래서 복음은 주일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단다. 먼저 전례력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시기부터 설명할게. 대림 제1주일 복음은 때가 차 주님께서 오심을, 제2주일과 제3주일은 요한 세례자를 말하고, 제4주일은 가까이 다가온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복음 말씀이 봉독 되어요. 이에 따라 대림 시기 구약 독서는 메시아와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 이사야서가 선포돼. 그리고 사도서 독서는 이 시기의 특성과 조화되는 선포와 권고를 담고 있단다. 대림 시기 평일 독서는 전반부(대림 제1주간 월요일부터 12월 16일까지)와 후반부(12월 17일부터 24일까지)로 구분할 수 있어. 전반부에는 이사야서를 차례대로 읽으며 주일에 배정된 중요한 부분은 중복되더라도 빼놓지 않고 봉독해. 대림 제2주간 목요일부터는 요한 세례자에 관한 복음을 읽어요. 성탄 전 마지막 주간에는 마태오 복음(1장)과 루카 복음(1장)을 봉독해.
성탄 시기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와 대축일 미사는 주님 탄생에 관한 복음이 봉독돼. 성탄 팔일 축제 동안에 오는 주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므로 복음은 예수님의 유년기에 관한 것이며, 다른 독서는 가정생활의 여러 덕행에 관한 하느님 말씀을 봉독해. 성탄 팔일 축제 제8일, 곧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독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에 관한 것과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관한 말씀이 선포된단다. 그리고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강생의 신비에 관한 독서가 봉독 되어요. 이날 사도서 독서는 이민족들을 구원으로 부르는 내용이 선포되지.
사순 시기 첫째와 둘째 주일에는 주님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와 주님의 거룩한 변모에 대한 복음이 봉독돼. 사순 제3, 4, 5 주일은 가해의 복음으로 사마리아 여인,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라자로의 부활 사건에 관한 복음 말씀이 선포돼. 그리고 나해에는 요한 복음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장차 영광스럽게 되시리라는 말씀이, 다해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루카 복음을 봉독해.
그리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주님께서 성대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사건을 이야기하는 복음 말씀이, 성주간에는 주님 수난의 신비에 관한 하느님 말씀이 선포돼.
파스카 성삼일 중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저녁 미사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금요일에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가 봉독돼요. 또 파스카 성야에는 구약 독서 일곱, 신약 독서 둘 곧 아홉 개의 독서가 선포돼. 구약 독서는 구원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신약 독서는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며, 그리스도 부활의 성사인 세례를 알려준단다.
주님 부활 대축일 전야와 대축일 미사는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선포되어요. 부활 시기 평일 독서는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사도행전을 봉독하고, 부활 제3주일까지 복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에 관해 들려준단다. 그리고 부활 제4주일에는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이, 부활 제5, 6, 7주일은 최후 만찬 다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기도가 봉독된단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말씀하신 성령의 약속을 기억해요.
연중 시기 복음은 전례력에 따라 주님의 가르침과 기적 내용을 선포해요.
전례 탐구 생활 (30) 신경 : 그리스도인의 ‘쉐마’ ①
신경은 초기 교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칙 또는 표준으로 사용했던 신앙의 요약 진술입니다. 원래 세례 예식 때 예비 신자들이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용도였는데, 나중에 올바른 교리를 보장하고 이설(異說)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경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왜 성경 본문이 아닌 전례문이 말씀 전례 안에 있는지” 의문을 가질 법도 합니다. 여기에는 신경이 성경의 이야기 전체를 요약한다는 말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강생, 죽음, 부활, 성령 강림, 교회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신경은 구원 역사의 이야기 전체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 짧은 신앙 진술 안에서 우리는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관통하는 이야기(창조, 타락, 구속)와 이 드라마의 주연인 하느님의 세 위격 성부, 성자, 성령을 알아봅니다. 한마디로, ‘성경이 길게 말한 것을 신경이 짧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경을 기도하듯 낭송하는 관습은 성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쉐마’라고 알려진 신앙 진술로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말로 “들어라”라는 뜻으로, 신명기 6장 4-5절에 나오는 말씀의 첫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 거룩한 말씀을 계속 마음에 담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에, 집에 있을 때, 거리로 나갈 때 등 하루 동안에도 규칙적으로 바쳐야 했습니다(신명 6,6-9).
‘쉐마’는 세상에 관해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이 일반적으로 알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고대 근동 민족들은 다신교 세계관을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었고, 각 부족 또는 민족은 그중에 자신만의 신들을 섬기면서 평안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란 원칙적으로 부족적, 인종적, 민족적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신교적 환경 속에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아주 대담하게 드러내는 표현이었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매우 과격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저 세상의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계신 진짜 하느님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교 유일신론은 이집트, 가나안,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모시는 신들의 가면을 벗기고, 그들의 진짜 모습을 폭로해 버립니다. 그것들은 한낱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우상에 불과할 뿐 전혀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야말로 유일한 하느님이다! 더군다나 ‘쉐마’는 세상에 그냥 한 분 하느님이 계심을 선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한 분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특별한 계약을 맺으셨음을 알렸습니다. 유다인들의 유일신관에는 실로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뒤집어엎는 날카로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낭송하는 신경은 ‘그리스도인의 쉐마’입니다. 구약의 ‘쉐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경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전례 탐구 생활 (31) 신경 : 그리스도인의 ‘쉐마’ ②
신경은 우리 삶에 대하여 세속화된 현대 세계가 상식으로 여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말해 줍니다. 도덕적, 종교적 진리란 없고,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 기준도 없다는 상대주의가 공기처럼 떠도는 시대,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자기 삶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엄청난 허용의 시대에 신경은 우리를 올바른 현실 위에 서게 하고, 우리의 믿음과 선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신경은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 오늘날 교회의 희생하는 사명으로 나아가는 흐름 속에서 인류 역사의 전체 틀이 되는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신경은, 삶에는 기본 바탕이 있고 우리가 여기 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전제합니다. 신경은 우주가 무작위적 우연으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진짜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께서 현실로 불러내시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신경은 이 거룩한 섭리가 하느님의 아들, 우리에게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려고 “사람이 되신”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다고 여깁니다.
신경은 또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던 상황이 뭔가 끔찍하게 잘못됐음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곧 사탄과 그의 무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일으킨 최초의 불순종과 그들이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바로 그 불순종으로 끌어들였다는 것, 또 이후의 인류 가족 전체가 죄에 떨어지면서 그 불순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경의 이야기는 태초부터 이어져 온 강렬한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암묵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 하느님과 뱀(창세 3,15; 묵시 12,1-9),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하느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사랑의 문명”과 “죽음의 문화” 사이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신경은 우리의 작은 일상이 창조와 타락, 구원이라는 더 큰 이야기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 각자는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던져진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신경은 우리가 세상에 옳고 그른 선택이란 없다는 신화, 우리 삶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는 현대의 상대주의적 신화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신경은 우리에게 우리 삶이 끝나는 날 우리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 삶의 모든 선택들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저울에 달릴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알맞은 보상 또는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경은 이 우주적 전투에서 우리가 미지근한 구경꾼으로 남아 있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신경은 우리가 어느 편에 서서 싸울지 선택하도록 재촉합니다. 진정한 옳고 그름이란 없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세상의 군주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늘과 땅의 임금님을 따를 것인가? 우리가 미사 때 신경을 통해 우리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공개적으로 온 교회와 하느님 앞에 서서 예수님의 깃발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2020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전례 탐구 생활 (32) 신경 : 그리스도인의 ‘쉐마’ ③
우리는 왜 같은 신앙 고백을 매주 반복해야 할까요? 세례 때 한 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우리는 매 주일마다 성당에 와서 “예, 저는 이 모든 것을 계속 믿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까? 신경을 시작하는 첫 단어는 이어서 나오는 여러 신앙 진술을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 단어인데, 이 단어가 매 주일 미사 중에 신경을 반복해서 낭송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빛을 비춰줍니다. 그 단어는 바로 “믿나이다”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0항에 따르면 신앙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지성적 차원입니다. 신앙이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측면은 신경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믿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또 “성령”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가르치는 모든 것에 우리의 정신은 “오케이!”라고 동의를 표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歸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동의를 표할 때 많이 사용하는 “아멘”(진실로 그러하다)의 어원이 되는 히브리어 아만(aman)에는 머리에서 오는 지성적 동의 말고도 ‘믿어 의지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지성적 확신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의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내 삶의 진짜 근본 바탕이 되어 주신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제가 무서워 떠는 날 저는 당신께 의지합니다. 하느님께서 제 편이심을 저는 압니다.”라고 외치는 시편 저자의 마음과 같습니다(시편 56,4.10).
신앙의 두 측면 - 인격적 측면과 지성적 측면 -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수학 등식과 혼인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 진술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는 당신을 믿어.”라고 한다면 그는 아내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어. 나는 나 자신을 당신에게 맡기고 있어. 나는 내 삶을 당신에게 주고 있어!”
이와 마찬가지로 신경에서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팩트’를 넘어 우리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단순한 확신을 넘어 - 물론 이것도 확실히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 우리는 한 분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맡겨 드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 주일 미사에서 신경 낭송을 반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사랑해”라고 말하며 자주 자신들의 신뢰와 서약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우리도 신경을 통해서 매주 주님에 대한 서약을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께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당신께 드린다고 거듭거듭 말하며 우리의 삶 전부를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말의 깊은 속뜻입니다.
신경이 우리 마음에 와닿을 때 우리 영혼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공명합니다. “내 삶의 진짜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내가 진짜 신뢰하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으로 내 삶과 내 모든 관심사를 하느님 섭리에 맡겨 드리고 있는가?” 누구도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신경을 낭송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 커지길 바라는 - 우리 삶의 더 많은 부분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길 바라는 - 소망을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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