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에 흡수되지 못한 대로(大路)는 모두 절로 소멸되었다.
하물며 역(驛)과 원(院), 점(店), 참(站) 등이 남아있겠는가.
어림이라도 되면 그래도 다행이라 하겠다.
원주와 30리길인 식송점(植松店)터는 정확히 짚을 수 없지만 마을 이름이
보전되고 있어서 가늠해 볼 수는 있다.
도로에 인접한 수암2리 농업인건강관리실 일대(아래 그림2)가 아닐까.
원주시 소초면 수암2리의 자연마을 식송 버스정류장(아래 그림1)도 있다.
나의 옛길 걷기에서 공신중 하나가 주유소다.
특히 염천에는 시원한 냉수와 그늘을 제공하는 오아시스다.
그렇다면 혹한기에는?
당연히 피한처다.
수암리 현대오일뱅크(아래 그림3)는 그 대표가 되는 주유소다.
아침 9시인데도 해는 치악산을 아직 넘지 못했는지 무력했다.
버티다 못해 염치 불고하고 주유소사무실 문을 열었다.
떨고있는 늙은이가 가여웠는가.
난로의 화력을 돋우고 따끈한 물을 내놓았다.
낙동정맥 검마산(영양군 수비면) 통과때 휴양림의 김운년님이 베푼 온정이
이랬다.(메뉴 백두대간 41,42회 참조)
걷는데 도움이 될 것을 주고 싶으나 휴지뿐이라며 배낭 안에 판촉용 휴지를
잔뜩 넣어준 그들의 본가는 서울 종암동이란다.
늙은(나보다 2살 연하) 아버지와 젊은 아들이 먼 타향에서 애로가 많겠지만
라일락향기(우리 카페에 등록된 닉네임)처럼 살으리라.
원주는 강원도 관찰사가 주재하는 강원감영(江原監營)이 있던 고을이다.
이조 태조 4년(1395년)부터 500년간 그랬다.
그러나, 고종32년(1895년)에 조선 8도(道)가 23부(府)로 개편될 때 감영을 춘천으로
옮기고 원주는 충주부 예속으로 다운시켜버렸다.
도청을 뺏기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즈음이라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인동까지 가세하여 유례없는 관민 일체의 반대투쟁을 벌일 것이 뻔하다.
부동산 가격을 비롯해 상권이 곤두박질침으로서 주민들이 패닉(panic) 상태에 빠져
들고 말텐데 아니 그러겠는가.
지금, 국력 낭비중인 세종시 사건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어땠을까.
고소원이나 불감청이었다며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층층시하의 말단에게 상전은 적을 수록,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편하고 좋다.
관찰사는 종2품고위직으로 9품까지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이 몽땅 떠난다면 향리(鄕
吏)들에게 이보다 더 잘 된 일이 있겠는가.
상민, 천민들도 가렴(苛斂)과 부역(賦役) 당하고 굽실거릴 일이 그만큼 줄어드는데
어찌 좋지 않겠는가.
포정루(아래 그림1)는 강원감영의 정문으로 지방관의 어진 정사가 잘 시행되고 있나
살펴보기 위해 세운 누각이란다.
선화당(아래 그림2)은 관찰사가 행정, 농정, 조세, 재판 등의 업무를 수행하던 곳.
루문 안에서 반가이 맞은 이는 원주시 문화관광 해설사 최석홍翁(아래 그리림3)
연배이면서도 입장은 다르지만 모처럼 오붓한 역사산책이었다.
그의 해설은 이즈음의 표현으로 톡톡튀는 젊은 이에 당할 수는 없겠지만 진지하고
연륜과 관록이 묻어있어 흐뭇했다.
그는 역사의 전승자라는 사명감과 자긍심이 있어서 이 일이 즐겁단다.
오늘의 골칫거리인 노인문제의 한 해답이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사적공원 조성사업으로 사적 제439호 강원감영을 복원중이란다.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도유형문화재 제3호)과 포정루를 보수하였으며
중삼문, 내삼문, 행각 등을 복원하고 내아(內衙:청운당)를 해체보수해 개방했단다.
질마재는 지정면 보통리에서 가곡리와 간현리로 넘어가는 88번지방도로의 고개다.(아래 그림1)
지정면소재지 간현리에는 국민관광지(유원지:아래 그림2~4)가 있다.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雉티岳악이 여긔로다"
송강(松江鄭澈)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섬강'이 여기란다.
92.6km의 섬강는 횡성군 태기산에서 발원해 간현관광지를 이루고, 안창, 문막을 거쳐 은섬포(銀
蟾浦:부론면)에서 남한강에 합수된다.
섬강철교 북동쪽 1km지점의 커다란 바위가 두꺼비가 기어 오르는 형국이라 해서 섬강이란다.
푸른 강물과 넓은 백사장, 삼산천 계곡의 맑은 물에 기암 준봉이 병풍처럼 그림자를 드리워 더욱
운치가 있다고 알려짐으러서 청소년 및 가족 단위의 피서지로 크게 부상되고 있단다.
안창1리 월운부락 입구(아래 그림1)에서 만난 전주이씨 이기석翁은 나를 형님으로 모시겠단다.
타고난 친화형(親和型) 이미지인 그는 나보다 5세 연하지만 아직 몇마디 나누지 못했는데도.
낮술을 했는지 주기(酒氣)가 도는 그는 자상하게 설명했다.
제법 큰 마을인데도 학령기 아이들이 없어 학교는 문을 닫았다(아래 그림2)
강원감영과 한양 간의 길목인 이곳(아래 그림3)에 역마를 쉬게 하거나 갈아타는 안창역이 있었는데
주재역사 1명에 대마 1필, 복마(卜馬) 2필, 노비 21명이 티오(Table of Organization)였단다.
안창과 문막을 잇는 새 다리가 놓였다(아래 그림4)
이 교량의 효과는 안창과 문막의 편리는 물론 솔치넘어 경기 동북지역까지 뻗히겠다.
의민공 김제남(懿愍公金悌男:1562~1613)은 이조14대 선조의 국구(國舅:仁穆王后의 생부)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이다.
그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사(賜死:光海君5년)되었다.
3년 후(1616년)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사자(死者) 공포증이라도 있었던가.
부활신앙이 있던 것도 아닌 때에 곧 썩고 말 시신의 목까지 베다니?
미구에 닥칠 그 업보가 두렵지도 않았던가.
실은, 선조가 세자(世子) 광해군 대신 유일한 정궁(正宮:仁穆王后) 소생인 영창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과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러나, 선조의 급서(急逝)로 광해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서 대북파(大北派)가 득세함에 따라
영창대군계의 소북파(小北派)가 숙청되었다.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다시 몰락하고 그의 관작(官爵)이 복원됨으로서 출생지인 여기(安昌1
里)에 사당(懿愍公祠宇:아래 그림2)과 신도비가 건립되었나 보다.
안창1리의 핵은 능촌(陵村:아래 그림1)이다.
능촌이라는 이름은 김제남의 묘가 있다 해서 붙혀졌단다.
88번지방도로와 안창~동화산업단지(문막) 간 새 길의 새 삼거리, 옛 안창역터 한 쪽에
'을미의병봉기기념탑'(아래 그림1, 2 )이 서있다.
대원군의 협력을 받은 일본이 명성황후(고종妃)를 시해한 이른 바 을미사변(1895년)과
단발령에 항거한 의병들의 봉기다.
안내판에 의하면 을미년 11월 28일(陰)의 안창역 봉기가 을미의병활동의 효시란다.
민비를 시해한 토우 카쯔아키(藤勝顯)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하수인이다.
그가 황후를 시해한 칼(肥前刀)이 일본 후쿠오카(福岡) 구시다진자(櫛田神社)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은 여러 해 전에 재일동포 역사학자 최서면(崔書勉)님이 확인했다.
최근, 한 단체가 이 칼의 국내환수 또는 폐기를 주장한단다.
"'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새겨져 있다는 히젠토는 우리나라
국치(國恥)의 상징이다. 지난 100여년간 발생한 양국간의 비극적인 업보를 상징하는 이
칼이 폐기되거나 한국 측에 인도돼야 한다. 범행 도구였던 흉기이므로 당시 조선정부에
압수됐어야 했다. 범인이 명성황후를 이 칼로 살해했다고 자백했는데도 일본의 신사에
기증돼 민간이 소유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한데, 이 비극의 칼이 왜 진자에 있으며 하필 후쿠오카의 구시다진자일까.
진자는 일본에서, 황실의 조상이나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그렇다면 토우 카쯔아키도 신으로 모실만큼 공로가 큰 사람이라는 뜻이 아닌가.
칼이 구시다진자에 보관된 것은 토우(藤)가 이곳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1천에 가까운 일본 성(姓)중 외자인 '藤'은 후쿠오카지방에만 있는 성이라니까.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투철한
유교사상은 오두가단 차발불가단(吾頭可斷 此髮不可斷)으로 거세게 항거했다.
을미사변으로 격앙된 민심의 봉기에 1896년 1월 1일자로 발령된 단발령은 철회되었다.
안창역에서 15리길 송치(松峙)에 오르는 동안 어찌나 기를 썼는지 겨울
석양인데도 몸에 땀이 배는 듯 했다.
그랬으나 고개마루에는 어둠이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아래 그림)
길을 묻는 한 승용차가 없었다면 양동역까지 밤길 20여리가 될 뻔 했다.
안창쪽에서 올라온 SUV승용차의 갖40대 여운전자와 나는 곧 win-win
관계가 되었다.
흔한 나비(nevigation)도 없이 밤의 초행길을 달리려는 이 여인은 겁이
없는 강심장인가.
나는 그녀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고 그녀는 내 밤길의 해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