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신앙고백서 4.성경-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 시편 잠언 아가
the first book of Ezra;
에스라 제1권;
귀도 드 브레가 에스라 제 1권이라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에스라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기록물이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성경에 포함된 에스라서만 인정을 받게 된 이유로는 다른 기록물들은 많은 부분이 에스라서와 공통된다거나 신앙과 무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또는 지나치게 세세한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 아닐까 싶다. 에스라서의 저자는 말그대로 에스라인데, 그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 시대의 느헤미야와 동시대 인물이고 무려 이스라엘의 첫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16대손 레위인 학사였다. 에스라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에스라가 여호와 그리스도의 율법과 계명을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다인들에게 가르치는데 힘쓰고 유다인들은 배우기에 힘썼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는 성경을 열심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에스라를 통한 유다 백성들의 신앙의 회복은 그들 자체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속국으로 삼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이방 군주의 호의와 배려로써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는 교회와 성도가 이 땅에서 지배하고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세속의 도움과 배려와 호의를 받아 신앙을 보존하는 나그네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우리의 심령을 겸비하게 한다.
Nehemiah, Esther, Job;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느헤미야는 학사 에스라와 동시대 인물로서 함께 유다 백성의 재건과 회복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학사 에스라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율법을 가르침으로써 백성의 신앙을 회복시켰다면, 느헤미야는 백성의 총독으로서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선조들에게 언약을 따라 지정해주신 예루살렘 지경을 따라 성벽을 재건함으로써 백성을 굳건하게 하였다. 즉 에스라는 영적인 회복을, 느헤미야는 육적인 회복을 담당하였다. 우리가 느헤미야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아닥사스다의 총애를 받아 가장 최측근의 술관원장이 된 것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신 순적한 기도응답이나 복으로 여기는 것인데, 원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멀어져서 예루살렘 변방으로 발령받기를 원하였으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소원과는 정반대로 역사하셔서 도리어 왕의 술관원장이 되도록 인도하셨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은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의 소망을 가지면서도 주님께서 우리가 소원하는대로가 아닌 정반대로 섭리하신다 하더라도 불평이나 원망이나 불신을 가져서는 안되고 잠잠히 묵묵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아울러 교회는 신자들의 내적인 신앙을 돌보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이 한데 모여 예배 등의 신앙활동을 할 수 있는 건물이나 시설 등의 외형적인 요소들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에스더서의 기록자는 불분명하나 여호와라는 호칭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배경이 되는 바사 왕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시대의 왕실 상황을 비롯하여 유대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와 유대인의 대적 하만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의 정황을 세세히 알고 있다는 것으로 봤을 때, 아마도 왕후 에스더를 가까이서 섬기는 내시인 하닥이 가장 유력해보인다. 에스더의 내시 하닥은 처음에는 여호와 그리스도라는 유대인들의 신을 믿지 않았다가 에스더를 왕후로 섬기고 여러 시중을 들게 되면서 에스더의 성품과 모르드개의 성품과 그들을 통해 유대인들이 죽다 살아나게 된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여호와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믿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것 자체에 세속적인 의미와 가치를 크게 부여하는 것이다. 즉 에스더가 유대민족의 안위를 위해 왕후의 지위를 어떻게 여겼는지를 보기보다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왕후가 된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선조들에게 주신 율법과 계명에 따르면 이스라엘 여인이 할례받지 않은 가증한 우상숭배자이자 이방 족속의 남자에게 혼인도 하기 전에 처녀성을 침범 당하고 그의 아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수치이자 모욕인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따라서 에스더서를 통해서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 중에 혹여나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는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성경과 성령의 원리에 따른 복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자리임에도 자신의 의지와 소망과는 상관없이 얻게 된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욥기는 욥이 어떠한 사람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와 천상에서 벌어지는 여호와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화 내용과 욥이 세 친구와 더불어 논쟁한 내용들과 욥의 말년과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으므로, 기록자는 아마도 마지막에 욥을 책망했던 엘리후가 가장 유력해 보인다. 욥과 그의 세 친구는 거주 지역으로 미루어볼 때 에돔 족속 즉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예들이고, 욥의 나이가 140세 또는 2백여 세 인 것으로 봤을 때 시대 배경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지내던 430년 기간 중 어느 때일 것으로 추정된다. 욥기는 특별히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바울 사도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자처하는 성도들의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삶을 기록한 히브리서 11장과 더불어 읽으면 유익하다.
the Psalms of David;
다윗의 시편;
시편은 다윗 뿐만 아니라 모세를 비롯한 여러 구약성도들의 시가 포함되어 있으나, 주로 다윗의 시가 편성되어 있으므로 다윗의 시편이라 불리운다. 시편은 다윗을 비롯한 기록자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체험한 여호와 그리스도를 시와 노래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이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은 신앙의 지식적인 요소에만 머무르거나 만족해서는 안되고 그 지식에 기반해서 각자의 삶에서 체험함으로써 주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시편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처럼 교회의 예배 찬송은 오로지 반드시 시편만으로 해야 한다거나, 찬송의 내용보다는 음악적인 요소만을 지나치게 중요시 한다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편이 물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편성되어있다 하더라도 구약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신약의 복음에서만큼 풍성하고 완성된 진리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신구약 성경이 모두 주어졌으므로 내용도 그만큼 폭넓고 깊이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오로지 시편만을 찬송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표방한 율법주의에 다름아니다. 한편 시편은 분명 음악적인 요소가 있지만서도 그것은 주님께 드리는 찬송을 좀 더 의미있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것이지 그것이 찬송의 내용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 찬송의 음악적인 요소는 가급적 많은 회중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평이하고 서정적인 음율과 곡조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극히 소수의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 구사할 수 있는 어려운 기교를 부린다거나,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그저 감정에만 치우치게 한다거나, 귀를 시끄럽게 하고 정신을 산란시키는 곡조를 붙이는 것은 찬양이 아니라 찬양을 빙자한 음악놀이들일 뿐이다.
the three books of Solomon-- Proverbs, Ecclesiastes, and the Song;
솔로몬의 세 권의 성경인 잠언, 전도서, 아가;
솔로몬의 잠언에는 초반에 솔로몬 자신의 지혜가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신앙생활과 관련있는 내용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세상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삶의 지혜가 수록되어 있다. 심지어 잠언의 어떤 조언은 이렇게 행하는 것이 과연 성도로서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하는 것들도 종종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수긍할만한 내용들을 굳이 여호와 그리스도의 지혜자인 솔로몬이 잠언으로 남긴 이유는, 신자들이 신앙을 이유로 비상식적이고 무지한 행위와 선택을 합리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교회와 성도들은 성경과 성령의 원리를 명백히 거스르는 세상 풍속은 손해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거부하고 반대해야 하겠지만, 주님께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베푸신 일반은총들과 일반섭리들과 가치중립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신앙의 프레임을 씌워 비약함으로써 스스로 불필요한 고난을 자초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품부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이러한 통상적인 삶의 지혜들을 알고 실천함을 통해서 하나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잠언의 내용에만 집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의 전도서는 크게 보면 잠언의 확장이라 할 수 있지만, 주로 우울함과 한탄과 탄식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구분지은 것으로 보인다. 전도서의 주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무의미하고 헛되다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크고 웅장하고 재정이 넘치고 영향력이 크다 하더라도, 신자가 아무리 많은 재능과 은사를 받고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성경과 성령의 원리를 따른 것이 아니라면 성령의 불시험에 전부 지푸라기처럼 불살라버리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와 신자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처지와 상황 가운데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응당 마땅히 받아야 할 애매한 고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의 전도서는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의 예배를 드리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솔로몬의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사랑 관계를 통해서 주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상징하는 성경이라 통상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주님의 율법과 계명에 비춰서 아가서를 살펴본다면, 아가서는 교회와 신자들이 신앙을 빌미로 얼마나 자기들의 죄악들을 합리화하며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로 교회와 신자들이 여전히 죄악된 본성으로 끊어내지 못하는 육체의 소욕과 열매들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이라고 볼 수가 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사랑을 나누던 때에는 이미 그에게는 백 명의 아내들이 있었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유부남인줄 알면서도 솔로몬과 애정행각을 벌인 것이기 때문에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서로 간음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