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의 사상.
소태산은 개인적 깨달음과 비슷한 비중으로 올바른 사회 만들기에 관한 가르침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한 최초의 설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설법의 주 내용은 '강자와 약자가 상생하는 법'입니다.
우선 강자를 향해 충고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강자란 없는 법. 강자가 계속해서 강자로 남아 있으려면 약자를 강자의 위치까지 올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자신의 힘만 믿고 약자를 해치면 아무리 강자라도 약자의 위치로 떨어집니다. 한편 약자도 실력을 길러 강자의 위치에 오르려는 생각은 안 하고 노상 강자 탓만 하고 싸우기만 하면 약자의 굴레에서 영원히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참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가 한 최초의 설법이 인간의 깨달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설법입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 과학기술이 이렇게 발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 상태는 이 물질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을 조정하고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물질에 의해 조종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인류는 마치 철모르는 아이가 칼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리적 종교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소태산은 최고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무정물인 불상이나 서낭당에 있는 돌 따위에 빌어 복을 받으려는 행위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깨치게 된다면 그런 '미신적'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가장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원을 제시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유명한 일원상입니다. 원이 가장 '진리다운'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따를 수 있는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도를 닦겠다고 산속에 들어가 일생을 허망하게 보낼 것이 아니라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수행도 하라는 것입니다. 불상이 없는 데가 없는데 불상을 법당에 가두어 놓고 거기다 복을 빌지 말자는 겁니다. 공부와 일은 둘이 아니요. 공부가 잘 되면 일도 잘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정전에 나오는 일상 수행의 요법입니다.
1.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 개인적 수행에서 먼저 참회를 이야기 합니다. 저자는 참선과 같은 명상 수행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기는 현상은 화두에 일념으로 집중하기보다는 자기 인생에 대한 반조와 참회입니다. 이런 상황이 한참 진행된 후에야 화두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참회를 통해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이 정화된 다음에야 제대로 된 수행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참회 할때 삼독(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작은 잘못에 대해서만 참회하는 것은 마치 큰 솥에서 펄펄 끓는 물을 식히기 위해 밑에서 타고 있는 장작은 내버려둔 채 위에다 찬물을 조금 붓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 소태산은 세 등급에 걸쳐 계문을 만듭니다. 가장 초보자들에게는 살생이나 음주, 다투거나 논쟁하기 등은 완전히 금한 것이 아니라 까닭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항상 참회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계율을 어기는 사람들은 "자성의 분별 없음만 알고 분별 있음은 모르는"사람들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그것을 가지고 자신만 깨우칠 뿐 옳고 그름을 공개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물을 대할때 공경감을 놓지 말라는 조항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없으면 물건들이 도리어 나를 해치게 되닌 두려운 마음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게으름)와 우(어리석음)을 제거하자.
: '신'은 내가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분'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의'는 자기가 들고 있는 화두에 강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이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그리고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염불법과 좌선법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서로 다른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 주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사람이 많은 곳이나 하루중에 낮처럼 주위가 산만할 때에는 염불법이 좋다고 합니다. 염불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때 참선을 하는 게 좋다고 말 합니다.
염불의 목적은 정신을 집중하는데 있으며, 염불을 하더라도 앞으로는 극락에 가려는 마음이 아니라 내 성품이 바로 아미타라는 것을 유념하면서 아미타 이름을 되뇌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몸은 흔들지 말고, 음성은 크게도 작게도 아닌 기운에 적당하게 하고, 어떤 때에는 염불이 정신을 통일시키는 데 방해가 되니 그런 때에는 그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분한 일을 당하게 되면 염불로 안정시키고 욕심이 일어날 때도 염불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역경뿐만 아니라 순경을 만났을 때에도 오직 염불로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좌선법은 머리에 있는 화기(뜨거운 기운)를 내리고 시원한 기운인 수기를 올리는 것이 좌선의 요지라고 주장합니다. 쓸데없는 데 정신을 쓰면 마치 등불에 있는 기름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화기가 올라오면 우리의 정신력도 이런 식으로 고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소태산은 단전주법을 제시합니다. 단전주란 온몸의 힘을 단전에 모으고 모든 생각을 놓고 단전에만 의식을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자는 간화선은 마치 복권 당첨과 같이 힘들기에 깨치겠다고 사생결단하지 않을 바에는 단전주법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간화선은 소수에게 적합한 수행법으로 간화선 할 때 큰 의심을 품기가 힘들며, 만일 큰 의심을 품게 되었다면 그 수행자는 그것 자체로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것이라고 얘기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처음 좌선을 하는 사람은 다리가 아프고 망상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는데 다리는 잠깐 바꾸면 되고 망상은 그저 망상인 줄만 알면 스스로 없어진다고 합니다. 또 초보자들은 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가려울 때가 있는데 긁지 말고 좌선중에 기이한 일을 구하지 말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 전혀 마음에 두지 말라고 전합니다.
심고와 기도법 대해서도 나오는데요.
심고란 동학에서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는데, 자신의 가장 깊은 마음(한울님)에 현재의 상황을 알리는 것으로, 심고는 자신에게 하는 것이고 기도는 바깥에 있는 대상에게 드리는 것인데 소태산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같이 썼습니다. 저자는 기도란 자신의 파동을 천지(우주)의 파동과 같에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보통 때는 우주적 힘과 아무런 교감이 없지만 오랜 기도를 통해 우주와 파종이 일치하게 되면 그 엄청난 힘을 손쉽게 쓸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만 맞으면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소태산은 죽음에 대한 태도도 소상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인간은 윤회하고, 죽음과 삶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접해 있어 인생의 근본이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죽게되면 영혼이 몸을 떠나 영계(중음계)에서 중간몸의 형태로 떠돌아다니다가 다음 몸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임종을 맞이하는 당사자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종에 가까워 오는 것을 느끼면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아 삶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유언도 미리 해놓아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원망를 품거나 원망을 산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불러 직접 마음을 풀어야 합니다. 당사자가 없으면 혼자라도 마음속으로 그 원망심을 풀어야 합니다. 마지막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가 다음 생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임종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당사자의 정신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실내를 조용하게 유지하고 이야기할 때도 착한 일만 언급해 그의 선행을 북돋아 줌으로써 그의 마음에 위안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있는데, 다름 아닌 본인 앞에서 재산이나 가족 등을 걱정하고 연연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삶에 대한 애착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울로 본인이 정신적 안정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와 염불을 해주고 경전을 읽어 주는 등 좋은 가르침을 들려주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임종에
가까워서 호흡을 모으게 되더라도 절대로 목놓아 울거나 그 사람의 몸을 흔들고 소리쳐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시끄러운 행동은 떠나가는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게 할 뿐 아무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 슬픔이 북받쳐 울음을 참지 못하게되면 몇 시간 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뒤에 울라고 충고합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최준식교수 대단하시네요. 기도에 관한 글도 정확해요. 대단.
지난번 말씀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느끼는 원불교는 대단히 현실적 불교입니다. 관념적 불교가 아닌 현실적 불교를 만들려고 소태산께서 무지 노력하셨던 것 같더군요. 오늘 글을 보니 제 생각이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관화선의 3대심(신심, 분심, 의심)은 그 누구더라? 중국의 유명한 분인데... 이 분이 제안한 것인데 후대 선사들이 녹음기처럼 되풀이하시지요. 저는 이 3대심을 강조하는 선사는 진실로 깨친 선사로는 안 봅니다. 당신이 못 깨치셨기에 깨친 걸로 공인된 옛 스승의 말씀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걸로 봐요. 3대심을 강조하면 할수록 간화선은 대중에게 멀어지고 수행자 스스로도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제 확고한 생각입니다.
글 내용과 제 생각이 다른 것 하나는 좌선 시 다리가 아플 때인데요, 저는 다리가 아프다고 바로 다리 바꾸는 건 별로 권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계속 다리는 아프게 되고 그 때문에 집중은 어렵게 됩니다. 일단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해요. 이게 육신을 조복받는 것(조신)인데, 이 자체가 바로 수행입니다.
좌선 수행은 조신이 먼저 되지 않으면 하기 어렵습니다. 다리 아프다고 못 참고 바로 바꾸고 그러면 조신은 불가능해요. 그리고 집중도 안 되고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아픈 시간이 줄어들어요. 물론 바른 자세가 전제된 후의 일입니다.
네에~~ 고맙습니다 ^^
덕분에 원불교에 대해 공부합니다. 시댁이 김제라 익산의 원불교 종단의 측근들과 친분이 있는데 마음을 다해 사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실천을 잘하시는 분들이군요.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제가 보는 원불교인들은 배타심이 적지 않게 있어요. 부처님이 아니라 사람(소태산)에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중 최고라는 문중 불교인들을 한번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이는 소태산이 원한 바는 전혀 아니겠지만 사람에게 의지하면 그렇게 됩니다. 왜 불교 경전들이 전부 <부처님>을 내세우는지, 특히 화엄경은 왜 아무리 사람이 뛰어나도 부처님 한 털끝만큼도 안된다고 말하는지 우리는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게다가 원불교는 이름에 불교를 썼지만 불교가 아닙니다. 어찌보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불교의 위신력을 빌려있는 상태지요. 그런 때문인지 제가 보기에 원불교인들은 밝지를 못해요. 아무리 웃음을 띠고 좋은 말씀 하시더라도 태생적인 어둠이 있어요. 아마 왜 그런지는 원불교인 자신들도 모르시리라 봅니다만.
종교인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그 분이 의지하는 의지처가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궁극의 문제점은 피할 수 없습니다. 겉모습만 보시지 마셨으면.
고맙습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자세한 가르침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