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용산역이다. 1박 2일의 탐매여행이 끝났다. 나에게 탐매여행은 무엇이었는가. 옛날 선비들은 탐매여행을 끝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2년전의 탐매여행이 끝나고 난 바로 이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옆에 아내가 있다. 그래, 그땐 아내가 함께하지 못했지, 그러고보니 그때 “다음에 아내와 함께 동행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또 그때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여행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지, 그럼 그때 그 바람이 2년만에 실현된 것인가. 용산역에서 파이팅을 외치며 탐매여행 일정을 마치고 지하철로 서울역으로 이동한 다음 거기서 다시 하남시로 향하는 좌석버스에 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하남시다. 세상만사 일장춘몽이라더니 지난 1박2일의 탐매여행도 춘몽에 불과했는가.
2년만에 다시 탐매여행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난 2004년의 첫 번째 탐매여행이 너무나 좋아서 그때 그 감동을 나 혼자 간직하기엔 너무나 아까워서랄까. 우선 2년전의 다짐대로 가족 동반을 못박고, 아내부터 함께할 것을 설득했다. 그동안 기회만 되면 여기저기서 매화 보러간 것을 자랑해서 그런지 순순히 동참에 응했다. 다음은 당시엔 3명만 갔지만 이번에 최대한 많이 가보자는 측면에서 우정 서실 회원들의 동참을 권했다. 그 결과 나를 포함 탐매여행에 참여하기로 한 사람은 모두 10명. 그러나 두 명은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 결국 8명이 탐매여행길에 올랐다. 즉 우정 정응균선생님, 죽정 권용태 선배님 내외분, 늘빛 박동희님, 동소 김옥희님, 산민 박인수님, 그리고 우리 부부 등 모두 8명이다.
3월 25일 08시 50분, 용산역을 출발해 순천역에 도착한 다음 송광사를 거쳐 조계산을 등산, 선암사에 도착하여 일박하고, 이튿날인 26일 선암사 매화 감상에 이어 구례 화엄사 홍매화 감상을 마지막으로 귀경하는 일정이었다.
서둘러 용산역에 도착하니 8시 15분경쯤 됐을까. 조금 이른 듯 했으나 택시를 타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30분까지 만나기로 한 만큼 그 전에 술이며, 술안주를 사기위해 역앞을 둘러보는데 편의점과 머리고기를 파는 가게가 눈에 띈다. 아내에게 머리고기를 주문하도록 부탁하고 나는 편의점에 들러 술을 샀다. 그런데 술을 사서 역으로 향하는데 이번 여행의 최대 불행이라면 불행이 내게 닥쳤다. 오른쪽 장딴지가 갑자기 무언가에 맞은듯 하더니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왔다. 옆의 아내가 걱정을 했으나 갑작스런 근육통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일행을 만나 순천행 열차를 탔다. “오늘 여행 일정에 등산이 있는데…”하며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이내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에 빠졌다.
차창가에 비치는 계절은 기차길 옆 언뜻언뜻 피어있는 개나리가 없으면 봄이 봄인줄 모르는, 그야말로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봄은 왔는데 봄같지 않은)의 날씨다. 그러나 賞春(상춘)에 들떠있는 우리는 실낱같은 봄기운에도 봄 소풍 가는 아이들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하나같이 웃는 모습들, 그 모습 하나하나가 꽃이다. 하하호호 웃음 소리는 그 꽃들이 품어내는 향기라고 해야할까. 만약 세상에 정말 꽃비가 내린다면 그 향기는 온 천지에 가득한 웃음 소리로 그 존재를 드러낼 것이며, 웃음소리 퍼지듯 그렇게 퍼질 것이다. 저렇듯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매화를 만나면 또 어떤 모습일까. 저렇듯 꾸밈없는 웃음 소리가 매화 향기를 만나면 또 어떤 울림이 될까. 순천행 무궁화호 열차는 그렇게 우리의 기대감을 싣고 역사 하나 하나를 지워나가기를 몇 정거장인가. 어느새 서대전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 나온다.
이쯤되면, 입이 궁금해진다. 마냥 좋아 떠들었으니 출출함에 소주 한 잔 생각날 때도 됐다. 죽정 선배가 준비해온 골뱅이 무침을 꺼내 놓자, 대낮인데도 입안의 침이 먼저 소주 맛을 아는 채 한다.
술잔이 도는 사이, 산민은 구운 계란을 꺼내놓고, 동소는 김밥을 꺼내놓고, 늘빛은 과일을 꺼내 놓으니 내가 준비해간 머리고기는 꺼내놓을 틈도 없었다. 여행중에 먹는 즐거움, 이 또한 무엇에 비기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예산을 넉넉하게 확보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우리 일행중 누구라도 여행중의 이 먹는 즐거움을 맛보지 못할까봐 적잖이 걱정했는데 이렇게 각자 준비한 것을 내놓으니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위안은 되었다.
<버스 안에서>
13시 59분, 예상보다 1분 늦게 순천역에 도착했다. 순천역사를 나서니 마침 지인이 우리가 여행지를 이동하면서 탈 승합차와 함께 우리 일행을 맞았다. 순천역에서 송광사까지 가는 시간이 우리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이렇게 승합차를 준비하지 않고 대중 교통 수단인 버스를 이용했다면 우리 일정이 큰 차질을 빚을 뻔 했다.
어쨌든 승합차로 송광사에 도착하니 거의 오후 3시 30분에 가까웠다. 예상 일정보다 30분 늦어진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다리의 통증이 그때까지 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서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걸음을 떼면 통증이 오니 “이걸 어떻게 하나” 걱정하며 일단 송광사 경내에 가서 매화를 본 후에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가는 조계산 등산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는 승보사찰(僧寶寺刹)로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로 불리는 통도사,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불리는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는 연유가 두 가지 있으니 첫째가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고려 때 보조 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장(根本道場)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열여섯명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 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경내의 풍광 또한 더욱 빼어난 것 같다. 오늘처럼 이렇게 일정에 쫓기지 않고 찬찬히 살피며 산사의 체험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픈 다리를 절뚝절뚝 한 발짝 한 발짝 옮겨 놓는데, 아뿔사 이일을 어쩌나!
저만치 대웅전이 보이고 그 앞뜰에 매화나무가 보이는데, 꽃이 보이지 않는다. 만개 하려면 적어도 1주일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저러나 여기서 매화가 피지 않았다면 선암사 매화도 마찬가지일터, 여기 오기까지 적지 않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을 텐데 활짝 핀 매화 꽃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다리 아픈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절로 힘이 빠졌다. 나는 조계산 등산을 포기하고 나머지 일행은 원래 계획대로 조계산을 등산토록 했다. 등산 시작이 오후 4시였으니 3시간여의 산행 시간을 감안하면 어두운 하산길이 걱정됐으나 내가 그런 걱정할 처지가 못 되는 같아 혼자 실소를 지으며,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가기 위한 버스를 탔다.
여느 때면 여행 중 시골버스 타는 재미도 쏠쏠하겠건만, 다리가 아파 산행을 못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내가 쓸쓸하기 짝이 없다. 일행에서 떨어져 있다는 이 느낌, 인생의 낙오자가 바로 이런 걸까. 내 의지대로 무언가 하고 싶어도 육신이 따라주지 않아 못하는데 따른 절망감이 이런 것일까. 일행들이 걸어갈 저 멀리 조계산 산자락으로 자꾸 눈이 간다. 우리 일행들은 저산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버스는 이리돌고 저리돌아 이제 어느 쪽이 조계산인지도 알 수가 없다. 오늘 아침 갑자기 다리 통증이 온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순간적으로 작은 돌멩이 같은 무엇에 맞은 듯 했지만 그런것이 없었으니 분명 외부적인 어떤 힘에 의한 것은 아닐테고…. 문득 조계산이 나를 산에 오르지 못하게 어떤 계시를 내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그래, 내가 산행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일행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조계산 등산의 즐거움이야 다음 기회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러나 산행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외톨이가 된 내 입장을 스스로 위안하며 쌍암이란 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선암사에 도착했다. 어둠이 내렸다. 일행이 아직 산에서 내려올 시간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자꾸 조바심이 난다.
<매향에 취해>
일행을 다시 만난 것은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였다. 모두가 한 눈에 들어오니 늦었기는 하지만 다행이었고, 얼굴 표정은 큰일을 해낸 듯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송광사에서 활짝 핀 매화를 보지 못한 아쉬움, 선암사에서도 그럴 것이라는 걱정이 다소 풀렸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기우였음은 곧이어 펼쳐진 만찬 자리에서 확인됐다.
만찬 메뉴는 예산 때문에 1인당 1만 원 씩 하는 산채정식은 그만두고, 버섯전골로 주문했다. 하지만 그 음식에 딸려오는 각종 진귀하고도 맛깔스런 반찬은 우리 일행들을 흐뭇하게 했다. 이윽고 소주로 건배를 하는데,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면 하이라이트가 연출됐다. 소주가 따러진 잔속에 매화 꽃잎을 띄웠던 것이다. 소주를 마시기 위해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매화 향이 코를 살짝 자극한다. 아, 이 향기, 이 맛을 보기 위해 다리가 그렇게 아팠으며, 혼자 버스를 타고 오며 외톨이의 안타까운 심정에 젖었을까.
여기서 혹자는 이를 두고 감정의 과장 이라고 악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년 전 섬진강변에서도 그랬듯이 오늘 이 흥분된 감정을 좀처럼 억누를 수 없다.
술잔에 매화 꽃잎 띄워 건네는 이 술
옛 선비가 마셨던 그 술인가
지난 밤 국화 향기 다하여 서러울 제
寒雪에도 氷霜의 넋으로 핀 꽃이여!
오늘 이 술잔에 살포시 내려 앉아
그 향기 더욱 그윽하니
내 한번 그 향기에 푹 빠져 볼라요
옛 선비 흉내, 맘껏 내어 볼라요
26일 새벽, 5시 30분, 핸드폰 모닝콜 소리에 잠이 깼다. 어제 밤, 새벽 매화를 보러 가기로 했던 것이 상기된다. 동시에 어제 밤 매화 꽃잎을 띄운 술로 한껏 기분을 내느라, 한 참 잊고 있었던, 아직 제대로 피지 않은 매화를 보러가야 하는데 대한 걱정이 되살아난다. 어제 송광사에서 주은 지팡이를 짚고 선암사로 향하니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선암사에 도착하니 매화 나무 주변에는 매화 꽃을 촬영하려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인데도 꾀나 많다. 매화가 활짝 피지는 않았지만 이제 막 터트릴 찰나에 있는 매화 망울이 열 여섯 살 소녀의 젖꼭지 같다. 차마 망울에 손을 대기가 민망스럽다.
그러고 보면 활짝 핀 20~30대 아름다운 여인과는 또 다른 순수하고 터질듯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은가. 함께 한 일행들도 활짝 핀 매화에서 느끼지 못하는 또다른 감흥에 흠뻑 빠져있는 모습이다.
특히 원통각 뒤에 있는 6백년이 넘는다는 고목의 매화 나무 앞에는 선암사의 스님도 막 망울을 터트리는 매화의 아름다움에 연신 디지털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고, 때론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가지며, 6백여년 세월의 풍상에 이끼 가득한 이 매화 등걸을 화폭에 담기위해 얼마나 많은 문인화가들이 노심초사 했을까. 나도 그 대열에 감히 서 보겠다고 나서긴 했으나 왠지 나 자신이 한 없이 작게 쪼그라드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2년전 활짝 핀 매화를 봤을 때와는 분명 다른 이 감흥, 아! 부끄럽다. 2년전 매화를 보고 마치 매화를 다 본 것처럼 자랑삼아 떠벌리고 다닌 것이 부끄럽다. 그것은 내년에도, 또 그 후에도 계속 이맘때면 선암사를 방문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선암사를 나서는 발길이 2년전의 그때보다 쉽게 떨어질 수 있었던 것도 선암사 매화를 이번 한 번에 다 볼 수 없음을 깨달은 덕분이랄까. 그렇게 이번 여행을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활짝 핀 매화를 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부담도 다 털고 나니 아프던 다리도 덜 아픈 것 같다.
거기다 우리가 하룻밤을 묵었던 선암사 앞 관광장여관의 주인 이덕순 할머니(72세)는 우리 일행을 또 한 번 감동시켰다. 아침으로 차려준 산채 백반이 너무 맛있었는데다 우리 일행이 매화 꽃 향기를 찾아 여행 온 줄 알고, 당신의 딸이 거주하고 있는 산장의 버들처럼 늘어진 매화며 홍매화와 이미 저버려서 아쉽기는 했지만 황매화까지 감상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북 고창이 고향이며, 그 당시에 명문 전주여고를 졸업한 이덕순 할머니의 매화처럼 고운 자태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우리 탐매여행은 사실상 여기서 끝났다. 화엄사 홍매를 볼 수 없을 것이 확실한데다 때 마침 구례군 산동면에서 산수유 축제가 있음을 확인한 우리는 여행 일정을 즉석에서 수정하고 산동 산수유 축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너무나 많은 인파에 자칫 귀경 열차를 놓칠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구례구역 앞 섬진강변에서 행장을 풀고, 못다 먹은 머리고기와 떡에다 근처 매운탕 집에서 시킨 빙어 튀김에 소주를 마시며 마지막 소풍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리고 15시 18분발 용산행 무궁화에 오르니 차창의 풍경이 지난 1박2일 탐매여행의 추억과 어우러진다. 아내를 비롯한 동행한 일행들은 이 여행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중 나에게 탈이 난 것이 다리 아픈 것 외에도 또 하나 더 있으니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것이었다. 동행한 형들이 촬영한 사진이라도 빨리 보고 싶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강변 낙조가 아름다운 카페에서 이번 여행의 후일담이라도 나누고 싶다. <끝>
첫댓글 2년전 '탐매여행기'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번 여행기도 읽는 사람이 같이 맛을 음미하는듯한 느낌입니다. 인생을 참 낭만적으로 사십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