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운서께’ 북한 청취자가 극동방송에 보내온 편지
북한 청취자가 극동방송에 보내온 편지. "받아적을 수 있도록 찬송가를 천천히 틀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극동방송 청취 소감을 적은 북한 청취자의 노트
최근 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성경과 찬송가 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의 크리스천들 이야기입니다. 새벽 시간에 극동방송을 들으며 찬송가를 받아적어 손글씨 찬송가집을 만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극동방송은 과거 냉전시대부터 북한은 물론 중공(중국)과 소련(러시아)에서도 수신이 가능하도록 강력한 전파를 쏘았습니다. 냉전 시절에는 공산 국가 주민들이 방송을 잘 듣고 있는지 확인이 안 됐는데, 1990년대부터는 피드백이 활발하답니다. 중국 동포들은 한중수교 이후 왕래가 자유로워졌고, 중국 동포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반응도 전해지곤 한답니다. 그들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북한에서도 극동방송을 청취하는 주민들이 꽤 있으며 더러는 방송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합니다. 북한 주민의 반응 가운데 극동방송 이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가 ‘받아쓰기’였답니다.
극동방송 프로그램 중엔 새벽 시간 성경과 찬송을 천천히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북한의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들으며 받아적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은 북한 청취자들이 탈북자나 중국 동포를 거쳐 극동방송에 보내온 편지에서 드러났습니다. 제가 읽은 한 편지는 “존경하시는 안아언사께”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안아언사’가 무슨 뜻인지 잠시 갸우뚱했지만 이내 ‘아나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들리는 대로 적은 것이겠지요. 이 편지에서 청취자는 “비록 방송을 듣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은밀한 가운데 곳곳에서 청취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라”라며 “찬송가를 (방송에)보낼 때 받아쓸 수 있게 1절만이라도 한 자 한 자 천천히 부를 수 없을까요?”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극동방송에선 북한 청취자들이 찬송가뿐 아니라 성경도 받아적어 책으로 만들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필사본들은 인쇄된 성경을 베껴쓰는 것이었습니다. 그 필사 성경들도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북한의 신자들에겐 베껴쓸 성경 자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받아 적어 성경과 찬송가집을 만들고 있겠지요.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받아쓰기 성경을 만드는 경우는 북한 주민들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 상태에서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찬송가를 한 글자씩 받아적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도대체 어떤 간절함이 그들을 새벽에 라디오 앞에 앉게 만들었을까요. 또한 그렇게 라디오 방송을 듣고 성경을 받아적는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니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3/06/07/OHDNIB5F65HUVEQW6OXZPIQX7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