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27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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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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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YnIMm72WG8 (김우성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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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가 내가 너무 보고 싶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가요?>
옆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신명나는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이0오늘 마르코 복음서에 소상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를 위한 사목 실습을 떠났던 제자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둘씩 짝지어 떠났던 제자들은 돌아오자마자 앞다투어 스승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큰 원으로 둘러앉은 제자들은 복음 선포 활동 중에 겪었던 성과와 보람들, 힘겨웠던 순간들,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신나게 줄줄이 늘어놓았습니다. 설마 설마 했었는데, 스승님 이름으로 기도하니 마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 손으로 치유시킨 사람만 다섯입니다.
어딜 가나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핵심만 말하면 좋을 텐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횡설수설하며 보고 시간이 늘어지는 제자를 향해 여기저기서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에는 대견스런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의 제1차 선교 활동에 대한 나눔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군중은 계속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삥 둘러쌌습니다. 요기라도 하든지, 잠시라도 머리를 눕혀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 일행이 탄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빨리 그들을 만나려고 육로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이 배에서 내리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지에 모여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무엇인가를 간절히 청하기 위해 뛰기까지 하며 따라다니는 군중을 보신 예수님의 시선은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누군가를 너무 깊이 사랑해서, 그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 뛰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천 년 전 가난한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뵙고 싶어 뛰어다니던 매력적인 존재.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착한 목자의 표상이신 돈보스코가 그랬습니다. 토리노 시내의 한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한 청소년이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눈에 가게 앞을 지나가는 돈보스코의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너무나 반가웠던 그 아이는 갑자기 이성을 상실했습니다.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돈보스코! 하고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급한 마음에 유리창이 있는 줄도 모르고, 유리창을 뚫고 뛰쳐나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조금도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물론 돈보스코는 가게 주인에게 초대형 유리값을 물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사목자로서의 제 모습을 깊이 성찰합니다. 누군가가 내가 너무 보고 싶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가요? 누군가가 세파에 시달리다가도 내 얼굴을 떠올리며, 파이팅! 하며 힘을 내고 있는가요?
요즘 교회도 여러모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 양들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여기는 사목자, 양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기는 사목자들이 늘어날 때, 우리 교회는 분명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과 일에 지친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런 제안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가끔 일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외딴곳을 찾아가야겠습니다.0내려놓으면 큰 일 날 것 같은데, 정작 내려놓아도 아무 일 없으니, 안심해야겠습니다. 만사 제쳐놓고 푹 좀 쉬어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 하나,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쉬어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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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KAgI0vvhm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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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묵상을 쉬기로 한 이유: “이 양들이 네 거니?”>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사도들이 예수님께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쉰다고 양 치는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을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외딴곳으로 사도들과 함께 쉬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사도들을 가리키는 게 분명합니다. 사도들이 쉬어야 하기에 당신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혼자 개인 피정을 하였습니다. 본래 단체로 피정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취소되고 성당이나 사제관에서 혼자 피정하라는 지시가 왔습니다. 저는 심적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유튜브 강론을 무리하게 일주일 동안 두 개씩 미리 올리는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정하면서 하나씩 올리면 됐습니다.
피정이 잘 됐을까요? 일주일을 혼자 사제관에서 지내고 났더니, 그냥 사람만 안 만났을 뿐이지 하루 일상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동영상을 올리는 시간이 일과의 매우 많은 시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동영상 하나 올리는데 4~5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루에 하나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2개도 올립니다. 그러면 동영상 올리다 하루가 다 갑니다.
코로나로 인해 유튜브를 시작한 지 2년이 안 됐지만, 구독자는 2만 명이 넘었고 매일 복음 묵상을 들으시는 분도 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가 올린 동영상 개수도 천 개가 넘어섰습니다. 열심히 달려왔고 많은 분이 사랑해주셨습니다. 지금도 구독자 수는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만약 한 본당의 사제라고 생각한다면 매일 미사 나오시는 분이 만 명인 것입니다. 그런 본당 신부가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쯤 되니까 여러 신부님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인기 유튜버가 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제가 유튜버라고 불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한 것은 ‘매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우리 자녀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매일 열심히 일하셨듯이, 목자는 양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매일 양식을 제공해야 합니다. 하지만 피정을 하고 나서는 약간 허무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피정을 유튜브 올리며 지내다니!’
물론 미리 일주일 것을 더 해놓고 다른 외딴곳으로 피정하러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은 일이라 피정을 놓쳐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휴가를 내서라도 다른 곳에서 다시 피정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며 오늘 복음을 보니 ‘양 떼가 진정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때는 목자가 쉬는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자가 쉬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묵상을 하루도 안 빠지고 올린 것은 양들을 굶기지 않으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며칠 올리지 않으면 꾸준히 들으시는 분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양들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주님께 맡기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가르치시려고 하는데, 사도들이 “아녜요, 제가 모은 양 떼는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양들이 네 거니?”
전에 어떤 목사님이 10년 동안 열심히 목회하였는데 신도 수가 늘지 않아서, 목사직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분은 “예수님,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실패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는 “제가 실패한 겁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만약 성공했으면, 네가 성공한 거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강론에서는 자녀들을 주님께 맡기라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쉴 시간도 없이 양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성공을 위한 목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월요일에는 묵상을 쉬고 휴가나 피정을 하러 갈 때도 쉴까 생각합니다. 또 7년이 되면 1년은 묵상을 쉬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 2년 정도 했으니 저도 안식년을 하면서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쉬는 시간이 저의 욕심을 내려놓고 양들을 주님께 봉헌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는 어떤 분들이 ‘이제 좀 게을러지려고 하시나 보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분들도 제가 좀 그렇게 쉬기를 바라셨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신자분들은 언제나 착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튜브에서 한 성공했다는 사람이 나와서 사람의 성실함은 성공의 25%밖에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게 더 중요하고, 장기적인 플랜도 중요하며,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을 쏟는 것도 중요하고, 하루 계획한 것을 제대로 마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책을 쓴 하완 작가는 40살이 될 때까지 성실함을 최선으로 여기며 살아오다가, 불현듯 회사를 나와 진정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자 한 사람입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며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벌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쩜 참으로 우리에겐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하완 작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간신히 대학에 들어갔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를 빼먹으면서까지 강사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 간신히 직장에 취직했지만 그렇게 앞만 보며 달리는 자신의 인생이 진정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사표를 던졌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그냥 또 쉬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고 한 것이 오히려 더 성공하게 된 경우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열심히만 살지 말고 쉬엄쉬엄 가라고 말해줍니다.
좋은데 뭔가 불편합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게 우리 대부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책에 실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조난 당한 한 남자가 튜브를 잡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똑같이 조난 당한 한 여자가 튜브를 붙잡고 헤엄쳐 옵니다. 그들은 나란히 바다 위에 떠서 둥둥 떠 있는 맥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눕니다.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다음 날 여자는 어딘가 있을 섬을 찾아 헤엄쳐 갔습니다. 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 계속 맥주를 마십니다. 여자는 이틀 낮, 이틀 밤을 헤엄쳐 어딘가의 섬에 도착합니다. 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 술에 취한 채 구조대에 의해 구조됩니다.
몇 년 후 이 둘은 고지대에 있는 어느 작은 술집에서 마주치게 되는데 여자는 굉장히 혼란스러워합니다. 자신은 팔이 빠지라 헤엄쳐서 살았는데, 이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살아있다니! 여자는 헤엄치며 남자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살았습니다.
이게 무슨 소릴까요? 노력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노력 하나 안 하나 비슷한 상황에서는 안 하는 것도 괜찮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말하면 여자보다 남자가 하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자가 섬을 찾은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행운이고, 남자가 구조대를 만난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행운입니다. 아마 속도보다 방향을 확인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제는 고기를 먹어서 고기가 어금니 쪽에 끼었습니다. 이쑤시개를 찾을 수도 없고 치실로 빼보려 했으나 너무 어금니 쪽이라 치실을 끼우기도 어려웠습니다. 칫솔로 닦아보려 했으나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피까지 나왔습니다. 좀 불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손톱으로 긁어서 빼낼 수 있을 정도로 그 찌꺼기가 옆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잇몸이 부어서 그 찌꺼기를 치아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할 일 중에 하던 일을 멈추고 쉬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런 시간을 주문하였습니다. 외딴곳에서 쉬라는 말씀은 안식일, 피정, 안식년과 같은 휴식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때 오히려 내가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예수님께서 직접 신자분들에게 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의 욕심을 내려놓는 좋은 시간이기도 하고 더 좋은 다른 것들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이며 주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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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0-34 :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사도들의 수고와 배우는 사람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을 말한다. 사제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이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성당에 와서 성체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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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과테말라에서 온 후배에게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이 코로나19에 걸려서 격리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식사를 준비해 주던 자매님에게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이 ‘가족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그러다가 코로나에 감염되면 가족들도 어려워지니 오지 말라고 거듭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은 매일 아침 비타민 C가 듬뿍 담기 과일 주스를 사제관 앞에 갖다 놓았고, 신부님은 그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부모님께서 기도해 주셨고, 본당 신부님께서도 신자들에게 이야기하여 기도 해 주었고,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성금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이야기를 하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친구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3가지를 물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진실한지 물어보았습니다. 친구는 진실은 모르겠고, 자신도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선한 이야기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친구는 선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유익한 이야기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친구는 유익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한 이야기도 아니고, 선한 이야기도 아니고, 공동체에 유익한 이야기도 아니라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필요 없는 말을 많이 전했습니다. 분란을 일으키는 말도 하였고,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기도 하였고, 걱정거리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곧 대통령 선가가 있습니다. 후보들은 공약, 정책을 발표하고, 토론을 하게 됩니다. 말 때문에 지지율이 올라가기도 하고, 말 때문에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합니다. 진실한 말, 선한 말,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후보를 식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솔로몬의 따뜻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건강과 재물을 청하지 않았으나,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건강과 재물의 축복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용기와 인내를 청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의 꽃들에게 솔로몬이 입던 옷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진실한 것이라면, 내가 청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면, 내가 청하는 것이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아가타 축일입니다. ‘아가타’라는 이름의 뜻은 ‘착하다. 선하다.’라고 합니다. 착하고 선한 아가타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다가 천국의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 신앙의 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때로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상처를 줍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하고, 평가할 때는 정말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처벌하고 심판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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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수요일에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15년 전에 저는 파주시 적성 성당에 있었습니다. 저는 기억을 못하는데 저를 찾아온 자매님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시 적성에는 군부대가 많았습니다. 아들을 군에 보낸 자매님은 아들을 면회하고 성당에 들려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아들 걱정에 눈물을 흘리는 자매님을 보고, 제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매님 울지 마세요. 저도 군 생활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잘 지켜 주실 겁니다.’
당시에는 면회를 오신 가족들이 성당에 오셔서 기도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뒤로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자매님의 아들은 군 생활을 잘 마쳤고, 지금은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평화방송에서 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작정 명동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 저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서품식 준비 때문에 저도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은 우연히 저와 함께 일하는 동창 신부님을 만났고, 동창 신부님은 저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자매님을 만나면서 한 가지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따뜻하게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모든 것을 저의 판단과 저의 뜻대로 일을 하는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많아도, 많은 일을 하였어도 넘어지는 것은 자신의 뜻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부족해도, 많은 일을 하지 않았어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채워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고 합니다. 일은 사람이 도모하지만 하늘의 뜻이 있어야만 성사된다고 합니다. 15년 만에 만난 자매님이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사람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한쪽은 감정과 예술을 담당하고, 다른 한 쪽은 논리와 이성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가 균형을 이루어 발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너무 감정적이어서 앞뒤 계산을 못하면 큰일을 도모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너무 계산적이어서 늘 현재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가 힘들어 진다고 합니다. 적당한 감성과 앞과 뒤를 분별하는 이성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좌뇌와 우뇌의 발달은 공부만 해서는 발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좋은 습관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만의 소유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고,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물려주었듯이 우리들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에서는 이와 같은 전인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르치지만 그것이 삶속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와 가정에서도 올바른 가치 형성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오늘 하느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이 올바른 분별력을 청하자 칭찬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솔로몬은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재물과, 명성을 찾지 않고,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솔로몬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이 돈과 명예와 권력보다 더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된 지혜의 길을 선택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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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만약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바라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하나만 선택해야 하니 심사숙고해야 하겠지요. 먹고 살 걱정에서 좀 자유로웠으면 하는 마음에 풍족한 재산을 청하겠다는 사람이 아마 가장 많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를, 자기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를, 좋은 반려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아프지 않고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기를 청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원들 대부분은 현세에서 누리는 안락이나 행복에 한정된 것들입니다. 죽음 뒤에도 지속될 것들은 아니지요. 그러나 영원한 삶을 희망하는 신앙인이라면 좀 더 값진 것을 선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청하면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사실 성경에서 전반적으로 말하는 ‘지혜’는 인간적 현명함의 차원을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지혜이며 그분께서 지니신 속성이기 때문입니다.(지혜 7,22-27 참조) 지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구원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이를 직접 드러내고 가르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지혜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몰려든 많은 군중을 가엾게 여기시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날마다 당신 말씀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성장시키십니다. 사실 생명의 말씀 속에 이미 구원에 필요한 지혜와 영적 자양분이 모두 담겨 있기에, 우리는 다만 그 안에 항구히 머무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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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신종호 베네딕도 신부님]
<측은한 마음>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겨울철 감기 들지 않도록 조심들 하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지난 주에 겨울 신앙학교를 연합해서 했습니다. Lectio Divina(거룩한 독서)를 통해서 했습니다.
잘 될까? 아이들이 잘 따라올까? 하고 걱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성령께 의탁하기로 하였습니다. 성공적이었다, 아니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였다에 관해서는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할 하느님의 영역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믿고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도구가 되면 충분하지 않겠냐라고 생각하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좋은 시간들이 되었고 참 새롭고 신선한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천성이 내향적인 저로선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끼여 있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쉴만하면 다른 누군가가 찾아오는 일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같으면 “이 웬수 덩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도 무척 바쁘셨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으니까요. 파견되어 돌아온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왔습니다.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것들을 모두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제 좀 조용한 곳으로 가서 쉬고 좀 먹자’고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찾아 떠나십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의 행적을 보았고 각 마을에서 나와서 어떤 이는 뛰고 어떤 이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 달려가 먼저 당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자 그 많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식사하실 겨를 조차 없어서 몹시 시장하셨을텐데… 그리고 좀 쉬고 싶으실만큼 몹시 지치셨을텐데… 이 군중들을 보고 측은히 여기시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측은한 마음, 여러분들도 느껴보신 적이 많으시지요? 짠~하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파르르 떨려오면서 슬퍼지는 마음 말입니다. 온 몸이 저미는 마음 말입니다.
이 측은한 마음은 오장육부가 다 끊어질 듯한 그런 마음입니다. 얼마나, 참으로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측은한 마음이 다 드실까요?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게 바로 하느님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가르침에 의해 사람들은 모입니다. 말씀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예수님의 몸이신, 만지기만 해도 구원받고 낫게 되는 몸이신 그 빵이 공동체를 먹여 살립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떠십니까? 우리 인간에 대해 이런 한없는 사랑을 지니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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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의 소임을 맡으면서 개인적으로 중점을 두는 사항이 있습니다.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더 나아가 사목적으로도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바로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시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시키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공동체성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공동체성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 줍니다. 복음 선포의 일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였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제자들보다도 먼저 그곳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휴식할 시간을 달라고 군중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배 속’,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가엾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자신의 속이 뒤틀릴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보다도 가시에 찔린 자기 손톱에 신경이 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의 공동체성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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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킵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1열왕 22,17). 목자의 주요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고,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고(탈출 16장), 엘리사는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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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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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코6,34)
<무엇을 청할까?>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인 '측은지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그 내어줌의 완전한 결정체가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오늘은 '간호사들의 수호 성녀'이시고, '평생동정과 순교의 두 영광의 월계관'을 받으신 '성녀 아가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선하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아가타'는 오늘 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처럼, 마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즐겁고 자랑스럽게 감옥에 갔으며, 자기 고통을 기도로써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지방 관리의 청혼을 거절하고, 그 거절의 댓가로 찾아온 큰 고통, 곧 사창가로 보내지고, 석탄불에 태워져 죽는 큰 고통을 아가타는 달게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시어, '이제와 영원히 사는 길'을 보여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던 아가타의 큰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있는 가엾은 마음이신 예수님께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한 것만 청하지 말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믿음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1열왕3,4-13)는 솔로몬의 멋진 청원을 전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는 하느님의 물음에 솔로몬은 자신을 위한 장수나 부나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 않고, 백성들을 잘 이끌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청합니다. 그리고 청하지 않은 부와 명예까지도 받습니다.
나도 그렇게 청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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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사람입니다>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내게 오니
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내가 가니
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내가 맞이하니
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를 맞이하니
나는 사람입니다
사람과
내가 함께하니
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와 함께하니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람이니
나는 사람이고 싶고
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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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889년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연금제를 시행했습니다. 연금제는 일정 기간 기금을 내면 은퇴 후에 받는 것입니다. 이 연금제를 시행하기 전, 그는 통계학자에게 다음과 같은 자문을 구했습니다.
“정년을 몇 살로 하면 국가의 부담이 없겠습니까?”
“65세입니다.”
당시 대부분이 이 나이가 되기 전에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연금은 매달 냈지만, 나중에 연금을 받아 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나이가 바로 65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65세 전에 사망하는 것이 아닌, 20~30년 이상을 더 산다면 연금제는 밑 빠진 물 붓기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연금의 문제도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정년 나이를 늘리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젊은이들의 자리가 줄어든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할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자리는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함께 살기 위해 새로운 시선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함께 잘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외딴곳을 찾아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의미심장한 일을 하시기 전에 늘 이처럼 고요한 장소를 찾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우리는 빵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외딴곳에서 우리 교회 생활에서 말하는 일종의 피정을 하러 가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수정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딴곳에서 머무르는 것을 멈추고, 군중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일정을 바꾸셨습니다. 어떤 원리원칙도 사랑의 기준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혹시 원리원칙만을 내세우면서 가장 큰 사랑의 기준은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님의 일정을 바꾸게 했던 군중의 노력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시는 것을 보고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간절한 마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함께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시선으로 나의 이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원리원칙을 내세워 그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 사랑의 시선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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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딴곳을 찾아라>
사람은 때때로 편히 쉬고 싶어 합니다. 지금 하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일상에 외딴곳을 만들어 삶의 질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 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강의는 교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교육은 삶의 현장에서 일생 계속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고(루가 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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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영성>
-자비와 지혜-
“입춘대길立春大吉”
늦게서야 자매가 보내준 카톡 메시지를 보고 어제가 입춘임을 알고 반가웠습니다.
“아, 오늘이 입춘이었네요! 입춘 소식 주신 자매님이 입춘이네요! 입춘처럼 사세요!”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위 속에서도 훈훈한 봄처럼 사는 입춘의 사람, 파스카의 사람이 성인입니다.
누구나의 소명이 참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참나가,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누구나의 궁극의 평생 목표이자 평생 공부입니다. 이런 원대한 꿈은, 청정욕은 언제나 좋습니다. 무죄합니다.
오늘은 3세기 초엽, 살다가 로마 황제 데케우스 박해 기간에 순교한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카타니아 출신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루치아, 아녜스, 체칠리아와 더불어 네 동정녀 순교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선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가테agate’에서 유래합니다. 참으로 온전히 주님 사랑에 헌신함으로 짧은 나이에 참나를 살았던 성녀입니다. 성무일도시 전설적 내용의 즈카르야 후렴과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은혜롭습니다.
“아가타는 마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즐겁고 자랑스럽게 감옥에 갔으며, 자기 고통을 기도로 주님께 봉헌하였도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여, 당신은 내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여, 내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그대로 성녀의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이 감지되는 고백입니다. 성인성녀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영원한 롤모델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우리의 영원하신 착한 목자 주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착한 목자의 영성-자비와 지혜-”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자비하신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한 제자들의 보고를 들은 후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배려에서 자비심이 잘 드러납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쉬어라.”
일과 쉼, 활동과 관상은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몰았다가 한꺼번의 쉼이 아니라 날마나 일정시간 나만의 외딴곳에서 주님안에서 쉬는 관상적 휴식이 절대적입니다. 20세기의 영성 대가, 토마스 머튼은 활동주의를 현대판 이단이라 못박았고, 고독은 현대인들에게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갈파했습니다. 참으로 활동과 관상의 리듬에 충실한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러니 모든 판단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사랑에서 분별의 지혜도 나옵니다. 그러니 자비와 지혜는 둘이 아닙니다.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자비로운 이가 지혜롭고 지혜로운 이가 자비롭습니다. 이점은 불교와 일치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우리 예수님이, 불가의 부처님이 바로 그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착한 목자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외딴곳에 제자들과 함께 휴식차 왔을 때 미리 도착한 영육으로 지치고 굶주린 민초民草들의 군중을 보신후 예수님의 즉각적 반응이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 사랑입니다. 참으로 이런 연민과 자비의 사랑이 있어 비로소 주님을 닮은 참사람의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에 앞서 영혼의 양식인 진리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입니다.
참으로 말씀 공부와 실천이 얼마나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데 본질적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불교의 혜암 대선사는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는 평생 화두같은 말씀을 주셨다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흡사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의 미사 구조를 연상케 합니다. 수도원의 일과표도 상징하는 바 일맥상통합니다. 아침미사후 아침식사, 낮기도후 점심식사, 저녁기도후 저녁식사가 배치되어 있어 영혼의 양식인 기도와 하느님 말씀이 우선되고 있음을 봅니다.
자비와 한 쌍을 이루는 지혜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의 선택이 참 지혜롭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다음 솔로몬의 답변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하느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무엇이라 답변하겠습니다.
솔로몬이 하느님께 아뢰는 말씀이 진정성이 가득해 보입니다. 부왕인 다윗에게 큰 자애를 베푸신 하느님께 감사드린후 다윗의 뒤를 잇게 된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깨달은 솔로몬이 결정적 소원을 아룁니다.
“당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수 있게 해주십시오.”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에 이어 분별력의 지혜를 청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솔로몬입니다. 경청과 분별력의 지혜가 하나로 직결됨에 주목해야 합니다. 정말 귀기울여 잘 들을 때 지혜로운 분별임을 깨닫습니다. 솔로몬의 대답에 만족하신 하느님의 답변입니다.
“네가 자신을 위하여 장수를, 부를,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 않고,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지혜를 청하므로 부와 명예등 부수적인 것들 까지 선물로 받은 솔로몬입니다. 한가지 부와 명예는 선물하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합니다. 부와 명예 앞에는 지혜도 빛을 잃을 가능성이 농후하겠으며 사실 솔로몬은 그렇게 됐습니다. 사람을 부패하게 하는 탐욕이요, 교만하게 하는 명예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탓이 아니라 솔로몬 자신의 탓입니다. 그가 참으로 하느님만을 사랑하여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깨어 자비와 지혜의 착한 목자 임금으로 시종여일 최선을 다했다면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점은 회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단한 회개의 효소가 있어야 발효인생이지 회개를 결할 때 십중팔구 부패인생이 될것이며 솔로몬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참 엄중합니다. 과연 착한 목자 예수님처럼, 자비와 지혜의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닮아갈 때, 즉 예닮의 여정,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자비와 지혜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를 자비와 지혜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제 길을 깨끗이 가리이까? 오로지 당신 말씀 지키는 것이옵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찾나이다.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저에게 당신 규범 가르치소서.”(시편119;9.10.12 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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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어젯밤 꿈에
주님께서는 솔로몬에게처럼
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물으셨지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갑작스럽고도 황공하온 물음에
우물쭈물 제대로 답을 못드리고
뒤척이다가 잠을 깼습니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주십사
겸손되이 청하네요.
하긴 먹고사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는
그런 신분이기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이
유일한 과제였을지 모르지요.
아무리 먹고살만 해도
더많은 부귀와 영화와 장수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
솔로몬의 '경청'하려는 마음은
참으로 돋보이는 지도자 자질이네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참 목자의 자질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시네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일을 시키고나서
돌아오자 수고했다고 위로해주며
'가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라'
배려하는 마음!
솔로몬의 '듣는 마음'보다
더 따뜻하네요.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대선을 앞두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들과
저 같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솔로몬의 듣는 마음과
예수님의 배려하는 마음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기념하는 아가다 성녀처럼
옳음의 신념과 착한 마음도
곁들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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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C5B6or0a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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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게 되는
은총의 외딴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휴식이라는
은총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신다.
건강한 삶의
방식을
잃어버린
우리들이다.
건강한 삶의
방식은
주님과
함께하는
일과 휴식의
여정이다.
휴식이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쉬어야
더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된다.
건강한 삶의
방식은
조화와
균형이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휴식도
포함된다.
주님 안에서
쉬고
어울리는 법을
다시 배우는
휴식의
주님이시다.
삶에 소중한
것은 건강한
삶이다.
건강은
휴식을
동반한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다시 만나게
되는 휴식의
시간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멀리있지 않다.
쉬어주는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의 기쁨이다.
쉬어주는
외딴 곳에서
만나게 되는
하느님 나라이다.
지쳐있다면
모든 것
내려놓고
외딴곳에
가셔서
좀 쉬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이 행복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께 다시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외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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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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