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38신]문학은 오로지, 온전히 인간에게 기여해야
『태백산맥』을 십 수년만에 다시 읽는다는 사돈께
사돈과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 ‘탐매探梅여행’이라니,
보름 전부터 상당히 들떴습니다.
수 년 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이 ‘탐매’였거든요.
사진 취미에 맛들여 혼자서도 단풍이나 노을 등을 찍으러
종종 다니신다구요? 얼마나 좋아요.
기꺼이 데려가준다는 말에, 매화 공부를 하려고 축령산의 도반에게 묻기도 하고, 관련 글https://www.itkc.or.kr/bbs/boardView.do?id=75&bIdx=17203&page=1&menuId=128&bc=7을 뒤적이기도 했습니다.
설중매, 납월매, 백매, 선암매, 남명매, 율곡매, 화엄사의 흑매, 무위사의 홍매, 백양사의 고불매 등을 읊어대는데,
문외한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단지 꽃을 강조하면 매화나무이고, 열매를 강조하면 매실나무라는 것 정도만 알고,
토요일 오전 7시 30분, 고향집에서 출발했습니다.
친애하는 사돈,
이 새벽, 그 길을 같이 회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순천 탐매마을의 고샅 홍매들은 이미 지고 있는 듯했지요. 곧바로 금둔사의 홍매를 찾았건만,
이곳도 비슷해 때를 놓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봄은 홍매와 함께 진작에 와버렸더군요.
하여 인근에 있는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을 찾았습니다.
한창기 선생(1936∼1997)은 지금으로 보면 요절夭折이라 할 짧은 생애였지만,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1976년 창간한 ‘뿌리 깊은 나무 ’월간잡지는 순한글과 가로쓰기로 한 시대의 획을 그었지요.
강제폐간된 후 월간종합지 ‘샘이 깊은 물’ 창간과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발간, ‘판소리전집’ ‘민중자서전’ 편찬 등 문화사적으로 빛나는 공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평생 수집한 ‘우리의 민속품’들을 수 천 점 전시해 놓기도 했더군요.
참으로 대단하고, 엄청난 선각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이 태맥산맥문학관이었지요. 그런데, 요즘 십 수 년만에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있다구요.
마침 잘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 문을 닫아 들어가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작가 조정래야말로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문호文豪라고 생각한 것이 오래인지라,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역시였습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문학관 전면 벽에 써있는 작가의 말이 와닿았습니다.
그러길레, 태백산맥 10권, 아리랑 12권, 한강 10권 등 초대형 대하소설 3부작을 ‘글감옥’에 갇혀 써내려갔겠지요.
처음에 세운 뜻(立志)을 언제 한번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마음으로 ‘사서 그 고생’을 한 작가를 생각하며 숙연했습니다.
200자 원고지 16,500장을 쌓아놓고 그 가운데에 선 작가와 작가의 손자 사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해괴한 무고誣告에 낭비되는 시간이 아까웠다는 작가는 심지가 굳어도 너무 굳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작가의 뜻에 따라 썼다는 태백산맥 필사는 그렇다쳐도
전국의 남녀노소 열혈독자 100여명이 썼다는 필사실에서는 그만 혀를 내둘렀습니다. 정말 놀랍더군요.
이종상 화백의 ‘옹벽변화’도 좋았었지요.
‘외서댁 꼬막나라’에서 정식을 먹고 둘러본 벌교읍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태백산맥 그 자체>로 이뤄진 작은 읍내이더군요.
소화네집, 현부자집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의 힘으로 보존된 보성여관과 술도가집, 금융조합 등
문학거리를 걷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태백산맥과 꼬막이 빠진다면 벌교는 앙꼬없는 찐빵일 것입니다.
다른 주인공들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었지만, 다른 날 아내와 함께 오기를 기약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참 좋았습니다.
일본 ‘설국雪國’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묵었다는 료캉을 일부러 찾았던 추억도 생각나는 반나절이었습니다.
이제 강진의 천년고찰 월출산 무위사無爲寺로 향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절 이름이 의미심장했습니다.
단청도 하지 않은 맞배지붕 극락보전의 단아한 모습이 한껏 고졸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 앞 도량에 부처님이 나투셨다는(현현), 우리 아름으로 안을 수조차 없는 팽나무 두 그루는 대체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이곳의 홍매도 비슷했습니다. 지난해 같은 날(2월 20일) 찍으셨다는 두 장의 사진은 작품이었는데,
다시 내년을 기약할 수 밖에 없음이 서운했지만,
올해의 탐매여행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3월말 선암매만큼은 제대로 봐야겠다고 다짐을 했었지요.
그때도 꼭 저를 끼어주신다고 약속했지요. 미리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무위사 가는 길에 들른 ‘홍암나철기념관’도 빼놓을 수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조선말 기존에 내려오던 ‘단군檀君신앙’을 ‘대종교大倧敎’로 처음 중광한 초대교주 나철(홍암은 호) 선생을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까닭을 이곳에 와서야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분이 1890년대부터 만주지역에서 벌인 광범위한 독립운동의 실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보성군이 그분의 생가를 복원하고 사당과 기념관을 세운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듯싶었습니다.
이름없이 스러져간 잊혀진 이 땅의 독립운동 애국자들이 무릇 기하이겠습니까?
비록 1915년 순명을 했다지만, 그분의 뜻이 이렇게라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후손들의 도리이겠지요.
그나저나, 제 둘째아들과 사돈 따님의 가연佳緣으로 만난 우리가
이런 여행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별 일 없으면 토요일마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고찰이든, 서원書院이든, 꽃구경(서산의 수선화단지, 부여의 궁남지 연꽃 등)이든, 부안 솔섬의 노을과 해넘이 구경이든 같이 가자는 말이 어찌 불감청고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3월에는 동부인同夫人하여 언제부터 가보고 싶었던 안동의 도선서원과 병산서원 같이 함 가봅시다.
그때까지 부지런히 관련공부를 하여 문화해설만큼은 제가 책임질 터이니,
우리 같이 여행을 다닌다면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식이 아니될는지요.
돌아오는 차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정치 이야기’조차 100% 공감하였기에 더욱 좋았습니다.
결코 호남湖南이라는 지연地緣으로만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같은 것은 아닌 듯했습니다.
우리나라 검찰과 법원의 문제가 무엇인지,
기득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카르텔에 대해서도 같이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가외소득'이라 하겠지요.
최강욱같은 국회의원이 왜 10명도 안되느냐고 하셨지요?
정치분야만 빼놓곤 예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앞서가는 세계적인 인물들이 얼마나 많으냐고도 하셨지요?
최근 별세한 백기완 선생님의 ‘평생 분노’와 ‘평생 투쟁’에도,
조정래 작가의 ‘사회주의자들의 인간 복원’에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셨지요?
정말 그렇지요. 정치만 후진後進이지 나머지는 모두 선진先進이 된 지 오래인데, 대체 왜 그럴까요?
이렇게 소통疏通이 잘 될 줄은 전혀 몰랐기에, 더욱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같습니다.
사실은 사돈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것이 솔찬히 ‘거시기한’ 것일텐데,
막상 쓰다보니 술술 잘 풀린 첫 편지가 된 것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해량하시구요. 사부인께도 안부 전해주소서 .
참, 아무리 베스트 드라이버라지만 '나홀로 운전'에 애 많이 쓰셨고, 이것이 조금 많이 미안하더이다.
다음 만남과 좋은 여행을 기약하고 내내 잘 지내시기 바라며 줄입니다.
2월 21일 새벽
'믿듬직할 사위’의 부족한 애비가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