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Bethlehem)ㅡ예수님 탄생교회, 구유동굴
▼아르메니안 소유 경당쪽에서 들어가는 출입문
▲베들레헴 예수님 성탄 성당의 성탄 동굴과 구유 동굴
아기 예수님 성탄 성당 중앙 제대 오른편(그리스 정교회쪽) 또는 왼편 계단(아르메니안 정교회쪽)을
내려가면 제대 바로 아래쪽에 폭 3,5m, 길이 12.30m 정도되는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탄생 동굴이 있다.
예수님의 성탄 동굴 바닥에는 “베들레헴의 별”이라고 하는 은색 별이 바닥에 붙어 있다.
▲그리스 정교회 소유의 아기 예수님 탄생 동굴
▲그리스 정교회 소유의 아기 예수님 탄생 동굴
▲그리스 정교회 소유의 아기 예수님 탄생 동굴
예수 탄생 동굴은 그리스 정교회의 소유이지만
바닥의 베들레헴의 별은 가톨릭의 소유이다.
전통적으로 예수의 정확한 탄생지를 표시하는 이 베들레헴의 별을
1847년 그리스 정교회쪽에서 훔친 사건이 표면상의 요인이 되어
탄생지와 관련된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크림전쟁(1854-56)으로 확대 되었었다.
베들레헴의 별에는 라틴어로 “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 (
여기서 예수 크리스토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다)라고 새겨져 있다.
별은 14각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십자가의 길 14개처를 나타내는 동시에,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으로부터 바빌론 포로시대까지 14대,
그후부터 예수까지의 14대를 상징한다.
&&&&&&&&&&&&&
크림전쟁
1853년 10월 4일부터 1856년 3월 30일까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랑스 제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
전쟁 이름은 전쟁 중후반기 이후의 주전장인 크림 반도에서 따온 것인데 당연히 크림 반도에서만 전쟁했던 것은 아니다. 1877~1878년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또 있기 때문에 제1차 동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위인전을 읽은 사람들이나 간호학도들이라면 뭔지는 몰라도 이름은 한 번 들어봤을 전쟁이기도 하다.
근본적인 배경은 러시아의 지중해 출구 확보 문제였다.
러시아는 1771년 크림 칸국을 정복한 이래로 크림 반도를 거점 삼아 흑해 상의 세력 확대에 나섰다(남하정책).
16세기 이래 흑해는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는데,
크림 반도를 확보한 러시아가 이 지역에 요새와 항구를 건설하고 해군을 양성하며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동유럽과 캅카스를 놓고 수백 년 간 충돌해온 앙숙인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잠시 對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 손을 잡았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다시 적대 관계로 변했다.
러시아는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오스만 제국 치하 동방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 등을 구실로
오스만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양 해협의 통행권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최대 주적으로 급부상한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호락호락 지켜보지 않았다.
영국은 1838년 오스만 제국과 불평등한 통상 협정을 맺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한 뒤,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군사·경제·정치·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했다.
결국 1841년, 이집트 문제의 사후 처리를 위해 주요 당사국인 오스만과 러시아, 여기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까지 끌어들인 영국이 런던 해협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 통제권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켰다.
한편 1851년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부활시킨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성지관할권,
요컨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요구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를 받아들이자 이전부터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성지의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러시아와 충돌은 더욱 불가피해졌다.
영국의 압력으로 일단 해협의 통제는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캅카스 및 발칸 반도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국경분쟁을 유도하며 국지적 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기회를 엿봤다.
결국 1853년 7월, 러시아가 오스만에 예속된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을 공격,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촉즉발의 위기가 터졌다.
오스만 제국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리즈시절의 위엄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던 반면,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꺾은 후 적어도 군사력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열강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누구도 오스만이 러시아의 위협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던 영국은, 전면적인 참전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오스만 정부에 강경대응을 권유했다.
또한 오스만 정부도 도나우 강 유역의 속국들을 내주면 수도인 코스탄티니예가 코 앞인 터라,
군사적으로 이를 격퇴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쟁을 결심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회 및 성지 관할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던
프랑스 제국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선전포고는 기세등등하게 했지만, 골골거리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나폴레옹을 꺾고 한껏 기세가 오른 러시아 제국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1853년 11월 30일, 소아시아 북부의 항구 도시인 시노페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오스만 해군은 나히모프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해군에게 참패, 11척의 함선 중에서 단 1척의 코르벳만이 살아남아 도망쳤다. 이때 러시아군는 근대화된 폭발형 포탄의 도입에 힘입어 사상자 수 37 대 3,000이라는 압도적인 교환비를 얻을 수 있었다.
뒤이어 캅카스에서의 국지전에서도 오스만군은 러시아군에 참패했다.
해가 바뀐 1854년, 시노페 해전에서 사실상 와해된 오스만 해군을 대신하여 영·프 연합 함대가 흑해에 진입,
오스만 제국의 흑해 통상로를 보호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프 양국은 3월 28일,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이에 당황한 러시아는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나히모프 제독이 세바스토폴 수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육상에서 연합군 병력들을 격퇴하기로 한다.
해군 기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3층 전열함 4척과 2층 전열함 12척 그리고 60포의 프리깃 4척이 격파당하고 다수의 소형함들을 잃었다. 10월 17일, 영-프 연합해군이 흑해의 킨번 반도를 포격했고 해안포대가 저항했으나 연합국 해군 주력 함선은 철갑선이어서 큰 피해는 없었다. 결국 킨번 반도의 수비 병력은 항복해야 했다.
총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포함한 상륙작전은 9월 14일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다.
연합군의 칼라미타 상륙을 예상하지 못한 러시아 지도부는 깜짝 놀랐다.
이를 요격하려던 러시아군은 3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9월 20일, 알마 강 전투에서 연합군과 격돌했다.
러시아 방어군은 초기에 고지대를 점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러시아군을 공황상태에 빠트렸다. 결국 영국군의 공세와 프랑스군에 의한 좌익의 궤멸로 인해
수 많은 러시아군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도망가면서 첫 번째 전투는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