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호령했던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 축구인생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 축구천재였다.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러시아어: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Ан, 영어: Mikhail Ivanovich An, 1953년 2월 19일~ 1979년 8월 11일)은 고려인 출신의 소비에트 연방의 축구 선수였다. 고려인 출신으로 소비에트 연방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1979년 드니프로제르진시크 공중 충돌 사고로 사망하였다.
‘까레이스키’.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담아낸 말이다. 1937년 구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역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을 일컫는 ‘까레이스키’는 이 당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우리말도 쓸 수 없었고 마음 대로 중앙 아시아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지금도 러시아를 비롯해 구 소련 지역에는 약 50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하지만 축구계에서 이들의 축구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은 지금까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오늘은 고려인을 대표했던 자랑스러운 축구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지금껏 한국 축구계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소련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선 ‘고려인’ 미하일 안의 모습.
소련이 인정한 17세 축구 소년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이하 미하일 안)은 한인 3세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소련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면서 미하일 안은 조선 땅이 아닌 소련에서 태어나야 했다. 미하일 안의 할아버지 역시 고려인들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강제 이주 정책으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우즈벡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당시 스탈린은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고려인들을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모았다. 그래야 관리가 쉬웠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핍박을 받으며 억척 같이 살아남았다. 그렇게 미하일 안은 1952년 2월 19일 우즈벡 타슈켄트주 상치르치크 콜호즈라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미하일 안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신경을 자랑했다. 미하일 안이 어릴 적 소련 축구는 유럽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소련은 1960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6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강했다. 소련인들에게 축구는 엄청난 인기였다. 운동 신경이 타고 났던 미하일 안은 그의 형인 드리트리 안과 함께 콜호즈 어린이 축구팀에서 처음으로 축구화를 신었다. 핍박 받는 고려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던 시대에 그는 축구를 통해 고려인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는 마음이 무척 강했다. 시골의 작은 축구 클럽에서 처음 축구를 접한 미하일 안은 이후 유망주들만 받아들이는 티토프 스포츠 전문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당시 우즈벡 지역은 소련에서도 낙후된 곳이었다. 대표 선수 대부분이 러시아 지역 태생이었고 우즈벡 지역은 축구의 변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하일 안의 재능은 이미 러시아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하프백(지금의 미드필더)을 맡았던 미하일 안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패싱력을 뽐내며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였다. 드리블 능력 또한 또래 선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미하일 안은 1968년 17살의 나이로 소련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될 정도였다. 우즈벡 출신이, 그것도 17세의 ‘까레이스키’가 소련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는 건 당시로서는 소련 축구계에 엄청난 이슈였다. 미하일 안은 머나먼 타국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고려인들에게는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미하일 안은 소련 청소년 대표팀 주장까지 역임하는 등 한껏 기대를 모은 선수였다. (사진=파크타코르 공식 홈페이지)
블로힌의 라이벌이자 소련 축구의 희망
1968년 FC폴리토트델 타슈켄트에 입단하며 성인 무대에 데뷔한 미하일 안은 2년 뒤인 1970년 소련 리그 명문팀인 FC파크타코르 타슈켄트로 이적했다. 지금이야 러시아와 우즈벡이 분리돼 리그를 치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광활한 소련 땅이 하나였던 시절이었다. 당시 FC파크타코르와 같은 소련 리그에서 뛰던 디나모 키예프, CSKA모스크바, 디나모 모스크바 등은 소련을 넘어 유럽 무대에서도 최정상급 기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팀들과 한 리그에서 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다. 이중에서도 미하일 안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1972년에는 2부리그로 떨어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다시 1부리그로 올려 놓는 등 미하일 안의 기량은 대단했다. 당시 2부리그 2위는 샤흐타르 도네츠크였다.
소련 축구계는 미하일 안의 등장에 한껏 기대가 커졌다. 당시 소련 축구계에서는 미하일 안과 우크라이나 출신 올레흐 블로힌을 ‘소련 축구를 이끌 천재’라고 평가했다. 미하일 안은 1974년에는 그의 라이벌이자 동갑내기인 블로힌과 함께 전 소련방 축구선수 33인에 선정되는 등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미하일 안은 미드필드임에도 불구하고 소련 1부리그 29경기에서 11골을 뽑아내는 괴력을 선보였다. 키 작고 왜소한 한 명의 고려인이 소련 축구계 전체를 뒤흔들 만큼 성장한 것이다. 실제로 미하일 안은 1976년 U-23 소련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됐고 팀의 주장까지 맡았다. 늘 무시하던 고려인이 소련 축구를 이끌 대표팀의 주장이 됐다는 건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미하일 안은 이제 고려인뿐 아니라 모든 소련인들이 알아보는 스타로 성장했다. 중원에서 그가 뿌려주는 감각적인 패스와 드리블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1976년 열린 U-23 유럽청소년선수권대회는 미하일 안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빛나는 경기였다. 예선 1라운드 터키와의 1차전에서 1-2로 패한 소련은 2차전에서 터키를 3-0으로 대파하며 8강에 진출하더니 8강에서도 프랑스를 격파했다. 1차전 1-2 패배 이후 2차전 2-1 승리로 승부차기까지 이어지는 승부 끝에 4-2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프랑스는 당시 예선에서 서독을 꺾고 올라올 만큼 강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미하일 안이 버티는 소련 중원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준결승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1,2차전 합계 3-1로 승리를 따내며 결승에 진출한 소련의 마지막 상대는 헝가리였다. ‘디펜딩 챔피언’ 헝가리는 예선 네 경기에서 11득점 2실점했고 이후 잉글랜드와 유고를 제압한 당대 최강이었다.
미하일 안은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영광스러운 우승과 안타까운 죽음
하지만 소련은 1차전을 1-1로 마친 뒤 2차전에서 헝가리를 2-1로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소련 축구 역사상 U-23 유럽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첫 우승이었다. 이 대회에서 미하일 안은 주장 완장을 차고 전경기를 소화하며 팀의 역사적인 우승을 이끌며 금의환향했다. 미하일 안은 어느덧 축구 유망주가 아니라 소련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1978년 이란과의 평가전을 통해 소련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른 그는 유로1980 예선 그리스전에도 나서며 두 번째 A매치를 치렀다. 소련 땅에서 인정 받기 어려웠던 고려인으로는 실로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파크타코르에서도 1970년부터 9년 동안 주장으로 활약하며 233경기에 나서 50골을 뽑아내는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1974년에 이어 1978년에도 전 소련방 축구선수 33인에 선정됐다.
1979년 8월 11일 미하일 안이 속한 팍타코르는 리그 경기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민스크로 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게 미하일 안의 마지막이었다. 미하일 안이 탄 이 비행기는 오후 1시 35분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다른 비행기와 충돌해 추락하는 대형 참사를 당했다. 미하일 안을 비롯한 팍타코르 선수 17명 등 승객 178명 전원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였다. 이 소식에 전세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고려인을 대표해 유럽을 호령하려던 미하일 안은 그렇게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또 축구를 통해 얼마나 더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까. 그의 라이벌이었던 동갑내기 블로힌은 이후 우크라이나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현재도 디나모 키예프 감독으로 일하는 등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미하일 안이 지금까지 건강히 살아있었더라면 블로힌과 함께 참 오랜 시간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을까.
고려인들 사이에서는 미하일 안이 이미 유명했지만 사실 우리는 그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그만큼 고려인들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9년 2월 한국 대표팀과의 두 차례 평가전을 위해 내한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니콜라이 스타로스틴 회장은 입국장에 들어선 뒤 이렇게 말했다. “미하일 안의 나라에 와보고 싶었다. 늦게라도 그의 나라에 올 수 있게 돼 기쁘다.” 당시 91세의 스타로스틴 회장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스타로스틴 회장에 의해 알려지기 전까지 우리는 우즈벡이 배출한 세 명의 역대 소련 대표팀 선수 중 한 명이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고려인의 긍지를 위해 뛰었던 미하일 안은 그렇게 하늘로 간 뒤에도 늘 우리의 관심 밖 인물이었다.
삼베 바바얀 파크타코르 부회장이 미하일 안 묘비를 부여잡고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사진=파크타코르 공식 홈페이지)
유럽을 호령했던 ‘고려인’ 미하일 안
지난 2월 타슈켄트의 한 시골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은 손에 국화꽃을 안고 누군가의 무덤 앞에 모였다. 미하일 안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이후 파크타코르 감독과 우즈벡 대표팀 코치를 역임했던 빅토르 자일로프, 삼벨 바바얀 현 파크타코르 부회장 등 옛 동료들이 미하일 안 탄생 60주년을 맞아 그를 찾은 것이었다. 이들은 미하일 안의 묘 앞에서 34년 전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를 그리워하며 비석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 거리 이름은 ‘미하일 안’으로 명명돼 있다.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를 함께한 고려인과 그들의 축구 역사, 그리고 이제는 전설이 된 미하일 안에 대해 한번쯤은 우리나라 축구계도 심도 깊은 연구를 해보는 건 어떨까. 머나먼 이국땅에 조용히 묻혀 있기에는 참 안타깝고도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다.
footballavenue@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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