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때문에 남들처럼 길고 거창한 여름 휴가를 떠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 하지만 우리에겐 그 어떤 럭셔리 휴양지보다 완벽한 피서법이 있습니다.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풍화김밥'과 사발면을 양손 든든히 챙겨 들고 수륙터로 달려가는 것, 바로 딸 가온이와 함께하는 '죽도행'입니다.
가온이가 8살이 되던 해, 처음 고무보트에 태워 죽도로 향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꼬맹이 시절부터 죽도로 달려가던 여름날의 작은 행사가, 이제는 우리 가족만의 굳건한 전통이 되었네요.
언제 이렇게 커버렸는지, 이제는 겁도 없이 보드 위에 척척 올라서서 제법 폼나게 파도를 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늠름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의 멋진 윈드서퍼가 될 싹이 보이는 것 같아 아빠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번집니다. 나중에는 가온이와 함께 통영의 섬들을 1박씩 누비며 진정한 '섬 투어'를 하는 날도 오겠죠?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출발 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던 아빠의 걱정이 무색하게 막상 바다에 나서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주기 시작합니다. 가온이 왈, 자기가 '바람이 불어라' 하고 주문을 걸었다나요.
"초능력을 그렇게 함부로 사용하면 안 돼~" 하고 농담을 건넸더니, "가끔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도 있어"라며 제법 진지하게 대답합니다. 엉뚱하고 귀여운 우리 딸, 오늘은 가온이의 초능력이 100% 통했나 봅니다.
무사히 죽도에 도착해 짐을 풀고 여유를 즐기던 중, 가온이가 아주 치명적이고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빠는 윈드서핑 레이스를 하는 게 좋아, 아니면 나랑 노는 게 좋아?"
하마터면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싱!!!'이라고 외칠 뻔했지만, 아빠의 본능적인 생존 감각이 발동했습니다. 간신히 "당연히 가온이랑 노는 게 제일 좋지~"라고 대답했는데, 이후 가온이의 함박웃음과 반응을 보니 그 대답이 제 인생에서 얼마나 훌륭한 결정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가온이는 엄마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제가 가온이를 '리틀 정현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죠.
도착하자 마자 우리의 먹방을 막을 순 없습니다. 사실 가온이가 죽도행을 즐기는 건지, 아니면 '사발면과 충무김밥'을 즐기는 건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아빠랑 수륙터에 가자고 하면 잠시 갈등하는 기색을 보이다가도 "가서 사발면에 김밥 먹을까?" 한마디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콜!"을 외치니까요. 5년 차 죽도 여행의 추억이 아빠에게는 '성장하는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가온이에게는 '야외에서 먹는 꿀맛 같은 컵라면'인 게 분명합니다.
지상낙원 죽도에서의 완벽한 레시피:
뜨끈하고 짭짤한 사발면과 풍화김밥의 조화
식후에 즐기는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과 아이스크림
아빠를 위한 카페인 충전, 얼음 동동 아메리카노
저 멀리 수륙터가 한눈에 담기는 눈부신 풍경
이 모든 것을 갖춘 여름날의 죽도는 서퍼들만이 누릴 수 있는, 우리 가족만의 특권이자 지상낙원입니다.
실컷 수영하고 놀고 난 뒤, 수륙터로 돌아오
는 길. 가온이가 바다를 향해 "죽도야 잘 있어~!" 하고 외칠 때면, 그 목소리에 담긴 진심 어린 행복이 느껴져 아빠의 마음도 덩달아 몽글몽글해집니다.
1차 죽도행이 어지간히 재미있었는지 며칠 뒤 또 가자고 조르는 딸내미 덕에 결국 2차 죽도행까지 감행했습니다. 똑같은 레시피로 준비했지만, 이번엔 구세주 '송이 이모'가 함께했습니다!
송이 이모 덕분에 고둥도 잡고, 공놀이도 하며 가온이의 텐션은 하늘을 찔렀고, 아빠는 덕분에 잠시나마 꿀 같은 '나만의 휴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송이 이모,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좋은 기억을 하나 더 얹고 돌아오는 길. 무언가 큰일을 무사히 치러냈다는 묘한 뿌듯함과 안도감, 그리고 내년엔 또 얼마나 자라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5년 차 죽도행을 마무리합니다.
아빠가 죽도행을 좋아하는지, 가온이가 죽도행을 좋아하는지 확실히 단정 지을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온이와 함께 차곡차곡 쌓아가는 이 여름날의 기억들이 제 인생 최고의 레이스라는건 분명한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