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39)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6장 진소양왕의 무력 정책 (3)
닷새가 지났다.
그 사이 진소양왕(秦昭襄王)은 형식적으로 목욕재계하는 시늉만 내다가 약속한 날이 되자 대전으로 인상여를 불러들였다.
"자, 나는 그대가 시키는 대로 닷새 동안 목욕재계했고 구빈(九賓)의 예도 갖추었소. 그대는 이제 화씨(和氏)의 벽(璧)을 과인에게 바치시오."
그런데 인상여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화씨(和氏)의 벽(璧)은 신에게 없습니다.“
"없다니?“
"진(秦)나라의 역대 군주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약속을 지킨 군주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왕 역시 신을 속일 마음이라는 것을 신(臣)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화씨(和氏)의 벽(璧)을 가지고 샛길로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신(臣)이 대왕을 속인 죄는 죽어 마땅하오나 이 모든 게 대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신하들과 깊이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불같이 노했다.
노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쳤다.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닷새간 목욕재계까지 했다.
그런데 너는 그 사이 화씨(和氏)의 벽(璧)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니, 이는 처음부터 나를 능멸할 생각이었음이 틀림없다."
"내 어찌 너 같은 자를 살려보내리오. 여봐라, 저놈을 당장 잡아 탕확(湯鑊)의 벌에 처하라!“
탕확이란 사람을 큰 솥에 집어넣어 삶아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우 무사들이 인상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인상여(藺相如)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신이 죽는 것이 두렵다면 어찌 화씨(和氏)의 벽(璧)을 조나라로 돌려보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고정하시고 잠시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천하가 다 알다시피 진(秦)나라는 강하고 조(趙)나라는 약합니다.
강한 진나라가 속임수를 쓰면 썼지 어찌 약한 조나라가 속임수를 쓰겠습니까?
대왕께서 진실로 화씨(和氏)의 벽(璧)을 원하신다면 그것을 얻기는 간단합니다.
먼저 유양 땅 열다섯 개의 성을 조나라에 내주십시오. 그러면 약한 조(趙)나라가 어찌 그 옥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도 꿀림이 없는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외침이었다.
대전 안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진소양왕(秦昭襄王)도 신하들도 입을 다문채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천하 호걸이다!“
진소양왕의 화산처럼 치솟던 분노는 어느새 감탄으로 변했다.
얄팍한 수단으로 화씨(和氏)의 벽(璧)을 빼앗으려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재상 위염이 그 눈치를 채고 얼른 말했다.
"저자는 교묘한 말과 행동으로 우리 진(秦)나라를 속였습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자를 죽이고 군대를 동원해 화씨(和氏)의 벽(璧)을 빼앗아 오십시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인상여의 대범한 행동과 말에 매료된 뒤였다.
"과인이 인상여를 죽인다고 해도 화씨(和氏)의 벽(璧)은 절대로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오.
공연히 진(秦)나라와 조(趙)나라의 우호 관계만 깰 뿐이니, 차라리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러고는 인상여를 예로써 대접한 후 돌아가게 했다.
이로써 인상여(藺相如)는 무사히 한단으로 돌아왔다.
- 돌아올 때는 진나라 열다섯 개 성의 지도나 화씨(和氏)의 벽(璧) 중 하나를 가져와야 한다.
라는 조혜문왕의 명을 완벽하게 수행해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인상여의 이 같은 행동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이에 대해 후대의 한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우리는 인상여(藺相如)가 왜 그처럼 강경하게 버티었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인상여는 화씨(和氏)의 벽(璧)이 아까웠던 것이 아니다.
진나라의 위력에 눌려 고분고분 화씨(和氏)의 벽(璧)을 바치고 나면,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만만히 보고 또 무슨 요구를 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오히려 화씨(和氏)의 벽(璧)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상여(藺相如)는 조나라에도 인물이 있음을 진나라에 인식시켜주려 했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다른 관점에서 인상여(藺相如)를 평하고 있다.
자신이 죽을 처지에 빠진 것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생겨난다.
이는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인상여가 화씨(和氏)의 벽(璧)을 들고 기둥을 노려보며 진왕을 꾸짖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상여(藺相如)는 그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적국에 위신을 세웠다.
그러나 선비들 중에는 죽음이 두려워 감히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상여(藺相如)의 이름이 태산보다 무거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秦)나라는 유양 땅 열다섯 개의 성(城)을 조나라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조혜문왕도 화씨(和氏)의 벽(璧)을 진소양왕에게 보내지 않았다.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해프닝 같은 사건은 인상여라는 인물만 역사의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용기'의 한 전형을 보여준 셈이다.
인상여(藺相如)는 이 공으로 귀국하여 상대부(上大夫)에 올랐다.
그런데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를 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이듬해 조혜문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회견을 청했다.
- 서하 밖 민지(澠池) 땅에서 우호를 나누고 싶소.
다분히 수상쩍은 냄새가 풍겼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은 경계심을 품고 대장군 염파 등 대신들에게 말했다.
"나는 진왕과 회견하고 싶지 않소. 공연히 갔다가 붙들릴까 두렵소."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가 서로 의논한 후 아뢰었다.
"왕께서 가지 않으시면 이는 우리 조(趙)나라가 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민지(澠池)로 나가십시오."
조혜문왕(趙惠文王)은 난감해하다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가긴 가겠소만은 인상여가 수행해야 갈 것이오."
조혜문왕과 진소양왕 사이에 민지 회담이 성사되었다.
민지(澠池)는 진나라 땅으로 황하 강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지금의 하남성 민지현 일대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