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문산은 낮은 산이지만 역사적으로 아품이 많았던 곳이다
구한말 면암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양윤숙 의병대장이 왜군과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6.25 당시 남부군 사령부가 있어 700여 명의 빨치산이 주둔했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의 동생 김란식과 조카 김현채가 이 산으로 찾아들어 기거했다
산의 곳곳에 음기(陰氣)가 서려있어서 잔뜩 긴장하며 하루를 즐기었다
회문산자연휴양림
국립 회문산자연휴양림 주차장에 차를 놓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입장료가 천원씩이지만 경로우대가 있어 그냥 입장하였다(사실 나는 아닌데...ㅋㅋ)
입장객이 뜸해서 우리 일행 4명 이외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성껏 쌓은 돌탑
정문을 통과하지마자 비탈진 언덕 위에 정성껏 쌓은 돌탑이 보였다
함부로 아무렇게나 쌓은 돌탑이 아니라 온갖 정성을 쏟은 모습이 보여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민족들은 돌탑을 쌓으며 소망을 비는 것을 매우 즐기는 것 같다
삼연봉(643m)
적당한 경사와 시원한 그늘이 있는 숲길을 따라 600m를 올라 삼연봉에 다다랐다
이곳에 주저앉아서 젖은 옷을 말리며 사과 한 조각씩을 나누어 먹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깃대봉은 눈인사만 하고 정상을 향하여 방향을 틀었다
서어나무 갈림길
삼연봉에서 400여m를 걸으면 서어나무 갈림길에 당도한다
숲길은 계단이 없고 경사가 완만하며 그늘이 많아서 매우 편안하고 사치스러웠다
국립자연휴양림에서 설치해 놓은 이정표가 매우 친근하고 정겨워 보였다
그대 깊은 가슴
안 보면 잊혀질까 생각했는데
새기고 간 그대 깊은 가슴 때문에
보고픈 사연이 불길 되어 탑니다
순정으로 차오르는 나의 사람아
뻐꾸기는 먼 산에서 울어대는데
그대 목소리
솔바람에 묻어 와서
밤새 파도 되어 넘치다가 가네........................................................채바다 <철쭉꽃 동산에 서서> 부분
참이슬 내리다
정상의 바로 밑에서 토마스형님이 짊어지고 오신 빠알간 참이슬을 꺼냈다
참이슬은 혼자서 오지 않고 남부시장표 돼지머리와 함께 왔다 ㅎ
얼음팩에 고이 싸오신 차가운 이슬이를 한 모금씩 마시며 시장기를 달랬다
정상(큰지붕) 837m
구름에 휩싸이면 둥글넙적한 봉우리가 마치 초가지붕처럼 보인다 해서 큰지붕이라 한다
회문산은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는데다 서쪽을 제외한 삼 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정상의 너른 암반에 서니 지리산을 비롯하여 추월산과 무등산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증산교에서는 모악산을 어머니 산으로, 회문산을 아버지 산으로 여겨 도인들이 자주 찾아 기도하고 있다
회문산에 다섯 신선이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형국인 오선위기(五仙圍基) 명당터가 있다고 알려졌다
이곳에 묘를 쓰고 나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란 말이 전해져 수많은 묘가 들어섰다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곽재구 <참 맑은 물살 회문산에서> 부분
회문산 주변의 수려한 산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수많은 무덤 순례
회문산은 말이 날아가는 형상과 말이 물을 먹는 형상이라 하여 명당으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전국의 풍수가들의 발길이 잦고, 실제로 능선은 물론 암반 위까지 이렇게 묘소가 즐비하다.
그러나 잡초가 무성하거나 멧돼지들이 파헤친 무덤이 많아서 명당이란 말이 무색해졌다
하도 무덤이 많아서 산행이 아니라 무덤 순례라고 하며 웃었다
음문석굴(陰門石窟)
등산로 옆으로 살짝 비켜선 곳에 음문석굴(陰門石窟)이 있었다
이곳은 회문산에서 음기가 가장 강한 곳이라고 한다
양기가 강한 회장님께서 음문석굴에 들어가 솟구치는 양기를 누르고 계신다 ㅎㅎ
천근월굴(天根月窟)
석굴 옆 암벽에는 천근월굴(天根月窟)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근(天根)은 남자의 성을 나타내고, 월굴(月窟)은 여자의 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음양이 한가로이 왕래하니 소우주인 육체가 모두 봄이 되어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은 동초 김석곤씨가 1900년 초 모악산 무량굴과 함께 새겼다고 전해진다
큰지붕(정상)을 뒤돌아보다
‘작은지붕’으로 불리는 헬기장에 서니 조망이 훌륭하고, 북쪽으로 정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정상을 멀리서 보면 둥글넙적한 봉우리가 마치 초가지붕처럼 보인다는데 정말 그렇다
산 이름이나 마을 이름을 지은 우리 조상들의 혜안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여근목(女根木)
등산로 가운데에 나체로 누워 있는 형상의 여근목(女根木)이 발길을 잡는다
어찌나 많은 남정네들이 앉았다 갔는지 반들반들하다
여체는 수많은 남성들을 품어주었으며 우리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소우주다
여근목의 음혈(陰穴)
여근목의 한가운데에는 음혈(陰穴)이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은 창조 이후로 남자들이 목숨을 걸고 찾아헤매는 수정궁이다
수정궁에는 내시들의 한숨과 후궁들의 눈물이 고여있는 냇물이 흐른다
수정궁에 초대받은 남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밤마다 만리장성을 쌓는다
살아남은 반송(盤松)
여근목 옆에는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토벌을 위해 온 산이 불바다가 됐어도 살아남은 반송이 있었다
용케도 살아남은 여근목과 반송은 영험한 나무로서 음기가 강하게 서려있다고 한다
반송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나무의 생김새가 쟁반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는 외줄기가 올라와 자라는 것에 비하여 반송은 밑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반송은 아름다운 모양새 때문에 옛날부터 선비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솜방망이꽃
무덤 주위에서 이 꽃을 많이 보았는데 꽃이름이 궁금하였다
집에 와서 야생화사전을 뒤져보고서 솜방망이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솜방망이꽃은 양지바르고 건조한 산자락, 특히 무덤에서 잘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범법을 저지른 권력자나 재벌들이 약한 처벌을 받으면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하는데 이 꽃은 억울하지 않을까??
시루봉(690m)
시루봉에는 시루바위와 문바위가 60m간격을 두고 서있다
시루바위는 마치 시루떡을 포개어 놓은 형상으로 세 개의 넙적한 돌이 얹어져 있었다
등산로에 여러가지 사연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단조로운 산행길을 재밌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문바위
시루바위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천연요새지인 문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전북유격사령부가 맨 처음 있었던 은둔지였다고 한다
빨치산은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안고 있는데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이므로 품어주어야겠다
돌곶봉(680m)
돌이 쏙 튀어 나왔다고 붙여진 이름 같은데, 회문산 일곱 봉우리의 마지막 봉우리다
돌곶봉 옆에서 초라한 무덤 한 기가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900여m는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져 쉽게 내려왔다
노령문(蘆嶺門)
하산을 완료하여 휴양림 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노령문이 나타났다.
회문산의 입구인 큰문턱바위를 출렁다리와 연결하여 휴양림 개설 당시 출입문을 노령문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노령문 오른쪽으로 출렁다리가 걸쳐 있고, 이곳을 건너면 등산로로 이어진다.
다리 아래는 개울물이 바위 위를 구르는 구룡폭포인데 가물어서 물즐기가 약하다
토마스 형님과 도로테아 부회장님의 기싸움이 치열하다 ㅋㅋ
산행을 마치다
우리의 산행 들머리였던 돌비 앞에서 산행을 마무리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움츠렸던 심신에 활력소가 된 것 같아서 행복하였다
전주로 돌아와서 한가람과 꼬끼오통닭을 오가며 행복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