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해 동안 준비한 날개로 창공을 향해 힘차게 솟았다. 세상을 품을 듯한 날개짓은 눈이 부셨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정적만이 흘렀다. 건강하던 젊은이가 심장마비로 하룻밤 사이에 가족 곁을 떠났다. 지금까지 살던 세상과 유리된 듯 우리 가족은 무증력 상태에 갇혔다. 그에게는 종착역이고 남은 사람에게는 참담한 간이역이 되었다. 예견하지 못한 충격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얼마나 취약한지 모른다. 가족은 마치 비에 젖은 흙벽처럼 무너져 내렸다.
서른 인생의 돌연한 마침표 앞에서 이별의 방식을 찾을 수 없었다. 인생의 시계에 빗대 보자면 오전 열 시쯤에 멈춰버린 망자의 삶을 하루치를 온전히 산 것처럼 일생을 읽어낼 재간이 없다. 제대로 날아보지도 못하고 추락한 인생을 읽으려는 것은 억지다. 그는 꿈을 꾸며 학문을 하고 친구와 더불어 세상 읽는 법을 배우며 젊음을 항유하던 영혼이었다. 남은 사람들이 아는 것은 이것뿐인데 어떻게 이별을 해야 할까. 그렇다고 덮어버리는 일은 남은 자의 직무유기다. 회한만 가득한 상가는 축제 같은 장례식이 부러운 것이다.
가족의 사망은 망자에게는 종착역이요, 남겨진 사람에게는 간이역이다. 가족은 인생이란 열차에 동승한 출발지와 목적지가 다른 친밀하고 매우 특수한 관계에 있는 합승자다. 그러나 오르는 것과는 다르게 내리는 일은 순서가 없어 누구의 종착역도 알지 못한 채 여행을 한다. 때로는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간이역도 있다. 크게는 국가나 사회적 재난일 수 있고 작게는 가족의 뜻밖의 사고일 때도 있지만 혈연관계일 때는 심각한 상처로 남게 된다. 상처가 주는 고통이 클수록 망자를 위로하는 구실을 찾기 마련이다. 그것은 가족의 슬픔이 망자의 이승에 대한 미련이나 회한과 비례한다고 여기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